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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21.03.26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막 15:21) (3)
  2. 2021.03.20 어린양 예수 (요한복음 1장 49절)
  3. 2021.03.10 무리인가 제자인가? (마태복음 9장 35-38절)
  4. 2021.03.10 참 베데스다 교회 (요 5:1-9)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막 15:2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 (막 8:34)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길을 따를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 주님을 닮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원받은 믿음 -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 

 

요즈음 신앙생활들을 이야기 하면서 요새는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고 영광 만을 받으려 한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십자가는 참 신앙인들이라면 마땅히 지어야 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데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 적어도 기도한다. 실재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고난에 대처하고,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라든지, 마음가짐이 다르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마땅한 것으로 여기며,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 그 중심에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 그리고 그 주님을 통해 우리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당연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십자가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당황할 때가 있다. 추상적으로 막연히,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보면 대부분 십자가는 자기의 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부산물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강도 -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23장 41절)

-> 주님 지신 십자가: 자기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받는 것이 아닌 철저히 우리를 위한, 타인을 위해 지는 십자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택한 삶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어려움을 십자가라고 부를 때가 많다. 

예) 결혼이나 육아로 인해 겪는 가정적인 어려움, 사업이나 학업에 있어서의 실패, 건강관리를 잘못하여 얻은 질병, 인간관계의 실패에서 얻어지는 고통.... 

 

물론 예수 믿으면서 당하게 되는 많은 손해들, 혹은 시선들, 때로는 핍박들. 십자가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진 십자가는 무엇이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 십자가에 대해 추상적으로, 아무 것에나 이름 붙이는 잘못된 십자가일 수도 있다. 

 

주님 지신 십자가 - 죄없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져야했던 하나님의 계시. 

                          - 메시야로서 그들을 구원할 상상치 못할 선택. 

                          

그렇다면 주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가 져야 주님을 따르기 위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지신 주님의 십자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지는 십자가를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진 인물 - 구레네 시몬 "짧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성경상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과연 성도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닮고자 하는 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적어도 강력한 힌트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 구레네: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나라에 지금도 있는 아프리카의 도시이다. -> 그러니까 그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사람이었을 것이다. 

 

(행 11:19-20)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증거한 사람 -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이들로 인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부터 파송되게 된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 이 떄 안디옥교회의 선생 -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는 흑인이라는 뜻 -> 바로 구레네 시몬이 아닐까? 성서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주장을 한다. 그를 통해 같은 동네 사람 루기오도,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 당시의 분봉왕 헤롯 (세례요한을 죽였던)의 젖동생까지,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와서....

(막 15: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빌라도의 법정 - 십자가가 달리게 되는 골고다 언덕까지의 고난의 길 - 비아돌로로사, 고통의 길, 고난의 길, 1 Km 채 안되는 길이지만 꾸불꾸불하고 언덕을 오르는 길.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으로 심히 맞으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신 길이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 지난 주 대속죄제일날의 희생양처럼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과 매를 맞으시면서 걸어가야 하는 길. 

지금 그 길에는 빌라도의 재판을 받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를 지다가 세 번을 넘어지시고, 모친인 마리아를 만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곳을 기념하며 14개의 지점이 표시되어 어느곳에서는 교회가 세워져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념비가 세겨져 있어 십자가의 그 고난의 길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 14개의 지점 중 5번째가 바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우게 된 지점이다. 

 

왜 이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에게로 왔는가? 

 

십자가 처형을 위해서는 반드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모진 고문과 고통으로 자꾸만 넘어져서 갈 수 없게 되자 로마 군사들에 의해서 "억지로"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지워진 것이다. 

 

십자가 - 입에 담기도 어려운 치욕, 아무도, 누구도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않는다. 대신 지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치욕이 될 수 있기에....흑인이자 이방인이었던 시몬에게 억지로 지워진 것이다. 

