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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8-30절 쉼과 멍에 

 

[마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교회 다니시는 분이라면 누구나가 들어본, 그리고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냥 말씀을 읽기만 해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같이 함께 28절만 읽어볼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중에서 몇을 오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자격을 가진 자보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빠짐없이, 예외없이 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해서 피곤한 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자에게 나에게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신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쉼, 안식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뒷 구절로 가면서 말씀이 조금 이상해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시더니 뒷 부분에 가서는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다가 "내게 배우기"까지 하랍니다. 

멍에가 무엇입니까? 

소나 나귀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서, 혹은 밭을 갉게 하기 위해서 등에 받치는 나무장치입니다. 

자유한 동물에게는 멍에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다시 말해 주인의 일을 대신 해주는 가축에게 멍에를 지우는 것입니다. 

그니까 세상에서 힘든 사람들 모아서 쉬게 해 주겠다고 불러서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니까 앞 구절에서 은혜를 받다가 뒷구절로 넘어오면 "에이 교회오니까 짐하나 더 얻어가지고 가네...."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왜 이리 많냐...그러면서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고 간다고들 합니다. 

 

세상살이 힘들어서 교회 왔는데 세상살이하는 것은 하나도 변하지도 않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채우려니 짐이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 하신 적 혹시 있으십니까? 

 

이것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또 다른 짐으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세상의 짐은 여전히 있고 교회의 짐만 얻어갈 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의 짐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가 무엇인지를, 그 멍에가 무엇이기에 예수님께서 와서 배우고 메라고 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그럼 세상에서의 수고와 짐에 대해서 먼저 살펴봅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저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권력자나 힘없는 자나, 부자나 가난한 누구나 다 나름대로 인생의 짐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 일로,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가사일과 자녀 양육일로, 어떤 사람은 학생으로 전공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목회자들 또한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영적 책임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 문제로, 질병으로, 장래 염려로, 자녀 문제로, 혹은 인간관계의 억눌림으로 그리고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짐에 눌려 살아갑니다.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되어 평생 육체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만남을 통해서 남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도 있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등록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고 평생갚아야 하는 금전적 짐을 지고 가는 사회가 현대 사회입니다. 

이렇게 수고하며 살다 죽는 것이 정해진 인생입니다. 창세기 3장7,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3:7,19). 

 

수고는 끝이 없습니다. 종신토록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될 것 같지만 살다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이 짐을 피하면 가벼울 것 같지만 또 다른 짐이 주어집니다. 최후에는 죽음이란 짐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짐을 지고 살아갑니까? 

죄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선악과을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창3:17). 결국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 에덴동산을 좇겨나게 되고 평생 수고하며 살다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 17-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래서 육신은 화려하게 사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죄로 인한 무거운 짐 때문에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이 소유 할수록 ,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짐이 더 큽니다. 가인이 죄를 짓고 유리하는 자가 되어 쫓겨날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4:13). 위대한 장수요, 위대한 왕으로 부족함이 없던 다윗은 죄로인한 영혼의 고통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죄의 짐 외에도 율법의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지는 짐 - 뜻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자존감 상실, 무력감....

 

율법을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이지만 이방인들은 양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율법을 멍에로 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을 지키면 생명을 얻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신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처럼 율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하나님의 의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했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해결은 주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자기의 문제만 보이고 죄만 보이니 얼마나 그 짐이 더 커지겠습니까? 

 

2.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이 쉬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도, 부모도 우리 짐을 대신 져주지 못합니다. 세상에 훌륭한 스승들도 우리 인생의 짐은 져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짐을 대신 지고 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그 분이 어떻게 우리를 쉬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까? 

 

1) 죄로부터의 자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아멘.”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죄뿐 아니라 장래에 대한 염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능히 이기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근심 걱정, 인생을 사는 동안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문제입니다. 이것도 주님께 내려놓으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고 내 인생 전체를 맡기지 못하면 평생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업이 잘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자녀들이 좀 늦게 들어와도 혹시?”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애당초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건강도, 우리의 자녀들도 책임지지 못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잠언 16: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주님께 맡기면(commit yourself to the Lord) 우리 인생은 더 이상 운명이 되지 않습니다. 짐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주님의 멍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9,30절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분이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앞뒤가 안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의례히 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잘 살펴야 합니다. 

