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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23-24절 상실 너머에 있는 형통의 세계

 

요셉 - 라헬로부터 난 아들, 사랑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 성경은 특별히 사람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에 대한 기사들이 많다.

솔로몬 - 밧세바, 잘못된 관계였지만, 다른 처들 - 거의 정략결혼,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다른 아들들보다 솔로몬을 가장 사랑했다.

사무엘 -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아들...

 

우리 성도의 위치

[시 2:7-8]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누구로부터 나은 자식인가?

[행 13:32-3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우리는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그 분의 자녀가 된 자들. 사랑받는 자.

 

요셉 -

  • [창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자. 홀로 집에 남아 아버지와 함께 유하고, 남자이면서도 혼자 채색옷을 입고....형들은 일하러 가고. 편애 중의 편애..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형들에 대한 배려도, 형제우애도 잃어버리고(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자신이 사랑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인격적으로 볼 때 미성숙한 자. 형제들 사이에서 밉상.

cf) 사도 요한 -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 그런데 그는 성령 받은 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를 받들고, 마리아를 받들고, 자신의 범위를 넘지 않고 섬기는 자, 사랑의 사도

여기에 비해 요셉은 사랑받는 것을 통해 남들의 미움을 받는다.

 

자기의 꿈을 가감없이 형제들에게, 두 번씩이나 고함으로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받았을 터인데 꿈이야기를 통하여 이젠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형들 위에 군림하려는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 수 벗다.

  •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그의 꿈보다 더 미운 것, 그의 말...진실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배려가 없는 진실은 오히려 남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말을 통해 배려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형들이 악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느날 야곱이 세겜 땅에서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밥을 갖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평소 때와 같이 감시자로 보낸다. 고자질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고하게 한다. 이미 다른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형들은 아버지에게 이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머물면서 양들을 친다.

아버지는 편애하고 형들은 불순종하여 아뢰지 않은 다른 곳에 진치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가오는 요셉을 보고 유명한 말을 한다.

 

  • [창 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구절을 잘 기억해 두자.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채색옷 - 요셉이 사랑받음을 벗기는 것, 그가 가진 모든 사랑을 벗기고 빼앗아 버림.

그리고 구덩이에 던진다. 구덩이는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이다. 누가 꺼내주기 까지는 나올 수 없다.

깊은 낙망, 깊은 우울증. 깊은 슾픔, 깊은 절망 -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설명을 붙인다. 그 구덩이는 빈 것이고 그 속에 물이 없다.

왜 이 구절을 붙였을까? 무언가 의미를 주고자 함이다. 빈 것이고 물이 없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물이 없음은 이제 받아왔던 모든 은혜가 사라진 상태다.

이후로부터 요셉의 삶은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것 마냥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옷이 벗겨진 채로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는 인생이 된다.

꿈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사는 이유도, 희망도 사라진다. 꿈이나 비전같은 말은 요셉의 삶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사치가 되었다.

 

적이 아닌, 악인들이 아닌 형들에게 배반당한 요셉 -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다 사라져 버림.,

아버지의 사랑이 속수무책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원인을 찾아보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야곱이다.

 

상실 - 자발적인 포기는 상실이 아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갖고 있는 것, 겅제로 빼앗기고 사라져 버릴 때 - 우리는 그것을 상실이라 한다.

요셉은 지금 전형적인 상실의 삶을 살아간다 - 그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을 지는 상실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

부정, 저항, 포기, 낙심, 우울, 생의 의욕이 완전히 꺾여짐.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 - 잃어버린 것을 그 것보다 더 한 것으로 채우는 것 (욥- 나중 받는 것으로 이전 잃어버린 것들을 극복한다)

가치 없는 것으로 그 상실을 극복하고자 할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중독과 일탈과 타락의 삶으로 더 깊숙히 추락한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다.

 

  • 보디발의 집에서 적응한다. 그럭저럭 삶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도록 노예의 삶에 잘 적응한다. 눈에 띠는 노예가 된다.

