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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창 13:15-16절) 

 

저는 쥐를 좀 무서워합니다. 쥐를 생각만 해도 좀 소름이 돋고 몸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 같고 기분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글을 읽고 이 생각이 좀 바뀌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이제 갓 스물이 넘은 한 청년이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마다 자신의 그림을 보내보았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납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계속되는 거절에 돈도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어떤 글에는 하숙집이라고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교회 창고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여하튼간 가난한 만화가였던 그가 사는 방에는 는 조그만 생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도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었지만 조그만 생쥐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먹이도 주고, 하다보니 생쥐도 이 청년을 보고 도망하지도 않고 함께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 생쥐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신의 삶에 위로를 받고, 친근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생쥐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누구이야기인 줄 아시겠습니까? 바로 월트 디지니가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야기입니다. 

 

누구나가 소름 끼쳐 하는 그런 생쥐를 보면서 그에게 오히려 친근하고 명랑한 미키마우스를 발견하고, 그 캐릭터 하나로 월트 디지니는 승승장구하며 만화 뿐만 아니라 에니메이션, 영화, 놀이동산 등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그 중심에 미키 마우스가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톰과 제리, 조금 지나 스파이더맨..... 다 남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끄집어낸 누군가의 눈으로 말미암아 대 전환을 맞이한 캐릭터들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비전(Vision)이라 한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밖을 보고 내 안을 보는 것이다. 

 

비전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깨달으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호 4:14]......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침받을까 두렵고 변화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대개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대로 본다.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때가 더 많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선입견이 들어가고 편견이 들어가서 볼 때가 훨씬 더 많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사람을 거인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가나안 사람을 "우리의 밥"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눈으로 보니 거인 같은 자들이 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이 골리앗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인으로 보았지만 다윗에 눈에는 고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한당으로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신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신앙은 하나님이 보라 하신 것을 보는 것이고, 보라 하신 곳을 종과 횡으로 두루 거닐며 받는 것이다. 

 

망상은 근거 없이 바라는 것이다. 막연히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라는 것을 거니는 것이다. 

 

  • 어떻게 비전을 얻게 되는가? 언제, 어디에서 비전을 받는가?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가? 그가 부르실 때 멈추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1. 말씀 

말씀을 펴야 보인다.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곳을 떠날 적에 보인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서 참 것을 보게 된다. 참 나를 보게 되고 참 세상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요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거듭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예수를 영접한 자이다. 회개하여 자신을 씻고 십자가의 보혈로서 자신을 깨끗이 한 자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곧 거듭난 자다. 

 

한 자로 보다의 의미는 "관"자를 쓴다. 

보는 것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진다. 비전이 있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이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킨다. 

 

정탐하라 (explorer)”는 것은 바라보라는 것이고 바라본 것을 두루 다니라는 것이다.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열 명의 사람들은 오로지 가나안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디를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찾는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 - 기도 

세상에 눈을 감는 자, 기도하는 자가 비전을 갖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눈 대신 하나님 주신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것을 보고, 참 것을 보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갈매기 조나단은 높이 날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짓을 한다. 

왜 높이 날기 원하는가? 멀리 보기 위해서.....

 

신앙인이 높이 날 수 있는 길은 기도하는 때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높이 날고 멀리 보게 된다. 

장대 높이뛰기 하는 선수보다 더 높이 나는 사람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앙인이다. 

 

헬렌켈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였지만 그의 전기에서 그녀는 말한다. 

"시력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비전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여주신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기도한다. 

소경 바디메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3. 본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험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중하고, 그 뜻을 알았을 때는 신속하라. -> 우리는 반대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는 조급하고, 뜻을 안 뒤에 행동할 떄는 망설이고 지나치게 신중하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을 때- 행동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 본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보여 주셨는데도 여전히 기도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다. 

보여 주셨을 때는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을 때에 망설이지 않는다. 어디인지, 거기 가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다. 

바치라니까 망설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친다. 

비전이 있는 자는 움직이는 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버렸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너머의 구원을 보았기에 과감히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전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물리치고 싸우며 나아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인생을 건 결단이고 모험이다. 

 

모험하는 자는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창조한다. 사막에 길을 내고 황무지를 장미꽃길 같이 가꾼다. 

쥐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고,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만든다. 

 

인생은 항해다. 배는 정박되어 있을 때에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항해할 때에야 비로서 배의 역할을 한다. 

나그네 길은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순례자의 길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앙인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4. 하나님이 비전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 

하나님을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듬어가시기 위해서 일을 주신다. 

