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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9절 화평케 하는 자 -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입이요. (마 5: 9)

팔복 중 일곱번 째 복 - 일곱: 하나님의 완전 수

청결함 -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복

         - 손을 깨끗이 하듯 행동이, 삷으로 정결함이 나타나야 한다. 

         -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  

         -> 하나님을 볼 것이라. -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변화되리라. 

         -> 하나님을 경험한 자들이, 변화받은 자들이 누리는 온전함의 복. 

         평화의 복은 온전함의 복, 우리가 맺는 가장 온전한 열매 -평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평화 

이스라엘의 역사 - 고난의 역사 - 식민지의 역사

그들의 인사 - 샬롬 

우리나라 사람들- 안녕하세요? 밤새 안녕하셨지요? 왜? 그 밤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지 못했으니까.

  • 성경에 등장하는 평화, 평강, 평안, 화평 이라고 번역된 단어들 -> 샬롬의 의미 
  • 예수님 -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 

베들레헴에 나실 때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찬송하여 가로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친히 제자들에게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평화의 복음을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화평케하는 자의 온전한 일생이었다.

예수는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 세상이 말하는 평화 

세계의 패권 - 로마 -> 로마의 국가 철학 -팍스 로마 -평화로운 로마 

무엇을 가지고 이 평화를 유지하는가? 힘과 법

그들의 식민지 - 종교의 자유 보장, 자치권 인정, 엄벌에 처하는 것 - 평화를 깨뜨리면, 소란케 하면...

 

예수님, 사도바울 -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란케 했다는 죄로....

 

- 트럼프의 전략 - 힉인들이, 멕시칸들이, 이민자들이...우리의 평화를 깨뜨렸다. 

- 영국: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여 우리까리 평화하자. 

 

  •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의 의미 

영어성경에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를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럼 그 평화는 어디에서부터 만들어 지는가? 

외부에서 오는 평안? NO!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평안 

화평케 하는 자는 먼저 자기 마음 속에 화평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안 - 어떤 환경에서도 요동치 않고 주어지는 평안 

 

세상의 것들이 왜 참 복이 되지 못하는가? 물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명예가, 권력이 아무리 높아도 평화를 간직할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복들은 성공하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평화를 잃어버리고 깨뜨리고 사라지게 합니다.

 

코로나 19 - 가정에서 머무는 시간, 국가에서 기본적으로 공급되는 돈. 

육신은 쉬고, 물질도 어렵다고 하지만 캘리포니아 한인가정 - 대부분 국가적 혜책 

온 가족이 함께 머물며.... 

그런데 평안하신가?  왜? 불안하기 때문. 안심할 수 없기 때문.... 

 

인류의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미움과 증오와 원수 맺는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이것은 교육으로 될 수 없다. 사상으로도 안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다. 성령은 평화의 왕이다. 평화의 왕이 임할 때에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어 평화의 사도로 임명했지만 그들은 평화의 사도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었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없었다. 그들 안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르면서도 그 마음 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며 다투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자냐고 자리다툼을 하고 분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심령 속에 평화의 복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도 언제나 마음 속으로는 칼을 품고 있었다. 자기를 압제하는 로마를 정복하는 꿈... 자기 실현 자기 목적, 오직 성령이 임할 때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

 

  • 자기 안에 평화가 이루어질 떄에 비로서 형제들과 평화가 이루어진다. 

남들과 평화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는 늘 그 원인을 외부에서, ~ 떄문에라고 하지만 내 안에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심..

님들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내 안에 평화로와야 하고 또한 내가 십자가 안에서 죽어야 한다. 

자신이 죽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우애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한다. 자기 욕심을 다 채우고는 결코 화목하기가 힘들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을 부정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형제들과 화목하고 평화로운 사람은 행복하다. 서로 원수 맺고 싸우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 순교는 평화의 사도가 되는 신앙행위이다. 순교는 원수의 손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원수와 평화를 이루는 행위이다.