요셉은 집에서 궂은 일을 해 본 일이 없다.그런데도 이방 땅, 다른 문화, 다른 언어의 사람에게 팔려가서 온갖 굳은 일을 해가며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는다.

.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노예로서의 삶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경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하나의 구절을 통해 힌트를 준다. .

 

상실을 대체하는, 누군가가 그에게 있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요셉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등장.

사랑받는 자녀였을 때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등장한다. 언제? 그가 상실의 극한에 있을 때에

꿈을 잃어버렸을 때에, 형들에게 배반당했을 때에, 물이 없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

 

그런데 그 전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자신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에게 경험된 하나님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비로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만난다. 아버지에 사랑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 분은 언제나 존재하시지만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경험할 때 그 존재는 현존, 임재, 동행이 된다.

 

포기 할 만할 때에 그의 삶에 생명력이 들어온다.

아버지의 집에서도 하지 않던 남의 집을 자신이 관리한다. 자신이 청소하고 운영한다. 모든 것을 관리한다. 놀라운 생명력이다. 포기의 순간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시간이 된다.

 

형통 - 찰라흐

외적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영과 혼이 만족되면서 오는 만족과 기쁨.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형통이다.

삶에 동기가 생기고 생명력이 생긴다.

그런 형통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한다.

 

  • 또 한 번의 시험 - 두 번 째 상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힘.

죄를 이겼는데 그 죄값을 치룸,.

이제 그 집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 집을 빼앗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상실이 찾아온 것이다. 어떤 상실이 더 큰 상실일까?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었다.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했다. 그래서 신나게 일하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칭찬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첫 번째 상실이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상실이라면 두 번째 상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실이다. 어떤 상실이 더 컸을까?

두번째 상실은 그간 버텨온 요셉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상실이다.

첫번째 상실이 그의 외적 환경을 빼앗는 상실이면 두 번째 상실은 그의 내면을 뒤흔드는 상실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첫 번째 상실을 신앙으로 극복하지만 두 번째 상실을 만나게 되면 무너진다. 넘어진다. 일어서질 못한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창 39:2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떤 상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견뎠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을 때에....

그런데 그 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상실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상실을 통해 요셉이 얻은 승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 넘어에서 행동하시는 분이니까... 그 분의 행동은 내 생각 밖에서 움직인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겪는 가장 흔한 실수

-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꺼야... 자신이 주도하고 해답을 내리고 하나님을 이끌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안되면 넘어지고 화내고 실망한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의 자람은 내 마음대로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이다. 그 때에 비로서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난다. 내 존재 위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 전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결국 내 믿음, 내 신념을 기대사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내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더하신다. 은혜를 받게 하신다. 요셉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포기하지 않도록, 그에게 사랑을 주신다.

 

17살에 끌려와서 27살 떄 그 감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또 붙든다.

 

성도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도 오히려 내 삶이 무너질 때

 

내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상(iMAGE)일 뿐이다.

내 과거의 믿음을 넘어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부활 전의 예수님의 상에 갇혀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제의 믿음을 깨뜨리고 오늘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실날처럼 보여진다.

말씀이 새롭게 보여진다. 그 분의 어떤 맒씀도 허투로 보지 않는다. 내 경험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 안에 내 영혼을 드린다.

 

감옥에서 3년만에 총리가 된다. - 오늘 새벽에 나눈 사도 바울의 아바리아에서의 3년....

 

[창 42:8-9]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꿈을 붙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루 하루를 살았더니 어느날 문득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결국 자신에게 주신 말씀, 자신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갔을 때에 그는 과거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말도 잃어버렸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꿈을, 비전을 잃어버려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여호와로 경험하는 삶이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난 후에 알게 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에 형들에 대한 사무친 억울함과 원망도 사라지게 된다. 상실을 넘어 형통으로, 상실을 넘어 화평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뉴욕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과 통화

예수 붙들자. 예수 바라보자. 견디고 참고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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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비전, 그리고 삶 (창세기 37장 18-20절) 


  • 요셉- 특이한 인물. 