 

그가 진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이 십자가는 자원하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 상황 설명:이방인이자 흑인이었던 그에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이다. 
  • 한 사람의 자원하는 제자들이 있었더라면 이 순간에 자원해서 자신이 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한 사람도 그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그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요한(예수의 십자가에 있었던 제자) 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 누구도 그 십자가의 수치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예수와 아무런 상관없는 시몬이 십자가를 짐 

 

2. 신앙적인 동기나 무언엔가 상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힘들어도 예수님은 알아주시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위로하심이 있다. 
  • 시몬에게 보인 예수님: 죄인, 나약한 자… 초라..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초라한 자
  • 그 십가가를 진다고 예수께로부터도, 로마로부터도, 어떤 보상이나 칭찬을 기대할 수 없었던 십자가
  • 오히려 알려지면 가문의 수치로 남을 십자가... 
  • 그래서 억지로 들 수 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만 싶은 십자가

 

3. 본인이 짊어져 야 할 십자가.

  •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진다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과 매질이 그쳐지지 않는다. 예수가 당하는 고난, 희생양이 당하는 고난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 모여있던 군중들: 제자들은 도망가있거나 숨어있고 오직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군중. 어쩌면 시몬도 예수를 욕하면서 서있다가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지도 모른다. 
  • 십자가를 들면서 욕을 하는 입장에서 욕을 듣는 입장으로 아무런 위로나 대가 없이 당하는 그런 수치감. 모욕. 

 

억지로, 아무런 보상이나 위로 없이, 수치를 당하면서 주워진 십자가. 

이게 구레네 시몬이 지은 십자가...

 

혹시 이런 십자가 여러분들이 지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이건 신앙생활이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치욕스런 고통들. 피할 수만 있다면 도망쳐버리고 싶은 문제들.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도 아무런 위로를 받을 수 없는 문제들. 이런 건 신앙에 걸림돌만 되고 아무런 유익이 안 될 것 같은 자신 만의 문제들. 

가만히 보면 많은 신앙인들 중에 아니 대다수 신앙인들 중에 잘 알릴 수 없는, 비밀스런 그런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십자가가 있지요? 

하나님도 해결해 주시지 않는 듯 한 … 

기도해도 기도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 도망쳐 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그러나 견딜 수 밖에 없는 나만의 아킬레스 건.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 누군가가 자원하길 바랬지만 자신들의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도 자원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넘겨져 온, 억지로 떠밀려 온 십자가

 

고난도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거나 허락되어진 것이라면 도무지 아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에 떠밀려서 나에게까지 온 고난. 그것이 질병이건, 가족이건, 실패건, 관계건.....신앙생활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아무도 자기 편이 없고, 혼자서만 모든 짐을 지셔야 하는 그 순간에…. 이제는 너무 지쳐서 예수님 조차도 더 이상 한 걸음조차 걸음을 땔 수 없는 그 순간에… 

저기 먼 아프리카에서 온 낯선 사람 하나가, 어떤 제자도 감당하지 못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에 함께 지닌 것이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다가 맡은 배역 - "주님의 시선" 

감정이입을 하면서...구레네 시몬을 연기하는데 

처음에 병사들에 의해서 십자가가 지워졌을 때, 속에서부터 막 화가나서

아 재수없는 날이다. 막 욕하고 불평하다가....사람들의 저주와 비아냥을 들으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독백하는 내용 

그러면서 마주친 그 예수의 시선

날 바라보시면서 침묵 속에서도 비추어졌던 그 사랑, 그 뜨거움. 

골고다 언덕에서 보게된 강도의 고백 - 당신은 죄없으신 분인데....

그가 숨을 거두시면서 말씀하셨던 일곱 마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들었던 백부장의 고백 -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영문도 몰랐던 시몬이 경험한 인생 속 가장 극적인 체험의 날. 

그가 고난 받을 때 유일하게 그의 십자가를 함께 했던 그 영광! 

 

(마가복음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이 책을 기록한 마가의 공동체에는 이름만 이야기 하면 다 알 인물 - 알렉산더와 루포 

 

(로마서 16장 13절) - 로마서 마지막 장의 문안 인사 중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내 - 사도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 이야기했던...

이 땐 이미 "구레네 시몬이 순교한 이후의 때"라는 결론

 

그 십자가로 인해 구레네 시몬은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이, 그가 남긴 아내가 초대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어떤 십자가? 