멍에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짐을 지거나 밭을 갈기 위해 메어 놓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주인없는 소나 나귀에게 멍에를 메지 않습니다. 주인이 뒤에서 움직여야 작동하는 것이 멍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멍에를 매면 따로 갈 수 없습니다. 멍에를 매는 것은 주인과 한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이 가시는 대로 가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멍에를 메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 멍에나 메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약한 자와 멍에를 매면 나도약한 자가 됩니다. 무지한 자와 멍에를 메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악인과 멍에를 메면 악한 자가 됩니다.

 

세상의 직장 - 멍에를 줍니다. 때로 나의 의식주의 문제, 자기 성취의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양심을 팔고, 건강을 헤치며, 기업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킵니다. 우리에게 삯을 주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받는 삯 이상의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4.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두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멍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3) 

 

주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멍에를 메고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면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도 , 공부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양들 섬기는 일도, 제자양성 하는 것도, 세계선교 하는 일들을 내가 하려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오히려 힘이 됩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라는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무엇을 배웁니까? 그 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멍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 그것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의 성품, 온유와 겸손.

 

(1)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배우고 메야 할 멍에는 온유입니다. 온유란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로 끄지 아니하시는 마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되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까지 하신 그런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멍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 그것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의 성품, 온유와 겸손.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란 단지 착한 심성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온유는 그 원어의 뜻이 들판에서 내 맘껏 다니던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어지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길들어진 야생마가 바로 온유함의 뜻입니다. 무엇에 길들여져야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라로 칭함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

 

왜 그가 가장 온유한 자인가? 바로 말씀을 받은 자요 그 말씀 안에서 훈련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자기를 꺾고 말씀을 따르는 자요,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하는 자입니다 . 

온유한 자의 반대를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누가 온유한 자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자, 바로 겸손한 자임니다. 길들어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결코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이 온유함과 겸손을 보여 주셨습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겸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온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온유와 겸손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1) 엘리야 (여름 수련회때 준비하고 있는 말씀) 

[왕상 19:9-10]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어느 때인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를 죽이고 무언가 상황이, 나라가, 이스라엘이 변할 줄로 기대했다가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이세벨이 위협하며 달려들자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

 

열심이 유별하오니- 마치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 다른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오직 굴 속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모습만.... 

                 

그 때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 

로뎀나무 가에서 그를 쉬게 한 후에

호렙산으로 인도해서 그곳에서 그와 교제하시는 장면. 

자기 열심으로 충만했던 엘리야를 말씀과 쉼이 있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창세기 1장 (말씀이 임하기 전의 상태 - 혼돈과 공허

그 위에 말씀이 임하니 창조의 사역이 6일동안 임하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 - 쉼과 안식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여전히 끝없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짐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무거워지고 있는 삶을 살진 않는가?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는가? 주님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가 원하는 데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목자 되신 삶은 쉼이 있는 삶이다. 열매가 있는 삶이다. 그 열매는 외부환경과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팔복의 말씀에서 유일하게 땅의 복에 관해서 하신 말씀- 온유한 자에게 주신 축복 - 말씀에 길들여진 자- 아브라함 - 땅의 약속

우리가 왜 신앙생활에 실패하는가? 왜 주님의 멍에를 배우지 못하고 메지 못하는가? 결국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 안에서 자유합니다. 물을 떠나면 물고기는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으로 지음받은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존재가 영적 생활을 잃어버리면 물질에 갇힌 존재가 되어집니다. 자기 욕망에 갇힌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자유하고 말씀 안에서 우리의 존재는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시는 분도 겸손과 온유한 선하신 목자요 

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도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얻으시는 저와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젊은 청년 - 결혼하려 하지 않는 세대. 자기 만을 위하는, 섬기는 시대 

결혼해라 - 나 너무 바빠요.. 연애하면 책임져야 하고, 그리고 얽매이는 것이 많아서 싫어요.그리고 실재 그의 삶을 보면 바쁘다. 

회사생활하면서 틈틈히 학원에 등록해서 자기 개발하고, 교회생활, 취미 생활....

 

그런데 어느날 그가 연애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너처럼 바쁘게 사는 녀석이 언제 연애하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밤새 통화해도 또 보고 싶고, 그리고 전화하느라 잠도 잘 못자지만 피곤한 줄 모르겠어요. 일할  때도 더 힘이나요....

 

그런 사랑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 사랑해서 손해보는 자 보질 못했다. 

