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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송구영신예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1.09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 (창 13장 8-13절)
  2. 2021.01.09 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12절) -2020년 12월 31일 송구예배 설교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 (창 13장 8-13절) 

 

흔히들 한국교회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에 '기복신앙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은 복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복을 소원한다는 것이다.  

왜 복을 소원하는가? 복이 없기 때문이다. 복이 없는 사람이 복을 찾아 다니며 간구하고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히 복을 밝히는 민족이다.  

옛날 집안의 가구들을 보면 숟가락에도 복, 젓가락에도 복, 베개포에도 복, 이불과 요에도 복, 심지어 변누는 요강에도 복, 대문 손잡이에도 복, 현관에는 복조리개를 걸어놓기도 했다. 

곳곳마다 복을 써 놓고, 복을 기원했다. 새해만 되면 지금도 예수 믿던 믿지 않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세배하며 인사한다.  

왜 그런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복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 처름 기독교가 들어갔을 때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었던 제일의 전도 표제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였다. 

실재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받았다는 것을 간증하고 다니며 전도했다.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정말 복 받은 사람입니까? 

 

예 1 - 선악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다.  

영어로는 "It was good" 이다. 

처음 시작부터 세상은,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인간은 선한 존재, 다시 말하면 날 때 부터 복 받은 존재였다. 

그런데 복으로 가득찼던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복을 잃어버렸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복을 대표하는 곳이 에덴동산이다. 

"에덴"이라는 뜻은 행복과 기쁨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들이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는 선악과 때문이었다. 

그들의 눈이, 마음이 선악과에 꽂이자 에덴의 모든 행복과 기쁨이 다 쓸모없어져 버렸다. 

선악과만 먹으면....하다가 결국 에덴에서 나오게 되었다. 

선악과를 사탄을 통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다. 이 구절을 요한일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표현하며 복이었던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정욕을 위해 사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예 2) 사울 

사울은 왕이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유능한 장군이었고 용사였고, 왕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윗을 주목하게 된다.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모습을 참지 못하고 시기하다가 결국 분노하게 된다.  

"저 놈만 없다면..."

이후의 삶은 우리가 너무 잘 알듯이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제거하는데 소모한다.  

한 사람을 시기하다가 결국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  

(가인- 예배의 실패- 그가 필요한 것은 관계의 회복. 그런데 그가 찾은 해결책은 아벨만 없다면...) 

 

사탄의 유혹은 무엇인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은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복을 쫓아 살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통제를 떠나면 더 자유하고 재미있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막상 떠나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예 3) 탕자의 비유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탕자의 비유를 통해 다시 설명한다.  

아버지의 것 중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살면 더 재미있고, 즐겁고, 자유한 삶을 살 것 같았는데 막상 떠니니 결국 궁핍이 찾아오고 짐승보다 못한 삶, 노예같은 삶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삶이다. 

자기들끼리 죽이고, 다투고, 시기하고, 저주하고, 탐욕과 욕망, 음탕함과 절망이 가득차다. 그래서 이후의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기복신앙이 되었다. 

잃어버린 복, 빼앗긴 복을 찾아 헤메이기 시작했다.  

복을 얻기 위해 안달이 난 삶을 살기 시작한다. 복을 얻기 위해서 더 벌고, 더 빼앗고, 더 배우고, 더 가지고.....

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가?  복을 달라고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울 복을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만 먹으면, 다윗만 없으면, 애굽의 노예에서만 벗어나면... 가나안에만 들어가면, 복을 누릴 줄 알았던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어도,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져도, 소망하던 것을 얻어도 정작 복을 누리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한다.  

 

우리는 오늘 읽은 아브라함과 롯의 기사를 통해서 기복신앙과 복의 신앙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참 복인가, 무엇이 참 복된 삶이고 복된 사람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2장은 복을 얻기 위해 우상을 만들었던 가정에서 자랐던 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75세가 될 때까지 땅도, 자식도, 자신이 생각한 아무 복도 얻지 못했던 한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창 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1절: 떠나라, 보아라. 가라 -> 말씀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주신 것이다. 에덴 동산이 복의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2절: 복의 주체가 나온다. "내가 너로..." 복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복의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이 주신 복의 내용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을 복 자체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나온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복이 흘러가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롯을 먼저 다룬 후에 다시 한 번 묵상하도록 하자. 

