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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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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창 13:15-16절) 

 

저는 쥐를 좀 무서워합니다. 쥐를 생각만 해도 좀 소름이 돋고 몸이 간질간질 해지는 것 같고 기분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글을 읽고 이 생각이 좀 바뀌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 이제 갓 스물이 넘은 한 청년이 만화가가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마다 자신의 그림을 보내보았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납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지만 계속되는 거절에 돈도 점점 떨어져갔습니다. 

어떤 글에는 하숙집이라고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교회 창고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여하튼간 가난한 만화가였던 그가 사는 방에는 는 조그만 생쥐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도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든 쫓아내고 싶었지만 조그만 생쥐를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먹이도 주고, 하다보니 생쥐도 이 청년을 보고 도망하지도 않고 함께 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그 생쥐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가난한 자신의 삶에 위로를 받고, 친근해지기 시작하면서 그 생쥐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누구이야기인 줄 아시겠습니까? 바로 월트 디지니가 미키 마우스의 탄생이야기입니다. 

 

누구나가 소름 끼쳐 하는 그런 생쥐를 보면서 그에게 오히려 친근하고 명랑한 미키마우스를 발견하고, 그 캐릭터 하나로 월트 디지니는 승승장구하며 만화 뿐만 아니라 에니메이션, 영화, 놀이동산 등 모든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그 중심에 미키 마우스가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톰과 제리, 조금 지나 스파이더맨..... 다 남들이 혐오하는 대상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끄집어낸 누군가의 눈으로 말미암아 대 전환을 맞이한 캐릭터들이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비전(Vision)이라 한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밖을 보고 내 안을 보는 것이다. 

 

비전은 말씀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말씀을 깨달으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깨닫는 것을 강조한다.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호 4:14]......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침받을까 두렵고 변화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대개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대로 본다. 우리의 생각대로 보는 때가 더 많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선입견이 들어가고 편견이 들어가서 볼 때가 훨씬 더 많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사람을 거인으로 자신을 메뚜기로 보았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가나안 사람을 "우리의 밥"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눈으로 보니 거인 같은 자들이 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이 골리앗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인으로 보았지만 다윗에 눈에는 고작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한당으로 보았다. 

비전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를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 전에 먼저 보게 하신다. 

 

[창 13:14-15]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신앙은 하나님이 보라 하신 것을 보는 것이고, 보라 하신 곳을 종과 횡으로 두루 거닐며 받는 것이다. 

 

망상은 근거 없이 바라는 것이다. 막연히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라는 것을 거니는 것이다. 

 

  • 어떻게 비전을 얻게 되는가? 언제, 어디에서 비전을 받는가?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통할 수 있는가? 그가 부르실 때 멈추어야 하고, 일어나야 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1. 말씀 

말씀을 펴야 보인다.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곳을 떠날 적에 보인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듯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본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서 참 것을 보게 된다. 참 나를 보게 되고 참 세상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요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거듭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예수를 영접한 자이다. 회개하여 자신을 씻고 십자가의 보혈로서 자신을 깨끗이 한 자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곧 거듭난 자다. 

 

한 자로 보다의 의미는 "관"자를 쓴다. 

보는 것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진다. 비전이 있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관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 관점이라는 의미의 영어 “Perspective”라는 단어는 Person과 spective의 합성어이다. 그것은 개인이 바라보는 시각, 같은 사물을 보고도 달리 감지하는 개인마다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똑같은 물컵의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이것밖에 안남았다”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라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관점은 바로 이 차이를 가리킨다. 

 

정탐하라 (explorer)”는 것은 바라보라는 것이고 바라본 것을 두루 다니라는 것이다. 12명의 뽑힌 자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열 명의 사람들은 오로지 가나안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디를 바라보든지 하나님을 찾는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 - 기도 

세상에 눈을 감는 자, 기도하는 자가 비전을 갖는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눈 대신 하나님 주신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 것을 보고, 참 것을 보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갈매기 조나단은 높이 날기 위해 끊임없이 날개짓을 한다. 

왜 높이 날기 원하는가? 멀리 보기 위해서.....

 

신앙인이 높이 날 수 있는 길은 기도하는 때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가장 높이 날고 멀리 보게 된다. 

장대 높이뛰기 하는 선수보다 더 높이 나는 사람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앙인이다. 

 

헬렌켈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자였지만 그의 전기에서 그녀는 말한다. 