아브라함 (복)- 이삭 (네 몸에서 태어난 자: 엘리에셀도 아니고 이스마엘도 아닌...)- 야곱 (장자권- 바로 그 자리를 놓고 쟁탈)


예수님의 족보- 장자의 족보?

두 번째의 의미- 아론이 아닌 모세, 사울이 아닌 다윗, 요한이 아닌 예수, 바라바가 아닌 바울...

요셉? 열 두 아들 중 열 한 째 - 라헬이 낳은 자녀로 가장 사랑받는 자. 

                                          - 다윗- 막내아들... 예수의 계보의 중심. 

                                          - 솔로몬: 막내까지는 아니여도 다윗의 아들 중에 서열에 끼지 못하던 자. 그러나 가장 사랑받던 자. 


첫째가 아닌 연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것, 가장 늦게 온 자가 먼저 삯을 받는 것 - 하나님의 구원 계획, 신앙의 신비. 


  • 형통의 의미 (39장) 

- 요셉의 삶에 있어서 39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 

- 형통의 의미 (2절, 3절, 23절) : 그의 외적은 환경: 노예로 팔려오고,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는 자가 되고, 끝에는 감옥에 갇히는 자가 되고....

   : 형통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함을 누리는 것, 결코 절망하지 않는 것

   : 형통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늘 함께 따라오는 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 일이 잘 풀려 걱정 근심 없는 것 Vs 요셉: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지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함으로 그 환경 안에서 최선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 

   

  • 아담과 예수 사이에서 

-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4절),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 청지기의 삶. 

-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7절) -> 뱀의 유혹 

[창 39:8-9]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이다. (뱀: 아무 것도 먹지 말라 하더냐? 너 못하는 것 있지 아니하냐? 선악과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림) - 요셉: 말씀 안에서 자유한 자의 삶의 모델.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끈질깁니까?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나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사탄은 끊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지요. 나중에서는 어떻게 그 여인을 피합니까? 

 15절)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 (죄를 짓자 옷을 지어 입는 아담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죄를 지은 것은 보디발의 아내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지금 보디발에게 요셉을 거짓 증거 하는데 

 17절에 보면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아담과 하와의 변명 _ 죄의 특성, 죄의 전가. 하나님 당신 때문에)   

 그런데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증거에 맞서지 않고 묵묵히 그의 죄의 전가를 자신이 감당하여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요셉이 아담의 원죄를 극복하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자기 가족,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리는 장면은 무고히 자기 제자, 가룟유다에 의해 은 30에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꿈의 사람

- 꿈 (dream) - 몽상, 욕망, 막연한 기대

- 비전 (Vision) -  약속, 언약, 청사진, 사명. 


75세된 아브라함 -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너는 복이 될 지라 (I will show you) 

- 이것은 비전인가 꿈인가? 


요셉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 - 곡식단이 절하는 것,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을 한 것 - 보여주신 것이다. 그 의미도 모르고 그냥 보여준 것을 본 것이다. 비전이다. 

이 비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 믿음이다.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하는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해 보자. 이런 강한 생각이 마음 속에 막 들어왔다고 해 보자. 

어떨텐가? 과연 여러분 같으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는가? 

'별 생각이 다 드네.... 내가 또 헛된 생각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보다'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말씀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까? 

목소리가 분명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변명하는가?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처럼 직접 눈으로 보이게끔 역사하시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 합리화다. 자기 변명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들 때에 그는 그것이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모세에게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다 크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들 또한 작고 미세한, 자기 생각과 정확히 분별히 되지 않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강하게 경험한 자들이 있다면 출애굽하여 광야 가운데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일 것이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굴복시키신, 홍해를 가르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신, 하늘에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내리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초현실적인, 초 자연적인 하나님을 모두 경험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좋았는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 말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도 우리는 절대로 저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삶을 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믿음이 생기겠는가? 

