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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1.11.27 첫 번째 감사절 (살전 2:13절)
  2. 2020.10.24 감사의 이유 (살전 2장 13절)
  3. 2018.12.01 예수를 쫓아버린 사람들 (1)
  4. 2014.11.27 사랑이라는 이름의 잔치

 첫 번째 감사절  (살전 2:13절)

 

(살전 2: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서, 스위스에선 칼빈에 의해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신앙의 순수성을 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에, 영국에서는 신앙의 순수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불편한 형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534년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하기 위하여 여왕인 캐더린과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를 열어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형식은 그대로 가톨릭을 따르나 가톨릭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른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나 형식이 신앙의 회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순수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청교도운동이라 부르는 신앙의 회복 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조에 따라 가톨릭이냐, 성공회를 교체하던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는 가톨릭 왕조로부터도, 국교회 왕조로부터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에 오직 신앙생활의 자유를 위해 승무원 6명과 남자 72명, 여자 29명, 100여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1620년 메이플라오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 미국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이런 긴 항해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100여명의 사람들이 긴 뱃여행을 시작해서 65일만에 11월 9일 미국의 동부 메사추세츠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뱃속에서도 뱃멀미니 건강악화로 시달리다가 꿈에 그리던 땅에 도착했더니 그곳 사정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곧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해 겨울을 지나는데 죽은 숫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어찌 눈물바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땅을 경작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가을 그들은 풍성한 수학을 거두며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50-60여명 남은 청교도들은 한해를 돌아보며 먼저 죽어간 이들을 기리고, 또한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했습니다. 90여명의 많은 인디언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초대는 했는데 자기들보다 많은 90여명이 초대되어 오자 당황이 되었지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급하게 들새라도 잡으러 나갔는데 다행히 들판에 있는 많은 칠면조를 잡아 그들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첫번째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인생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걸어 나아가는 행로에서 자그마한 구렁텅이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자기의 걸어가는 행로가 비록 캄캄하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작은 빛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사의 태도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인류의 역사도 바뀝니다. 100명이 탈출하여 50여명만이 살아남은 극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들 청교도의 신앙은 지금의 미국의 개척정신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미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고향을 떠나고 생명을 걸고 어떠한 희생도 무릎쓰고 얻고자 한 것일까요? 다 잘살기 위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그들의 도전과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던 수많은 희생들, 그리고 이 신앙을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서바쳐야 했던 수많은 생명들은 거꾸로 믿음이 생명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라는 구절이 있고 이 구절로 된 찬양도 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되었는데, 교회사를 보면 정말 믿음을 위해 생명을 버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신앙의 지형도에서 보면 한국은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된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신앙은 바울의 시대에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확대됩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청교도들의 이주로 이제 아메리카 대륙이 신앙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 그 중에서도 그들과 인접하지 않은 동북, 동남아는 오히려 지구를 돌아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가려 선교사들의 눈에도 가리워진 나라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을 전도하려고 지나가다가는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된 19세기 말에 우리나라는 고종황제가 이른바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 문물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의 입국 자체가  차단되었고 몰래 들어와서 선교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멀리 영국에서, 미국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던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긴 뱃여행으로 땅에 내리지도 못하고 죽은 경우도 허다했으며 땅에 내려서도 낯선 환경과 문화로 미국땅에서 첫해 절반가까이 죽었던 것처럼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차라리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온 첫 세데 선교사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 나라에 와서 어린 자녀가, 아내가, 그리고 선교사 본인이 수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러한 희생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지 10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 미국을 낳았고 영국을 바꾸었듯이, 뚫릴 것 같지 않던 한국의 신앙의 문이 열리자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서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감옥의 옥문이 열려 빠져나와 도망치듯 도달한 곳이 데살로니가 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해서 적지 않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곧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그들을 위협하고 또 쫓아냅니다. 