->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나를 온전히 희생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만드러져 갈 때이다.

나의 온전한 변화가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는 이유는 비전을 통해 일을 완수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통해 우리를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비전하면 가장 첫 번째로 손꼽는 인물 - 요셉, 꿈의 사람

 

그런데 성경에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꿈의 완성이 아니라 요셉이라는 사람의 완성이다. 

언젠가 다루겠지만 요셉에게 임한 세 번의 꿈 

1) 어릴 적 - 부모와 형제 앞에서 해와 달과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곡식 열한 단이 내게 절하더이다. 

꿈의 내용은 알았지만 전혀 해석할 줄을 몰랐다. 자기의 꿈의 내용을 알았다면 감히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천진무구하게 그 꿈을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2) 감옥 속 - 술 관원, 빵 굽는 관원 - 꿈을 해석할 줄 알았지만 그 꿈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몰랐다. 그래서 꿈 해석 뒤에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3) 바로의 꿈 해석 - 꿈을 정확히 해석 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정확히 안다. 결국 그 나라의 리더가 된다. 

 

세상에서는 업적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를 세워가시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가꾼다. 

인기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격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사울은 인기 때문에 인격을 잃어버렸지만 다윗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인격을 가꾼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열고 

비전을 보기 이해서 기도하고

기도한 바를 갈망하며 바라며 움직이는 자는 결국 자기를 변화시키는 자이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라는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먼저 인도하신다. 

왜? 그들을 다듬어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비전을 품는 자는 광야를 살고, 고난을 이기고 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제 한 주 뒤면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리는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지난 간 몇 개월을 생각해보면 각자의 처소에서 힘들어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꿈을 부어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꿈을 나누며 천천히 움직이려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우리는 발 맞추어 달려왔다. 

이제 창립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솔직히 기대하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이 함께 든다. 

사람이 너무 안 모여도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나 걱정이 몰려 올 테지만, 목사로서 오히려 그럴때에는 함께 한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독이며 때를 준비시키면 된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할 때에 우리의 흠이 커 보이고, 빈틈이 벌어지고, 준비되지 못한 일들이 발생될 때, 둑이 무너지듯 허점이 크게 드러날 까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제가 개척 초기에 말씀드린 "한 성도를 교회로 만들어 가는 교회 공동체"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목적에 들어있는 뜻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교회보다 우선인 초점이 신자를, 성도를 온전한 하나님의 제자, 어느 곳에 가든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교회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그 말 속에는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추상적인 건물에 내 존재를 모두 바치며 헌신하는 목회가 아니라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공동체의 작은 교회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자의 인격, 각자의 가정,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로서 만들어가지지 않으면 사탄은 연약한 지점을 공격하듯 나의 생각과 감정을 통해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른 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리 개척 멤버인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루 하루 자신을 잘 점검하여 무너지지 않은 각자의 교회를 잘 지키며,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나누고 중보하되, 서로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사랑하고, 새신자가 오건, 상처입은 심령이 오건, 한 영혼 한 영혼을 잘 보살피며, 또 다른 제자로 삼아갈 수 있는 작은 트레이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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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부활의 완성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도 놀라둔 장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니고 단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은 단지 부활의 표징,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 새벽, 이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던 세상, 죽음이 왕노릇 하던 세상, 죽음이 생명을 삼키던 세상에서 생명이 왕노릇하고 빛이 어둠을 이기고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이 도래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반응

1. 그런데 그 부활의 소식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2. 더 어처구니가 없는 부활에 대한 반응은 다름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식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만난 뒤 바로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역시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예루살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조작질을 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여러 증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그렇게 문을 꼭꼭 닫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증언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샬롬!”,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는 인사의 말씀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하는 인사,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하는 인사, 새배하러 가서 어른들께, 혹은 새배하는 자들에게 인사하는 말!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달력은 1월 1일을 새해로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한 교회력은 오랫동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날,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아니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힘없이, 기쁨없이, 평안 없이 그저 고기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상의 어려움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듯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일상에 남겨져서 힘없이 고기 잡으러 나온다.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에게 남겨진,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할 세상을 본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시건 말건, 세상이 바뀌건 말건, 자기에게만 관심있는 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 전혀 상관이 없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1)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2)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3) 가정사가 복잡해서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불신,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5) 게을러서 들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한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끝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왜 실수 했냐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왜 나를 배반했냐고? 왜 또 세상으로 갔느냐고 탓하시지 않고 네가 배고파서 그렇다. 네가 피곤해서 그렇다. 네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엘리엘레 라마 사박다니, 하는 영적인 고통과 심장이 파열되는 사랑의 고통을 뚫고 사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동안 예수 없이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탓하는데 익숙합니다. 난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넌 왜 네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해 주지도 않니?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배고프지? 힘들지?"하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장면, 시몬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또 실패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사랑은 실패해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한다....내가 널 사랑한다.....는 세번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완성은 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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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막 16:1-14)

 

부활, 새로운 해의 소망 (2018년 새해에 지은 시) 

 

단지 똑같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 새해라 부른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엔 소원 성취하라고

새해엔 건강하고 다 잘 될 것이라 다들 덕담이다. 