주님 사랑해서 내 인생 망가졌어요 하는 사람, 때로 사람에게 실망해도 주님께 실망해서 떠난 사람 보질 못했다. 

왜?  그 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을 사랑하면 우리 안에도 그 겸손과 온유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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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말씀, 그리고 동행 (민 11:4-9, 출 16장) 

 

  • 민수기 11장의 본문 - 어떻게 그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향해 불평하는 장면 
  • 만나가 내리는 사건 - 출애굽기 16장 : 지난 주 홍해를 건넌 지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을 만나 불평하였을 때에 한 나무를 통해 쓴 물이 단 물 되게 하고 엘림으로 인도한 사건 (출 15장) 

-> 시내산 (십계명과 성막에 대한 규례)를 받기 전 신 광야에서 다시 음식으로 말미암아 불평하였을 때에 그 때서부터 40여년간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림. 

출 16장 1절) 애굽에서 나온 지 두달 십오일만에 또 다시 큰 불평 . 

 

순서를 기억하라 

홍해를 건넘 - 구원의 사건 

마라의 쓴물을 통해 엘림으로 인도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공동체로 인도 

-> 그리고 만나 -> 날마다 일용할 말씀으로 훈련, 양육 

 

큰 은혜 받고 구원의 사건을 경험한 자라 할지라도, 또한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씀으로 가다듬어지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 출애굽기 16장 1-2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자온 후 둘째 달 십오 일이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홍해를 건넌지 3일만에 불평 불만을 쏟아냈던 그들이 엘림의 축복을 얻고 나서 2달여 후에 다시 불평의 병, 원망의 병에 빠진다. 

신광야 - 불모의 땅, 모세와 아론을 원망 

 

(출 16: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힘이 들 때에 특징: 현실을 왜곡하게 된다. 과거는 화려하게...현재는 죽을 치 만큼 고통스럽게

힘이 들면 늘 하는 말 - 지금처럼 힘들었던 적이 없어.... (6.25, 보릿고개를 다 경험한 사람들이 현재 일어나는 일 앞에 언제나....지금이 더 힘들어...그 땐 좋았어) 

 

이 때부터 매일같이 40년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하늘로 부터 주어진 양식이 바로 만나. 

만나의 뜻- "이게 도대체 뭐냐?" 

 

  •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 (출 16:4)- 하늘로부터 주어진 양식 - 하나님의 말씀 
  •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섞은 과자 같았다 (출16:31,민 11:8) 

시 119:10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과자를 만들었는데, 그 맛은 기름섞은 과자 맛 같았다 (민 11:8). - 다양한 용도로서 먹음 

한가지 형태를 띠었지만 매우 다양한 맛을 내는 음식. 요리 방법도 가지 가지 

-> 200백만 명이나 되는 서로 다른 민족들의 입맛을 고루 맞추어 주는 하늘의 음식 

  • 매일 먹을 만치만 먹으라.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주시는 것) 
  • 안식일엔 거두지 마라. -> 일주일이 하나님으로 부터 만나를 공급받아 살았다면 안식일은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 예배하는 날 

시 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내 발의 등- 한 발자욱 앞을 비치는 빛, 내 길의 빛- 내 인생의 방향을 가리키는 빛) - 숲과 나무, 일용할 양식과 내 인생을 인도하는 말씀" 

날마다 주시는 만나와 안식일 날 주시는 말씀. 

  • 엘림을 지난 자에게 주신 말씀 - 교회에게 주신 말씀 

 

문제제기)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날마다 먹으라고, 살라고 주신 말씀,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지나 이 만나마져도 불평을 하게 된다.

만나에게 질렸다고 말한다. 

민수기 11:10절

백성이 각기 장막에서 울었다고 기록한다. 

만나가 싫어서 울었다는 것이다. 

 

이 음식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는 불평 

애굽의 음식과 비교한다. 

그런데 이들이 상상하는 애굽의 음식은 너무나도 환상적으로 그린다. 

(출 16: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민수기의 말씀은 더 기가 막히다. 

(민 11:5)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출애굽기- 배불리

민수기 - 값없이 

고기와 떡...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

 

아무리 눈 앞의 현실이 현실을 왜곡한다해도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은 배불리, 값없이 먹었다 불평하고 하늘로부터 그야말로 배불리, 값없이 내리는 음식에 대해서는 감사함없이 불평한다. 

