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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속의 기쁨의 전도자 (빌립보서 1장 12-21절)

 

새벽예배에 말씀을 나누고 있는 빌립보서.

27권 신약성서 중에서 사도바울의 저작이라고 여겨지는 성경이 13권인데 그중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빌립보는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와 로마로 향하는 유럽의 다리 역할을 하는 지역인데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시작지가 바로 빌립보 지역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탄생에 대한 배경이 소개되는데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복귀해서 1차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2차 여행을 출발하고자 채비를 갖추고 있다.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던 바나바와 결별하고 이제 실라와 디모에와 함께 떠나는데 원래 그들의 목적지는 1 전도여행에서 방문하거나 개척했던 교회들을 방문하여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1.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그런데 출발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그들의 길을 되돌이켰다.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바울과 그 일행에게 있어서 마게도냐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지역. 언어나, 거리, 거기에 대한 정보도 하나도 없었다.

성령의 두 번에 걸친 역사와 환상으로 인해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땅, 준비되지 않은 채로 미지의 땅 마게도냐, 유럽을 향하여 떠난다.

 

7절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0절-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니 곧 바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2. 감옥과 기쁨

빌립보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

그런데 이 글의 쓰는 바울의 배경을 보면 기쁨이라는 주제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의 현상황

로마 감옥에 2차 투옥

1차 때는 단지 감금으로서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 곳으로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며 마음껏 대화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쓸 당시의 상황은 더 악화 됨.

 

사정이 달라져서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감옥 안의 삶 - 비인간적인 대우, 매를 맞음.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

- 그가 한 것은 주를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 그런데 결과는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모습.

 

무엇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는가?

1) 감옥 안에서 사도바울의 깨달음.- 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 12절: 나의 당한 일- 감옥에 갇히게 된 일.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시위대 안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됨.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 그의 기쁨의 기준 - 내 개인적인 사정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예수에게 도움이 되는가, 주의 일에 도움이 되는가?
  • 우리의 기준: 항상 '나'에게 맞추어져 있다. 내가 잘되면 좋은 것이고 내가 고통스러우면 불행한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생각은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요,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가?
  •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절,“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들

  •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선교를 하면서도 다른 교회가 이미 들어 간 지역은 들어가지 않도록 함으로 교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자립하게 했지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절,“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whether from false motives or true)- 거짓 동기로 하든지 혹은 참된 동기로 하든지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벗어버렸을 때 그는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비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게 된 일이...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가 신앙 안에서 이룬 결론. 성령께서 주신 생각...
  • 너희의 간구와: 사도바울의 외로움이 들리는가?

-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가장 높은 학식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학문과 가문이 뛰어난 자가 반역자라는 이름을 무릎쓰고 유대교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를 쫓음. Why? 예수를 만났으니까... 주님의 은혜로 강권적으로...

-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의심한다. 그는 죽일 때까지 그의 사도권, 그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변호하며 다녔어야 했다. 그 자신도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 안식처가 없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의 불행을 기뻐한다.

-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상처받은 이야기, 배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직 가룟 유다 이외에는...왜? 그들도 떳떳치 못하니까... 그들 자신도 다 배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바울은 누구는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으며... 그리스도를 떠났으며..그런 구절이 많다. 서운함도 느낀다. 어디 하나 의지할 때가 없다. 결혼을 안 했으므로 가족도 없다. 그래서 서운함도 느낀다. 외롭다. 성도들의 기도는 그가 세상에서 위안을 받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안다.

-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상처를 안 입었을까?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았다. 배설물로 여겼다. 자기 자신 안에 기댈 수 있는 것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에겐 성도가, 믿음의 동료가 귀했다. 때로 의지했다. 그들의 헌금에도 의지하고 그들의 기도에 의지했다.

 

  •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내가 풀려나게 될 줄을 내가 안다.

-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풀려 났다가 다시 감금되고 지하 감옥에서 사형당함.

- 곧 풀려 나지만 또다시 감금...