       

       4절을 보면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다. 아브람이 따라가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롯이 따라가는 대상은 아브람이다. 

       롯이 아브람과 함께 있을 때는 아브람이 가진 복을 롯도 가질 수가 있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롯은 아브람을 통해 아브람이 가진 복을 나눈다. 

       그런데 이 둘이 함께 거하는 것이 아브람에게도 롯에게도 자꾸만 불편을 가져다 준다. 

       아브람에게는 롯과 함께 있는 것은 그가 따르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완전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과 함께 함으로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 

       친척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롯과 함께 거함으로 과거에 우상섬기는 습관과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가는 자라면 롯은 철저히 복을 추구하는 자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다. 

       모든 민족에게 주시는 궁극적인 복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다. 영생이다. 

       

       그런데 롯은 구원이고 영생이고 필요없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복만 있으면 된다. 

       아브람에겐 복이 목적이 아니요 말씀이 목적인데 롯에겐 말씀은 복을 얻게 위한 수단이다.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복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복을 위해 신앙 생활 하는 사람과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자, 말씀은 곧 그리스도니까 그리스도를 쫓아 신앙생활 하는 자가 함께 있다. 

       처음엔 복 받기 위해선 말씀에 순종하라 하니까 잘 티가 안난다. 

       복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자도, 정말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도 다 같이 말씀을 통해서 거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둘은 점점 나뉘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되듯이 복을 쫓는 자와 말씀을 쫓는 자가 교회 안에서도 나뉘게 된다

       언제? 어느 정도의 복을 얻은 후에.... 

       

       (창 13: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은 소유가 많아질수록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자 한다. 주면 줄수록 더욱 궁금한 것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관심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향한다.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말씀의 열매가 나타날수록 말씀을 사모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분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롯의 관심은 여전히 복이다. 가지면 가질 수록 눈에 보이는 복에만 관심이 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눈은 자꾸만 밖으로만 향한다.        가지면 가질 수록 더욱 욕심 부리는 재벌들 전쟁처럼 롯은 더 화려한 것, 더 많은 것, 더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말씀은 점점 더 부담스럽기만 하다. 

       

       아브람이 먼저 제안한다. 다투지 말자. 네가 먼저 선택해라. 

       말씀을 따르는 자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자기 먼저를 내세우지 않는다

       

       롯의 선택을 보자 

      (창 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가 취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짝퉁 동산이다. 

      보이기만 비슷한 것이다. 복인것 같지만 정말 참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14절부터 아브람에게 주신 땅을 보자. 

      바라보라. 이르리라. 주리라. 다 미래에 대한 말씀이다.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는 약속이 있고 보장이 있고 인도하심이 있다. 언약으로 주신 땅이다. 

      마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약속으로 아브람에게 주신다. 

      그런데 이 씨앗은 생명이 있다. 짝퉁이 아니다. 진짜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떨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한번 주고 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되는 on-going한 관계이다. 

      보고 믿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순종하면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고 교제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아브람을 만들어 가신다. 그가 복이 되도록 인도하신다. 

      복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이다. 

      

      12장 1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은 어디였는가?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었다. 아니 하나님이 약속한 땅인데 왠 기근인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 그럼 애굽이 복의 땅인가, 가나안이 복의 땅인가? 

      이것으로 보아 약속의 땅은 장소가 아니다. 지시 자체가 약속의 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다.  어디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애굽으로 갔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다. 사래는 친척 누이였다. 

      그 꾀로 인해 16절에 보면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낙타를 얻었다. 이것이 그들이 얻은 풍부함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17절에 보면 그들의 풍부함은 곧 재앙이었다. 