원수의 칼에 죽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죽음을 자원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만약 원수의 손에 죽으면서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죽어간다면 이것은 순교가 아니다.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자신이 먼저 죽어서 원수의 마음 속에 평화를 심어주어야 한다

자기를 죽여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평화의 산 증인이다. 순교의 제물은 어디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죽이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족들의 마음에 평화가 임한다. 직장에 순교자로 들어가면 동료 직장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수 있다.

 

  • 화목제물의 의미 

[레 7:15-18]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흠이 없어야 한다. 

가정 평현체 따라 제물의 종류는 다를 수 있다. (소, 양, 염소...)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어떻게 해야 그것을 하루 동안에 먹을 수 있을까? 

나누어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셋쨰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 것이다. 왜? 상해서? 

다 나누지 못해서, 자기를 위해서 남겨서...

 

자기를 위한 화목제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돌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질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드린 제사 - 회목제

오직 회목제는 제사 후의 남은 음식을 제사장에게 주거나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어 먹게 했다. 

 

결국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탐욕을 버리고, 우리의 것을 희생하며 나누라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라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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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8절 - 그리스도인의 청결함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청결- 카탈로스 - 더러워진 어떤 것을 씻어내다.

 - 카타르시스 -> 카탈로스에서 파생된 용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다.

 

청결하다는 말은 “키질하고 채로 쳐서 모든 겨를 제거한 곡식”에 사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의를 사모함으로 말씀으로 나를 가다듬고, 닦아서 마음 속의 불순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정결의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하셨는가? 

마음이 청결한 자 -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 청결의 의미
  • 마음이 청결한 자의 의미 
  • "하나님을 볼 것이라"의 의미 

 

당시 유대인- 바리새파, 제사장, 서기관 -> 청결의 유지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강조,

제사, 음식, 의복, 관계- - 정결법 - 거룩하게 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율법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러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막 7:15-16)

 

손도 씼지 않고 음식을 먹는가? - 그들의 입장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청결의 위배 

 

[마 23:25-28]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왜 겉만 깨끗이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쳗결함의 의미 

 

1. [약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정결함의 반대 - 두 마음을 품는 것->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하는 자  

 

"두 마음을 품는 것" 

  • 하나님과 우상,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

이스라엘의 범죄는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 바알과 앗세라 - 그들의 농사와 충요로운 삶에 연관된 신 

마음을 품는 자에 대해 얼마나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1:8절을 보면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 호세아 10:2절은 두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것 

베드로: 풍랑이는 바닷가에서 다가오시는 예수님 

"주여 주시어든 나로 오라 하소서" 주님을 향해 풍랑 위를 걷던 베드로가 중간에 바다에 빠진다. 왜? 

바람을 보고 빠져 가는지라. 

 

엘리야-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앗세라 선지자와의 영적 전투 

          - 이세벨의 유혹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마음이 정결한 것 -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는 것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방법, 자기 형편, 자기 감정에 이끌리는 마음 - 정결하지 않은 마음 

믿는 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에 의지해서 살고자 하는 것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로다".

 

2. [시 24:3-6]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여호와의 산, 거룩한 곳 -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 누구냐? 

  • "손이 깨끗하다"의 의미  

[사 1:15-17]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 - 팔복과 이어지는 말씀 
  •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이다. 

 

3. [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무엇을 통해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가? 예수의 피를 힘임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 무엇으로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는가? 예수의 피, 십자가의 보혈로...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 

 

청결의 조건 

  •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 
  •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자 
  • 예수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 속에서 정결함을 나타내는 자. 

 

하나님의 얼굴을 대한 자 모세? 

브니엘 - 하나님의 얼굴 

언제 그가 하나님을 보았는가? 

[창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자기 죄를 고백하며 사기꾼(야곱)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이름이 바뀌었을 때에... 붙인 이름, 

 

아무 것도 의지 할 것 없을 때에 얍복강 가에서 비로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를,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자기 자신이 사기꾼 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가 의지하는 힘의 상징인 환도뼈를 치면서 평생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은혜를 주신다. 

 

  • 오늘 새벽 사도행전을 끝내면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도시를 가던지 가장 먼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유대인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한다. 

