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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비전 (창 13:15-17절)

by 소리벼리 2023. 2. 5.

비전  (창 13:15-17절) 

 

적거 지망생이었을 때 - 제게 감명을 주었던 한 인물의 예화 

 

1920년대 초반 이제 갓 스물이 넘은 한 청년이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마다 자신의 그림을 보내보았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계속되는 거절에 돈도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지금은 웹툰이라 해서 만화가들의 위상이 많이 좋아졌지만 1920년대에 만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 - 얼마나 어려웠을까? 

어떤 글에는 하숙집이라고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교회 창고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여하튼간 가난한 만화가였던 그가 사는 방에는 는 조그만 생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도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었지만 조그만 생쥐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먹이도 주고, 하다보니 생쥐도 이 청년을 보고 도망하지도 않고 함께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 생쥐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신의 삶에 위로를 받고, 친근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생쥐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 생쥐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납니다. 

 누구이야기인 줄 아시겠습니까? 바로 월트 디지니가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야기입니다. 

 

누구나가 소름 끼쳐 하는 그런 생쥐를 보면서 그에게 오히려 친근하고 명랑한 미키마우스를 발견하고, 그 캐릭터 하나로 월트 디지니는 승승장구하며 만화 뿐만 아니라 에니메이션, 영화, 놀이동산 등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그 중심에 미키 마우스가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톰과 제리 (생쥐와 고양이를 적이면서 동시에 친구로 그린) 조금 지나 스파이더맨 (쥐와 같이 사람들이 가장 협오하는 대상이었던 거미를 주인공 캐릭터로..)  다 남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끄집어낸 누군가의 눈으로 말미암아 대 전환을 맞이한 캐릭터들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비전(Vision)이라 한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밖을 보고 내 안을 보는 것이다. 

 

오늘은 함께 하던 조카 롯과 헤어지면서 비로서 하나니믜 비전의 길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1. 배경 

1)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나님의 말씀 -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 맨 처음 떠난 것 - 고향인 갈데아 우르 - 바벨론에서 끄집어 낸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 
  • 그 다음 떠난 것 - 아버지: 그가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중간 지점인 하란 지방에서 데라가 죽자 비로소 하나님이 지시 하신 땅으로 온다. 
  • 그리고 13장에 가서 비로서 친척인 롯을 떠나 보낸다. 롯은 자기 동생 하란이 죽고 남긴 유족이자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 상속의 자격을 갖춘 친족이다. 

 

2) 신앙적으로 롯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같으며...

 

  •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자라면 롯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아브람을 따라가는 자이다. 왜 아브람을 따라 가는가? 그를 따라가면 아버지 하란 대신 보호받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자라면 롯은 아브람이라는 복, 자기의 이익을 쫓아가는 자다. 
  • 하나님은 아브람의 종과 롯의 종의 다툼을 통해 아브람에게서 롯을 구별해 내신다. 아브람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댜. 

 

그러면서 아브람은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준다. 

롯의 선택은 무엇인가?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3:10) 

 

그는 자기 눈에 보기에 가장 좋은 땅을 선택한다. 그가 아브람을 통해 보았던 신앙의 기준 (여호와의 동산 - 에덴) 세상의 기준 (애굽)에 가까운 땅이다. ~같은은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유사품이지 정품이 아니다. 

 

이에 반해 그가 떠나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4-15) 

 

아브람은 자기 눈을 의지해 선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보게 하시고 본것을 취하리라 하신다. 

그리고 그의 앞길은 그가 말씀을 통해 보게 된 땅을 종과 횡으로 구석구석 다니게 하시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보게 하신 것을 걸어가는 것이다. 

롯은 복을 쫓아 가장 비숫해 보디는 것을 보고 떠났지만 그의 기준은 자기 눈, 자기 경험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말씀을 따라 그냥 바라보고 간다. 

 

우리가 맞딱들이는 선택의 상황 - 진로, 결혼, 떄로는 교회, 무수한 선택의 상황 

어떤 사람들은 가장 좋아보이는 것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의견을 물으며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는 것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길은 언제나 하나다. 결국 그 길이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앙인들도 그러한 선택의 때 - 하나님께 정직하게 구하는 자들을 좀처럼 보지 못한다. 

오히려 롯과 같이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것,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훨씬 더 많이 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하거나 분별하는데에 확신이 없다. 

 

2. 비전 

  • 비전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깨달으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성경에서 짐승 -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을 잃어버린 사람들) 

[호 4:14]......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 예수님은 말씀을 깨닫고 돌이키지 못하는 이유가 오히려 "고침받을까 두렵고 변화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대개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대로 본다.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때가 더 많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선입견이 들어가고 편견이 들어가서 볼 때가 훨씬 더 많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사람을 거인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가나안 사람을 "우리의 밥"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눈으로 보니 거인 같은 자들이 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이 골리앗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인으로 보았지만 다윗에 눈에는 골리앗이 고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한당으로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신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롯이 떠나자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보인다. 그동안 롯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 비전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보라 하신 것을 보는 것이고, 보라 하신 곳을 종과 횡으로 두루 거닐며 받는 것이다. 

 

  • 망상은 근거 없이 바라는 것이다. 막연히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을 거니는 것이다. 

 

  • 어떻게 비전을 얻게 되는가? 언제, 어디에서 비전을 받는가?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가? 그가 부르실 때 멈추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1. 말씀 

말씀을 펴야 보인다.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곳을 떠날 적에 보인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서 참 것을 보게 된다. 참 나를 보게 되고 참 세상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요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거듭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예수를 영접한 자이다. 회개하여 자신을 씻고 십자가의 보혈로서 자신을 깨끗이 한 자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곧 거듭난 자다. 