그 며칠 사이의 소란 중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3주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2-3개월 가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곧 바울과 실라는 또 쫓기어 떠나고 교회만 덩그러니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냥 도망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 감사하냐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라, 찬양해라. 감사해라 

 

우리의 삶- 

그 사람이 좋아지면, 내 감정이 동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좋은 일이 생겨야 찬양하는 것이지.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한 것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사랑해라. 하나님의 말씀이니가 감정이 동하지 않아도 사랑해라. 

어려운 중에도 찬양해라. 

고난 중에도 감사해라. 절망 중에도 감사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 

그런데 감정이 앞서는 우리의 사랑, 우리의 찬양,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가? 정말 진실하고 정직한 감정일까? 

 

누군가는 아무리 사랑을 줘도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힘들고 누군가는 나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이른바 나쁜 남자인데도 오히려 좋아하고 쩔쩔 매지 않은가? 

부모가 아이들에게 베푸는 정성과 사랑은 얼마나 훨씬 강해졌는가? 그래도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누리는 것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나 감사하나?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하는가? 좋은 것 사주었을 때에 하는 찬양은 얼마나 입에 발린 소리들이 많은가? 진실한 감사와 진실한 찬양을 찾기 힘든 세상 아닌가? 

 

감정은 우유부단한 것이다. 진실하지 못하다. 현실을 왜곡하고 과대포장하거나 반대로 축소시킨다. 말 한마디 상처로 인해 사람 전체가 꼴보기 싫기도 하고 다신 안본다 하면서 반대로 맔한마디 때문에 풀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 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정에 놀아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그분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날 사랑한다는 이 고백은 "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변해도 세상이 변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변해도 한 번 새겨져 있는 그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그 고백. 외침..." 

 

왜 우리 감정이, 환경이 사랑하도록, 찬양하도록, 감사하도록 허락지 않는데 말씀으로 감사하라고 하시는가? 

변치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견고히 서라는 것이다. 내 지금 감정이나 환경은 어렵고 막혀 있어도 반드시 그 분이 날 인도하시고 감싸 안으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감사는 내가 받은 은혜를 되찾게 한다. 오늘 특송 - 은혜: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알고보니 은혜다. 

감사는 지금의 어둠을 이기는 소망이 된다.  

그래서 감사는 천국 백성의 표요

감사는 신앙의 선포요

감사는 행복의 열쇠요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요

감사는 죄의 독을 없애는 해독제요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그릇인 것이다. 

 

목사로서 저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

주일 예배 전에 제 설교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읽어보면서 어떻게 이 설교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견고히 할 수 있을까?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내 기도로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으로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력해지고 움추려 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부족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마음을 알고자 마음을 여는 성도님들이 계시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결국 저는 통로요 제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역사되어지면 설교자는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 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를 이루어가는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제 모든 삶의 열매이고 면류관이고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은 축제의 잔치이기도 했지만 그 축제 안에는 고향을 떠난 설움이, 긴 항해를 통한 고통이, 긴 겨울 죽어간 수많은 가족들의 죽음과 슬픔이 깊게 묻어있는 잔치였습니다. 