- 그러나 영원한 구원에 확신을 가짐.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그의 인생의 기준점, 목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려 함.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다. 내 소망과 기대... 말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인데...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잘 되고 싶어하는 생각... 내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생각...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고자 했는데...난, 나 자신을 살펴보면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서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나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려 하다 보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엔 언제나 부끄럽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NKJV에 이 말씀이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죽는 것은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od News Translation에는 “For what is life? To me, it is Christ. Death, then, will bring more (삶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더 많은 것을 가져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난 내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다. 예수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들이 여전히 있다.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는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쉬고 싶고 즐기고 싶고 때론 망가지고 싶다. 그런데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를 뜻대로 쓰다보면 결국은 그 시간이 일부분의 헌신 마저 집어 삼킨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하신 이유는 그 분이 욕심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군열, 구멍에서부터 큰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 마음은 조그마한 틈에서부터 무너진다.

사도바울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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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10 03:24

    부끄럽습니다.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가시 너머의 으혜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잘 알려진 바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되는 어떤 질병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 가시에 대해서 설명한 사람은 초대교회의 교부중 하나였던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삶을 추적하며 이 육체적 가시는 안질이나 간질, 혹은 심한 편두통과 같은 육체적 질병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서 칼은 바울 자신이 받았던 영적인 유혹이나, 의심, 가책, 갈등 같은 것이었다고 해석했고,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이 받았던 핍박이나, 외적인 환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사실이라기 보다는 칼빈이나 루터 자신의 삶을 적용한 해석일 수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이 육체적 질병이던, 내적인 유혹이나 고통이던, 혹은 외적인 핍박이나 환난이건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까지 부르며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가를 표현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사용한 가시라는 단어는 고문하거나 찌르기 위해 사용하는 막대기나 가시 등의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하면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심히 괴롭히고 깊이 찌른 이 가시 때문에 바울은 큰 고통을 당하고 사역에 방해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 성경에서 가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서 등장합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내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에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7-18) 

즉 죄가 있는 곳에 가시덤불과 엉컹퀴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받은 저주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싹튼 저주이기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도 가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가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가시로 말미암아 잘 열매 맺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찔러대기도 합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도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

라고 말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가시로 말미암아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가 왜 생깁니까?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며 재물과 향락을 바라고 취하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이 땅의 것을 생각하다가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잘못된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을 취하다가 얻게되는 못된 열매입니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성경에 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용서받았는가, 용서받지 못하였는가만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 스스로만 보면 다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몸에서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 가정의 불화, 자녀문제 등의 많은 환경과 관계 속에서의 가시가 자기를 찌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가시가 되고, 부인이 가시가 되어서 일생을 찌르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평생의 가시가 되어 찌르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쯧하지 않은 자신의 성품이나 성격으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잘 띄고 안 띄고의 문제고 정도의 문제이지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찌르고, 상대방을 찌르고 주위를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가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찔리고 찌르는 가시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그분께 나아오면 우리의 가시가 무뎌집니다. 그 분을 찌름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주님께 나왔는데, 계속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가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남겨둔 가시가 있다는 것이지요. 


  • 계속 간구했어도 남겨두었다는 것은 대부분
  1.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았거나 
  2.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거나
  3. 아주 가끔 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 바울이 받은 응답은 
  1. "내게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입니다. 

가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교만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처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환도뼈를 치게 함으로 그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 없으면 내가 평안해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더 붙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또 하나님을 멀리 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시를 남기셔서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람은 약할 때 겸손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나는 감기한번 안 걸렸어" 라고 뽑내던 사람도 중병에 걸리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또 권세가 있던 사람도 그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우쭐대지 못하게 막습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2. 두번째로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에게 그 가시보다 더 큰 은혜, 더 한 사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가 당장 아픈 것, 당장 없는 것, 현재 내가 힘든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인도하신 것, 그 분이 내게 주신 것, 그 은혜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광야에서...항상 불평.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그래도 늘 불평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나에게 없는 것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의 아픔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받은 은혜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층 천까지 올라가서 (일층 천- 우리가 보는 하늘, 이충천- 해와 달과 별이 운행되는 하늘, 우주  상층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 하늘나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가시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숨깁니다. 남이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혼자 괴로워하다가 아파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져나와 기도하는 자, 예배하는 자는 더 이상 가시를 숨기지 않습니다. 