왜 어젠 그런 소리 못하고 오늘엔 이렇게들 소란들인가!

그래 새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게다. 

 

그 때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음에도 

하늘엔 잔치가 열렸다. 

사탄이 패배하고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그 날, 

제자들은 숨기에 바쁘고 

거짓 종교인들과 로마의 관리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날, 

하늘엔 새해가 시작되었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날, 

십자가를 저주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날, 

그 날 후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해가 돋았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의 새해는 바로 부활이다! 

 

1.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장 - 은사장, 13장 - 사랑장, 15장 -부활장) 

(고전 15: 12,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기독교 -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수많은 위인들과 성인들 -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긴 하지만 부활을 기념하는 종교 - 기독교가 유일하다.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인가? 

No!

구약에서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 

예수님 때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로 - 죽어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죽은 냄새가 나는 자가 살아남) 

 

그런데 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나? 

주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첫 모델이기 떄문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선언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2. 부활을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도 주의 재림의 날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이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뿔뿡히 흩어졌을 지라도 그들이 제자들로서 주님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래도 열 두 명 중 몇명이라도 부활을 기다리고 믿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어느 제자도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힘을 잃고 하늘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가 열렸는지 모르지만 부활의 바로 그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는 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3. 부활의 증인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부활을 가장 기다리며 걱정했던 것은 뜻밖에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 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 또한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 그들은 메시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지위, 체면, 사회적인 안전만을 위해서 예수를 죽였고, 부활하신 예수마저도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2.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돌이 막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도 무작정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 - 빈 무덤을 본다. 

그리고 무덤에 흰 옷 입은 청년 - 천사

6-7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9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3. 제자들의 반응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절)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에 자세히 소개) 

->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 

 

또 요한복음을 보면 20장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나타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보왔다고 하는데도 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는 것 -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주님의 말도, 믿음의 형제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누군가의 증언도 아닌 자기가 믿고 싶은 것, 자기가 되고 싶은 것만을 믿은 것-> 마음이 완악하다. 

 

  •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4. 막달라 마리아 

이에 비해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에서 유독 눈에 띠는 한 사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막 16장 1절에서도 여러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맨 처음으로 언급하고, 9절에도 그녀의 이름을 따로 언급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에게 보이심. 

 

기독교 역사상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여인 

1) 예수를 부정하는 안티 기독교 입장 - 그녀의 증언을 신빙성 없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거짓증거를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가? 그 장면을 같이 본 막달라 마리아...어떻게든 로마병사와 종교지도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믿지 못할 여인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습니다. 

 

카잔차스키라는 작가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많은 안티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얻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시 유명한 귀족 부인이었으며 "예수의 부인"이었고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곧 성배였다는 결론까지 이르릅니다. 

기독교계와 학계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지만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과 호응을 일으키기에 딱 알맞은 주장이었습니다. 

 

2) 기독교 공동체 

열 두 사도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 

그녀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합니다(요한 8,1-11).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또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 12:1-8)과 동일인으로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1절은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 11장)로 혼동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여인일 뿐이었습니다(눅 8:2). \
  •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류가 이 여인을 그릇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1년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언급되는 “죄 많은 여인”을 지칭하며, ‘죄인’을 이르는 헬라어 ‘harmartolos’를 ‘창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porin’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9년에야 이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 표현되고 교회역사가들의 평가 - 초대교회의 중요한 여성리더 

 

"가장 먼저"라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사실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소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꾸며낸 일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를 첫 번째 증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 기록해 두었던 시  

 

 "마리아의 고백"

 

까닭을 묻는 이에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답한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편애하시고 또한 그녀에게 나타나서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러셨을까?"하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어요(막15:40).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고요(막15:47).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답니다(마태 27:61외).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막16:1-2).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한20:11)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이 최초로 나타나신 그곳, 그곳에 나는 또 약속처럼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요한20:13-18)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순간,

이어 철저한 실패자로 종을 친 그 비통의 순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그분은 내 일생의 유일한 의미였기 때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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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은 항상 "나"였다. 