한 해 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게 신앙생활 하던 코로나 가운데서 참된 교회, 참된 예배를 향해 몸부림치던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아픈 기억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닌 상처도 있었고, 사랆들의 수근거림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견디고 함께 했던 이유는 참 예배에 대한 갈망,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몇 명이 모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자 우리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함께 예배드리고, 소수이기에 가능한, 비록 마스크를 끼고 드리는 예배였지만 대면예배를 한 주도 빠짐없이 드렸고, 두 번의 야외예배, 여름 수련회, 그리고 선물로 주어진 밭모임등을 통해 정상적인 모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 완벽한 것은 없어서 때론 함께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이 이사로, 질병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일도 있었고, 의견의 불일치로 작은 갈등을 빗기도 했지만 그러한 일들은 더 기도하고,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자 우리에게 주신 연약함의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장미꽃도 감사하고, 장미의 가시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 은혜인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신앙의 역사를 계속해 나가도록 우리 첫 추수감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더 온전한 예배,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더 힘 힘쓰고 전진하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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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살전 2장 13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있는 아테네 인근의 도시였고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빌립보 도시 다음으로 방문한 두 번째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지역에서 큰 핍박을 받으며 교회를 세운 후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를 하였는데 빌립보 지역에서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한 유대인들이 소문을 듣고 따라와 데살로니가 지역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 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일행을 쫓아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곳 데살로니가 지역에서의 활동은 10절도 되지 않게 짧은 문장으로 매듭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2-3주 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길어보았자 2-3개월 가량이라고 합니다. 짧은 기간동안 단기선교를 가서 아름답게 선교를 해도 열매를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일행이 다녀갔던 그 기간동안 마을은 큰 소란이 일었고, 바울 일행에 대해서는 나쁜 소문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고 교회만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지나간듯한 경유지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늘 마음에 품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바울이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라고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하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게도냐 유럽지방에 전한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는 날 주 앞에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너희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평생을 신앙생활 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을 읽지도, 믿지도, 기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데 인생의 선택의 순간이나, 여정을 보면 신앙과는 전혀 관계 없는 행동이나 선택이나 계획을 합니다.

 

어제 새벽에 나눈 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이렇게 한탄합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생각하며 선택하며 잔소리 듣듯 하는 사람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났다 하시면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리듯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어떤 이는 짧은 만남, 한 번의 만남을 통해서도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과 신앙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기도훈련, 말씀의 훈련....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도구 들이 신앙의 본질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소 귀의 경읽기 처럼 아무리 교육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듣는 말씀을 책읽듯이, 교육받듯이,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을 것이냐,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이냐 하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열매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고작 사람의 열매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면, 그 말씀은 우리 심령을, 본질을, 모든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에 종교개혁을 통해 영국 성공회가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 영국 성공회의 신앙은 형식적인 면에서 가톨릭과 전혀 구분되지 못하였고 당시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실질적 영국의 종교개혁적 운동이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들은 가톨릭으로부터도, 영국 성공회로부터도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 도무지 마음껏 찬양드리며 기도하며 말씀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열려지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100명 조금 넘는 신앙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건너온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여러분,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목숨을 걸고 떠날 용기가 과연 어떤 마음일까?

한 달 넘는 항해로 말미암아, 항해 중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고, 미국 땅에 도착해서 첫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은 그들이 한 해를 보내고 첫 감사의 축제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과연 그러한 때에 원망없이 감사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은 이전의 신앙생활을 기억하며 많은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맘껏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 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마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먼 항해를 떠나는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들 합니다.

물론 사람들 부딛치지 않으며,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예배를 공급받으며 더 편해졌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편한 습성에 익숙해져 버리면 교회의 본질 또한 잃어버리고, 부딪치며, 깨어지며, 나 자신을 훈련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곳이 없습니다.

세계의 어느 장소도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각성과 회복을 위해 어디를 향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전세계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가장 신앙이 뜨겁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나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십니까?

가장 뜨겁게, 순수하게 신앙생활한다고 여겨지는 나라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빼앗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지금 현재에도 격리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지역 사회에서 축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구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이 들어왔던 말씀을 암기하고 또 되새기며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가장 억압받는 땅에서 가장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꽃피는 것입니다.

 

몇주전 무엇이 유대인들을 경멸의 대상, 비난의 대상에서 존경받는, 뛰어난, 지혜있는 민족으로 바꾸어 놓았나하는 말씀을 느혜미야 말씀을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무엇이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까?

바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다. 그들의 본질이 바뀌니 상황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도, 그들의 삶도 바뀝니다.

 

코로나 상황은 익숙한 상황에서 너무 쉽게, 나태하게 신앙생활 해오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우리의 믿음은 과연 환란이나 곤고에도 요동하지 않는 반속위에 기초한 믿음이었나? 아니면 모래 위해 쌓여진 모래탑은 아니었는가?

