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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나무에서 (왕상 19:1-8)

 

* 성경에 등장하는 3대 영적 침체, 혹은 영적 탈진

민수기 11- 모세의 침체,- 광야에서 끊임없이 백성들이 원망을 들으면서....

열왕기상 18장 엘리야의 침체...

복음서의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 십자가를 앞두고... 내 영혼이 죽게 되었으니...

 

엘리야 - 변화산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던 두 명- 모세와 엘리야 (모세- 율법의 상징, 엘리야- 선지자의 상징) -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악했던 왕 아합왕 때의 선지자

 

말씀을 통해 본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은 무엇입니까?

 

1. 형편을 보고 (3) -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3)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3-4)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자기 속 동굴로 들어간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엘리야와 모세는 죽기를 간구-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살기를 간구->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그 어떤 정욕도, 열정도 사라진 상태이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9장의 상황 -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이 후,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과 아합왕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줄로 알았는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거꾸로 이세벨 여왕이 자신을 즉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는 상황.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이것만 응답되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또 다른 문제가 생겨날 때. 그 응답 이후에 오는 더 큰 공허감....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육체적 한계의 상황을 이미 넘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진단하면 흔히 쓰는 용어가 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목회자) 설교 이후에 성도들에 대한 기대...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힘든 영적 전쟁의 승리 후에 이세벨의 작은 위협에 지금 혼비백산 도망하고 있는 엘리야를 보면서도 책망치 않으신다. 그의 침체, 탈진, 슬럼프에 공감해 주신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5: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쉼과 어루만짐의 목적은 그를 다시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와 임재로 이끌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호렙산에 들어가서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기다리고 있던 그 말씀을 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9)

 

내가 열심히 유별하오니...오직 나만 남았거늘...” (잘못된 엘리야의 믿음을 들추어내신다)

(10, 14) 두 번에 걸쳐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고 입맞추지 아니한 자 칠천명을 남겼다.“ (18)

너만 특별하지 않다. 너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보여주신다.

그 계획은 아합을 완전히 무너뜨릴 왕을 세우는 것과 엘리야의 뒤를 이을 선지자를 세우는 것. 즉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즉,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나누고 싶은 인물 - 엘리야에 대한 말씀

 

기독교 영성 - 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안의 영이신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통로- 하나님의 형상 - 바로 영이다.

그래서 영성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과 방법이 영성의 연구대상이다.

그 가운데 만난 엘리야.

 

개별적인 사건들은 많이 설교되었지만 그 인물 전반에 대한 것은 잘 모르는 성도들이 많다.

미숙했던 그를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 그의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너무도 특별하고 또 도전이 된다. 4번의 예배를 걸쳐 엘리야의 영성을 다루고 우리 자신을 살필 것이다.

 

이번 수련회가 우리 성도들에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금 세워져서 호렙산에서 다시금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제와 제 2의 사명을 받을 수 있는 준비의 장소가 되기를 원한다.

 

순서로 보면 엘리야에 대한 말씀 중 가장 마지막 사건을 서론격인 오늘 설교 본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개척 이후에 쉼 없이 달려온 우리 성도들의 지쳐있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진단하고 다시금 설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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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왕상 18:41-46) 


17장에 처음 등장하는 엘리야

아합왕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바알과 앗세라의 숭배자들이 가득하던 때.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분노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이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이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다. 보장이 없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한다. 

순서가 바뀌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전하는데, 엘리야는 선포하고 나서야 말씀이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엇인가?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충만히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훈련시키셨다.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머물면 머물게 하고

만나가 내리면 먹고 물이 나오면 마시고, 메추라기가 떨어지면 배불리 먹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은 그릿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고독의 훈련, 만나 (말씀의 훈련) 을 시키셨다. 

이 훈련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을까? 

나는 정말 무력하다. 나는 정말 할 수 있는게 없다. 세상은, 신앙은 신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단지 신념이다. 

무능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릿 시냇가가 마르니까 바알과 앗세라의 수괴, 이세벨 여왕의 고향, 그 중심 사르밧으로 엘리야를 보낸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동역자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한다. 

거기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는 우선수위의 훈련을 한다. 


하나님의 것을 먼저, 내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서 언제나 내 믿음, 내 생각, 내 환경, 내 감정을 우선했던 실패를 되돌아보고 이젠 실패하지 않도록 훈련시키신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늘 실패하는 훈련, 이기적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훈련

기복적인 신앙인이 매일 같이 위선 속에서 자기를 속이는 그런 훈련. 