응답하시건 거절하시건, 치료하시건 남겨두시건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자기의 가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했습니다. 

내 능력의 약한 데서 더 온전하여짐을 경험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강하게 보이려고, 남에게 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사는데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약해질 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세상은 자기의 강한 것을 자랑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가시를 감추고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가장 중요한 때에 가시를 드러내며 찔러댑니다. 매정하게 찔러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시를 인정하고 가져와서 치료받던지, 아니면 가시보다 더 큰 은혜를 맛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이나 언약궤를 지을 때에 주재료로 사용했던 나무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 혹은 아카시아 나무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막에 서 있는 싯딤나무는 그야말로 가시나무입니다.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을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땅에서 받은 면류관이 어떤 면류관인줄 아십니까? 

바로 가시 면류관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씌여준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찌르시는 것을 다 담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가시가 있으면 아픕니다. 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시를 빼내어야 합니다. 나자신도 남도 찌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재료가 조각목이든 교회는 가시 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그 찔리는 상처가 아프고 괴로와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로서 서 가는 것입니다. 

가시가 예수님의 면류관이듯이 가시가 그 분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면류관이기도 합니다. 

가시를 통해서 더 겸손해 지시고 가시를 통해서 더 큰 은혜, 넘치는 은혜를 맛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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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23 16:59

    약함으로인해 온전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바라봅니다.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은혜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설교자로서 제일 힘을 주는 말 - 성도들에게 은혜 받았다. 

또한 설교자로서 가장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 -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은혜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성경은 은혜로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지만 전혀 은혜롭지 못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되 내 것이 다 네것이니..."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 아버지와 함께 거하고 떠난 적도 없고,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았는데.... 그에게 은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 38년된 병자.... 왜 매일같이 은혜의 집에 모였는데 그들에게 은혜의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까?


이와는 달리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버을은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현제의 모습.... 

과연 예수 믿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바울의 모습 


(빌립보서 3장 5-6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였지만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분열되어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의 사도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가 말이 어늘한 것을 비아냥 거리고, 더 나아가 그가 생긴 것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는다. 


예수를 알기 전 자기 잘 난 맛에 살던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눈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고 지금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말하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을 아는 것이다. 은혜를 그리스도릉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그 은혜의 내용을 15장 1절부터 설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서 선 것이라"  (1절) 


은혜는 곧 복된 소식, 복음이다. 우리가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그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반대로 헛되이 믿는다면 - 구원에서 멀어진다. 구원과는 성관이 없다. 이 구원은 장차 올 구원이기도 하지만 오늘 내게 임한 현제의 구원이기도 하다. 


-> 은혜는 내게 전해진 그 복음의 말을 굳게 지키고 참되게 믿는 것이다. 


그 복음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3~4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 사도될 자격도 없고,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따르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던 나같은 자에게까지 나타나신 주... 


너무나도 평범하게 들어왔던 그 복음의 내용이 내 삶의 중심에 박히도록 들어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정말로 만삭되어 난 자 같은 나, 아무런 믿음의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내가 예수 안에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유대인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 여기고 깜짝 놀랄 그런 친밀한 관계...) 


  •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가 달린 십자가, 그냥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잘 안 다가온다. 그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가?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 


- 군대에서의 경험, 군대에서 사고가 나서 영창은 아니고 군기교육, 총과 모든 개인용품을 넣은 군장을 매고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연병장을 돌고 자녁 먹은 다음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A4로 10장씩 번성문을 써야 잘 수 있었는데 ...도저히 쓸 것이 없어서 첫날은 새벽 2시가 되어서 잠자리....

그 다음날 또 아침에 일어나서 연병장을 도는데 벌써부터 반성문 걱정.. 

그 날도 새벽 2시 

그런데 그렇게 반성문을 쓰다보니까 내가 어릴적 부터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서부터,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들, 행동으로 저질르진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풀어왔던 수 많은 폭력과 살인과 음행과.... 

그리고 겉은 바른 척 하지만 속으로 풀어왔던 그릇된 말들, 욕들.... 

2주동안 난 정말로 내가 큰 죄인이었구나. 내가 이런 벌을 받아도 쓰구나... 