주님이 왕이 되면 내가 받을 상급, 내가 얻게 될 지위. 

예수가 죽자 그들은 생각은 이제 예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뭘하고 살지...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항상 "나"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분" "주님"

사도바울..마리아... 살아있을 때에.. 어쩌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서럽게 억울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주님을 생각했던 자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주님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는 매 주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도 항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새긴다.  

매일 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여러분이 없으면 찾게 되고 앞으로도 찾을 것이다.  

무슨 일일까? 아픈가? 속상한 일이 있는가? 시험에 들진 않았을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고 항상 바란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파격적인 임무를 주신 이유;

오직 그녀 만이 언제나 주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그녀에게 보이셨다.  

 

여러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로마 총독이 아닌 제사장들을 찾아간다.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부활을 알고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병사를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도, 부활한 예수 앞에서도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메시야를 언제나 거부했다. 

예수의 제자들 - 마리아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증언해도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는데도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세상으로 향한다. 

모두의 관심이 예수가 아닌 "나 자신"에게 가 있었기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예수를 따라다닌 자들도 예수를 통해 자기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증인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을 때도, 십자가를 질 때도, 죽었을 때도, 돌문이 막혀있는 무덤가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킨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부인하는 공동체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마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예수 부황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를 통해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폭풍우가 몰아쳐도, 때론 침묵하고, 내 인생이 힘든 상황이라도 그 분 안에 있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린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되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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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시간에 (마 26:17-35) 

 

1. 종려주일 :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마지막 고난의 일주일 - 가장 드라마틱한 일주일 

왕의 입성- 논쟁- 침묵 - 만찬- 체포- 고난- 죽음 - 부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실패와 승리가 너무나 극적으로 반전에 반전을 이루는 시간...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묵상집을 통해 예수님의 종려주일 후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살펴 볼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십자가상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며 함께 예배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날 - 우리는 3개월여간의 우리 케이티 집사님 댁에서의 개척예배와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의 모든 준비과정을 걸쳐 본예배당으로 입성하게 되고, 4월 마지막 주에 창립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알리는 종려주일은 비록 빌린 예배당이지만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공식적인 예배당에 입성을 앞둔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뜻깊은 주일인 것 같습니다. 

 

2.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내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히 살펴보며 함께 묵상할 터이지만 오늘 본문은 그 일주일 중에서 목요일날 이루어지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 전  수요일 - 침묵의 날 (그 분주한 여정 속에서 수요일날에는 아무런 행적을 남기시지 않는다. - 침묵의 날) 

하루 후 금요일 - 십자가의 고난, 죽음 

 

내일 있을 일을 미리 아시는 주님 -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보낼까? 가장 의미있는, 가장 사랑하는...제자들과 목요일 마지막 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육신적 가족보다 제자들이 그분의 형제였던 것이고, 그들에게 최후까지도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만찬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예수님 

  • 제자들 - 한 껏 들떠 있었습니다. 종려주일날 받았던 백성들의 환호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맞이할 유월절.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뜸은 곧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 되면 그 다음 자리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는 경쟁과 시기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하는 만찬은 서로 주님께 인정받으려는 그런 자리인줄도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 -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식사자리가 평안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답답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될 일을 제자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생각에 꽉 막혀 예수의 하는 일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갈 것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한껏 들떠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만찬 자리에서 행하신 세 가지 것 

(1)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21절) 

한껏 들떠 있는 제자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 만찬 시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너희 중에 하나는 가룟유다를 지칭할 것입니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팝니까? 앞에 15-16절을 보면 단지 은 삼십냥을 위해 예수를 팝니다. 은삼삽은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 

스승인 예수, 아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값에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찬 가지 입니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앞에 닥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신앙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앞에 놓인 잠깐의 쾌락을 위해,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과의 신뢰를 깨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 구원코자 하는데 우리는 당장의 작은 어떤 것을 위해 예수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이 자리에서 하셨을까?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미리 예언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유다를 회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모든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따로 불러서 "네 마음에 죄악을 다스려라"하는 방법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뒷부분에도 나왔지만 가룟유다만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56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왜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합니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에게만 나를 팔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너 그렇다가 큰일 난다.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설사 누가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도 그렇하지 못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잘못을 막아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뭡니까?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왜 그들이 몹시 근심하였을까? 자기들 안에서 언제든 주님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면 떠날 마음을 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품었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근심하여 열 두명이 각각 "나는 아니지요?"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곧 교회 생활 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중 하나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 모두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위험하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곧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 앞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날 팔리라 하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왜 예수님은 그토록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까? 