영문도 모르게 억지로 지워졌던, 아무도 지지 않아 나에게 떠밀려온 그 십자가. 

앞으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가 가르쳐야 할 십자가 

 

자기에게 임한 모든 고통, 고난, 신앙적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떠밀려온 고난, 수치, 모욕....

모든 것을 품고 감사하자. 무한 긍정. 그 속에서 주님의 시선을 볼 수만 있다면....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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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3.28 21:05

    오랜만에 들어와봤더니 교회를 옮기셨군요.
    사역의 참 모범을 보는거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트레이시 제일교회를 기대하며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성령충만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목사님.

  2.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3.30 06:09

    넵 목사님 ^O^

어린양 예수 (요한복음 1장 49절) 

 

기독교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 Jesus Christ 

어떤 이: Christ - Last name, Jesus- First Name? -X

Jesus(예수) - 고유명사로서 그 사람의 이름 

Christ- 보통명사,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말로 야훼와 호세아가 결합된 말입니다. 야훼는 하나님이고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말이 예수의 의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메시야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보통명사 - 누구라도 메시야가 될 수 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예수님이 활동하신 1세기 -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끊어진 상태, 그러나 그들에게는 비롯 정통성은 없지만 왕과 제사장은 존재, 로마의 식민치하 아래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다윗과 같은 참된 왕으로서의 메시야. 

그 메시야가 왕으로 올지, 선지자로 올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해 줄 그 어떤 누군가를 기다리며 메시야 대망론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유대의 사회, 특별히 당시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종교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이에서 예수의 출현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이다. 

이 두 부분을 경계짓는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 사건이다.  

 

[마 16:14-17]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여러 메시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이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 이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이야기가 없다. 제자들의 고백 이후에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기디린 메시야는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메시야인데 그 메시야가 참혹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도 이전까지의 메시야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메시야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들의 생각 바깥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구약성경에서도 이미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모습이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4번에 걸쳐 하나님의 종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메시지는 바로 이사야 52장 13-53:12까지에 묘사된 메시야의 모습이다. 

 

(사 52:13-53:7)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7)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사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트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향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 -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실제로 예수의 연구가 - 외모적으로, 어떤 존귀함을 찾아볼 수 없던 모습. 

사도 바울 역시...

 

그런데 영화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의 모습 - 유대인이 아닌 백인의 모습, 금발이나 연한 갈색, 인자한 모습. 

세상의 문화는 예수를 그렇게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 - 당시 입에 담지도 못하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 

           늩지 처참 -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

           그런데 그렇게 죽어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외모. 왜? 

이사야 53장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 

왜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어야 했는가?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 때문이다. 

 

그의 사명을 상징하는 사건 - 구약의 제사, 특별히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 속죄일의 희생양

구약의 성막, 성전 -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교회보다 훨씬 거룩하고 신비한 모습이 아닐까? 

성막 - 외부에서 보편 꺼먼 가죽으로 쌓인 음침한 천막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 매일 같이 양과 염소, 송아지와 비둘기를 잡아 제사하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몇번씩 - 도살장의 모습이다. 그들의 각을 뜨면서 발생하는 피비린내, 타면서 발생하는 고기냄새.

일년 내내 진동 - 거룩? 왜 이래야만 했는가? 그것을 통해, 그 예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난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의 벽이 이토록 컸다. 

그들이 행했던, 마음 속에 품었던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외면하고, 불순종하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모든 죄...

사람들끼리 전쟁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빼앗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그 모든 죄가 그런 아수라장 같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피의 제사 속에서 또한 불결해진 성막 자체, 제사장, 레위인의 모든 더러움, 그리고 매일의 제사를 통해서 다 씻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한 대속죄일이 일년에 한 번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제사의 날이지 죄를 씻지 못하면 당하게 되는 심판의 날. 

