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창 13:15-16절) 

 

저는 쥐를 좀 무서워합니다. 쥐를 생각만 해도 좀 소름이 돋고 몸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 같고 기분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글을 읽고 이 생각이 좀 바뀌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이제 갓 스물이 넘은 한 청년이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마다 자신의 그림을 보내보았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납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계속되는 거절에 돈도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어떤 글에는 하숙집이라고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교회 창고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여하튼간 가난한 만화가였던 그가 사는 방에는 는 조그만 생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도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었지만 조그만 생쥐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먹이도 주고, 하다보니 생쥐도 이 청년을 보고 도망하지도 않고 함께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 생쥐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신의 삶에 위로를 받고, 친근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생쥐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누구이야기인 줄 아시겠습니까? 바로 월트 디지니가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야기입니다. 

 

누구나가 소름 끼쳐 하는 그런 생쥐를 보면서 그에게 오히려 친근하고 명랑한 미키마우스를 발견하고, 그 캐릭터 하나로 월트 디지니는 승승장구하며 만화 뿐만 아니라 에니메이션, 영화, 놀이동산 등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그 중심에 미키 마우스가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톰과 제리, 조금 지나 스파이더맨..... 다 남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끄집어낸 누군가의 눈으로 말미암아 대 전환을 맞이한 캐릭터들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비전(Vision)이라 한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밖을 보고 내 안을 보는 것이다. 

 

비전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깨달으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호 4:14]......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침받을까 두렵고 변화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대개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대로 본다.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때가 더 많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선입견이 들어가고 편견이 들어가서 볼 때가 훨씬 더 많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사람을 거인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가나안 사람을 "우리의 밥"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눈으로 보니 거인 같은 자들이 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이 골리앗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인으로 보았지만 다윗에 눈에는 고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한당으로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신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신앙은 하나님이 보라 하신 것을 보는 것이고, 보라 하신 곳을 종과 횡으로 두루 거닐며 받는 것이다. 

 

망상은 근거 없이 바라는 것이다. 막연히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라는 것을 거니는 것이다. 

 

  • 어떻게 비전을 얻게 되는가? 언제, 어디에서 비전을 받는가?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가? 그가 부르실 때 멈추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1. 말씀 

말씀을 펴야 보인다.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곳을 떠날 적에 보인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서 참 것을 보게 된다. 참 나를 보게 되고 참 세상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요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거듭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예수를 영접한 자이다. 회개하여 자신을 씻고 십자가의 보혈로서 자신을 깨끗이 한 자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곧 거듭난 자다. 

 

한 자로 보다의 의미는 "관"자를 쓴다. 

보는 것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진다. 비전이 있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이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킨다. 

 

정탐하라 (explorer)”는 것은 바라보라는 것이고 바라본 것을 두루 다니라는 것이다.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열 명의 사람들은 오로지 가나안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디를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찾는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 - 기도 

세상에 눈을 감는 자, 기도하는 자가 비전을 갖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눈 대신 하나님 주신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것을 보고, 참 것을 보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갈매기 조나단은 높이 날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짓을 한다. 

왜 높이 날기 원하는가? 멀리 보기 위해서.....

 

신앙인이 높이 날 수 있는 길은 기도하는 때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높이 날고 멀리 보게 된다. 

장대 높이뛰기 하는 선수보다 더 높이 나는 사람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앙인이다. 

 

헬렌켈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였지만 그의 전기에서 그녀는 말한다. 

"시력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비전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여주신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기도한다. 

소경 바디메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3. 본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험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중하고, 그 뜻을 알았을 때는 신속하라. -> 우리는 반대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는 조급하고, 뜻을 안 뒤에 행동할 떄는 망설이고 지나치게 신중하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을 때- 행동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 본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보여 주셨는데도 여전히 기도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다. 

보여 주셨을 때는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을 때에 망설이지 않는다. 어디인지, 거기 가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다. 

바치라니까 망설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친다. 

비전이 있는 자는 움직이는 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버렸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너머의 구원을 보았기에 과감히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전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물리치고 싸우며 나아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인생을 건 결단이고 모험이다. 

 

모험하는 자는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창조한다. 사막에 길을 내고 황무지를 장미꽃길 같이 가꾼다. 

쥐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고,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만든다. 

 

인생은 항해다. 배는 정박되어 있을 때에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항해할 때에야 비로서 배의 역할을 한다. 

나그네 길은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순례자의 길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앙인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4. 하나님이 비전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 

하나님을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듬어가시기 위해서 일을 주신다. 

->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나를 온전히 희생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만드러져 갈 때이다.

나의 온전한 변화가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는 이유는 비전을 통해 일을 완수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통해 우리를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비전하면 가장 첫 번째로 손꼽는 인물 - 요셉, 꿈의 사람

 

그런데 성경에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꿈의 완성이 아니라 요셉이라는 사람의 완성이다. 