 

 비전에 따라 사는 삶 VS .현실에 따라 사는 사람

  • 이스라엘 백성 - 늘 현실(현실이 힘들면 애굽이 더 좋았다. 광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여기에서 살 것이다.) 
  • 네비케이토 선교단체의 창시자 도슨 트로트맨 :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꿈의 사람인지 현실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살 것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아니면 어떤 기도도 못하는 사람. 
  • 바울: 내가 푯대를 향하여.. 약속을 향하여, 목적을 향하여... 비전은 내 인생의 청사진, 약속,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어떤 것이 있다는 것. 
  • 너 뭐가 되고 싶니? 돈 많이 벌고 싶어요...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교육이, 신앙이 목적을 가리쳐주려 하지 않고 수단에 집중해 있다. 그러니 돈이 있어도 공허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 비전이 없다는 것은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없이 만들지 않았다.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목적이 있는 삶이다. 


요셉의 꿈-

  • 17세 때 - 그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의미도 알지 못했다. (말씀을 보는 것이다. 경건의 시작이다. 비전의 삶의 시작이다. 의미를 모르지만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보는 믿음이다) 
  • 떡맡은 자, 술 맡은 자 - (감옥 속에서) - 꿈을 해석한다. 의미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해석이 나와는 상관없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말씀을 알아가는 단계 - 해석하는 단계) 
  •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해결책을 알려주는 단계 - 자기의 해야 할 일을 아는 단계 - 그 의미와 자기가 만나는 단계,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되는 단계. (적용의 단계) 


처음 꿈을 꿀 때의 요셉 - 17세였지만 철부지 - 이꿈을 형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자. 그가 하는 일은 형들의 부정한 행위를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자. 혼자 채색옷을 입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 

- 그가 고난을 통해 성숙해간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우리를 삶의 극단에 빠지게 해서 꿈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악한 영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 영들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요셉을 꿈을 꾸는 자에서 꿈을 이루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 

형통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 


 꿈이 있는가? 인생의 청사진이 있는가? 당신의 삶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 하루 오늘 하루, 날마다 오늘만을 바라보면서 돌고 있지 않은가? 

 오늘이 힘들면 교회를 바뀌볼까, 신앙버리고 다른 일을 해 볼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헤메이지 않는가! 

 

 교회 나오면서도 왜 자기가 교회 나오는지, 예배의 목적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 신앙의 첫째 목적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닮는 것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제 신앙의 목적도 예수를 닮는 것이고, 제 목회의 목적도 예수 닮는 성도를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위탁하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치라, 사랑해라. 발을 씻겨 주어라. 섬겨라. 낮아져라. 십자가를 지라. 나를 따르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복음을 증거하라. 세례를 주어라....

 오늘 나에게 주시는 예수의 명령을 내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 의인 열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진정한 크리스찬 열명만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12명의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고 그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이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자기를 위해 예수를 희생시키는 무리를 만들 것인가, 예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가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꿈을 꾸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인생을 헛되이 살지 말자. 

 사탄은 지금도 꿈 꾸는 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그러나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죽이지 않으신다. 꿈을 꾸면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분의 꿈을 이루어 가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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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후에 누리는 영광 (창 50:15-21) 


다른 사람으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다든지, 나에 대해서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닌다든지, 인생의 고난 가운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 관계로 인한 고난입니다. 

성경에는 다른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불평을 들어야 했고,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욥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 때문에 괴로와했고, 아벨은 자신의 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들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인해 받는 고난은 곧 삶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요셉도 다른 사람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야곱의 열 두 형제들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특히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고 야곱의 편애는 형제들의 시기를 불러왔습니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떨어뜨려 죽게 하려하다가 상인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형들에 의해 요셉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땅에, 그것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인의 아내의 요혹을 피하여다가 강간범으로 몰려 감옥에까지 가게 됩니다. 

이런 인생이 실제적으로 주어진다면 부당한 시련앞에 절망하고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상처 투성이의 삶입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이 대개의 인생일 것입니다. 