 

  • 대속죄일 예배의식의 절차 및 방법
  • 수 송아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침. 
  • 숫 염소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성소에 뿌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회막과 지성소를 성결케 하는 의식
  • 나머지 한 염소 (아사셀 염소): 대 제사장 아론은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그동안 지은 모든 불의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다 보냅니다. (죄의 전가) 그리고 정한 사람 하나를 통해 그 염소를 끌고 나가 아무도 살지 않고 살지 못하는 사막 한가운데 광야에 가져다 버리게 되는데 이 사이 백성들의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다 없애기 위해서 지나가는 염소의 몸과 머리에 침을 뱉고 자신의 죄를 마치 그 염소 때문인 것 처럼 다 저주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게 됩니다. 심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죄가 깨끗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맞고 괴롭힘 당한 염소를 끌고 광야 가운데 던져놓고 한 편으로 건너와 염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염소의 울음 소리만이 근근히 들려오지요. 염소는 힘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어느 덧 턱 하고 쓰러지고 결국은 독수리나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끌고 갔던 사람은 염소의 죽음을 확인 한 후에 백성들에게 알리면 백성들은 환호하며 우리의 죄가 다 사해지고 사라졌다고 기뻐하며 아론은 다시 회막에 들어와 나머지 한 양을 가지고 번제를 드려 제사를 마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1년에 한 번씩 드렸던 대 속죄제의 의식입니다. 

 

 이 아사셀 염소에 대한 말씀은 오직 레위기 16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scapegoat, 희생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염소 하나를 희생시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소의 모습은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죄없는, 흠없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에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질을 했으며 돌을 던지고 모욕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해를 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안의 모든 죄를 전가하듯, 예수를 괴롭히면서 그의 십가가길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그렇게 우리의 죄를 감당할 어린양으로, 희생양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어린양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었던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분에게 무엇이든 구하고, 피비린내가 아닌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즐겁게, 평화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지성소의 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맘껏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 십자가가 아닌 영광스런 메시야,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광을 재현시킬 메시야 

그렇게 헛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정작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때론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에도 예수를 우리 생각대로 바꾸어 놓고 예수를 자신의 이상형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 때가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용히 깊이, 묵상하다보면,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그 영광스런 찬란한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을까? 

그 메시야는 왜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을까? 

왜 제자들도,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하나이다. 

나의 죄 때문이다. 

나의 그 모든 죄를 그분의 그 십자가로 모두 씼으시고, 그리고 그 분처럼 하나님을, 아무 두려움없이, 친밀하게 아버지 아빠, 하면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그 모든 장벽과 휘장을 그 분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것이다. 

 

지금도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높이 만들어줄 영광스런 이상형 예수를 사모하는가? 

충분히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으신 분이 죄인처럼, 침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면서 어쩔 떈 무력하게,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그 이유는 오직 나의 죄를 씻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는, 그래서 그 분 앞에 정말 겸손하고 감사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그리고 그 분이 걸어가신 길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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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와 제자 (본문: 9:35-38)

 

지금은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에 의해 제자훈련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에 있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여러 가지 목적, 대개는 각자 개인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제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인생의 목적보다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을 맞추는 자. 이러한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하여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설명하시고, 그들에게는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 더욱 신성한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모습, 귀신 쫓는 모습, 모든 사역의 모습을 지켜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28:19-20) 이른바 지상명령(The Great Mission)을 내리시는데 이 말씀은 분명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제자 삼은 것처럼, 너희도 제자를 삼으라는 분부를 하심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을 택하고,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고, 보이시고, 훈련시키시고 위임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 만들기 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좀 바꾸어서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성육신의 목적이 제자를 만드는 것이냐?’하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영리

구원의 4가지 원리, 복음의 핵심 원리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2.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3.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4.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è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고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è 이것이 구원의 기본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공생애의 많은 시간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함께 하시고(경험케 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마침내 승천하실 때는 너희도 제자를 삼아라 하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자와 제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들이 곧 제자입니까? 다시 말하면 제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까?

무리-> 제자 : 무리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인가?

무리와 제자는 어떤 관계인가?

(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è 이것은 구원에로의 부르심. 구원은 돈 없이, 값 없이 받는 것이다. 주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무거운 것들을 요구하신다.