 

[행 28:26-27]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누가 병자인가? 유대인들, 오래 믿은 자들, 자기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구약시대 가장 큰 질병 - 문등병, 자기 병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 

이단보다 더 무섭고, 이방인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 38년된 병자, 오래된 병자, 분등병자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왜 그토록 오래동안 신앙생활 하는데도 은혜에서 멀어져 가는가?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는가? 

두 마음을 품고,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고, 세상에 나가서 똑같이 돈밝히고, 줄을 잡으며, 온갖 꾀에 의지해서 살고자 하니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내 마음에 남지 않는다. 

그런 심령은 언제나 길가, 돌짝밭, 가시덤불일 뿐이다. 

 

가장 큰 복-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복, 하나님 나라를 사는 복. 

언제? 내 마음의 시선이 하나로 모아지고, 예수의 보혈의 은혜가 내 삶 구석구석 펼쳐지고, 내 삶에 믿음의 열매가 맺힐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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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7절 긍휼

 

지난 주 설교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어떤 의인가? 하나님의 의

내가 의로와지기 위해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말슴에 길들여 지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내 노력과 내 의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다가갈 수 없음을 절절히 깨닫고 

내 안의 성령이, 주님의 은혜가, 다가갈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왜? 신앙 생활을 하면 할수록,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할 수록 우리가 깨닫는 것은 말씀이 날 거룩케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요

내 안에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이 자꾸만 나오기에 주님께서 날 불쌍히 여기사 날 다스려 달라고, 인도해달라고, 함께 해 달라고...주리고 목마른 것 

심령이 가난한 것이 내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라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말씀 생활 하면서, 기도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거룩해지지 못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말씀 안에 비추어진 나를 바라보며 목말라 하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신 복? 배부를 것이다. 

 

무엇으로? 다시 한 번 말씀으로, 은혜로, 하나님의 통치로, 하늘의 만나로.... 

 

지난 주 까지의 복 - 내면의 복,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열리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 

 

이제 다섯 번째 복 부터는 구체적인 내 삶 가운데서 펼쳐지게 되는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모습. 

그 첫 번째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 당시의 사회에서 통용되던 긍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부모는 오직 건강한 자녀만을 키울 책임이 있다.  

세네카 - 건강하게 출생하지 못한 자는 신의 저주를 받은 자요, 또한 저주받은 삶을 산다. 

 

사랑받고, 대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고, 자격 없는 자가 있다. 

어떻게 저러한 철학자가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당시만 그런가? 그들의 말은 지금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가? 

 

지굼도 여전히 세상은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베풉니다. 은혜도 그렇고 상도 그렇고 축하도 그렇다. 상을 받을만한 사람, 축하를 받을 만한 사람, 은혜도 받을만한 수고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사랑도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베풀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기면 분노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속상해한다. 

 

2. 이와 반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긍휼은 무엇인가? 

 

먼저 구약에서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집약한 단어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인애 - 헤세드 - 하나님의 성품 -사랑, 긍휼, 자비로 표현

그 하나님이 예배보다 백성들에게 더욱 원하신 것 - 바로 헤세드 - 인애, 자비, 긍휼, 사랑 

하나님의 무엇을 알기를 원하나? 바로 그 분의 헤세드. 그 분의 사랑, 긍휼 

 

긍휼-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집약한 단어 

 

[애 3:22-23]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그 긍휼은 무엇인가? 

 

  • 긍휼은 받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따스한 손을 내미는 것이 긍휼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것이 긍휼이다. 그저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베풀기만 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누구의 마음인가? 바로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는 자녀를 보면 돕고 싶다. 못하면 대신 해 주고 싶고 필요한 것 있으면 사주고 싶고, 말 안들어도, 때로 애 때문에 속을 태우고, 고생을 해도 자신의 몸이 부서져라 피곤해도 자녀에게 해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바로 긍휼이다. 

긍휼은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내 옆의 이웃에게, 내게 맡기우신 영혼에게 넓히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6-47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문안하는 것은 긍휼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죄인 취급을 하던 세리를 사랑하고, 짐승 취급을 하던 이방인을 문안하기 위해서는 긍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듯 긍휼은 자격을 묻지 않고,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도 베프는 사랑이다.  