그런데 먼 훗날 요셉이 형들을 만나 이야기 할 때를 보면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 50: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쉽게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형님들은 악의를 가지고 그 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어 내 삶과 형님들의 삶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 유익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어떻게 요셉은 어렵고 힘든 상처 투성이의 삶을 견딜 수 있었을까? 뭐 쉽게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신앙이 그를 지켰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신앙이 있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지요.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상황들을 뎐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첫 째, 요셉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보시며,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도와달라고, 구해 달라고, 그 기도의 이면에는 "하나님, 왜 내 인생을 보시지 않습니까? 왜 날 보살펴 주시지 않습니까?"하는 생각이 스며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에는 그가 중대한 위기를 맞은 후에나 고난을 당한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이 반복해서 등장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이 구절이 요셉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다섯번이나 본문에 등장합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을 때에도 하난미은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옳은 것을 선택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억지로 그 분의 뜻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다가 일을 일으키고 나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탓인양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악과를 먹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도, 왜 우리에게 선악과를 주셔서, 왜 우리를 광야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왜 하필이면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가게 하셔서...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하나님은 그 분이 하시지도 않은 많은 일에 대해 비난을 받으십니다. 

어떤 대형 교회 목사님이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마찬가지로 우리는 커다란 사건이나 비극, 문제나 위기가 닥치면 이런 말들을 하면서 영적인 사람인 양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야.." 때론 그런 믿음 속에는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고난을 계획하시면서 즐거워하는 분으로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라고 기도를 하지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 지지만 땅에서는 때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또한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자신의 방식대로 하기로 선택할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제한하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때론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잘못된 선택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당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의도적으로 요셉을 헤치려고 선택합니다. 그것은 죄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십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최종적인 결과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실수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저지른 모든 죄악을 취하여 그것들을 좋은 것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때로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때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의도적인 죄악으로 이곳 저곳에서 패배하고 다닐 때에도 하나님은 결국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쁜 상황들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에도 최종적인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거의 죽을 뻔했고, 노예로 팔려갔고, 강간범으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인생은 점점 더 밑으로 향해서 추락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은 그 비극들을 주관하셔서 어느 순간에서부터 방향을 바꾸시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유익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을 사귑니다. 그 사람은 감옥에서 나와 요셉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늦었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때에 그를 불러 바로의 앞에 세웁니다. 바로와의 한 번의 만남으로 인해 그는 애굽의 총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 뿐만 아니라 인근 모든 나라에까지 기근의 고통으로부터 도움을 주는 돕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두 보시지만 또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의 자유 의지를 막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제한하지 않고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릴 때, 그분은 우리의 의도적이지 않은 잘못된 선택, 혹은 나를 괴롭히는 자들의 의도적인 죄들까지도 사용하여 최종적으로 유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셉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님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선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요셉이 비록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에도 그 모든 역경을 끝까지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마라. 

어쩌면 여기 있는 여러분들도 지금 이 순간 어려움 가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환경의 희생양이 되고 힘겨운 처지에 놓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잘못된 선택의결과를 치루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첫 번째 주의할 것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나 힘겨운 일이 닥쳐도 자기 연민에 빠지면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절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드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자존심이 밑바닥에 닿을 때면 자신을 비난하고 깎아내려 결국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게 합니다. 

요셉은 자신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한 위기는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었고, 그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바라보고 이겨내기 위해 힘썼습니다. 

만약 지금 시련을 만나 의기소침해진 마음으로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 걸까?"하고 묻고 있다면 모든 결정을 내려 두고 말씀과 기도로 그 상황을 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연민에 빠져 낙심하고 있으면 "떠나고 싶고, 바꾸고 싶고, 피하고 싶다." 그런데 그러한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감정이다. 초점은 흐려지고 생각은 비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요셉은 자신의 삶이 전체적으로 잘못되고 있을 때에도 절대로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위치와 형들의 위치가 바뀌어 형들이 요셉에게 곡식을 구하러 왔을 때에도 요셉은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용서했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요셉은 모든 판단과 심판을 주님께 맡겼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을 믿으며 자신의 영적 생활을 지속해 나갔다. 