[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 예수를 믿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è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무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 14:25-27]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지금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데,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가 말씀에 거하고 지켜야 하지요. 그 말씀을 최우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자기 가족들보다도 말씀을 우선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구원의 조건과 제자의 조건이 굉장히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교회만 나오면 구원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을 얻는다, 참 평안을 얻는다고 해서 교회는 나왔는데,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요구하는 것도 많고,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봉사하라 하고 헌신하라 하니까 신앙생활 점점 힘들다. 말씀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하면서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1) 구원은 값없이 거저받는 은혜지만 우리가 행함으로 인해 상급을 받는다. 그래서 그 상급에 따라서 2) 부끄러운 구원과 영광스런 구원이 나뉘게 되고, 3) 천국에서의 지위가 달라지게 되고, 4)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건 또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왜냐? 천국에는 계시록 21장에 보면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나왔지요.(21:4) 거기에는 밤이 없고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21:25-26) 증거하고 있습니다.

-> 알곡과 쭉정이부터, 부끄러운 구원상급의 문제

1) 물론 성경은 구원받은 자가 받게 될 상급, 상에 대해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받게 될 면류관과 영광과 칭찬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상급이 결정되고 계급이 나뉘게 되면 거기에도 차별이 있고,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고, 만족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우리의 현실과 다를 게 없는 것이 되지요. 자 밭에 일하러 온 품꾼들이 어떤 이는 아침부터 나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이는 오전에 어떤 이는 오후에 어떤 이는 끝나기 바로 직전에 나와서 일을 합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먼저 온 자가 더 많이 받고 늦게 온 자는 조금 받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이지요.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빨리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똑같이 한 달란트씩 주지요. 그러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2) 구원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받는 은혜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시하는 위험한 말이지요. 성경 어디에도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영광을 받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최소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부끄러운 구원은 존재하지않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10:11)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은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우편 강도의 구원에 대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3:10~15에 나오는 비유를 잘못 해석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십자가상의 구원받은 강도가 평생 죄 짓고 죽기 전에 예수님 영접했다 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친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면서 그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3) 알곡과 쭉정이는 교회 안에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 결코 구원받은 자들을 신앙의 정도로 분리해 놓은 것이 아니지요. 교회 안에도 자기 죄를 회개 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왜 제자인가?

구원받은 자에게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인가?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데에 그의 사역을 집중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 그들만 사랑하려고, 그들만 복주시려고 그들을 택하셨는가? NO,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듯이 그들을 통해서 수많은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한 자가 바로 제자인 것이다. 복받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은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è 누구를 사랑했는가? 제자를? 아니다. 세상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제자 뿐만 아니라 무리를 모두 사랑하셨다.

l  하나님의 첫째 궁극적인 관심사는 제자가 아니라 무리다!

(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      하나님의 심정, 그리스도의 심정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왕자로 태어났는데 거지처럼 사는 자녀들의 모습불쌍한 거다. 한없이 불쌍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 모습그들이 왜 불쌍한가? 그들이 아버지가 있고 목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서 부모없는 고아처럼,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이다.

-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큰 할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장면시간 날 때마다, 아니 없는 시간도 내어서,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돌아돌아 가면서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 한 자, 고달픈 자를 만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셨다. ? 그들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      그런데 공생애의 기간은 정해져 있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와 사건을 알리고, 그 분을 믿게 하고 영접하게 하는 일을 전하기 위해서…. 오직 세상에 죄악에 빠진 사람들, 부모 없이, 목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알리고자, 그 일을 위해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이고, 그들에게 영혼 구원의 일을 맡기시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말씀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엄격하게 명하신 것이다.

-      예수를 따라, 그 예수가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오직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리를 위해….

-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를 보러 오기는 했지만, 아직 불완전한 자들.. 온전히 믿지 못하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때로는 쭉정이도 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잃은 양. 그런데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자들. 예수를 대신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는 자들그들이 바로 제자!

-      제자는 무리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제자 입장에서는 왜 구원 받았으면 됐지.. 힘들게 예수를 따라야 하나?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 보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야 하나? 그러니까 어떤 제자들은 내가 이렇게 하니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높은 자리 주소서상급 주소서하지만 제자는 상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깊히 사랑하는 자, 그 사랑을 정말 깊히 깨닫고 체험한 자가 하는 것이다.