먼저하고 나중에 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채우시고 보장하신다는 것을 경험케 하신다. 

풍요로울 때에 그 훈련을 시키시지 않으셨다. 

마지막 먹고 죽으려 할 만큼 기근이 극심할 때

없어도 정말 없을 때에 하나님의 것 먼저 할래? 결국 네것 하다가 죽을래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나서 죽은 아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기도의 능력을 알게 하신다. 

죽은 한 영혼을 살리는 기도

기도는 결국 한 사람을 향한 애끓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간절한 기도는 사랑에서부터 나온다. 다급함에서부터 나온다. 

한 영혼을 위한 기도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 간절함에서부터 기도가 시작된다. 

바알과 앗세라를 향한 영적인 전투에 앞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영적인 죽음을 살리는 기도에 앞서, 연약함 가운데 죽은 한 영혼을 향한 기도를 시키신다. 


그리고 다시 아합왕에게 보낸다. 

18잘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순서가 바로 잡혔다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많은 날이 지났다"고 말씀이 증거한다. 

하나님은 순서가 바로 잡히기 까지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는 서둘고 급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서둘지 않으신다. 

차곡 차곡,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첫 번째 큰 비는 노아 때 왔었다.

그 큰 비는 죄악을 다 씻어 내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다 씻기 위해서는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비는 심판의 비가 아니다. 반대로 이 비는 은혜의 비다. 모든 기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 쏟아지는 비다. 

우리의 냉랭한 신앙이 물러가고 눈물이, 은혜가, 평화가 찾아오는 비다. 

그야말로 큰 비다. 


(큰 비에 대한 묵상) 바알과 앗세라가 도저히 줄 수없는 은혜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해도, 가진 것이 많아도 비가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큰 비는 단순한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의 복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을 다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엘리야는 이 은혜를 맛보면 아합과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꼐로 돌아올지 알았지만 그들은 비가 없어도, 또한 비가 와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 -> 이 실망이 로뎀나무의 사건을 인도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은혜다.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은혜가 큰 비다. 우리는 1년동안 이 큰비의 은혜를 묵상할 것이다. 


그런데 큰 비의 약속을 받은 엘리야가 바로 큰 비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아합왕에게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싸그리 모아 갈멜산에 모이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백성에게 질문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언제까지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면서 여전히 바알을, 돈을, 쾌락을, 정욕을 쫓을 것인가 묻는다. 

백성들이 한 마디 말도 답변하지 못한다


여호수아 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오직 여호와를 따르겠습니다 말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도 해깔린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인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모여 기도하기 시작한다. 

제단 주위에서 뛰어 놀고, 큰 소리로 울부 짖다가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다. 

미친 듯이 떠든다. 미친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자가 미친 듯이 떠돌아 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미친 예배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미친 짓이다. 예배는 내가 미쳐서 날 뛰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서 춤추는 것이다. 

내 감정에 들떠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감격하는 것이다. 

성령은 내 가슴을 찢고, 목이 쉬도록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예배는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예배이다. 

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훈련이 담겨 있는 예배고, 순종이 담겨 있는 예배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는 고백이 담겨 있는 예배다.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다. 

자기 감정의 예배, 축복만을 부르짖는 정욕의 예배, 쾌락을 위한 예배를 무너뜨리고 말씀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다시 드린다. 


31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32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36절: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성령 충만은 순종이다. 그 분의 뜻대로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야는 제단과 번제물에 물을 가득 붙고서 기도한다. 

한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회복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해서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왜 비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제단에 불을 내리시는가? 

회개가 없이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없는 은혜는 오히려 타락이고 교만이고, 죄악을 낳기 때문이다. 


아합은 우리 안의 죄이다.  

바알과 앗세라는 우리 안의 돈을 사랑하는 탐심이고, 음란함과 쾌락이고, 화려함과 외모를 최고로 하는 우리 안의 이세벨이다. 


이것을 몰아내시지 않고선 비를 내릴 수가 없다. 

은혜를 맛볼 수가 없다. 큰 비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성전, 우리 안의 바알과 앗세라, 우리 안의 아합가 이세벨을 죽이지 않고서는 내리질 않는다. 


큰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복이 되어 돌아가냐 하지 않는가? 


그러면 다시금 갈멜산에 올라가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여야 한다. 