우리는 일이 잘못되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인 주님을 멀리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허락하셨나요?" 하며 마치 하나님의 잘못인양 반기를 들 수도 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 이 문제를 맡겨 주세요."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 믿는 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롼경을 사용할 때, 하나님은 그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개발시키신다. 그 분은 십자가를 부활로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모든 것이 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이 그로 인해 지연되거나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쁜 것들을 선하게 바꾸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그것을 취하셔서 우리 삶 가운데 선한 것으로 나타나도록 사용하신다. 그래서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신다. 죽음인 줄 알았던 십자가가 영광의 부활임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겪는 문제보다 큰 분이시다.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은 힘들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뒤돌아 보게 될 때에 우리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이 그 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게 하실 것이다. 그 상황이 결국 나에게 이렇게 유익했음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요셉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나에게 선하게 바꾸셨소. 당신을 나르 무너뜨리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나를 발전시켰습니다. 나를 더 강하고 성숙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분이 항상 나를 폭풍 가운데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 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신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꼐 맡기고 그 분께 내 삶에 일하시도록 내어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선하게 바꾸신다. 


세월호: 원래 어떤 거친 바다에서도 좌초되지 않고 평형을 복원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답니다. 

그 설계의 핵심은 선박 밑바닥의 평형수 입니다. 이 평형수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배는 항상 평형을 유지하고 배가 잠시 기울다라도 오뚝이처럼 따시 평형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세월호는 이 다른 화물들을 싣기 위해 이 평형수를 팍 줄였답니다. 결국 돈이 되는 것을 추구하다가 평형을 잃고 좌초한 것이지요.  

내 몸의 평형수가 떨어지면 우리 또한 좌초하게 됩니다. 병은 다름 아닌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병균이 침입했을 때에 몸이 저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고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건강하면, 몸의 평형수가 가득 채워져 있으면 무엇이 와도, 무엇을 해도 문제가 되자 읺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평형수를 채우시겠습니까? 여러분의 평형수는 무엇입니까?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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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창 37:18-20) 


비좁은 감방에 두 명의 죄수가 갇혀있다. 감방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고 단지 눈 높이에서 석 자 위에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을 뿐이다. 두 죄수는 그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은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을 응시했다. 그는 날마다 점점 풀이 죽고 비탄에 젖어 분통을 터트리는가 하면 절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죄수가 본 것은 그 창문 너머에 있는 하늘이었다. 언젠가 저 자유로운 하늘을 만끽하며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는 희망이 샘솟았다.  같은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 사람은 창살을 보았고 또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다. 시야의 차이가 이들의 삶에 커다란 차이를 낳은 것이다. 


새해가 밝아서 벌써 열흘이 지났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끊임없이 묻던 질문이 있었다. 너 커서 뭐가 될래? 

언젠가 부터 내 인생에서 그것에 대한 질문이 사라졌다. 

더 이상 꿈을 묻지 않고 날마다 기도해도 막연하게 그저 교회 부흥하게 해 주세요. 재정 넉넉하게 해 주세요. 교인들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들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친다.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 로고스 교회를 이 땅 프리몬트에 세운 목적이 그저 우리 성도들이 천국가는 날까지 교회 사라지지 않고, 교인들 아프지 않고, 재정 빵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을까? 

그런데 대부분 성도들이나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제목은 부흥과 재정, 성도들의 안위 문제이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정확한 뜻과 목적을 바라보지 못한다. 

물론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그러나 부흥해서 무엇할 것인가? 부흥된 이후에는 무엇할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목표를 잃은 이스라엘 같이 되어 버린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은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다. 왜 그런가? 

가나안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5년 후, 10년 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매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이 꿈을 잃어버리면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는가? 

자녀들에게도 꿈을 묻지 않는다. 자녀를 바라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올 해 또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야 할까? 자식을 바라보면서도 미래를 보지 않고 현실, 현재, 매일 매일의 삶을 살아가기에 바쁘다. 

흔히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꿈을 가진 사람은 삶의 에너지가 식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목적이 없기 때문에 방향도 없고 날마다 삶을 체크하지도 않고 그저 날마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다. 