 

  • 그래서 긍휼에는 조건도 없지만 대가도 없다.

 

대가를 바라고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있는가? 내가 널 키우는 데 얼마 들었으니까 너 크면 갚으라....

아니 다 주고 키워줘어도 죽을 때까지 더 남겨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글흉은 그 마음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다른 사람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에게 부모의 마음을 주신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은 마르지 않는다. 

 

사랑하여 죽고 못살던 연인들이 왜 헤어지나? 서로 바라는 것이 채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휼한 마음은 대가를 생각지 않는다. 아니 그 모든 대가를 주님이 이미 치루셨기에 감사함으로 행한다. 

 

  •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불쌍한 느낌의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긍휼과 짝이 되는 단어 - 성실 "지속되고 반복되는 행동" 

[롬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우리말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오’는 마음으로 느끼는 자비, 용서, 친철, 은혜의 구체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즉 마음과 행위가 동반된 것이 긍휼입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직접 병문안을 가거나 아니면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해 주고, 가슴이 답답한 일을 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서 들어준다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행동이 긍휼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언제나 마음과 행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설파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참된 긍휼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안 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율법사가 이같이 답했습니다. (누가복음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우리말 “자비”로 번역된 단어가 ‘엘레오스’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을 베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저에게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다윗입니다.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둘람 굴에서의 다윗.

[삼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에게 긍휼이 없었던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광야에서 그 400명을 거둘 수가 있었겠습니까? 압제 받은 자, 빚을 진 자, 원통한 자, 억울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한들, 어디 자랑거리나 되겠습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긍휼을 베풀었던 400명을, 하나님은 다윗의 용감한 군사로 만드셨고, 그 400명의 손으로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그 400명을 통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다윗의 거처를 광야의 동굴에서 이스라엘의 왕궁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랑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4. 어떻게 긍휼한 자가 될 수 있는가?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 닮을 수 있다. 

예수는 긍휼히 여기는 자의 모델이 되시고 원천이 되신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으셨겠습니까?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긍휼이 불붙듯 일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8: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여전히 불의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던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나 있었겠습니까? 주님이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이처럼 귀한 예배의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의 긍휼을 받으면서도 우리는 그 분의 긍휼하심을 닮지 못한다. 

주님은 긍휼을 넘어 우리의 아픔을 체휼하신다고까지 하셨다. 

체휼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험하시면서 함꼐 하신다는 것이다. 

 

5. 결론 

신앙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때 

기도 중에나, 찬송 중에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분이 내 마음을 아시고, 그 분이 내 마음을 위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심령으로 느낄 떄" 

 

그런데 여러분, 우린 언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아니 되보려고 애쓴 적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 사람들에게 주님은 "긍휼함을 얻은 너희여, 이제 너희도 나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라..." 

 

그런 자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 너흭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았는데? 

무슨 말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면서 비로소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긍휼히 여겼는지를 더 깊이, 더 진실하게 경험할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의 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반항하고 투정하는 자녀에게 부모가 하는 말 - 너도 애 낳아서 키워봐....

키워보면서....비로서 깨닫게 되는 그 깊은 사랑. 

 

저희 어머니가 목회하면서 여자 성도 한 분이 여자 목사라고, 어떻게 여자가 목사가 되냐고....그러러면 다른 교회를 가든가, 여전히 나와서 다 좋은데 여자 목사라서 이 교회는 안된다.....

 

끙끙 앓다가 하신 기도 " 하나님, 저 집사님, 주의 종 되게 해 주세요...주의 종의 마음을 알려면 주의 종 되야 하잖아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진정 깨달을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긍휼한 사랑을 하면서, 그 아픔을, 그 깊은 사랑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주님 닮고 실지 않으세요? 주님 마음 알고 싶지 않으세요?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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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6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 출애굽 백성들에게 임한 목마름과 은혜

출애굽기 15장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모세가 찬양하고 이어 미리암이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대략 이백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소망과 희망은 홍해를 건넌지 3일만에 무너져 내립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짤리 갈 수도, 그렇다고 홀로 뒤쳐질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고된 길을 걸어가는데 3일을 걸어도 도대체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애굽에서부터의 삶을 생각하며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고된 길을 계속 갔습니다.

