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12022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예수님의 대화법 (요한복음 4장 19-26절)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 - 요한복음 3장 16-17절 -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 예수님과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와의 대화 

오늘 나눌 말씀 - 4장의 사마리아 여인, 현대 성서학자, 특히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며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는 본문. 그 안에 들어가있는 주제들- 이스라엘의 역사, 구원의 역사, 제자도, 예배, 신앙고백, 전도 등등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주제도 다양하고 깊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다룰 때마다 또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본문이입니다.  

 

3장 니고데모의 장면과 대조하면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새롭습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이에 반해 4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밤에"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아왔으나, 여인에게는 유대인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그것도 6절에 보니 제 육시, 우리시간으로 정오- 낮에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1.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는데, 앗수르는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침략제국으로서 강제로 혼인정책을 써서 앗수르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더럽혔다는 것은 생명이 더럽혀진 인간이라 여겨.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거꾸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과 북의 갈등보다 훨씬 더한 갈등 

우리는 북한의 체제는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감정은 없고 그들을 한 민족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 자체를 결명하고 상종하지 않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할 때에 종합시험을 보는데 한 교수가 정통 유대인, 제가 요한복음 4장,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소논문을 쓰고 시험을 보는데, 이것 저것 질문하고 저보구는 잠시 나가있으라 하면서 교수 3명이서 합격여부를 판단. 

그런데 방 밖에 잠시 나가있는데 교수 3명이서 언성을 높이고 막 소리치는 장면 - 나중에 제 지도교수에게 들으니 평소에 저에게 잘해주시고 칭찬을 해 주시던 유대인 교수가 사마라아를 다루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사마리아 여인과 유대인이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하면서 언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어서 "아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건...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여인을 만난 사건 이외에 다른 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2.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막의 더운 한 낮에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 하시는 모습- 스쳐지나갈 수 있는 모습.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그 여인을 만나신 목적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13-14절)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한 첫 마디 

"내게 물을 좀 달라" 

 

오늘의 설교 제목- 예수님의 대화법...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이루어진 대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자신의 생각도 아닌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단도직입적이다.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의 말을 끊고 네가 아무리 선생이어도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다. 그가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하신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먼길을 가서 그녀를 찾아가서 그 첫 일성이 "내게 물 좀 달라"한다. 

니고데모에게 무언가 달라했으면 단 번에, 기분좋게 주었을 것이다. 왜 그는 주는데 익숙한자요,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남에게 받아본 일도, 나아가 주어본 일도 별로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가장 더운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물을 길으러 온 그녀에게 그것도 자기 민족과는 상종도 않는 유대남자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녀에게 와서 내 뱉는 첫 마다. - 물을 좀 달라. 

 

깨어진 그녀의 자존감을 채우신다. 상처입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신다.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존재고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상한 마음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배빈한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씩 물으시며 그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은 이름 없는 사마리아 지역의 한 여인을 찾아가 "나에게 물을 좀 달라"하신다. 

 

예수님의 그 따뜻함. 그 배려, 그 섬세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이 열립니다. 성종할 수 없었던 관계가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오랜 역사를 걸쳐 막혔던 관계가 소통하는 관계, 대화하는 관계, 그리고 나아가 구원받는 관계가 됩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보면 그 대화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첫 대답 (약간의 적대감)

(15절)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여) 

 

16-18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구절은 해석의 주의가 필요한 어려운 부분. 

 - 전통적, 일반적: 남편을 다섯 둔 부정한 여인.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가장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 

 - 문자적으로 다섯 남편을 두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인가? 당시의 이혼- 여인에게 권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혼의 권리는 오직 남성에게...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번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기구한 여인...

 - 상징적, 비유적 해석 : 남편 -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들. 앗수르에 의해 강요된 우상들. 