"시력이 없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비전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보기 위해서 기도하고 보여주신 것을 간절히 바라도록 기도한다. 

소경 바디메오-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3. 본 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험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신중하고, 그 뜻을 알았을 때는 신속하라. -> 우리는 반대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는 조급하고, 뜻을 안 뒤에 행동할 떄는 망설이고 지나치게 신중하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셨을 때- 행동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 본 것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보여 주셨는데도 여전히 기도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다. 

보여 주셨을 때는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을 때에 망설이지 않는다. 어디인지, 거기 가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저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다. 

바치라니까 망설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친다. 

비전이 있는 자는 움직이는 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버렸으며,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왜 가지고 있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 너머의 구원을 보았기에 과감히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의 나라는 안전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물리치고 싸우며 나아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인생을 건 결단이고 모험이다. 

 

모험하는 자는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창조한다. 사막에 길을 내고 황무지를 장미꽃길 같이 가꾼다. 

쥐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고, 십자가를 가장 아름다운 상징으로 만든다. 

 

인생은 항해다. 배는 정박되어 있을 때에 아무런 가치가 없고 항해할 때에야 비로서 배의 역할을 한다. 

나그네 길은 걸어가야 하는 길이고, 순례자의 길이다. 움직이지 않는 신앙인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4. 하나님이 비전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 

하나님을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듬어가시기 위해서 일을 주신다. 

->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나를 온전히 희생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만드러져 갈 때이다.

나의 온전한 변화가 가장 큰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는 이유는 비전을 통해 일을 완수 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통해 우리를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비전하면 가장 첫 번째로 손꼽는 인물 - 요셉, 꿈의 사람

 

그런데 성경에서 요셉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꿈의 완성이 아니라 요셉이라는 사람의 완성이다. 

언젠가 다루겠지만 요셉에게 임한 세 번의 꿈 

1) 어릴 적 - 부모와 형제 앞에서 해와 달과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곡식 열한 단이 내게 절하더이다. 

꿈의 내용은 알았지만 전혀 해석할 줄을 몰랐다. 자기의 꿈의 내용을 알았다면 감히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천진무구하게 그 꿈을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2) 감옥 속 - 술 관원, 빵 굽는 관원 - 꿈을 해석할 줄 알았지만 그 꿈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 몰랐다. 그래서 꿈 해석 뒤에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3) 바로의 꿈 해석 - 꿈을 정확히 해석 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정확히 안다. 결국 그 나라의 리더가 된다. 

 

세상에서는 업적을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일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일의 목적은 우리를 세워가시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신을 가꾼다. 

인기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고 인격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다듬어 가시는 것이다. 

사울은 인기 때문에 인격을 잃어버렸지만 다윗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인격을 가꾼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열고 

비전을 보기 이해서 기도하고

기도한 바를 갈망하며 바라며 움직이는 자는 결국 자기를 변화시키는 자이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라는 비전을 주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이 아닌 광야로 먼저 인도하신다. 

왜? 그들을 다듬어가시기 위해서다. 

그래서 비전을 품는 자는 광야를 살고, 고난을 이기고 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제 한 주 뒤면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이 사회에 대해 공식적으로 시작을 알리는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지난 간 몇 개월을 생각해보면 각자의 처소에서 힘들어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꿈을 부어 주셨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꿈을 나누며 천천히 움직이려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우리는 발 맞추어 달려왔다. 

이제 창립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솔직히 기대하는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이 함께 든다. 

사람이 너무 안 모여도 우리 가운데 두려움이나 걱정이 몰려 올 테지만, 목사로서 오히려 그럴때에는 함께 한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독이며 때를 준비시키면 된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 할 때에 우리의 흠이 커 보이고, 빈틈이 벌어지고, 준비되지 못한 일들이 발생될 때, 둑이 무너지듯 허점이 크게 드러날 까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제가 개척 초기에 말씀드린 "한 성도를 교회로 만들어 가는 교회 공동체"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 목적에 들어있는 뜻은 불신자를 전도하는 교회보다 우선인 초점이 신자를, 성도를 온전한 하나님의 제자, 어느 곳에 가든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교회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그 말 속에는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추상적인 건물에 내 존재를 모두 바치며 헌신하는 목회가 아니라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트레이시제일교회라는 공동체의 작은 교회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각자의 인격, 각자의 가정,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로서 만들어가지지 않으면 사탄은 연약한 지점을 공격하듯 나의 생각과 감정을 통해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른 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리 개척 멤버인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루 하루 자신을 잘 점검하여 무너지지 않은 각자의 교회를 잘 지키며,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나누고 중보하되, 서로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사랑하고, 새신자가 오건, 상처입은 심령이 오건, 한 영혼 한 영혼을 잘 보살피며, 또 다른 제자로 삼아갈 수 있는 작은 트레이시 교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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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부활의 완성 (요한복음 21장 1-14절) 

 

부활! 