- 언젠가 TV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30년 가까이 억울하게 감옥할이 하고 나온 사람들의 인터뷰

억울해서 언떻게 사셨습니까? 

처음엔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내 죄값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젠 별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 로마 시대의 사형 방법, 지금은 금지된,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한 

벌거벗겨져서 숨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받으며 또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사람들로부터, 군병들로부터 방아야 하는 조롱과 멸시... 


십자가 상의 강도 - 

(누가복음 23장 41-42)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은혜는 내가 받을 상보다 조금 더 받는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오히려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 은혜는 어느날 사두었던 복권이 당첨되는 정도의 행운이 아니다. 나는 산 적도 없는 천국의 시민권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어진 것이다. 
  • 기대치도 않았는데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그런 상이 아니다.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삶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헤아릴 수로 셀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부활이다. 

-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 일컫는다. 

고전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 겉은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자. 영이 죽은 자, 범죄한 아담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적으로 죽은 자의 이중의 의미 

 ex) 계 3:1)…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다. 살아있으나 정작 죽은 자 같은 자들의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은혜가 오는 순간 죽음은 사라진다. 

 가장 절망적일 때 그의 은혜가 생각난다. 

 

 (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면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은혜는 주가 베푸신 역사가 내 일상의 삶 중에서 고백되어 지는 것이다. 내 입술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비로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 그런데 은혜를 입지 못하는 자 
  1.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인임을 부정하는 자 

죄인, 새리, 창기- 자기가 죄인임을 누구보다 아는 자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 자기는 상 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자. 


2. 남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은혜를 비교하는 자ㅡ, 은혜의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은 은혜를 누릴 수 없다.  

탕자의 형

포도원에서 일찍 나와서 일한 자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남의 은혜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부당하게 느껴진다. 왜 은혜를 수치로 환산하기 떄문이다. 

남의 은혜는 큰데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작아보인다. 그런데 은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3. 내 삶이 상황이 주님을 가릴 때에 은혜는 보이질 않는다. 

마 14: 24: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7절: 예수꼐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렇게 상황에 눌려 수렁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다윗을,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을 붙잡아 일으키신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른 뼈에 생기가 돋게 하신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다. 

은혜가 보이질 않는가? 느껴지지 않는가? 너무 바빠 은혜를 바라볼 시간이 없는가? 

너무 무기력하여, 떄로는 우울하여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가? 


가만히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있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 모습을 가져다 보아라. 

어울리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하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도 싸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리에는 내가 없고 언제나 주님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이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물이 되게 하신다. 목거리마다 귀거리마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품이 되게 한다. 버림받은 것 같은 나의 존재를 그렇게 보석같은 존개가 되게 한다. 


당연히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내 모습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보고도 이제 일어나라 하신다. 

내가 널 위해 죽었거늘 너 지금 무엇하고 있냐 말씀하신다. 

은헤는 내 모든 우울함을 사라지게 한다. 내 억울한 모든 삶을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은혜는 내가 값을 매겼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폐를 전혀 나와 상관이 없게 만든다. 

난 은혜받는 자다. 은혜는 나를 숨쉬게 한다. 

나의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그냥 나를 보시고 구해주기로 작정해서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게 경험된 그 은혜가 우리 성도 여러분께도 경험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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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5 04:20

    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에 감사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


[딤후 1:1-딤후 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바울의 가장 최후의 서신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에,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에 쓴 글. 

이 때의 역사적 정황은 바울이 두 번째로 투옥되면서 사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고 봄에 순교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형을 두 세달 앞 두고 쓴 글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남기는 유서와도 같은 성경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후세의 학자들도 디모데 후서를 바울이 디모데와 같은 영적 자녀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남긴 유서라고 인정을 합니다.  


1. 사도 바울 

우리는 바울을 부를 때에 흔히들 사도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라는 말은 초대 교회에서 열두 제자들에게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apospolos"라는 말로 파견된 자, 전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 사신 등의 뜻이죠. 

그러다가 초대교회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아 사도의 직함을 주었고 나중에 이 바울도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받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 곡절과 반대가 있었을까?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직접 선택하여 함꼐 다녔던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의 제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생전에 만난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성에 가는 중에 예수를 만났다고 하나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증인도, 증거도 없는 개인의 주장일 뿐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인도했던 권위자 바나바도, 당시 유명한 설교가였던 아볼로 같은 사람들까지도 감히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의 박해자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소개 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으로...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13번째 사도였습니다.  이것은 12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더욱 놀라운 주장입니다. 

