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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삶을 누린 모델을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기 좋아하셨습니다." 보시기 좋아하셨다는 말은 언제 봐도 또 보고 싶은,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한다는 것은 서로가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일이 있어도 '서로가 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만을 보고 마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알람을 울리고, 찾아다니시는 감시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가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낙원의 장소였지만 타락하기 이 전에도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다시 말하면 보고 싶어할 적에, 반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다가와 말걸고 인사하고 교제하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교제란 부르심이 있고 응답이 있는 교제 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부르심(콜링- 소명)" 이 있고 "응답- 순종, 헌신"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마치 집 안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함께 살지만 동시에 서로의 공간이 있고 활동이 있고, 그렇지만 언제든지 보고 싶거나 할 이야기가 있으면 부르고 찾고, 응답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공간들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통해 동산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며 동산의 모든 실과들을 맛보며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바로되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에 모자라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뱀이 인간을 유혹해서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되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커다란 억압이고 불행인양 우리의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게 합니다.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니까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냐면 나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내가 벗었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부족하다. 내가 부끄럽다는 의식입니다.

 

  • 내가 벗었다 - 나의 열등감 Vs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 나는 그 분 안에서 충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입히고, 꾸미고, 가리고, 먹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벨탑을 만들고, 나 자신을 위해 여리고성을 쌓고 나 자신을 위해 성전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자신을 정말 위한 것인가? 결국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기준이 없고 절제가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이죠.

 

사사기-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가질 것 다 있어도 왕이 없는 삶, 기준이 없는 삶, 집안에 어른이 없고, 내 안에 주님이 없는 삶은 혼돈과 공허로 표현된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마치 붕어에게 먹이를 주면 붕어는 주는 대로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붕어 밥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주다 보면 붕어는 죽을 때까지 먹다 죽습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인간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채우다 보면 시간의 차만 다를 뿐이지 계속 자기를 채우다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채우다 채우다 죽는 것입니다.

 

  • 또한 죄의 결과로서 온 것은 하나님이 부를 때에 숨는 것입니다. 그가 찾아도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콜링은 있는데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 분의 콜링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 그 분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담아 어디있는냐?"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응답이 없는 인간을 행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멈추질 않습니다.

 

[창 3:8-11]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담이 범죄함을 알고서도, 아담을 찾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합니다. 대답하지 않습니다. 몇번을 부르시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는 것....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이 소리는 분명 꾸짖는 소리, 자기의 죄를 지적하시는 노하신 아버지의 분노로 들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탄식으로 풀이합니다.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답던 사람의 마음 속에 죄라는 커다란 상처가, 부패가 생겨서 더 이상 이들이 하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제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숨을 수 밖에 없게되는 인간의 타락을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서 여겨졌던 것은 질병, 특히 문등병. 그리고 부정한 자, 창기와 신약시대의 세리와 같은... 부정한 민족, 사마리아인들과 같은...(섞인 민족)

그런 자들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여겼기 때문에 아얘 쳐다보지도 않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이런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죄 지은 자를 정죄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창조한 그들이 그토록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통한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하여 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많은 설교가들은 이 제목을 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서기관들과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작은 아들을 이들과 다른 평범한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자기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 분깃 - 내 부분, 내 몫

아버지가 주신 것 - 그 "살림"을 각각 주었더니...

살림 - 헬라어 "비오스" 생명, 인생

 

창 2-3장 : 에덴동산에 거할 때에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 피의 제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만나시는 것.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의 생명을 주어 그를 보낸다.

 

"구약의 시각"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 죽는다. 저주 받는다.

신약의 시각 - 하나님이 벌을 주셔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떠나면 저주가 임한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도래한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하지요.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아버지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분깃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고 나만 보았던 탕자가 자기를 보고 회개하니까 비로소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

신을 신기라- 참 자유

를 주시는 분.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내 아버지 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지난 시간에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더니 어떤 분이 그럼 작은 아들은 뭐냐, 왜 큰 아들만 챙기냐 해서 오늘은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 탕자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 병자들, 문등병자들, 세리들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이라 정죄당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말했지만, 그건 너무 좁은 해석이고 그 탕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났던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가 많지요. 뱀의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되리라! 순종하지 말고 네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라!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탕자인 셈입니다. 