 - 근거 - 이 대화 뒤에 이어지는 여인의 고백과 질문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 29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나- 말씀도 알았고, 체험도 있었고, 순종도 하였지만....그가 없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예배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이다. )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인이 주님을 유대인에서 주님, 주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녀의 믿음이 자라듯 그녀 역시 예수님을 고백하며, 이름없고 소외된 여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신앙인으로, 그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로, 제자로 그녀의 신분 역시 달라집니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 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를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그녀의 고백을 변화시키지만 그 고백의 변화는 그녀의 신분 또한 변화시킵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과 대화함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가 삶이 자라고, 우리의 신분이 자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 대화함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여러분의 고백도, 여러분의 영적인 신분도 날마다 자라며 변화하는 주님의 제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메시야를 만나다 4  사마리아 여인

본문 : 요 4:4-14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 유대 역사가 – 바벨론에서 귀환 –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시는 지금의 낮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창 29장: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 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절)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절)

 

뭐,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 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 2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4-26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ㄱ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l  유대 역사가 바벨론에서 귀환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는 지금의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c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29: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

 

,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에서, (11, 15, 19), 주에서 선지자로 (19),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공동체어떤 죄인도 받아들이는 공동체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까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3.25 04:51

    샬롬^^.
    진리의 말씀 감사합니다.
    우물가의 여인 "우물"에 이런 숨겨진 비밀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평안한 한주 되세요.

 목마름이 없는 예배 (요 4:13-15) 


인간은 연약하고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가 목마름이 있습니다. 

더 좋은 삶을 향한 목마름, 사랑에 대한 목마름, 행복에 대한 목마름...


물론 어떤 순간에는 "아 참 좋다. 딱 이순간만 같아라!"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상태는 말 그대로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 인생은 또 목말라지기 시작합니다. 

늘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 목마름을 채우기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학교를 다니며 지식을 채우려 하고,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여 사랑을 채우려 합니다. 

오락을 하며 즐거움을 채우기도 하고, 열심히 수고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려 합니다. 


문제는 아무리 채워고 또 채워도 만족이 없고 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전도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솔로몬의 공허한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를 가지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룬 왕입니다. 

그는 세상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하늘 아래에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고 살폈다"(전 1:23절)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2장으로 가면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삶의 갈증을 채우기 위한 모든 노력과 그 결과들을 소개 합니다. 

  • 먼저 그는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도 술과 오락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술과 오락을 통해서는 진정한 즐거움을 얻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의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공허하고 허무함만이 남습니다.  
  • 그 다음으로 그는 자기를 위하여 사업을 크게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전 2:4) 집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동산과 과원을 만들어 각종 화목을 심었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고 그 당시 어떤 누구보다 더 많은 가축들, 그리고 금과 은과 보물, 노래하는 남녀들과 천명의 처첩을 거느렸음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금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진 모든 것이 공짜로 거져 얻은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수고로 얻은 몫이라 말합니다. 부정한 축제가 아니라 떳떳하고 정당한 댓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는 고백은 무엇입니까? 
  • <전 2:18-21>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노니 내가 수고한 모든 결과를 결국은 다 다른사람에게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뭐라 말합니까? 
  • (전 5:10-16)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5:11)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전 5:12)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 5:13)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전 5:14)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전 5:15)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전 5:16)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 또 그는 계속적으로 지혜를 탐구했습니다.하늘의 천체나 철학, 당시 첨단의 학문들을 그의 지혜로 섭렵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전 2:12-17절까지 읽어보면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당하는 일이 매한가지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당하는 질병을 지혜가 많다고 비껴가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때로는 사기를 당하고 실패도 합니다. 천재지변이 지혜자가고 비켜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혜자라고 그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지도 않습니다. 똑같이 죽으면 잊혀질 이름들입니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을 통해 내 안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인생의 갈증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그 갈증을 해결하려 하십니까? 

내가 추구하는 삶, 내가 힘쓰고 있는 삶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진정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솔로몬이 관찰한 것처럼 살펴보십시오. 

