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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Posted by 소리벼리

속히 내려오라


새해의 표어를 구하며 몇주일을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라는 말씀을 주셨다. 아니 그 말씀 밖에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구절을 가지고 표어를 만들려니 영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새해에 진취적이고 발전적으로 "올라가라!" 라는 말은 모를까 내려오라니.... 그것도 속히 내려오라니... 아무리 말을 붙이려 해도 새해 표어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이다. 며칠을 다른 말씀을 달라고도 기도해보고 마음 속으로 내년도 계획에 맞는 이런 저런 말씀들을 떠오리려 해도 막상 아무런 말씀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속히"라는 말에 생각이 꽂힌다. 


어릴적 담장 옆에 나무 위에 놀던 때가 있었다. 어른 들은 항상 올라가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나무 위에 올라가 놀곤 했다. 나무 위로 올라가 놀던 모습이 어른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 난 것처럼 달려와서 혼이 나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혼을 내려 달려와서도 나무 위에 있는 아이들에겐 항상 "천천히 내려와, 조심히 내려와"하시곤 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급해도 어느 누구도 "빨리 내려와, 말씀대로 속히 내려와"하는 어른은 없었다. 급하게 내려오다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나이는 많아도 키는 아이처럼 작은 삭개오에게 '천천히', '조심히'가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왜 그랬을까?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로 올라갔다. 자기의 작은 키를 탓하지 않고 그는 주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다. 올라감은 신을 향한 인간의 갈망이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올라가 본 자 만이 의로움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무엇인지 깨닫는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의로움을 향한 몸부림, 하나님을 향한 갈망, 자기의 연약함을 이기려는 싸움이다.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어쩌면 교회의 문제, 신앙의 문제는 올라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려오지 못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열심내는 사람들이 남들을 향해 나는 이정도 하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말하면 싸움이 된다. 

올라감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했듯이 내려오지 못하면 주님과 함께 거하지 못한다. 사람들과 함께 사랑할 수 없다. 


삭개오의 올라감과 내려옴 속에서 슬며시 영성의 오랜 두 갈래 길, 긍정의 신앙과 부정의 신앙을 떠올리게 된다. 상승의 신앙과 자기 부인의 신앙을 생각하게 한다. 


"아....!" 

 주님의 말씀엔 항상 깊음이 있다. 감사하며 한달간의 표어를 향한 씨름을 마칠 수 있었다. 

 

 "속히 내려오라!"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표어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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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올라감과 내려옴 (눅 19:1-10절)


배경 - 18장 

  • 1절: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 7절: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간절히 부르짖는 자) 
  • 9절: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바리새인) 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자 - 겸손은 자기 존재를 아는 자)  

바리새인 - 난 저들과 다릅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는 자,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 

세리 -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4)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15절: 어린아기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연약하고 부족한 자) 

  • 18절: 어떤 관리 (다른 복음서에서는 부자 청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0절: 계명을 지키는 자 (그런데 그 계명에서 1-5계명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계명을 들지 않고 6-10계명인 사람들 사이에서의 계명...

내가 다 지켰나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가 큰 부자이므로 심히 근심하더라. 

고린도 전서 13장 3절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없는 의는 외식이요, 교만함이요, 죄이다.

  •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구걸하는 맹인 거지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8장의 모든 비유에 해답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이다! 

1절- 여리고라는 장소적 배경 

2절 - 삭개오 (의로운 자), 세리장 (죄인 vs 18장에 나타난 겸손한 자) 부자(사랑이 없는 자, 천국과는 먼자) 

3절 - 키가 작은 자 - 어린아기와 같은 자 


죄인과 의인이 혼합되어 있는 자.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자,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그의 선택이 흥미 진진해진다. 

 

  • 여리고성 - 여호수아때, 철의 요새 

              - 가나안 입성의 관문, 홍해-광야-가나안의 여정에서 가나안의 관문

              - 구원을 넘어서 성화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가장 큰 장벽 - 철저히 숨겨지고 닫혀진 나의 자아의 성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장면 - 여호수아 6장   

              어떻게? 침묵과 순종  마지막 7일째 - 양각나팔불고 소리치며 - 예배하며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하지만 바알과 앗세라를 국교화시키려 했던 아합왕 때 여리고성 다시 지음...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우상숭배하게 되면 짓게 되는 성 - 여리고성, 굳게 닫힌 내 자아의 성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올라가 본 자 만이 의로움이 무엇인지, 율법이 무엇인지, 죄가 얼마나 무엇인지 깨닫는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한다. 구약이 없으면 신약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세례요한이 없으면 주의 사역이 시작하지 못한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

올라감의 신앙이란 의로움을 향한 몸부림, 하나님을 향한 갈망, 죄를 이기려는 싸움이다. 

호렙산에서 40일 40야를 금식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간이요, 동시에 광야에서 사탄을 맞닥뜨려 전쟁을 치루는 기간이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부르짖는 과부의 기도는 갈급함이고 열심있는 신앙이지만 부르짖는 것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 "남들은 왜 부르짖지 않지? 기도는 부르짖어야 하는 거야.."

거기에 자기 만족과 남들을 향한 판단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열심은 곧 교만함이 된다. 


부자 청년의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따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것이다. 칭찬받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평안이 없다. 자기를 채우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는 데는 자신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려오라는 말에는 근심한다.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고 주님과 함께 하지 할 때는 나서지 못한다. 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높이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거절을 당하고 자기를 낮추는 세리에게 주님은 이가 의롭다 했다. 의롭다고 인정받은 세리는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세리를 보며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신다.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여 하겠다는 것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요청과 같은 말씀이다. 

네 교만함에서 내려오면, 너를 채우고 높이고 돋보이게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에서 내려와서 나와 함께 거하자 

이 요청 안에는 부자청년에게 하신 네가 가진 소유를 다 나누어주고 나와 함께 하자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듣고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6절) 주님을 영접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가 빼앗은 자에게 돌려준다. 


신앙은 올라감과 내려옴의 신앙의 반복이다. 

올라가는 열심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한다. 무리를 헤쳐 그 분을 만져야 한다. 

나무에라도 올라가 그 분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열심이 나를 망가뜨리게 해선 안된다. 

그 열심이 어느덧 자기 만족이 되고 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자기를 높이는 수단이 되면 그 신앙은 이미 바라새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옴이 있어야 한다. 

아니 내려 올 때에 진정한 은혜를 발견한다. 의를 넘어선 십자가의 은혜, 자기 의가 아닌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구원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오신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도 남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아니 난 남들보다 더 큰 죄인임을 마음 중심으로 고백하고 주님께 가식적인 겸손함이 아닌 자기 존재 중심의 겸손함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