예수님이 왜 12명의 제자를 뽑았을까? 많은 사람들은 12제자는 바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고 12지파를 통한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12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자, 사도들은 이 12의 숫자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하면서 기도하고 제비 뽑아 맛디라를 새 사도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직분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이고 그 조건은 

열 두 제자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항상 함께 다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열두 제자들과 같이 다닌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바나바와 나중에는 실라, 디모데등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닙니다. 


제자들로서는 바울이 아무리 사도라고 주장하고 다녀도 그것을 인정해줄만한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설교마다 글마다 자신을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럼 다른 사도들이 바울은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벧후 3:15-벧후 3: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는 바울이 교회에게 쓴 편지들을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가리켜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지칭한다. 오히려 그의 글이 무식한 자들에게 좀 어려워서 해석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러서 이 글을 쓴다고 하면서 그의 글의 가치를 칭송한다. 뿐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의 편지 시작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하면서 시작합니다. 

요한의 글이 예수의 사도된 요한은..이라고 시작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마태가, 다른 제자들의 글도 자신을 소개하면서 구태여 사도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요? 그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하필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아까 베드로 후서 3장 15절 16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그는 바울의 글쓰는 형식을 빌어 구원에 대한 사실을 보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사도 중의 사도요, 가장 큰 사도로서 인정받는 자가 지금 사도 중에 끼기 힘든 바울을 사랑하는 는 나의 형제라고 하면서 그의 글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베드로 사도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오히려 열 두 사도 누구도 사도 라는 이름 붙이기에는 좀 어설프고 낯선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꼭 꼭 이름 앞에다가 사도 바울하고 불릴 정도로 사도의 대명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바울 자신이 이 '사도'라는 이름을 너무 너무 사랑하고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라는 이름의 뜻은 그냥 심부름꾼인데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이 이름을 너무 너무 사랑했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분, 여러분의 사명을 이렇게 사랑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는 이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글을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남기면서도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사명, 자신의 사도직을 말씀함으로서 편지글을 시작합니다. 


그는 스스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그가 받은 이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 즉 그 분의 피값으로 모든 과거의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죄에서부터 자신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도, 사신, 심부름꾼이 된 나 바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나의 정체성을 무엇입니까? 

목사로서의 삶. 

난 이 직분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 감사한가? 자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성도라는 이름. 

그 이름 Saint. 성자, 성인...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 

너무 거리가 멀어서 낯설어버린 이름은 아니십니까?  성도라는 이름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한 적 있으십니까? 남들에게 성도라는 이름을 자랑하신 적 있으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시스터 액트 2: 가수가 너무나도 되고 싶은 소녀...

어느 날, 주인공 수녀가 그 여자에게 물어요. 

넌 무엇이 되고 싶니? 가수요, 그런데 될 수가 없어요. 저희 집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머니는 내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하시거든요...


그래서 포기할꺼니? 그럼 포기해....

그런데 넌 일어나자 마자 무슨 생각을 하니? 자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니? 

노래하는 것이요...

그럼 넌 이미 가수야. 노래하는 것을 그만큼 사랑하면 어떤 것도 널 방해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그 소녀는 어떤 장벽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하는 곳으로 향합니다.


너무나도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되고 싶었던 베드로

너무나도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고 싶었던 요한....

왕 이전에 찬양하는 자가 되고 싶었던 다윗....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바라는 모습대로 되었습니다. 


당신은 예수의 어떤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되고 싶은 간절한 그런 모습이 있습니까?

당신의 유언장에 당신은 당신의 이름 앞에 어떤 글귀를 넣고 싶으십니까? 

바울은 누가 봐도 사도의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로부터 위임받은 그 사도라는 직을 그 어떤 사도들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사랑했고, 그로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대표적인 사도가 되었습니다. 12라는 제도도, 관습도 무너뜨리고 당당히 이방인을 위한 열 세번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소명과, 사명을 찾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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