결국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택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야곱을 낳아 이스라엘을 이루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할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 

75세이면서도 자식도 없고, 아버지의 직업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별 볼일 없고, 소망 없이 그저 하루 하루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그런 인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런 별 볼일 없는 인생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주신다. 소망을 주신다. 

(창 12:1-2)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러분이 어느날 기도하는데 이런 응답을 받았다고 해 보자. 이런 강한 생각이 마음 속에 막 들어왔다고 해 보자. 

어떨텐가? 과연 여러분 같으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날 수 있는가? 

'별 생각이 다 드네.... 내가 또 헛된 생각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보다'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과 말씀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까? 

목소리가 분명하면 순종할 수 있다고 변명하는가?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처럼 직접 눈으로 보이게끔 역사하시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 합리화다. 자기 변명이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들 때에 그는 그것이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모세에게는,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다 크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그들 또한 작고 미세한, 자기 생각과 정확히 분별히 되지 않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강하게 경험한 자들이 있다면 출애굽하여 광야 가운데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일 것이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을 굴복시키신, 홍해를 가르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함께하신, 하늘에서 만나와 매추라기를 내리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초현실적인, 초 자연적인 하나님을 모두 경험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이 좋았는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 말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도 우리는 절대로 저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삶을 살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믿음이 생기겠는가? 

 

본론 


성경에서 꿈의 사람 하면 바로 나오는 사람이 우리가 읽은 요셉이다. 

요셉에 대한 보통의 생각들 - 꿈의 사람, 똑바른 아이, 모범생,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한자. 

특별히 우리가 요셉의 생을 떠올릴 적에 대다수가 기억하는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39장에 나오는 장면인데 중요한 대목이니까 다 함께 한 번 찾아볼까요? 

자, 오늘 읽은 본문에서 조금 시간이 지나 장면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말씀한다.  


지금 상황은 요셉이 노예로 잡혀와 이방땅인 애굽에서 노예로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상황이 좋고 내 주위가 평안한 것이 형통이 아니라 외적인 상황은 어떨지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형통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다. 


3절에는 형통하는 요셉을 보디발이 바라보며 그를 자기 가정의 총무로 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특별히 4절에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곳을 다스리게 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장면을 창세기 3장의 아담의 범죄하는 장면과 함께 보면 요셉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 수가 있지요.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니까... 

 8절부터 요셉이 뭐라고 말하냐면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절에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의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마치 창 2:16-17절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뱀이 와서 무엇이라며 유혹하냐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며 아담을 혼동케 합니다. 

나머지 다 먹고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인간이 다 되고 하나만 못하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 하나가 나중엔 너무 커 보여서 나머지 자유는 다 보이질 않고 오직 못하는 하나 때문에 부자유한것 같은 삶을 살 때가 많지요., 

사탄이 지금 그런 인간의 본성을 이용해서 아담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자기가 얼마나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가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지요.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않았습니다. 금한 것은 오직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 안에서 자유한 삶) 

잘 보아야 할 것이 지금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가리켜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큰 죄악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아담이 실패했던 사탄의 유혹을 완벽하게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끈질깁니까? 

10절에 보면 여인이 날마나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 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사탄은 끊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유혹을 피하는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지요. 

나중에서는 어떻게 그 여인을 피합니까? 


 15절)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 (죄를 짓자 옷을 지어 입는 아담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지금 죄를 지은 것은 보디발의 아내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지금 보디발에게 요셉을 거짓 증거 하는데 

 17절에 보면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아담과 하와의 변명 _ 죄의 특성, 죄의 전가. 하나님 당신 때문에)   

 그런데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증거에 맞서지 않고 묵묵히 그의 죄의 전가를 자신이 감당하여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요셉이 아담의 원죄를 극복하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자기 가족, 형들에 의해서 은 20에 팔리는 장면은 무고히 자기 제자, 가룟유다에 의해 은 30에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꿈을 생각하며 그 꿈의 성취를 애굽의 총리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총리가 되어서 형들과 아버지까지 와서 총리인 요셉에게 와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셉의 꿈의 성취는 애굽의 총리가 된 것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한 것. 성경에서 요셉의 위치, 중요성, 그의 영향력은 그가 구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처음 부터 모범생이고, 온전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초기의 요셉 