언젠가 다루겠지만 요셉에게 임한 세 번의 꿈 

1) 어릴 적 - 부모와 형제 앞에서 해와 달과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곡식 열한 단이 내게 절하더이다. 

꿈의 내용은 알았지만 전혀 해석할 줄을 몰랐다. 자기의 꿈의 내용을 알았다면 감히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천진무구하게 그 꿈을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2) 감옥 속 - 술 관원, 빵 굽는 관원 - 꿈을 해석할 줄 알았지만 그 꿈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몰랐다. 그래서 꿈 해석 뒤에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3) 바로의 꿈 해석 - 꿈을 정확히 해석 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정확히 안다. 결국 그 나라의 리더가 된다. 

 

세상에서는 업적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를 세워가시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가꾼다. 

인기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격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사울은 인기 때문에 인격을 잃어버렸지만 다윗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인격을 가꾼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열고 

비전을 보기 이해서 기도하고

기도한 바를 갈망하며 바라며 움직이는 자는 결국 자기를 변화시키는 자이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라는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먼저 인도하신다. 

왜? 그들을 다듬어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비전을 품는 자는 광야를 살고, 고난을 이기고 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제 한 주 뒤면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리는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지난 간 몇 개월을 생각해보면 각자의 처소에서 힘들어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꿈을 부어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꿈을 나누며 천천히 움직이려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우리는 발 맞추어 달려왔다. 

이제 창립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솔직히 기대하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이 함께 든다. 

사람이 너무 안 모여도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나 걱정이 몰려 올 테지만, 목사로서 오히려 그럴때에는 함께 한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독이며 때를 준비시키면 된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할 때에 우리의 흠이 커 보이고, 빈틈이 벌어지고, 준비되지 못한 일들이 발생될 때, 둑이 무너지듯 허점이 크게 드러날 까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제가 개척 초기에 말씀드린 "한 성도를 교회로 만들어 가는 교회 공동체"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목적에 들어있는 뜻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교회보다 우선인 초점이 신자를, 성도를 온전한 하나님의 제자, 어느 곳에 가든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교회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그 말 속에는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추상적인 건물에 내 존재를 모두 바치며 헌신하는 목회가 아니라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공동체의 작은 교회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자의 인격, 각자의 가정,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로서 만들어가지지 않으면 사탄은 연약한 지점을 공격하듯 나의 생각과 감정을 통해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른 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리 개척 멤버인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루 하루 자신을 잘 점검하여 무너지지 않은 각자의 교회를 잘 지키며,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나누고 중보하되, 서로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사랑하고, 새신자가 오건, 상처입은 심령이 오건, 한 영혼 한 영혼을 잘 보살피며, 또 다른 제자로 삼아갈 수 있는 작은 트레이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드린다. 

 

비전, 내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민수기 14장 7-9절)

 

1. 되돌아보기

지난 시간, 마가복음 4장 18-22절 말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을 가지고 비전을 소명과 사명과 연관시켜 살펴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애써 보아야 하나님의 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에바다"하듯이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래서 비전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 마음이 곧 소명이다.

소명은 Calling, 곧 하나님이 나를 특별한 목적을 향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셨음을 깨닫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르신 자에게 주신 것이 사명, 곧 부르심에 대한 특별한 임무, 소명에 대한 책임감이다.

소명은 나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나의 임무를 아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소명은 거룩에의 초대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 비전을 갖기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먼저 거룩이다. 뜻을 정하여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거룩한 자에게 주시는 것이 사랑할 수 있는 비전을 주시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참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2. 도입 - 비전,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보는 것.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

오늘은 그 중에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눈을 갖게 하시길 원하시는가? 나에 대한 비전을 갖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민수기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내가 비전을 가진 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본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볼 적에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죄와 벌>을 쓴 도스도에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대로 본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채 살아간다.

 

3. 하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사명을 주어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출 4:10, 13) 라고 말했다.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라"라고 부르셨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

[렘 1:5-6]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동시대를 살았던 이사야를 선지자로 불렀을 때, 이사야는 더 나아가 "화도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사 6:5)라고 말했다.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라고 말했다.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불렀을 때, 기드온은 미디안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겁쟁이였다.

 

4.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 - 열등감과 교만함, 자기비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지 못한다.

대부분 참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하나님 주신 나의 고유함을 바라보는 대신에 남을 통해 자신을 보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함을 통해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함은 결국 하나이다.