-      베드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치라. 네가 내 양을 좀 맡아라…. 우리가 상급을 위해서만 일한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라 공로로 일하는 것이다. 거기엔 내가 일했으니 자리 주세요 하는 거래만 있다. 자기를 모두 내어 줄 수 없다. 그런데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온전히 죽여야 돼. 거래하는 자는 도저히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지 못해.. 그러니까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에 감동된 자.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를 죽이고 한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극단적인 두 교회

1) 제자에 관심이 없는 교회: 성도를 양육하지 않고, 성숙시키지 못하는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새신자들로만 가득찬 교회는 능력이 없고, 성숙이 없고, 사명이 없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제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신자, 말씀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교회 교육의 목적이고 기능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의 사명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제자에만 관심이 있는 교회: 그런데 교회가 너무 제자에게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한 자, 예수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자가 마치 쭉정이인양, 죄인인 양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 또한 교회의 구원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리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관리 대상은 제자가 아니라 무리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무리를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l  교회: 제자들을 양육하여 무리들을 돌보게 하는 곳

l  무리:자기 목적, 자기 이익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자

l  제자: 예수가 선택하여 자기를 부인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

제자가 무리의 모습을 띠는 교회는 무리를 향한 돌봄이 없다. 서로를 향한 이익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제자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다.

 

l  제자의 특권

홍해를 건넌 것- 구원받은 백성 무리

요단강을 건너는 것 성화, 성결을 체험하여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것 여호수아, 갈렙

가장 큰 공신이지만 가장 힘든 길, 양보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것. 그 분과 은밀히 교제하는 삶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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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베데스다 교회 (요 5:1-9) 

 

사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중에 마태, 마가, 누가 - 공관복음 -> 바라보는 바가 같다. 

 아침묵상 - 마가복음 (제일 일찍 쓰여진 최초의 복음서) 

 마태, 누가복음에는 마가복음의 내용이 거의 반영되어 있다. 

 요한복음 - 제 4 복음서, 공관복음이 다루지 않은 요한만이 알고 있는 내용, 혹은 영적인 해석이 필요한 내용

 가장 영적인 복음서-> 가장 높이 나는 독수리에 빗대어서 독수리 복음서. 

 

 2장 - 가나혼인 잔치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 

 4장 -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오늘 나눌 베데스다 연못의 사건 -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 사건이 끝난 다음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이 다른 복음서와 처음으로 같은 사건이 소개되는 것이다. 5장에 가서야... 

 

 오늘 다룬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사건 역시 굉장히 중요하고도 상징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사건이다. 

 

 1. 배경 (1-2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유대인의 명절 (시간) : 어떤 절기인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유월절이나 맥추절, 칠칠절 - 온 이스라엘 민족이 모이는 떄
  • 예루살렘: 신앙의 중심지. 예배의 장소 
  • 양문 (양들이 드나드는 문) : 이중적인 장소 - 희생과 제물의 문 Vs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왜? 가지고 온 제물을 검사맞고 교환하고... 성전 정화- 예배를 두고 장사하는 곳. 
  • 베데스다 베이트 (집) + 헤세드 (은혜, 자비, 사랑) : "은혜의 집, 자비의 집" 이라는 뜻. 
  • 많은 환자 :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

->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유대인들에게 있어 병이 의미하는 것 - 육적인 질병에 더하여 영적인 의미 

맹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 

다리를 저는 - 절뚝이가 아닌 걷지 못하는... 서지 못한, 연약하여 생명력을 잃은  

혈기 마른 - 무감각한 , 반응하지 않는...

 

2. 문제제기 

  • 그런데 은혜의 집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은혜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은혜를 찾을 수가 없다. 정작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 베데스다 - 어찌 보면 교회를 나타내는 장소. 예배의 도시, 희생의 제물이 있는 곳에 정말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있있는 곳 -> 그런데 상상만 해도 은혜라기 보다는 비참한 광경이 그려진다.  

 

3. 그들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올 때 물이 진동하고 그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을 듣고 기대하고 있다. 

 

4. 이것이 정말 은혜인가? 