 

둘째 아들은 뱀의 유혹에 빠진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러분, 아버지 집을 떠나려고 하는 자에게 도대체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내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하는 아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언제 분깃을 요구합니까? 야곱이 라반과 갈라 설 때에 분깃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가 평생 남편 뒷바라지 하고 살림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갈라설 때에 분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분깃은 갈라섬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랑 안살테니 내 몫을 달라는 것입니다. 

근데 자녀가 이제 아버지를 떠날테니 내 몫을 주세요!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랑 함께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불효인데 자기 몫을 달라고 합니다. 

아니 떠나는 자녀 키워주고 먹여주고 교육 시키고 다 한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오히려 자기 분깃이라니요? 

이것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지요.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 자체를 속는 것으로, 마치 착취당하는 것으로, 억눌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가 원한 대로 분깃을 주어 그를 보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쫓아냈다고 표현하고 탕자의 비유에서는 스스로 나가기를 원한 것인데 이것은 결국 똑같은 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죠. 

이스라엘을 끝까지 출애굽하지 못하도록 막은 애굽의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걍퍅케 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악한 생각을 넣어주시는 분입니까? 

아니요,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악한 마음을 가질 때에 그것을 내어버려두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자유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때문인지,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더 넓은 심정인지 모르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려고 마음 먹었을 때에 아버지는 그 마음을 바로 치지 않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 반대로 행할 때에도 그것을 붙잡지 않습니다. 내버려 두십니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자유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자유는 방탕함이 아닙니다. 자유는 과정도 좋아야 하지만 결과도 좋아야 합니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유익한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방탕은, 방종은 결과가 참담합니다. 

뒷감당하지 못하는 자유는 방탕입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에 따라 자유와 방탕함이 나뉩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것이라고 믿어왔지만 그야말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버지께로 부터 받은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한 이 아들은 그야말로 그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합니다.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보호하시고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면 자연이 우리를 대적하고, 만물이 우리를 대적하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떠나면 그의 힘, 그의 보호, 그의 영향력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야말로, 육적, 심적, 영적 궁핍이 찾아옵니다. 

흉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다 떨어진 상태가 바로 흉년인 것이지요. 

나가서도 아들이 산 것은 무엇으로 산 것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산 것입니다. 

아버지의 것으로 세상에 나가서 살다가 그것이 떨어지니까 흉년이 들고 흉년이 드니까 궁핍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것이 떨어지니 어떻게 삽니까? 

아버지만 없으면 독립해서 나도 떵떵거리며 더 재미있게, 자유하게, 더 풍족하게 살 것으로 알았는데 아버지의 것으로 살아가다가 그것이 떨어지니 이젠 살 길이 없습니다. 이젠 아버지 아닌 남에게 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나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기대 사는 존재입니다. 결코 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에 기대어 사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대어서 사는가? 세상에 기대어 사는가? 

나는 나만 믿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만 믿고 사는 사람들도 점집 찾아가고 굿하고 난리를 칩니다. 

사람에게 붙어사는 인생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왜 초라합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겉잡을 수 없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해서 나를 사랑하는데 세상은 내가 죽어라 희생해야 하고 희생해도 그 댓가를 종잡을 수 없습니다. 

  

아들은 사람에게 붙어살다가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본능으로 가득찬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떠난 자의 현 모습입니다. 

하나님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살던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속 사정을 보면 하나님의 기준을 떠난 자들의 삶은 결국은 허랑방탕하다 정욕과 본능만 가득찬 돼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전 베테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보시면 재벌2세라고 하는 자들의 삶이 나옵니다. 

다 가진 것 같지만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고 그야말로 혼돈 속의 삶입니다. 

마약과 술, 여자와 힘...


여러분, 금요일날 데모데전서를 통해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나누면서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아내의 남편이 될 것이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

그런데 우리나라 20대 기업 중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 여러분, 다섯명도 안됩니다. 

다 첩들이고, 몇 번씩 결혼한 사람들이지요. 

가지지 못하고 못배운 사람이 그렇게 살면 손가락질 받을 것이지만 그들은 돈과 권력으로 그 손가락질을 피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을 보면 얼마나 황폐한 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집사의 자격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입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집 안에 있을 때의 모습을 되돌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 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 회개하면 천국이 보인다"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보이는 것이 아버지 집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그렇게 떠나고 싶고 독립하고 싶었던 아버지가 깨닫고 보니, 돌이켜 보니, 회개하고 보니 이젠 아버지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어릴적부터 창세기를 설교하심나누면서 항상 했던 간증. 

LG 카셋트가 고장나면 어디가냐? 삼성제품이 고장나면 어딜가나? 