 

약 400 여년전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긴 항해를 하며 자유의 땅을 찾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신앙이라면 이제는 물질적 장소가 아닌 우리 마음의 장소를 찾아야 할 제 2 의 추수감사절을 준비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 역사상 수많은 성경을 불태우고 없애려는 노력들.

활자 인쇄술이 개발되기 전 약 1500여년 동안 성경은 오직 필사를 통해 다음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가히 경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사하기 전에 목욕재개 하고 기도한 후에,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경외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하나님을 대하듯 말씀을 옮기고,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단어가 나오면 필사를 멈추고 기도하고, 한 글자라도 틀리면 집중하지 못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기록하던 장을 찢고, 만약 한 권의 책을 필사하는 중에 네 번이나 다섯번, 어떤 이는 세번이상 틀린 글자가 나오면 그 모든 장을 다 찢어 처음부터 성경을 다시 썼습니다.

천년 이상을 이러한 필사가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손상됨 없이 후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우리는 화난다, 짜증난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데 필사가들이 필사를 하면서 화를 낸 대상은 찢어야만 하는 종이가 아니라 오류를 범하는 자기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자신의 죄, 자신의 나태를 두고 회개하고 또 다시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기록된 필사 성경이 그들 교회의 영성이 되었고, 교회의 자부심이 되었다.

 

새벽말씀을 전하고, 또 그 말씀을 필사하면서 난 내가 경험하는 그런 말씀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또 함께 경험되어지기를 깊이 소망합니다.

떨어져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이런 떨어져 있는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순수해지고 뜨거워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뵈옵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우리가 읽는, 우리가 쓰는 이 말씀은 만물을 창조한 바로 그 말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을 보는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역사를 통해 상처입고 비뚤어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처럼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고난 가운데 가장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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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를 쫓아버린 사람들 (누가복음 8장 26-39절)


  •  추수감사절의 유래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영국에서는 신앙의 순수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불편한 형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534년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하기 위하여 여왕인 가타리나와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를 열어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형식은 그대로 가톨릭을 따르나 가톨릭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른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나 형식이 신앙의 회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순수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청교도라 불리며 완전한 신앙의 회복 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교회를 공고히 하고자 한 국왕은 국교회를 따르지 않는 가톨릭 교도나 청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하고 청교도들은 국가의 핍박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승무원 6명과 남자 72명, 여자 29명, 100여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1620년 메이플라오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먼 미국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이런 긴 항해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100여명의 사람들이 긴 뱃여행을 시작해서 65일만에 11월 9일 미국의 동부 메사추세츠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사이 배 속에서도 어쩔때는 하루 2-3명씩 끊임없이 죽어나갔습니다. 뱃속에서도 뱃멀미니 건강악화로 시달리다가 꿈에 그리던 땅에 도착했더니 그곳 사정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곧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해 겨울을 지나는데 죽은 숫자가 50명이 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어찌 눈물바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그들은 또 땅을 경작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가을 그들은 풍성한 수학을 거두며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50 여명 남은 청교도들은 한해를 돌아보며 먼저 죽어간 이들을 기리고, 또한 그들의 농사를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했습니다. 90여명의 많은 인디언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들새를 잡으러 나갔는데 다행히 많은 칠면조를 잡아 그들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 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예수께서 군대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고 돼지들이 몰살되었을 때에...

그 사람의 삶 - 오랫동안 옷을 입지도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며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 

같은 내용을 다룬 마태복음 8장 28절 -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라. 

                          마가복음 5장 : 쇠사슬로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왜? 군대귀신이 들렸기 때문 - 30절 

성경 밑에 주석을 보면 - 군대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레기온, 로마 군대의 여단 규모- 당시 레기온, 여단은 6000명으로 구성 


한 사람의 귀신 들린 사람도 성령이 충만하고 귀신에 눌리지 않은 영적인 권세가 있는 사람도 쫓고 나면 기력이 쇠하는데 

6000명의 귀신이 들린 사람-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데 그 귀신들이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한다. 제발 지금 무저갱으로 들어가지 말게 해 달라. 