  • 때- 가끔 (결코 풍성한 은혜가 아니다). 백화점 경품 추천보다도 확률이 낫다. 그런데 백화점 경품은 추첨이라도 하지 이 은혜는 언제 있을지 모를 물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야 한다. 그럼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경주이다. 1등하면 상주는 것은 어디에서나 있는 경제적 거래이지 더 이상 은혜라는 말을 쓰기가 민망한 것이다. 
  • 대상- 그리고 지금 이 곳에 은혜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들을 보면 더욱 은혜라는 말을 의심하게 된다. 

               맹인(보지 못하기 때문에 물이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 

               다리 저는 사람 (그는 다리가 불편에 경주할 수 없는 사람이다)

               혈기 마른 사람 (중풍병자, 그 역시 기력이 없어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눈에 불을 키고 있다가 아주 가끔 천사가 나타나 요이 땅 하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기적을 베푼다. 이건 은혜라기 보다는 정말 잔인한 게임이다. 이건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도 더 불가능한 확률을 가지고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만약 어떤 돈 많은 사람이 경품을 걸고 이러한 일을 진행한다고 하면 그를 칭찬하기 보다는 잔인하다고 비판을 할 것이다.  

 

5.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지금의 교회 안에는 없는가?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절망시키는.... 

언젠가 나에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나타날 거야...(막연한 기대) 

내가 은혜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성이 모자라서, 남보다 믿음이 없어서, 열정이 없어서 그래...

언젠가 나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거야

먼저 못에 들어간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막연한 기대를 품지만 정말 그런 은혜는 희귀한... 

 

6. 율법 주의자들의 신앙

은혜가 임할 때에 그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다. 무능한 사람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의 구원관이 이러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것도 흠없고 거룩한 율법의 완수자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린 양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때에만 선택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7. 38년된 병자

여기에 삼십팔년 된 병자가 누워 있다. 그는 여러 병자 중에서 그나마 전혀 은혜를 기대할 수 없는 자다. 

누워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기껏할 수 있는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남들이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는 혼자 서지도, 걷지도, 홀로 물에 들어갈 수도 없는자다.  

 

(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라는 기간만 나왔지 그가 어떤 병에 걸려있는 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떤 병보다도 38년이라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삼십 팔년이라는 그 환자의 병력에서 구약에 나와 있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신 2: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 출애굽해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 - 2년, 38년 - 율법을 받은 후의 시간 - 38년 

       * 가데스 바데아 - 여호수아가 열두 정탐꾼을 보낸 땅. 우리 힘으로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한 땅. 

        -> 베데스다 연못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저 곳에 들어가리라 하며 38년을 기다리고 있는 병자의 모습과 광야 가운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우리 힘으로 절대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어하면서 유리구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들 모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다. 그들이 거한 곳은 모두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고 무능하고 연약하다.  

야훼 하나님은 분명 존재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내 여호와가 되지 못하다.  

남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너무 무정하고 엄격한 분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잔인한 하나님이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 가운데 이런 시기가 있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이 계신 것도 확실하고, 내 삶을 그 분이 인도하신 것도 확실한데, 매일의 삶 속에서 은혜가 없다. 즐거움이 없다. 

그냥 똑같이 언젠가 나에게도 복이 오려나 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대감도 없이 인생이란 다 이런 건가 하고 반복적으로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던 경험....

 

말씀은 너무 어렵고, 복은 사모하지만 무엇인가 하면 할수록 모자란 것 같고, 남들보다 못한 것 같고....

 

8.  예수, 복음으로 다가오다! 

 (요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주님: 자기 힘으로 노력으로 무언가를 해보려다가 38년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며 여전히 절망하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이것이 복음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데스다만 죽어라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열심히 달려 구원을 이루리라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이 베데스다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에 38년된 오래된 병자를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 이것이 38년된 병자에게는 얼마나 울화통 터지는 질문입니까? 

아니 그가 여기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입니다. 

낫기를 포기하면 여기 나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왜 이 질문을 하시는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가운데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앞에 두고 그들은 자기들은 힘이 없어 못들어간다고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애굽이 더 좋다고, 광야가 더 좋다고 머무른다.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38년동안....