이 신앙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그들만의 문제인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아닌가?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고 이런 문제가 일어날 때에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처음 연애하듯 그 분의 말씀이 다 좋은 말씀같고 달콤하게 느끼지만...시간이 지나면서 내 일상의 문제는 여전히 일어나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거나, 현실에 그리 위로가 되지 못한다. 아니 문제를 만날 때마다 기도해라, 말씀을 읽어라 하는 말들이 지긋지긋해지기도 한다. 

설교에 말씀이 답이다. 기도가 답이다 말할 때마다 또 그 소리..; 견딜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영, 혼, 육의 문제를 만지신다. 먹이신다. 치유하신다. 

 

잘못하기 쉬운 오류- 신앙생활을 영적인 일로만 제한 하는 것, 하나님은 영적인 일들만 관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상의 주인이고 인도자이다. 

"신앙생활하면 밥이 나오냐?" 

전 자신있게 밥이 나온다라고 말한다. 그 분은 우리 일상의 문제를 외면하시지 않는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은 매일 필요한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 뿐만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자의 고백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식사시간.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다." (눅 22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인들에게,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으로, 직접 밥으로 먹이셨다. 

오병이어의 사건도 그렇고, 최후의 만찬 때도,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손수 고기를 구워 먹이면서 또 말씀하셨다. 

 

  •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밥, 말씀에 그리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에 불평하듯 우리는 말씀 생활 자체를 피하고 거부한다. 예배 드리면 되었지, 무슨 말씀을 매일 같이 읽냐고 한다. 기도하고 말씀읽고 신앙생활이 왜 이렇게 까다롭냐고 한다. 

 

주님은 매일 하루 하루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탕자처럼 나의 분깃이 있다면 빨리 달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곳에, 내 마음대로 쓰고 싶어한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살면서 날마다 필요를 공급해 주겠다고 하는데 탕자는 어떻게든 자기의 분깃을 가지고 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한다. 애굽에서 누리던 향락, 쾌락....여전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려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같이 양식을 내리시면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두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내일 것 까지... 남의 것 까지 거두다가 벌래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된다.   (출 16:20) 

 

진단) 

민 11: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출애굽) 히브리인들 + 허다한 잡족 (하나님을 바라는 하나님의 백성 + 잡다한 이유 때문에 모인 족속)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따라는 나왔는데 광야에서 조금 고생하니까 애굽이 더 좋았다고 끊임없이 애굽 이야기만 한다.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히브리인들 역시 그들의 불평과 애굽에 대한 동경이 전염된다. 

 

  • 빌 4:18-20)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요한복음 6장 - 오병이어의 장면, 예수님의 이적 중 가장 대표적 이적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있지 않은 그 뒷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요 6:26-2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의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하나님의 말씀" - 영생하도록 주신 말씀 

 

그러면서 만나의 의미를 설명 (요 6:31-33)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리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러면서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기 위하여 내려온 떡- 내가 곧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새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51절)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0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증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육신의 것을 공급받았을 때에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는데, 영생하는 말씀을 주실 때는 어렵다 하고 떠나간다. 

 

주기도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상 언어로 이야기 하면 "오늘 먹을 밥을 주세요"하는 기도다. 

 

오늘 필요한 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때로는 솔직하게 내게 지금 필요한 것, 가지고 싶은 것, 그런 것들을 위하여 기도는 했을 지언정 오늘,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적은 없다. 왜? 이미 가지고 있었으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생각하지 않는 순간, 내 시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순간, 언젠가 부족함이 다가왔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항상 긴장하고, 크고 작은 염려거리, 기도거리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 염려의 거의 모든 것은 바로 "내일 이후"의 염려였다. 

내일은 뭘 먹지? 언제까지 이걸 해결해야 하는데?. 이제 조금만 지나면 떨어지는데?. 

한 번도 오늘 필요한 양식을 위해서 기도한 적 없다. 오늘의 양식은 언제나 있었다. 

 

예수님 살아계신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오늘 먹을꺼리였다. 