그래서 산에서 먹이를 먹고 있던 돼지 떼에게 그리로 들어가라 하니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 귀신의 정체- 결국은 사망으로 인도

인간은 영이 있고 의지가 있어서 저항을 하지만 영이 없는 동물은 저항 불가- 바로 사망으로..


귀신 나간 사람 - 정신이 온전하여 졌다. 


34절 -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렸다. 

       - 왜 도망했을까? 

36절-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절- 그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기를 구하더라. 


구원 받은 자를 보았으면 기뻐하고 축하하고 예수께 나아와 찬양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고 그들은 도망하고 두려워하고 급기야 예수께 떠나가 달라고 구한다. 


왜? 돼지를 치던 자들은 무엇을 알렸을까?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 진 것? 

아니다. 오로지 돼지가 몰살 당한 것. 

사람들이 본 것은 무엇인가? 돼지가 몰살당한 이유가 귀신들린 사람의 정신이 온전해진 댓가.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 한 것일까?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혹 자기들의 돼지도 죽지 않을까?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돼지떼, 자기들의 생업. 


비슷한 일이 사도행전 16장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과 실라가 귀신들려 점치는 소녀의 귀신을 쫓아내자 마을이 난리가 났다. 

그 점을 가지고 장사하던 주인이 더 이상 소녀를 통해 점치며 장사할 수 없자 고발을 하여 바울과 실라가 감옥데 갇히는 사건. 


사람들의 관심은 영혼에 있지 않다. 귀신이건 뭐건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온전해진 사람을 보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잃어버린 돼지떼를 보고 예수를 쫓으려 한다. 

정말 죽어야 할 돼지는 동물이 아니라 이런 부류들이 아닌가? 


- 본투의 땅을 떠나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배를 탄 자들. 

절반이 죽고 나서도 포기하지 않고 농사의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의 감사가 아니라 없는 중에서도 이웃을 초청해서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 

그들을 먹이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 칠면조. 


그것이 또한 미국이란 나라의 시작을 알린 것이고 11월 세번째 주일날 마다 이 날을 기념해서 추수 감사절로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목사로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물론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업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기도는 성도 여러분의 영혼이 병들이 않는 것, 영혼이 죽지 않는 것. 

그것만 아니면 다른 것은 괜찮다. 


당신의 영혼은 안전하십니까? 

그럼 괜찮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가장 중요한 감사의 조건은 우리 영혼이 주님 품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감사요, 가장 큰 은혜요, 가장 큰 능력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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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8.12.02 17:53

    감사합니다.^^

추수감사절 주간이 되면 몇분의 성도님들이 전화를 한다.

"이번 주도 새벽예배 있나요? 금요예배 드리나요?"

"네, 그냥 저 혼자라도 교회를 지켜야지요. 부담갖지 마시고 시간되면 나오세요..."

 

그런데 긴 휴일 덕에 가족끼리, 친구끼리 여행을 가고 쇼핑을 가고 그런 주간에라도 흔들림없이 교회를 지키시는 분들이 계시다.

 

몇분이 새벽예배 끝나고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며 혼자 교회에 들어오는데 또 다른 성도님 차가 눈에 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간에 잘 뵈지 않던 그 분은 또 교회의 한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휴일이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다 여행을 가기 때문에 홀로 남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모르다가 옆에 사람들이 다 사리지고 나면 비로서 남겨진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은, 교회는 그런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평안한 안식처가 아닌가 싶다.

"이제 쓸 것 다 쓰고, 할 것 다 하고, 이제 남은 것이 없을 때에 날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소서"하며 찾아 왔을 때에,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 따뜻한 손길로 탕자를 안아 주며 종들에게 잔치를 열라 하셨다.

새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겼다.

 

주님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여셨다. 

 

이제 다 떠나고 혼자 남게 된 텅빈 교회당...

이제 주님은 날 위한 잔치를 열고 계신다.

그 잔치의 이름은....

사랑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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