 

38년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낫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는 어느덧 낫기를 포기하고 그저 익숙한 공간에서 남들이 은혜받는 것을 바라보는데에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왜 교회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우리 영혼이 낫기를 원해서 아닙니까?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사람들로 부터 상처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받은 영혼 낫기를 기대해서 나온 것 아닙니까? 십자가의 보혈로 씻고, 죽어서 가야할 영생 뿐 아니라 매일 매일의 구원을 이루면서 예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기 위해서....

 

너무 오래된 병이 되어 어느덧 신앙생활의 목적이 바뀐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업적을 이루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물론 이미 구원 받았고, 영생을 믿기에 나 자신보다 남을 구원하고, 열매를 맺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 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재림 때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 

난 아직도 미완성이다. 난 아직도 고침받아야 한다. 

 

난 그저 날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러 나온 것이지 더 이상 바랄 것도, 필요한 것도 없다?

구원의 이중성 - 궁극적, 최후의 구원

오늘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경험되고 완성되는 구원.

왜?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력과 그 흔적 속에서 살아가기에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구원히 필요한 존재이기 떄문이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우리는 구원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오늘의 은혜가 필요가 없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더 이상 고칠 것도 필요한 것도 없습니까? 

찬송가 가사 처럼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오늘의 흡족한 은혜 간절히 기다리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까지 우리가 처한 영적인, 또한 육적인 상태이지 않습니까? 

 

정작 은혜받으러 온 사람들이 은혜 받는 통로를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익숙해져 버린 방법에 의지하다가 그저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두리뭉실하게 신앙생활 하면서 그저 난 할 도리 다한다고 자기 위안 삼으면서 자기 한계 안에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 신앙생활-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를 초월하는 것.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자기 안에 갇혀서 신앙생활 한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이건 자기 변명이다. 하느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그러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했는데 남들 때문에 은혜 못받는 다는 것이다.  
  • 자신의 불순종과 믿음없음틀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남이다. 내가 열매맺지 못하는 이유, 은혜 받지 못하는 이유.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 떄문에, 아벨만 없으면, 다윗 때문에....

 

10.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절) 

변화는 변명이 아닌 순종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능력은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지금까지 그는 자리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 자리는 38년동안 그가 의지하던 그의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38년 동안 그 자리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에 의지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38년동안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날 변화시키지 못하고 내 영혼을 치유하지 못하고, 내 삶에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을 버리고 내 말을 좀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고 

모세에게 와서 "네 신을 벗어라" 하신 주님이 이제 38년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이제 내가 의지하던 방법을 버리고 내 말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네 노력으로 하는 신앙이 아닌 내 말에 응답하고 내 말에 순종하고 내 말에 너 자신을 부서뜨리고 넘어서고 초월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38년된 신자는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타성에 젖어 버리고, 자기 변명하기에 급급한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다가가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우리 신앙의 어두운 과거입니다. 

 

네가 진짜 낫기를 원하냐? 네가 진짜 은혜받기를 원하냐? 

그럼 일어나라. 떠나라. 자리를 들고 안주하지 말고,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하라! 

 

은혜는 내가 바랄 수 없는 것을, 내 공로가 아닌 것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한 대로 보상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쳐주시는 분이다.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는가? 낫기를 원하는가?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트레이시 제일교회라는 새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교회는 이름 뿐인 은혜의 집이 아니라 참 베데스다, 은혜의 집이 되기를 원한다. 

참 은혜의 집은 주님을 만나는 집이다. 

주님을 만나 내가 고침받는 집이다. 

우리 성결교회의 교리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거읍날 뿐 아니라 성결을 통해 주님 닮아가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이 치료받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 전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나아야 한다. 

내 연약한 몸과, 내 불안한 마음과,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이 나아야 한다. 

오래된 병자는 바리새교인이다. 병자이면서 의로운 줄 알고, 연약하면서 강한 줄 착각하는 병자가 바리새교인이다. 

은혜의 성도는 연약함을 알고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그 분이 고쳐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제 성전 예배를 통해 다른 성도들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 먼저 고침받고 나아 은혜를 전하는 참 베데스다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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