예수님 당시에 노동자들의 임금은 하루 일당이었다. 그러나 일당이 너무도 적어서 그들에게는 하루 양식을 다음 날까지 남길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하루 먹고 하루 살아가야 했다. 당장이라도 직장에서 쫓겨나면 그날은 온 가족이 굶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종교 귀족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서 과도한 세금으로 하루를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특히 남편을 잃은 과부들,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 또 몸이 성치 않는 병자들에게 하루 양식은 목숨 그 자체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 내가 반드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여하튼, 이제 우리는 대부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에 대한 걱정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필요한 양식을 채우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다.  향후 5년간 걱정 없을 통장을 만들기 원하고, 노후 대책을 위해 노력하고, 아이들 학교 들어갈 때 필요한 것들, 결혼 할 때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걱정하고 그리고 기도한다. 

전도 할 때, "영생 보험 드세요... 죽어서 지옥하면 어떡해요? 만약을 위해서 천국 보험 들어놓세요."

신앙생활을 만약을 위해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가 무엇인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나이 든 사람들만이 보험만기를 기다리며 교회에 남는 현상. 

그런데 만나는 오늘 필요한 오늘의 양식이다. 내일의 양식이 아니다. 

신앙 생활은 오늘 주님과 동행하여 영육간에 강건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 그 이외에 소망하는 것은 "잉여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잉여의 축복에는 만족함이 없다. 계속적으로 채워야 하고, 채워도 채워도 한이 없는 것이 잉여의 공간이다.  

그래서 어느 덧, 우리는 일용한 양식에 대해서도, 더 나아가 그 보다 몇 배, 몇 십 배, 몇 천 배의 잉여의 축복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그 축복을 누리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탐욕적으로 사는 것이다. 오히려 일용할 양식이 다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 한다. 앞으로 닥칠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상상하며 불면증에 걸리고 신경증에 걸린다. 

내가 가진 것을 누리지도, 만족하지도 못하고 항상 부족하게 여긴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는 것이다. 감사히 먹는 것이다. 그 밥이 나의 영혼을 깨끗이 하고, 나를 죄에서부터 멀어지게 하고, 나를 연약함에서부터 강하게 한다. 

우리에게 밥을 주시는 분은 단지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사망권세를 이기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다. 

 

그 분이 지금도 우리에게 매일 같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한다. 

매일 같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기뻐하는 자는 결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만나를 처음 내릴 때, 모세는 내가 부모도 아닌데 왜 내가 이 짐을 져야 합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항변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똑같이 하나님과 똑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인도한다. 

 

목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나이도 어린 것이 여러분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어서...얼마나 큰 부담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밥, 이 말씀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토요일마다 긴장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을 싫어했듯이, 세상살이에 지치고 때로는 세상의 밥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입맛에 어떻게 하나님이 차려 주신 밥을 먹게 할 수 있을까 너무 큰 짐임과 동시에 가슴벅찬 숙제이다. 

 

하루 하루에 삶에 힘이 들때, 어떤 걱정거리가 내 영혼을 망가뜨릴 때, 내 영혼에 파도가 쳐서 위태 위태 할 때....

다른 것으로 피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차려주신 밥상 앞으로 나아오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다시 요한복음 6장으로 가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몰려들었던 수많은 무리들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생명의 양식에 대한 말씀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여 다들 떠나갔을 때에 

주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물으신다 

요 6:66-68) 

그 때 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여러분! 

하나님이 차려준 밥상을 홀대하지 맙시다. 그 밥은 우리를 살립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합니다. 

왜 그맛을 모르냐면 여전히 내 관심이 세상 중에, 탐욕 중에, 욕망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허다한 잡족들의 말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로 인해 우리 마음이 요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차려주신 밥은 우리의 영을 깨끗이 합니다. 

처음에는 맛이 없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한번 그 맛을 알면 어떤 꿀보다 답니다. 

주님이 날마다 이 성경 안에서 우리의 밥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먹이고자 합니다. 우리를 살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차린 식탁에서 저와 함께, 날마다 귀한 음식을 맛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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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와 엘림 (출애굽기 15장 22-27절)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바로 전장 14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넌 사건을 다룹니다.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세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세상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이고 그것은 홍해를 건넘으로 인해 이제 뒤돌아 서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이에서 그들의 결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고, 또한 그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별하시는 사랑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었던 애굽의 장자가 죽고 오직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만 그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건은 세상을 추구하는 삶의 최후를 보여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을 체험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요, 역사의 주권자요,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홍해 사건을 다룬 14장의 마지막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출 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15장에 들어가면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로 및 애굽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로 시로 찬양을 합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이제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이제 인도하시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걱정으로, 원망으로, 고통으로 변하는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입니다. 