번제물에, 제단에 성령의 물을 뿌리고 그 성령이 내 죄를 불태우도록 해야 한다. 


내 감정에 들떠서 날 뛰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신 것과 당신은 나를 되돌이키시는 분임을 알게 하옵소서."  


단지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의 복,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 하나님 나라의 심령이 열리기 위해서 내 안의 바알과 앗세라. 내 안의 아합과 이세벨을 몰아내야 한다. 


불로 태워야 한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태워야 한다. 

내 안의 불평, 내 안의 판단, 내 안의 정죄, 내 안의 교만, 내 안의 탐욕, 내 안의 변명, 내 안의 핑계, 

내 안의 게으름, 내 안의 모든 죄를 태워야 한다. 


불을 내려달라 기도했던 엘리야가 이젠 물을 위해 기도한다. 

3년 6개월동안 이나 오지 않던 비를 위해 머리를 무릎에 쳐박고 기도한다. 

엘리야는 바알과 앗세라가 없는 것을 가졌다. 아합왕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천국 문을 여는 열쇠이다. 그 열쇠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기도에서 나온다. 


첫번째 기도는 회개를 위한 기도였다. 불을 위한 기도는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죄를 불태우게 된다. 자기 안의 모든 우상을 불태우게 된다. 하나님 외에 의지했던 세상의 물질과 힘과 권력을 던져버리게 하신다. 


두 번째 기도는 은혜를 향한 기도다. 이제 하나님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겠다는 기도다.

회개를 하게 하신 하나님은 성결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비를 향한 기도는 성령 충만을 향한 기도요, 성결을 위한 기도다. 

회개의 기도가 비움을 위한 기도라면 은혜를 향한 기도는 채움을 위한 기도다. 

우리는 은혜로 채우지 않은면 넘어진다. 

성도는 은혜로 산다. 은혜가 없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다.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왕상 18:42) 


-겸손한 기도, 간절한 기도

회개 후에 만족하지 않았다. 교만하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목말랐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물릴쳤을 때에 승리감에 도취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산꼭대기로 기도하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죄인이 되어 엎드린다.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하게 했던 베드로가 평소랑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에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보게 된다. 은혜는 또 기도할 때 온다. 또 무릎꿇을 때에 온다. 

예수님의 승천을 본 제자들이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에 성령이 임한다. 


그름조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다. 

그 증거품이 구름조각이다. 

7번의 기도는 그 증거를 향한 변함없는, 끊질긴 간절한 기도.... (1년동안 묵상해야 할 것들...)  

7번-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기도이자 순종이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법칙이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순종이다. 

7번은 끝까지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을 끝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을 통해 큰 비를 보았다. (18:44) 

아합에게 선포할 때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18:41) 

작은 것 안에 담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 작은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축사... 

겨자씨 하나에 담긴 100배의 열매... 


(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말랐던 강들이 물로 가득차게 되고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 온 나라 백성이 비에 젖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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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과 때 (왕상 18장 1-19절)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 방법 - 하나님의 뜻과 때.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              

  • 그릿 시냇가 - 세상으로부터 격리하여 하나님 주시는 양식으로 살아가는 훈련, 광야의 훈련, 만나의 훈련
  • 사르밧의 훈련 - 
    • 말씀의 적용 훈련, 우선순위 훈련(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 동역의 훈련: 왜 동역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역을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동역하는 것 자체가 전도이다. 
    • 하나님을 주인삼는 훈련- 영접은 구호가 아니라 실재다. 사르밧 여인, 하나님을 섬겼지만 결코 주인삼지 못했다. 그 분을 주인삼으려니 자신의 죄가 드러난다. 
    • 중보의 훈련- 한 영혼을 위해 금기를 깬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초월이자 완성이다. 한 영혼을 위한 사랑이 결국 하나님 일의 시작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만을 가지고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 뜻대로 사는대도 일이 해결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부딪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고 살아가는 훈련이 준비의 기간이라면 이 뜻을 "하나님의 때"를 통해서 성취된다. 


(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숨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왕상 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이제 드디어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가라 명하신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광야의 때를 바꾸어 이제 엘리야를 드러내게 하신다. 갈멜산의 계절이 왔다.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때는 측량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작용한다. 만물의 통치자가 만물의 때를 알아 바로 그 때에 실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숨어라 하면 숨고, 드러내라 하면 드러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만 숨어지내는 것은 못견뎌 하는 사람이 있다. 