 

한 자로 보다의 의미는 "관"자를 쓴다. 

보는 것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진다. 비전이 있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이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킨다. 

 

정탐하라 (explorer)”는 것은 바라보라는 것이고 바라본 것을 두루 다니라는 것이다.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열 명의 사람들은 오로지 가나안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디를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찾는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 - 기도 

세상에 눈을 감는 자, 기도하는 자가 비전을 갖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눈 대신 하나님 주신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것을 보고, 참 것을 보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갈매기 조나단은 높이 날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짓을 한다. 

왜 높이 날기 원하는가? 멀리 보기 위해서.....

어제 아참묵상 -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전쟁하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그 때 산꼭대기가 가서 기도한다. 전쟁은 여호수아가 하는데 전쟁의 승패는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신앙인이 높이 날 수 있는 길은 기도하는 때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높이 날고 멀리 보게 된다. 

장대 높이뛰기 하는 선수보다 더 높이 나는 사람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앙인이다. 

 

헬렌켈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였지만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는 말한다. 

"시력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비전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여주신 것을 육신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기도한다. 

소경 바디메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3. 본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험하라. (adventure)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중하고, 그 뜻을 알았을 때는 신속하라.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을 때- 행동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 본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바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보여 주셨는데도 여전히 기도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다. 

보여 주셨을 때는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보게 된 것이 있다면 기도하며 이젠 행동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을 때에 망설이지 않는다. 어디인지, 거기 가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다. 

바치라니까 망설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친다. 

비전이 있는 자는 움직이는 자이다. 

신앙인은 신중히 분별하되 분별된 것이 있다면 신속히 행동한다. 

감동을 주었는데 망설이고 기다리다 보면 다른 마음이 들어오고 처음 마음을 의심하다가 결국 내 마음이 성령의 마음을 덮어 버린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버렸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너머의 구원을 보았기에 과감히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전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물리치고 싸우며 나아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인생을 건 결단이고 모험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절 전의 4주간 - 대림절 -> 영어로는 Advent

그 기다림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가 무엇인가? Adventure (모험)이라는 단어이다. 

신앙인은 결코 기다리기만 하는 자가 아니다. 보여주신 것이 있으면 과감히 행동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의 동생이었던 초대교회의 리더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까지 단언한다. 기독교인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모험하는 자는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창조한다. 사막에 길을 내고 황무지를 장미꽃길 같이 가꾼다. 

나의 가는 길 주님 인도하시네 찬양 - God will make a way -> 그는 길을 만드시는 자이다 .그런데 무작정 길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고 구하는 자를 향해 길을 만드신다. 

 

쥐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고,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만든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안전한 길을 택하기 보다는 과감히 모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떄론 방황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한 믿음을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 두 학자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Vs 어거스틴 (고백록) - 누가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는가? 

부모는 아이가 안전하기를 원하여 조금만 어긋나는 것 같아도 마음을 추스리기 어렵지만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그를 보호하신다고 하신다. 

 

그런데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난 우리 교회 어르신 성도들도 죽기까지 모험하시는 분들이 되시길 기도한다. 

나이가 들수록 모험심을 잃어버린다. 안전한 것이 좋고 편안한 것이 좋다. 그런데 그런 마음은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소리다. 

하루를 살더라도 생명력을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생명이 있는 삶은 움직이고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그래서 난 우리 성도들이 끊임없이 배우고 또 여행도 다니고 성지순례로 다니셨으면 좋겠다. 

난 못가도 우리 성도들이 다녀왔으면 좋겠다.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다른 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그냥 따라가는 교회가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 보지 못한 길을 주와 함꼐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꿈구고 소망하고 기도한다 

 

인생은 항해다. 배는 정박되어 있을 때에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항해할 때에야 비로서 배의 역할을 한다. 

나그네 길은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순례자의 길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앙인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4. 하나님이 비전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 

하나님을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듬어가시기 위해서 일을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는 이유는 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완수 하는 데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통해 우리를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꿈을 버리고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비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혼자 일 하실 때 가장 완전하시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런데 왜 우리와 동역하시길 원하시는가? 어렵고, 오래걸리고, 실수도 많지만 하나님의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비전하면 가장 첫 번째로 손꼽는 인물 - 요셉, 꿈의 사람

그런데 성경에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꿈의 완성이 아니라 요셉이라는 사람의 완성이다. 

세상에서는 일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주신다.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를 세워가시는 데에 있다. 

교회 안의 모든 일이나 임직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우리를 온전히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일이 좀 더디고 오래 걸려도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을 세우기 위해 함께 견디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가꾼다. 

인기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격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사울은 인기 때문에 인격을 잃어버렸지만 다윗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인격을 가꾼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열고 

비전을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한 바를 갈망하며 바라며 움직이는 자는 결국 자기를 변화시키는 자이다.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 transformation (자기 변혁) - 영화 트랜스포머

영성적 성경읽기의 영어적 표현 - reading for transformation이다. 

 

결론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재정이 어려워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성도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고 교회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 바로 비전이 보이지 않을 때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느보산 꼭대기에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모든 것을 보았다. 

육신적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가나안의 미래까지도 다 보았다. 

 

그런데 그 바라봄은 오직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본 것을 지키고 걸어가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다. 

그것이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믿음으로 모험하는 삶이다. 안전과 편안함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