작심3일이듯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제 그 분을 믿기고 세례 받고 결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3일만에 좌절과 고통과 원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처음에 성경을 읽을 때는 무슨 백성이 이리도 우유부단 할 수 있을까하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언제고 고작 3일 지나서 인생의 쓴물을 보았다고 있는대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백성 편에서 볼 때에 그들의 불평은 한 편 이해할 만하기도 합니다. 물이 없이 사막을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장정만 60만 추정 이동 인구 200만이나 대는 대규모 사람들이 가축과 함께 마실 물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겠습니까? 억지로 참아가며 광야길을 걷다가 며칠 만에 오아시스를 만나듯이 물을 발견했는데 써서 먹을 수가 없으니까 바로 모세를 향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연약함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바로 3일 전에 목격했던, 체험했던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의 통치자 하나님이 물이 없자 바로 무력하고 자기랑 상관없는 하나님, 당장 무엇을 마실까 염려해야 하는 인생으로 전락해버립니다. 

 

3일동안 뜨거운 사막에서 물이 없이 지내는 상황. 누구라도 원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도 아닌 3일을 물이 없이 지내야 했다. 

그것도 단지 가만히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사막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3일 만에 만난 물이 먹을 수 없는 쓴물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눈으로 본 하나님이 크고 위대한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당장의 삶의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너무도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은 무엇인가?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 대다수가 선택하게 되는 자연스런 결과. 

그런데 모세가 한 선택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 신앙인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

그런데 대다수가 신앙생활 중에 이런 쓴 물을 만났을 때에 기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반응인 원망과 불평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켜 그 나무를 물에 넣게 합니다. 그 나무를 넣자 물이 달게 됩니다. 

 

(출 15: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스라엘 역사- 실재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 하나가 마치 시처럼 영화처럼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를 보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장면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나중에 그 장면이 무슨 암시를 주고 의미를 주는지를 관객과 함께 나눕니다. 영화니까 가능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하나님이 주관하신 신앙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한 나무"의 의미입니다. 

유대교 주석은 이 나무를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의 대다수의 주석가와 신학자들은 이 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낸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닮는 것- 신앙생활의 목적 

그 목적을 잃어버릴 때 우리가 빠지게 되는 함정 - 열심히 믿는데 고난을 당하면 시험들고 원망하는 것 

그런데 그 때 예수를 바라볼 때 - 고난마져도 인생의 단맛이 된다. 왜? 내가 예수를 따르고 있구나, 내가 에수를 닮고 있구나. -> 내 중심적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예수없이,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 하는 자들에게 신앙의 여정은 마라, 쓴물입니다. 

힘들기만 하고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자신들에게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할 때는 찬양하고 즐거워하지만 쓴물을 맛볼 때면 언제그랬냐는 식으로 험한 말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뭐기에 나한테 쩔쩔매야 합니까? 내가 뭐길래 하나님이 내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합니까? 

 

(출 15: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거기서: 어디서? 예수 없이 살아갔던 신앙인들에게, 십자가 없이 하나님을 부렸던 그런 사람들에게

오직 믿음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알게 하신 뒤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 가장 먼저 주신 법도와 율례

- 시헙하신다 -> 떨어뜨리고 가르기 위해? 

                  -> 그 다음 단계의 신앙으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입학시험) 

 

(출 15: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들을 것이냐? 신앙 생활은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듣는 것이다. 들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다름아닌 우상숭배다. 미국 사람들. 교회 나가지 않아도, 순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예수의 복음. 난 다 안다. 신앙생활은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 의: 관계가 바른 것. 하나님과의 관계, 
  • 귀를 기울이는 것은 - 집중해서 듣는 것,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 경청- 존경하며 바라보는 것.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유언을 듣듯이 내 모든 신경을 모아서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 그리고 지키는 것. 
  • (롬 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럴 때 일어나는 것- 치료하는 여호와다. 여호와 "라파" 

왜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애굽의 가치관, 세상적인 가치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니까?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뀌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계속적으로 마라, 쓴물로서 다가오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나뭇가지는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것. 

날마다 말씀 속에서 그 분의 음성을 경청하고 따르며 행하는 것. 