남이 함께 있고 남들이 날 인정해주고 하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남이 없이 홀로 되면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활발한 것 같지만 자기의 의미를 남들이 시선을 통해서 찾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기에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다. 오히려 남들에게 나서는 자리는 피하고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 사람은 건강한 것 같지만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다. 홀로 있을 때만 편안한 사람은 "일어나 가서 제자를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보다 귀찮고 부담스럽고 어려운 명령이 없다. 

그런데 주님은 때로 우리가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드러나게 하신다. 

이 홀로 있을 때 드러날 때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숨어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내공을 쌓고 준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하고 훈련하여 얻는 것이 내공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숨어 있는 기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동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 "온유"한 자가 된다. 온유란 말씀으로 길들여진 사람에게 붙이는 성경의 전문 용어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광야의 전문가가 되어 향후 40년동안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된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 집의 감옥에서의 13년간을 집 안일을 돌보고, 감옥을 돌보는 총무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그 훈련이 나라를 책임지는 총리가 되게 한다. 그 곳에서 요셉은 애굽의 언어와 문물을 배우고 떡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등을 만나 정치를 배운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 받는다. 


[시 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아버지의 편애로 자기 밖에 모르던 요셉이 배려의 사람이 되고 검소한 자가 되고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된다. 


  • 엘리야의 또 다른 만남

오바댜 - (왕상 18:2-6)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 -

(왕상 18: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아합왕을 섬기기는 하지만 아합왕과 다른 길을 가는 자. 여호와를 따르는 자. 

(왕상 18:10)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 7절: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그동안 아합: 각 나라마다 사람을 보내어 엘리야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기심을 얻은 엘리야는 아합의 손길에서 피할 수 있었다. 

오바댜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그러나 내가 그 말을 하면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니이다. 

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았음에도 이전의 엘리야나 사르밧 과부처럼 훈련 받지 아니한 자. - 몰래 주의 선지자들에게 물과 고기를 가져다 주는 선한 일을 하였지만 언제나 아합과 이세벨을 두려워하면 고통을 당하는 자. 


그러나 엘리야와 만난 오바댜는 죽음을 무릎쓰고 아합에게 엘리야를 말한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통해 아합보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자가 된 것이다. 아합이라는 공포를 이긴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믿음


아합과 엘리야의 대면 : 누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인가? 

[왕상 18:17-18]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왕상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아합: 현재의 현상- 엘리야의 말대로 기근이 왔으므로.... 세상의 사람들의 관심. 당장의 눈앞에 현실에 민감...

엘리야: 그 근원, 원인... 하나님과의 관계... 


무엇이 진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고 누가 우리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이신가???? 영적 전투를 선포 


자. 하나님의 사람에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의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우상숭배다. 황금 송아지 신앙이다. 그들의 고정관념대로, 경험대로, 전통대로 신앙생활을 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인 줄 알고 섬겼다. 

황금 송아지는 권력과 힘이다. 물질과 성공이요, 쾌락과 방종의 신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으로 훈련된 자는 때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때는 하나님의 전권적인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다. 때로 숨어 있어야 하고 피해 있어야 하는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런데 그 삶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일어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시고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게 하시고, 큰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다. 

그 때를 얻기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내공을 쌓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충성함으로 삶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게을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영성은 일상에서 훈련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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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17-24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는 명목상의 하나님 신앙도 다 사라지고 바알과 앗세라, 돈과 쾌락만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던 자였고, 이런 시대는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아합왕앞에 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뛰어나고 의기에 찬 엘리야였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청년 엘리야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아합왕에게서 떠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릿시냇가는 "고립, 분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 곳은 어디냐? 바로 그 악한 이세벨의 고향이요, 이세벨의 아비였던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이세벨의 본 고장 사르밧으로 보내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와 함께 우선순위의 훈련을 합니다. 사르밧은 "용광로, 제련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이었다면 사르밧에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통해 떡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죽고자 헀습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이것이 지난 금요일날 나눈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르밧에서의 훈련 두번째 시간으로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 가장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믿음의 사람들이 돌봐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이건 좀 특별하고 영적인 표현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나그네는 집,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교적인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잃어버린 남편, 아버지, 본향을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땅에 그것도 애 딸린 과부의 집에 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유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시선으로도 이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그 집안의 가장이 되시고, 주인된 하나님의 집으로서 그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과 엘리야의 만남은 하나님을 믿지만 불완전하던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받아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훈련 되지 아니한 엘리야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했지만 능력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하는 학교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함으로서 우리 또한 엘리야가 받았던 교육,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7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우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위하여, 그 다음 너를 위하여 하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약속을 성취한 후입니다. 한 줌의 가루, 기름 조금이던 그녀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먼저 심었더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체험한 후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중에 일어날 적에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늘 내 것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을 나중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백만 있고 체험이 없습니다. 생각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을 통해서 훈련 받으면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제는 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그 집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이 집의 주인 되는 여인"이라 이 과부를 표현합니다. 기름 조금, 가루 한 웅큼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가난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마땅히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할 공간에 여전히 주인은 그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기가 주인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죽음을 앞둔 여인처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습니다.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헌금 한 번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 다음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문을 열라 하시는데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락방 구석에 몰아 놓고 자기가 또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기까지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증세가 점점 위중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병이 들어도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증세가 악화 되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영이 죽고, 병들어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서 엘리야에게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절) 