(창 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창 37: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고자질쟁이, 부모의 과잉사랑, 섣부른 발설. 왕따의 기질 


그렇다면 무엇이 요셉을 성숙케 하였는가?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요셉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광야),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드렸던 절대절명의 기도의 순간들, 모세가 궁전을 떠나 광야에서 고독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듯이 

요셉은 아버지의 과잉보호에서 떠나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을 통해서 신앙의 성숙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죽음, 이생의 자랑의 상실, 진정한 자아와의 대화, 진정한 자아와 하나님과의 대면, “거듭남, 체험, 중생의 순간)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요셉의 성숙의 시간 

육신적으로는 가장 피곤한 시기. 영적으로는 가장 갈급한 시기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시기. 

그러던 그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팔려가면서부터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보호가 없어도, 보디발의 집에 있어서나, 감옥에 있어서도 요셉을 증거하는 성경의 묘사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도다"


그는 연단을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는,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그가 세 번의 꿈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릴적 형들과 아버지인 야곱 앞에서 형들의 농사한 곡식단이 자기의 곡식단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내게 절한다는 내용의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형들이나 아버지가 그 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심이 없고 자신도 그 꿈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들은 형들과 아버지는 우리가 네게 절을 한다는 소리냐 하면서 화를 내며 급기야 요셉을 팔아넘길 정도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나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요셉은 감옥안에 잡혀온 왕의 관원장들의 꿈을 듣습니다. 

이번에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히 해석해 냅니다. 그런데 실수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 꿈 가운데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놓쳐 버립니다. 그 꿈은 현실이 되었지만 자신을 그 꿈 속에서도 아무런 의미도, 역할도 찾지 못합니다.   

마지막 바로의 꿈을 들으면서 요셉은 그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꿈의 주도자가 되어서 결국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서 꿈을 꿀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점 더 깊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신다. 비전을 주신다. 삶의 사명을 주신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에너지가 되고 새명줄이 되고, 목적이 되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꿈을 꾸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꿈꾸는 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세력이 있다. 

그저 하루 하루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음을 향해 살아가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우는, 그야말로 감옥 속에서 철창살만 바라보도록, 하늘을 가리는 존재들이 있다.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37:18)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우리를 삶의 극단에 빠지게 해서 꿈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악한 영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악한 세력의 방해를 말리지 않으신다. 

 악한 영들은 우리를 고난에 빠뜨려서 꿈을 버리게끔 만들지만 하나님은 또한 그러한 고난을 통해 자신을 의지하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품안에 있던 요셉이 나와서 오직 하나님과만 교제하여 신앙의,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옴을 알기 떄문이다. 

 고난은 악한 영들을 통해 오지만 고난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고난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인사말에 우리 로고스교회의 목회 비전이 나온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미 실패했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부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때 부흥했던, 아니 지금도 겉모양은 여전히 부흥하는 교회들로 인해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를, 복음을,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있다. 

 수 많은 무리들을 쏟아내지만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기의 삶을 내어 놓는 Real Christian은 점점 사라져 간다. 

 더 이상 이렇게 부흥만을 외치는 교회를 소망하지 말아야 한다. 이전과는 다른 교회, 다른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나오면서도 왜 자기가 교회 나오는지, 예배의 목적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나의 신앙의 목적은 예수님 닮은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것이다. 

 내 목회의 오직 유일한 비전은 예수님 닮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 의인 열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진정한 크리스찬 열명만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해 12명의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고 그 열 두 명의 제자들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이 되었다. 

 

 교회의 미래는 자기를 위해 예수를 희생시키는 무리를 만들 것인가, 예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자가 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꿈을 꾸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인생을 헛되이 살지 말자. 

 사탄은 지금도 꿈 꾸는 자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저기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

 그러나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죽이지 않으신다. 꿈을 꾸면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분의 꿈을 이루어 가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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