 

그럴 때에 인도되는 곳 - 엘림

엘림의 뜻- 큰나무.  엘림이 곧 나무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제자가 된다.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 

제자공동체, 교회 공동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 12제자와 70인의 문도.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랐던, 예수님과 함께 동거했던, 동행했던....그 분의 제자들. 

 

복있는 사람은... 

(시 1: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 1: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하나님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러면 또 묻습니다. 

제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듣고 순종하며 따르겠습니까? 

 

내 길, 내 방법, 내 목적을 버리고 그 분의 길, 그 분이 정하신 통로, 그 분이 정하신 목적, 사명을 향해 나가시겠습니까? 

 

그 분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 분의 계획은 완전하십니다. 

그 분께 내 계획을 맡길 때에 참 평안이 임합니다. 

 

엘림을 지나서 하나님께서 곧바로 하신 일은 만나를 내리시는 일.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날마다 새벽마다 그 말씀 가지고 나아가는 것.

그 말씀 듣지 못하면 하루를 살아갈 수 없없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4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말씀으로 그들을 영육간으로 먹이신다.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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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30-32절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막 6:30-막 6:32]

(막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막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막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사도 - apostlle - 대사, 파견된 자, 청지기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 - 6장 7절-13절에 이어지는 말씀 

예수 공생애의 초창기 - 그들이 많이 배워서 가르치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파송하여 사역하게 함.

 

제자- 배우는 자, 따르는 자 Vs 사도 - 일하는 자 

 

  •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한적한 곳- 붉은 순교의 시대가 끝나고 흰색 순교의 시대. 한적한 곳을 찾아 사막으로, 또 사막으로..., 흰색 순교의 시대를 지나 녹색 순교의 시대 

 - 한적한 곳은 장소가 아니라 내 심령의 빈 공간이다. 세상 것으로 가득찬 마음이 아닌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온 우리의 영혼의 공간이다. 

한적한 곳에 나와 하는 일 - 쉬고 음식을 먹으라. 쉼(안식), 음식을 먹으라 (말씀을 들으라) 

왜? 세상에서는 오고 가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 방향을 잃은 사람들, 정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음식 먹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ex) 승구야, 말씀을 읽어라 하시는 말씀.... 

 

  •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갈새 

배- 교회를 상징한다. 노아의 방주,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주님, 내 삶에 들어오신 주님. 

한적한 곳-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곳, 로뎀을 지나 호렙산으로, 안식일은 쉼을 지나 임재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 오이코스 인텐시브 코스 - 학기마지막 수업 - 레이크타호에서 1주일간의 합숙 수업 

                                   -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미국에 체류하기 위해 있는 학부모 

                                   - 1주일간을 집을 떠나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든 사람들... 

                                   

  • 한적한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은 곧 예배이고 그 예배는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다.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 삶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예배를 통해 안식하고 말씀으로 채워진 자에게 주님은 영혼을 먹일 능력을 주신다.

 

야외예배의 의의 

1. 작장인 선교회 박홍일 장로 

주일, 예배당, 성직자 중심의 예배 -> 예배당을 벗어나 함께 어우러지는 교제도 역시 예배이다. 

(인하대 알레데이아, 군대군종, 그리고 징검다리) - 교회 밖에서의 사역) 

 

2. 계시 :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 

일반계시 (성경), 특별계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연계시 (자연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 

 

3. 안식과 예배 (마태복음 12장 1-8절) 안식일날 밀밭 사이로 지나며 이삭을 먹던 제자들) 

  • 예수님과 제자들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회당이 아닌 밀밭, 이삭을 잘라 먹는 일 

 

바로 이전 구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밀밭 사이로 갔는가? 지치고 시장한 자들이 쉬고 먹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눈에 그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회당이 아닌 밀밭에서 이삭을 먹는 것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주일날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 주님과의 소중한 약속 

그런데 반드시 거기에 얽메일 필요는 없다. 

때로 예배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고, 때로 순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런 때라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께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임을, 어느 장소, 어느 순간에서도 주님을 향해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온전한 삶의 예배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은혜 

- 예배가 멈추어지거나 식어가는 때에 개척하게 한 은혜 

-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할 그런 상황에서 한 주도 빠짐없이 이영자 권사님, 케이티 집사님 짐에 함께 모여 안전히 예배하게 하신 은혜 

- 그 중점에서 아름다운 예배처소를 얻게 된 은혜 

-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또한 야외예배까지 드리게 된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https://youtu.be/q_FaqwDSmRs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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