1.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여인이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나를 왜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느냐? 왜 자꾸 간섭하느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뭡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찾아갑니다. 빌고 굿하고 부적 부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나면 돈주고 그만 딱입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맘대로 살다가 또 문제 터지면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요, 내 아버지요, 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안전하고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신앙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대화 하지 않듯이 주를 영접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까지, 문제가 터질 때까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비로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이 회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뉘우쳤다" "후회했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돌이켜야 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잘못을 알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개합니다. 탓을 하고 변명을 하고 오히려 성을 냅니다. 

인정해야 할 때에 숨기고 회개해야 할 때에 성냅니다. 

그런데 일찍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오기 전에 그 여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2절)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굽에 종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보냈는데 당장 물이 없다고 백성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나오게 했습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오고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탓."

성경에 어디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다. 위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가 되는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여인의 항변에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 잘못이냐?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왔느냐?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 했느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그냥 여인의 분노를, 하소연을, 원망을, 묵묵히 듣고 참습니다. 

여인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 지킨 것이고 아들은 다른 문제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하며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십자가로 몰려 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빈정대고, 소리칩니다. 

옷을 찢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하늘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이 하신 기도는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변호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하나님 잘못한 것 알지만 저들의 편에서 생각해 주세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싶고, 꾸짖고 싶고,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애굽이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럼 애굽으로 가서 실컷 먹고 살아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저 사람 어떻게 저래요? 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광야 생활하면서 피곤한 그들의 모습, 만나를 먹으며 지겨워 하는 모습, 광야 가운데서 불기둥 구름기둥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을 위해 울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잃은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묵묵히 그녀의 아픔을 자기 품에 앉고 자기의 기도처소로 옮니다. 

여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품에 가득 안고 자기 침소에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의 편에서 하나님께 변호합니다. 

이것이 근데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죄인을 구하는데,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안타까지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습니다 .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주님,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이곳의 주인이 되심이 아니십니까? 

주인 잃은 여인의 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인이 마음으로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여인의 언어로서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시체에는 근처에도 가면 안됩니다. 

일단 죽은 시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시체를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그 시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그 위에 엎드립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 앞에 두고 기도할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려면 진작 했겠지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까? 

어차피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거 기도해서 "하나님도 부담, 나도 부담, 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간절히 시체를 앞에 두고서라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하는 사람,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하기에 자기 뜻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아직 포기하라는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수넴여인이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앞서는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세번씩이나 그 몸에 엎드려서 자기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냥 정도껏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문제있는 자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주님앞에 나와서 그 짐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그 문제을 안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면 됩니다. 남의 문제를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영적인 리더들이, 설교자만 되려고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된 삶, 참된 목자는 형제 자매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 양을 치라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 나오면 될 수 있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목자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이름보다 목자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영적인 목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문제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앞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키시기 전,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이 기도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엘리야와 아이를 건네 준 사르밧 과부가 마주칩니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안믿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전에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믿음이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면 이젠 온 몸으로 체험된 믿음이고 삶으로 고백된 믿음입니다. 

이제 여인은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엘리야는 이제 사르밧 신학교를 마칩니다. 디셉 사람 이름없는 무명의 사람에서 이젠 하나님의 선지자로 공인됩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심젇을 가진 자, 죄짐 맡은 자,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이 아닌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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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0 13:06

    목사님... 바쁘신가보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