      그러니까 복은 소유가 아니다. 많이 가졌다고 복이 아니다. 가진 것이 재앙일 수 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시 1편) 

      

      나중에 가면 또 하나의 실수를 한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것도 아브람의 꾀였다. 꾀는 언제나 재앙을 낳는다. 그 꾀를 다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리신다. 

      꾀로 말미암지 않고 약속으로 주어진 복이다. 참 복이다. 

      

      이삭을 주신 후 다시 한 번 마지막 시험을 주신다.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을 따를래, 복을 따를래...

      롯과 함께 시험했던 마지막 시험을 하신다. 

      

      모리아산의 시험에서 아브람은 다시 한번 복을 택하지 않고 말씀을 택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복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이 복이 되었다.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곳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 

      

     (창 22: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는 말씀을 따라 살다가 복이 된다. 복이 되어 죽는다

     롯은 복이 되지 못한자가 결국 복의 땅을 얼마나 더럽히는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그들이 복이 되지 못함으로 그 땅을 저주받게 만든다. 

     롯도 에덴 동산 같은 풍성한 땅에 들어가지만 결국 그 땅은 음란의 대명사, 타락의 대명사 소돔과 고모라가 된다. 

     그 땅을 도망나와서도 두 딸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다. 결국 죄악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희한하게 이슬람에서는 이스마엘, 그리고 이 롯도 이러한 자들을 그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복을 쫓아 산다. 

     좋은 학군을 위해 이사하고,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결혼하려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하고, 좋은 교회에 가서 은혜를 얻으려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쫓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냥 우리에게 "너희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미 너희는 복이다. 복덩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복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 

     복되게 살라는 것은 복답게 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 믿으면서 아직도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내가 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주신 말씀 안에 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내가 복되면 내가 있는 가정이 복된 가정인 것이고 나를 부모로 둔 자녀들이 복된 것이고 나를 자녀로 둔 부모가 복된 것이다.  나를 성도로 둔 교회가 복된 것이고 나를 목사로 둔 교회도 복된 것이다. 나를 직원으로 둔 직장이 복된 곳이고 나를 남편으로 둔, 아내로 둔 사람이 복된 것이다. 복은 내가 가지지 못해서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아직 복이 아니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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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벤에셀의 하나님 (삼상 7:12절) -2020년 12월 31일 송구예배 설교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을 가지며 사무엘상에서 4장과 7장에 등장합니다. 두 장 다 이 지역에서 블레셋 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4장과 7장의 상황은 굉장히 대비가 됩니다. 

 

1. 4장에서의 에벤에셀 

사론 평원의 아벡에 포진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포진했던 장소가 바로 에벤에셀이다. 이스라엘은 이 싸움에 패하여 4천여명이 전사하게 된다. 

 

블레셋군에게 대패를 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제사장이 있는 실로에 보관되어 있는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을 다시 치루자고 해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온다.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진동할 정도로 환호하게 되고 블레셋 군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전쟁터에 도착했다고 하면서 두려워 떨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블레셋 군사들이 추스려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3만명이 죽게되고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기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게 된다. 

성경은 엘리가 죽은 이유가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삼상 5:18절)라고 증거한다. 

- 엘리 - 나이가 많고 비대한 제사장 

- 홉니와 비느하시 : 패역한 제사장 

- 이스라엘 백성 - 법궤만 있으면....미신적 신앙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 

 

  •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제사장과 제사장의 두 아들은 죽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대패했으며 여호와의 궤는 빼앗긴 상황-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브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법궤를 빼았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가 죽은 이야기, 그 충격으로 갑자기 애를 낳다가 죽은 엘리의 며느리, 그가 외친 말 ‘이가봇’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난 상태입니다. 