다들 건들면 터질 상태였지만 그래도 꾹꾹 참고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소리칩니다.

"물이다"

사람들은 모두 참은 보람이 있다며 기뻐하며 물가로 달려갑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약한 자들을 앞세워 물가로 가는데 처음 물을 먹은 사람이 이내 물을 토해냅니다.

 

그 물은 이미 마실 수가 없는 썪은 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상태가 어땠을까?

목마름이란 이런 것입니다. 배고픔보다 더 큰 고통이 목마름의 고통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한 나무를 가리키고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이제 그 물이 달게 변합니다. 마실 물이 됩니다.

그 나무는 곧 무엇입니까? 바로 나무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사마리아 여인에게 임한 목마름과 그 은혜

신약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만남입니다.

고된 인생 속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며 아무도 오지 않는 뙤억볕 내리쬐는 정오에 오직 살기 위한 갈급함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가에 나온 여인에게 주님은

 

[요 4:1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초막절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7:37-38]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 주림과 은헤

출애굽기 15장이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라면 16장에는 떡에 대한 불평이 나옵니다.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의 이 부르짖음에 내리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만나입니다. 만나는 곧 생명의 떡 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의 배고픔의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든 무리들의 배고픔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축사하사 떡을 떼어 모인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고 오히려 그 남은 것을 열 두 광주리에 담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

 

4. 온유함과 목마름의 관계

지난주 우리는 온유함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온유함은 성격이 유순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길들여진 성품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길들여지자 않으면 야생마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질대로, 성질나는대로,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행합니다.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시지만, 또한 우리를 만지사, 변화시켜 주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길들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닮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가지신 겸손과 온유를 닮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는 우리가 예수님께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두 축입니다.

 

겸손은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알고 낮추는 것

높은 자가 억지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지신의 본질을 알기에 자신의 위치를 알기에 자신의 위치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셨지만 아들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순종하셨습니다.

 

온유는 우리가 나눈대로 내 모습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길들여질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율법이고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야생말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말씀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자가 축복을 받으면 그 축복은 남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는 멸망의 길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차차 익숙해지며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과 온유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교만해져서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남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는 것, 자신아 남들과 구별되는 것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입니다.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럼 우리가 읽은 팔복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구해야 할 의를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먼저 (시간상의 시제가 아니라 최고의 가치를 말함) : 최우선. 첫째 것, 장자. : 대표하고 대신하는 것
  • 더하시리라: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Add가 아니라 Complete (완성할 것이다. 온전케 할 것이다) 의 의미이다.

 

팔복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복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중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동행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주인된 나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구해야 할 것은 내가 인정받고 내가 높아지는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롬 3:20-2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내 연약함, 내 죄, 내 어리석음

-> 그 깨달은 자의 마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을 깨닫고 주님의 필요하심을 통렬히 깨달은 상태

 

하나님의 의 -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실 한 중보자. 그리스도, 메시야

 

우리가 구해야 할 의는 바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채우실 예수 그리스도

 

그 의로 충만할 적에만 우리는 겸손과 온유함을 간직한 의로움, 바로 예수의 의로움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로마서 1:17에서 이같이 외쳤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의 은혜에 감사하고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 내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구할 뿐입니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던 사울이, 자기 의를 멈추고, 자기 자랑을 멈추고 자기 교만을 멈추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사울은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는 털끝 만큼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기에, 자기 의를 멈춘 사람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대신 평생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복음이 있고 그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의는 먼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허물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이웃과 세상과도 바른 관계를 맺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동시에 이 땅에 도덕과 윤리를 바로 세우면서,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을 때 이웃도 세상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목사건 성도님들이건 처음엔 하나님의 역사를 자랑하다가 결국은 자기 자랑, 자기 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 주셔서 내가 얼마나 많이 바쳤는데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데요,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요…. 결국은 내가 무엇했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의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나타낼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는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중 한 장로님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 배부를 것이다.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완성시킬 것이다. 그가 만들어줄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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