그렇다면 네가 고장나면 어딜가야겠냐? 날 만드신 분, 날 가장 잘 아는 분, 바로 아버지께로....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로 가득차자 아들은 생각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일어납니다. 행동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끝입니다. 

회개는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똑같이 후회했지만 베드로는 행동으로 주님 앞에 나왔고 유다는 후회하고 죽었습니다. 

왜 우리 삶에 능력이 없는가? 

회개했다고 하지만 후회하고 주저앉기 때문입니다. 

후회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돌이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니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입니다. 

떠날 때는 어땠습니까? 자기 분깃을 요구합니다. 자기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아버지가 당연히 주어야 된다고 자기 의, 자기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교만함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자기 의는 하나도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회개한 자는 그래서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죄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히듯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우리의 죄는 가리우고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고, 내 안에 머물면, 나의 안에 거하면...하면서 다시 언약을 맺으십니다. 

신을 신기라-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제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고 다니고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누가복음 15장 25-32절 - 아버지와 큰 아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의 시작은 11절의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표현에서 시작합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특별히 그중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큰 아들은 유대인들 중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혹 제사장들을 표현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인물들은 굉장히 입체적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쉽사리 결론 내릴 수가 없다. 한 번 정리했다고 끝나는 내용이 아닙니다. 

집나간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마치 금의환향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은 오히려 기뻐하지 못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반대의 상황에 처합니다. 

처음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탕자에 맞추어져 있는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관심이 큰 아들에게로 옮겨집니다.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여러 모습을 큰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형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 봅시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1. 그는 성실한 자입니다.   

- 25절에 보면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로 시작합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자였습니다. 둘째가 나가서 허랑 방탕할 때에도 묵묵히 밭에 나가 일을 한 것 입니다. 아버지는 부자입니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습니다. 동생이 유산을 달라하여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습니다. 형도 마음이 흔들릴 수 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입니다.  

29절 -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동생은 아버지가 명령에 순종하기는 커녕 그 말을 듣기 싫어 집을 나간 사람입니다. 형은 그 말씀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순종하던 자였습니다. 싫은 내색 하나 한적 없어 보입니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습니다. 일만 열심히 한 자였습니다. 

 

그는 칭찬받을 만한 자입니다.  동생이 떠나도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놀고 먹어도 되지만 밭에 나가 일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큰 아들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성실하며 책임감도 있고 아버지를 잘 보필합니다.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합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뜻하지 않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 그 위기의 시작은 "풍악과 춤 추는 소리"를 듣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즐겁게 놀고 잔치하는 소리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참고 견디고 일하는데는 익숙한데 자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행하신 기적이 어디서, 어떤 기적을 행하신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오신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사건입니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잔치를 열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네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지니..."(창 2 16-17) 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 제대로 못해서 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실수 없이 바로 서 있어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풍성이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제가 늘 강조하는 신앙 생활의 목표, 영성의 목표는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바로 아버지의 입으로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었다”라고 인정합니다. 

형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려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그는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말씀에 종처럼 순종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주인처럼 섬겼습니다. 

어찌보면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그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즐거워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을 주인 삼아 살아가고 있는데 그의 말과 행동, 그의 삶을 보면 고달파 보입니다. 억눌려 보입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 있는 거 아닙니까? 잘못 된 거 아닙니까? 아버지와 함께 하면, 그 분을 주인으로 삼으면 천국의 기쁨이 늘 함께 해야 하는데 큰 아들에게 보이는 것은 시기와 분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관심은 언제나 현제가 아니라 아직 받지 못한 보상, 자기가 받아야 할 유산, 신앙적으로 보면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상급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 나라가 오면 오른 자리, 왼자리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그의 삶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노역이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읽다가 새롭게 다가온 단어가 있습니다 

그가 집 앞에 서서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을 적에 종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여기서 눈에 확 띤 단어가 "건강한"입니다. 

앞의 상황을 보면 돌아온 탕자가 과연 건강하게 돌아왔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그는 궁핍했고 여러날 동안 주렸습니다. 그리고 먼길을 왔습니다. 

그런데 종의 보고는 그가 건강히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맞아 들였다고 가르쳐 줍니다. 종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제 당신의 경쟁자가 왔습니다. 이제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재산을 물려 받으려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맏아들에게 있어 탕자의 귀환은 경쟁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 전 서로 으르렁 대면서 늘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듯이 맏아들에게 탕자는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한 경쟁자입니다. 