 

반대로 블레셋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두었는데 이튿날 깨어보니 다곤 신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저 얼굴을 땅에 떨어지고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 나가 버리게 된다. 또한 그 지역에 독한 종기가 퍼져서 다른 지역, 가드로 옮기니까 그 다른 지역마저 환난이 더하여 독한 종기가 나게 된다. 옮기는 곳마다 환난이 오는 것이다. 그렇게 일곱달을 여기 저기 옮겨 다니다가 결국 블레셋 군사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데 자기들의 죄를 사하게 되는 속건제로서 금과 송아지 같은 제물까지 더하여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게 된다. 

 

  • 이스라엘로 보내진 법궤는 먼저 벧세메스로 보내집니다. 그곳은 레위지파의 영토요 주로 제사장들이 거주하던 땅인데 그곳으로 보내진 법궤를 들여다보다가 70여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들이 아무리 제사장이고 레위인들이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둡고 말씀대로 그것을 보관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레위인이라 할지라도,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성별하여 20년동안 거함 

-> 누가 여호와의 궤를 담당할 수 있는가? 거룩한 자. 아주 무명의 한 가정을 택하사 궤를 담당하게 함

 

2. 7장의 에벤에셀 

  • 아비나답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산에 사는", "거룩하게 구별하여"이라는 말이 눈이 멈추어 집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구별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산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 구별된 장소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당한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 구별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 자기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 그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그의 집은 신전이나 산당도 아니었음에도 그는 그의 집에 법궤를 두고 20년 동안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나는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가 이런 아비나답의 집 같은 구별된 장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난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자신을 거룩히 구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미스바로 모이라. 

이 2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전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법궤가 사라지면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체험하고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무엘이 등장하여 이른바 미스바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이때의 미스바라는 장소를 따서 많은 집회의 이름이 미스바 집회, 미스바 회개 운동 등으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미스바는 "망대" 즉 "파수꾼이 망보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깨어라,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슬퍼하지만 말고, 두려워하지만 말고 하나님 앞에 깨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며 여호와께 회개하고 구원을 노래함. 

블레셋이 쳐 들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뢰를 내려서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전쟁에서 승리.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 실패했던 바로 그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됨. 

 

7:13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엘리 "나이가 많고 비대하여져서..." 

악한 제사장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의로운 자, 그러나 눈이 어두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웠고, 자식들이 범죄해도 막지 못했다. 

어느 덧 모르게 굳어져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몸이 비대해져서 영적인 것에 민감하지 못함. 

신앙생활은 삶이 어려워서 실패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비대해서, 부유해서 실패한다. 

부유함의 의미: 애굽의 바로가 열가지 재앙중에 재앙이 조금만 지나가도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태도.... 부유함의 표현... 

 

결     론 

똑같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4장과 7장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의는 해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패하자 우리가 왜 졌을까? 하면서 궁리하여 법궤를 가져오게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여전히 범죄하며 단지 형식만 남은 경건, 부적과도 같은 신앙생활만을 합니다. 

 

엘리 "나이가 많고 비대하여져서..." 

악한 제사장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의로운 자, 그러나 눈이 어두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두웠고, 자식들이 범죄해도 막지 못했다. 

어느 덧 모르게 굳어져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못하고 몸이 비대해져서 영적인 것에 민감하지 못함. 

신앙생활은 삶이 어려워서 실패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비대해서, 부유해서 실패한다. 

부유함의 의미: 애굽의 바로가 열가지 재앙중에 재앙이 조금만 지나가도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태도.... 부유함의 표현..

 

그런데 7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곁에 없을 때에 자기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법궤는 산위에 엘리아셀이 지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회개와 기도,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이자 능력입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요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우리는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을 떠난 존재가 됩니다. 

똑같은 에벤에셀 이지만 이가봇의 에벤에셀은 패배의 땅이요 절망의 땅이요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떠돌다가 아비나답의 집에 정착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면 미스바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를 통해 우리 영혼이 깨어납니다. 죄로부터 벗어납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쏫아납니다. 

실패의 장소가 바로 그 장소에서 승리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올 한해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며 우리에게 에벤에셀의 은혜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 장소에서 승리의 함성이 울리길 기도합니다. 실패의 장소가 승리의 장소가 되듯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이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의 첫 시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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