돈을 가장 많이 벌었다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나 권력의 가장 최고에 있다는 현, 전직 대통령들, 그들에게서 행복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연예인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왜 마약이나 알콜 중독에 걸리며 혹은 공황장애나 우울증으로 고생을 합니까? 


내가 추구하는 삶의 끝에서 난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난 거기까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자족하고 적당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적당이라는 말 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항상 조금만 더....하다가 포기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목적이나 자기 꿈이라도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목적도 없이 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저 마지 못해 일하고, 마지 못해 살아가며 그래도 죽기 싫어서 바둥바둥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도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유명인이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이 불경하게 여기며 가지 않는 땅에 살면서 그 마을에서 조차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시선을 피해 해가 쨍쨍인 대낮에 홀로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오는 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더 나아지라는 보장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 자기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꾸역꾸역 우물가로 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인생은 고단함의 연속이고 마지 못해 사는 것이며 목적도 없고, 소망도 없는 그저 반복되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매일 같이 물을 마셔도 또 다시 목말라 지고, 아무리 마셔도 인생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인생을 만나고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구원코자 하는 인생이 바로 이런 갈증에 목마른 인생입니다. 


뭐라하십니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함께 읽읍시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물질이 우리 영혼을 절대로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세상의 권세를 이용해서 자꾸만 우리에게 세상의 것으로 우리 영혼을 채울 수 있다고 유혹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고백처럼,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 세상의 것으로는 채우고 또 채워도 계속되는 목마름뿐입니다. 우리 영혼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개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처럼 잡을 수 없는 것을 잡고자 수고하고 고단히 또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채울 수 있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 역시 여전히 그러한 목마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구원받은 자들이 여전히 영적, 육적 목마름을 벗어나지 못할까요?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교제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서 여전히 세상의 것, 물질적인 부요, 권력, 명예에 사로잡혀 그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진정으로 예수가 주는 은혜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여전히 채울 수 없는 세상에서의 것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초대에 여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구원의 초대에 여인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반응하는 것...이것이 은혜이고 믿음의 역사입니다. 


소망없이, 변화 없이,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 중에 주님은 새롭게 말씀하십니다. 

하루를 더 살아도 어제와는 다르게, 의미있는 삶, 목적있는 삶, 낭비가 없는 삶, 열매맺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분의 초대가 들려진다면 간구해야 합니다.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 안으로 깊이 들어오려고 해야 합니다. 


나에게 그런 물을 주옵소서. 

주님 나에게 목마르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누구나가 다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만 누구나가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가치를 알고 그 은혜를 간구하고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거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이 정도 까지만.... 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너에게 아무런 위안도, 해결도 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서 남편은 이 세상의 우상이요, 이 세상에서 그녀가 의지했지만 위로받지 못했고 그녀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던, 오히려 그것을 위해서 그녀 자신이 날마다 수고해서 감당해야 했던 세상의 헛된 가치관들입니다. 


신앙은 내 꿈, 내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꿈을 품는 것입니다. 

야망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주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종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자기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비로서 자기 안에 숨겨진 헛된 욕망들을 버리고 진정한 자기의 모습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합니다. 

자기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비전을 보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꿈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위로받고, 나를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녔던 세상의 우상을 버리고 내 삶을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시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세밀한 소리를 듣는 순종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 내 욕심과 야망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내 꿈을 바라기에 신앙이 성숙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러 오기 때문에 자꾸만 하나님이 내 비위를 맞춰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Worship" 그야말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열린예배, 구도자 예배란 이름으로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불신자가 되고, 새신자가 되고, 우리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기 보다 성도들의 입맛과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적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공급되는 생명입니다. 

우리의 야망, 우리의 우상을 자기고서는 여전히 목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올해 "너희가 주어라."라는 표어 중에 내용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소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예배.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고 대화가 있는 예배.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또 다시 열매맺을 수 있는 교회.... 


세상의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예배 하였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편)이었습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만족이 있고 우리 삶의 갈증을 해결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주님은 그러한 샘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약속하셨습니다. 

 

 여전히 목마르십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십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길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 안에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