남과 비교해서 우쭐한 것이 교만이고 남과 비교해서 움츠려 드는 마음이 열등감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만함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판단하고,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끝이 없고, 쉼이 없고, 결국 남을 무너뜨리려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열등감과 교만함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의미로 우리의 비전을 가로 막는 것은 '자기 비하', 혹은 '자기 학대'이다.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 안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이 잘못된 자기 사랑의 표시라면 자기 비하는 전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표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전을 포기한 인생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다른 사람을 본다. 자신의 영혼의 창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내 안에 있는 세상을 통해 모든 것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모든 관계 형성의 열쇠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도 끊임없이 나 자신과 비교한다.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난 것이 있으면 내가 겸손해져서 다가가고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면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대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보다 잘 나 보이면 나 자신의 교만함을 위해 상대하지 않고

나보다 못나 보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무심한 것 같으나 혐오하거나 아얘 상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과 자녀의 인격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자기 비하의 전형 적인 예

"이런 못된 놈의 자식" "00놈의 자식"

자기의 자녀에게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결국 자기가 못된 부모, 00이라는 존재라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5. 자기 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 - 언어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가 비전의 사람인지,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작년 말에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육신에 있어서 혀, 말의 역할 - 배의 키, 말의 재갈-> 결국 인생의 목적, 방향이 말에 달려 있다는 것.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그 방향으로, 목적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시면서 행하신 것 -

-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킨 것

- 홍해를 갈라 백성을 건너가게 하시고 애굽 병사들을 물리치신 것

-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

- 만나를 내리신 것

-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

- 공중의 매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신 것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갖가지 기적의 선물 세트를 다 보여 주신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 대표 각 1명씩을 뽑아 정탐하러 보낸다.

정탐한다는 것은 보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라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의 안목이 드러난다. 누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지, 누가 열등감과 자기비하로 자신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는지....

 

먼저 정탐한 자들이 본 내용 (객관적 사실)

[민 13:27-28]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 사실을 가지고 열 명의 정탐꾼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사실의 해석)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부정적 언어)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비교에 의한 열등감)

악평하여 이르되 (잘못된 판단)

거주민을 삼키는 땅 (거주민이 누군가? 가나안 민족, 아낙 자손- 그들이 땅에 삼켜졌는가?) - 사실 왜곡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 자기 비하.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 - 막연한 추측에 의한 잘못된 판단.

-> 라합을 비롯한 가나안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 떨었더라.

 

실재 가나안 사람들의 히브리인들에 대한 반응.

[수 2:9-11]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을 통해 보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본 것은 라합과 가나안 사람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만을 보았다.

 

비전은 무엇?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는 것.

 

그들은 왜 자신들을 그렇게 보았는가?

하나님 이전에 애굽에 있을 때의 자신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노예생활 하던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우리가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세계는 애굽의 세상. 노예로서 항상 부러워하고 눌려하던 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 불신앙은 불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멸시 : These people treat me with contempt

contempt: 무시하다. 모욕하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어디서? 애굽에서...

그들이 당한대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이다.

 

6.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민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심히 아름다운 땅 Vs 거주민을 삼키는 땅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면 (경멸하지 않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무시하지 않고) 인도하고, 들이시고, 주신다.

Guide, Get a ticket in the Entrance, and give them to the land.

거역하지 말라. - 인정하라. 받아들이라. 맞이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왜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지 않고 귀족이었나? 모세처럼 왕족이었나?

아니다. 똑같이 노예였다.

더군다나 갈렙의 족보를 살펴보면

[민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그나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로서 에돔족속의 조상이다.

 

새벽예배시간에 에스더서 - 하만 - 아말렉 족속 아각의 후예,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후예

그런데 그 똑같은 에서의 후예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사람

 

갈렙의 족보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대상 2:18-20]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낳은 아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로 말미암아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그는 아수바와 여리옷, 그리고 마지막에 에브랏이라는 아내를 맞게 되는데 한 성서학자에 의하면 아수바와 여리옷은 애굽에 있을 때에 얻은 처요, 에브랏은 출애굽 당시의 아내

그에게서 나은 아들이 훌, 그 훌의 손자가 브살렐

훌은 누구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준 사람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는 훌을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소개.

 

그리고 그의 손자 브살렐 - 오홀리압과 더불어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총 책임자.

 

[출 31:2-5]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에돔의 후예였던 갈렙의 자손이 어떤 지파에 속하게 되는가? 유다지파....

다윗과 예수님의 지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열악한 배경과 환경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다. 그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나중에 가장 고령이면서도 기개있게 아무도 가지 않은 땅, 헤브론 땅을 취하면서, 비전의 사람이 된다.

 

7. 결론 여러분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치유받은 세상, 하나님이 충만한 세상을 지니고 그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신앙 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세상, 부모와 타인으로부터 욕먹던 나, 멸시받던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천국의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삶의 다인것 같은 세상의 풍조와 문화와 가치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젠 그 세상을 떠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거저주신 그 땅 안의 사람,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비전은 결국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회복된 나로 세상을 바라볼 때, 꿈이 열리고, 열매가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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