신앙은 서로에게 관심 갖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섬기고 보호하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의 모습이고 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내 살과 피를 먹으라 - 성찬과 세족식 

서로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이제 은 삼십냥을 가지고 자기에게 입을 맞추며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줄 유다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자기 살겠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 

로마 병정들의 위협 앞에서 다 뿔뿔히 도망칠 나머지 제자들....

한시간도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해하며 졸기만 하는 그런 제자들. 

 

제가 만일 예수라면 한 한시간동안은 혼을 내며 잔소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을 해서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고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얘 포기하고 홀로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편이 훨씬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바라 볼 수록 앞으로 그들이 행할 일들이 더욱 괴씸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 

 

그런데 예수님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날,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떄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살과 피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 살과 피로 너희를 구원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씼겼습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경험했거나 들어봐서 알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다는 것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 

이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대미문이 사건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서도 스승이 제자를,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긴 예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그 만찬, 최후의 만찬 시간에 그들의 발을 씻길 마음을 가지셨을까? 

 

첫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격려, 수고했다.

미우나 고우나 3년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손수 씻겨 주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 

공생애의 일과를 함꼐 했던 제자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용서였을 것입니다. 

나같으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화가 났을 그 순간에 주님은 용서함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이제 다가올, 그들 마져도 너무나도 후회할 그런 모든 배반과 저주의 일들을 예수는 미리 용서 하신 것입니다. 

 

셋째,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요 13:14) 라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잘하고 기특한 자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떠나가고 도망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결국 끝까지 그들에게 예수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방탕한 아들, 맨날 사고만 치는 그런 자녀를 끝까지 용서하고 믿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혼내고 잔소리하고, 꾸짖는데 익숙하지만 가장 엄한 회초리는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난 정말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얼마나 실수투성이인줄 모릅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나도 시시 때때로 너무도 하찮은 일에 주님과의 약속을 깨고 내 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패한 마음, 죄책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려고 하면 염치가 없어서 기도조차 안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지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면 제가 어떤 잘못을 해도 주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용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승구야 난 너를 믿는다"하십니다. 

 

여러분, 난 회개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셨다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회개하는데 막 화내셨다 하는 분 있습니까? 

다 용서하셨지요? 

다 받아주셨지요? 

그리고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우리지만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더러도 이렇게 격려하고, 용서하고, 믿어주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심보가 참 못되서 혼을 내다 보면 잘못한 줄 알아도 인정하지 못하고 성질 부릴 때가 많습니다. 

잘못한 줄 몰라서 안고치는 것이 아니라 심보가 못나서 성질내고 않고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어다." 

호되게도 아니게 하나님의 가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한낱 가인이 하나님이 따끔한 지적에 회개하지 않고 살인을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곧 넘어질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일 잘하고 인정받는 제자들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곧 넘어지고 배반하고, 떠나갈 자들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앙인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어..."

자기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 있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자격 있는 사람만 구원하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없기에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없는 우리앞에 주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십니다. 

발을 씻김으로 죄인인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시고,  주 앞에서 잘못한 것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실수 투성이인 우리임에도 끝까지 믿음을 주셔서, 우리 또한 그렇게 살라고, 부족한 자들의 발을 씼겨주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수건을 두르시고 천지를 지으신 그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씼겨 주시면서 내가 너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씼겨 주어라 하십니다. 

 

지난 3개월동안 함께 했던 가정 예배 

코로나로 모일 수 없는 중에도 우리는 모였고 예배드렸고, 또 조심스러웠지만 교제했다. 

기쁨도 있었지만 사로의 부족한 모습도, 어쩌면 실망스런 모습도 보았을 수 있다. 

이제 더 큰 예배당에 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금까지 우리생각보다 항상 더 빠르게 더 많은 것들을 역사하신 하나님꼐서 어떤 일들을 예비하고 계실 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처럼 기쁨과 슬픔, 죽음과 부활, 실패와 승리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갔다 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모였던 이 장소, 이곳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사랑을 잊지 말자.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고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셨던 예수님의 새 언약처럼 처음 시작했던 우리 멤버들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발을 씼겨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가 행복하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우리 교인들도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나는 아니지요?"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을 챙긴다면 모두가 무너지는 둑이 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 서로의 발을 씼기는 예수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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