가인이 경쟁을 통해 아벨을 죽이고, 

야곱이 경쟁을 통해 장자권을 빼앗아 먼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고, 

사울이 경쟁을 통해 다윗을 시기했듯이 

비교하고 경쟁함을 통해서 맏아들의 삶은 전혀 사랑없고, 은혜 없고, 오직 상급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식이면서도 철저히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둘째 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와 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의 밭에서 일하고 나온 큰 아들은 집안으로조차 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노한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권합니다. 그를 설득합니다. 잔치에 들어가자. 잃은 영혼 찾은 것을 기뻐하자. 


한번도 아버지의 명을 거한적이 없다는 그가 아버지의 설득에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맞섭니다. 

29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돌아온 동생을 위해 연 잔치라는 말을 듣고 큰아들은 아버지의 지나친 사랑에 분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서 설득하는 아버지마저 거절합니다. 도리어 아버지를 자신에게 고된 일만 시키는 인색하고 고약한 고용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동생보다 재산을,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자기만족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여 참 아들로 회복되었지만, 큰아들은 자기 욕심을 숨기지 못해 아버지의 사랑을 조롱하는 죄인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집 안에 있던 탕자였습니다. 혹시 나도 몸만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탕자는 아닙니까?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닙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은 무엇입니까? 그가 일을 하던 안 하던 아버지 안에 있으면 아들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스스로를 일한 것으로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품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일한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구원받을 영혼이 하나라도 있을 것입니까? 

 

들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작정하면서 먹었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21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19절)” 하고 아버지께로 오지요. 그런 마음으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지체치 않고 그를 아들로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큰 아들은 아들의 위치를 벗어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품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일한만큼 대우받으려고, 매일 아버지의 대우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기 의만 앞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마음과 큰 아들의 마음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그냥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은혜를 베풉니다. 내 것이 다 네것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또한 아낌없이 주었고 줄 것입니다. 큰 아들이 달라고 하면 또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모든 재산을 다 주고라도 지키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이 그의 것을 언제 받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어떤 것, 하나님의 부유,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권세... 

큰 아들은 다 써버리고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염소새끼를 잡은 아버지의 마음에 분노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것으로 되어 있는 한 한 번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누리지 못한다. 자기 것으로, 자기만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채워주신다고, 구하면 주신다고, 다 먹이고 입힐 것이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통장을 가지고, 집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누질 못하고 베풀지 못하고 항상 채우려고만, 가질려고만 하는 것이다. 은혜 없이 욕심만 남은 것이다. 


이 사건의 결말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큰 아들이 계속 큰 아들로서 남아 있을 지, 아니면 거꾸로 탕자가 되어 집을 나갔을 지...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몰라주는 큰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로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장자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장자로 삼은 것은 그들을 통해 탕자의 나라들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그들은 선민의식, 장자의식은 있었지만 그 소명, 장자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고 아는 일에는 여전히 무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는 장자권을 중시하는 나라였지만 구원의 통로는 끊임없이 장자권에서 멀어집니다. 

참 예배의 모델이 가인이 아닌 아벨에게서, 이스라엘의 시작이 에서가 아닌 야곱에서부터, 참 왕의 모습은 심지어 막내동이 다윗에게로 이어집니다. 

장자가 장자의 모습을 잃어버릴 때에 하나님은 그 장자권, 큰아들의 자리를 내어놓게 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교회의 중심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로 인해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면서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에도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 이른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서 멸시했고 무시했고 차등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가 되어서는 유대인들은 교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2천년간 세계 역사 속에서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큰아들이 역할을 못하면 그저 빼앗기느냐? 

하나님의 마음은 아무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 헤메여도 한결같이 애타게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자가 회복되어 그가 예비하신 풍성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시면 흩어진 유대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도록 그들이 회복하기를, 돌아오기를,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를, 은혜 안에 거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2016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깊은 물의 은혜, 소낙비의 은혜,  기쁨의 잔치...


교회 안에서도 목사의 심정은 믿음의 첫세대, 힘들 때에 교회를 지키고 애쓰고 땀흘렸던 장자와도 같은 성도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자와도 같은 자들이 자기 의, 자기 공로 앞세우다 교회 안의 탕자처럼 되어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슴 칠 노릇이고 속이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스스로 품꾼이 되어버린 큰아들이 아닌, 품꾼이 아닌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리며 잔치의 주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