부활은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지 사흘 되는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도 놀라둔 장면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resurrection)이 아니고 단지 소생(resuscitation)입니다. 소생은 단지 부활의 표징,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선포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 그 날, 그 새벽, 이 세상이 뒤집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던 세상, 죽음이 왕노릇 하던 세상, 죽음이 생명을 삼키던 세상에서 생명이 왕노릇하고 빛이 어둠을 이기고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이 도래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반응

1. 그런데 그 부활의 소식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가 부활했냐가 아니라 동료 유대인들에게 그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과 힘과 부가 심각하게 소멸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2. 더 어처구니가 없는 부활에 대한 반응은 다름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그 소식을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막 16: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이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를 만난 뒤 바로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역시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지금 예루살렘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를 비롯한 정치가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조작질을 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자들은 함께 신앙생활 했던 여러 증인들이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도 전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그렇게 문을 꼭꼭 닫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으려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다가오십니다. 

 

말씀으로-> 증언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 후 제자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은 “샬롬!”, 우리말로 하면 “안녕!”하는 인사의 말씀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가 하는 인사, 송구영신예배가 끝나고 하는 인사, 새배하러 가서 어른들께, 혹은 새배하는 자들에게 인사하는 말! 새해 (하나님의)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우리의 달력은 1월 1일을 새해로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한 교회력은 오랫동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은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알리는 중요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날, 새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

아니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힘없이, 기쁨없이, 평안 없이 그저 고기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요? 일상의 어려움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삼일 만에 마라의 쓴 물 앞에서 불평하듯이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일상에 남겨져서 힘없이 고기 잡으러 나온다. 주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기에게 남겨진,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할 세상을 본 것이다. 주님이 부활하시건 말건, 세상이 바뀌건 말건, 자기에게만 관심있는 자는 세상이 바뀌었는지, 전혀 상관이 없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1) 가장 근본적인 이유야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습니다.  2)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3) 가정사가 복잡해서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4) 기독교에 대한 불신,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5) 게을러서 들리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한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끝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왜 실수 했냐고?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왜 나를 배반했냐고? 왜 또 세상으로 갔느냐고 탓하시지 않고 네가 배고파서 그렇다. 네가 피곤해서 그렇다. 네가 힘들어서 그렇지...

 

그 십자가의 고통과 엘리엘레 라마 사박다니, 하는 영적인 고통과 심장이 파열되는 사랑의 고통을 뚫고 사망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동안 예수 없이 그들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탓하는데 익숙합니다. 난 힘든데 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넌 왜 네 생각만 하고 내 생각은 해 주지도 않니?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배고프지? 힘들지?"하는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장면, 시몬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아니 또 실패해도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사랑은 실패해도 난 널 끝까지 사랑한다....내가 널 사랑한다.....는 세번의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완성은 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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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막 16:1-14)

 

부활, 새로운 해의 소망 (2018년 새해에 지은 시) 

 

단지 똑같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 새해라 부른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엔 소원 성취하라고

새해엔 건강하고 다 잘 될 것이라 다들 덕담이다. 

왜 어젠 그런 소리 못하고 오늘엔 이렇게들 소란들인가!

그래 새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게다. 

 

그 때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음에도 

하늘엔 잔치가 열렸다. 

사탄이 패배하고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그 날, 

제자들은 숨기에 바쁘고 

거짓 종교인들과 로마의 관리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날, 

하늘엔 새해가 시작되었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날, 

십자가를 저주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날, 

그 날 후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해가 돋았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의 새해는 바로 부활이다! 

 

1.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장 - 은사장, 13장 - 사랑장, 15장 -부활장) 

(고전 15: 12,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기독교 -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수많은 위인들과 성인들 -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긴 하지만 부활을 기념하는 종교 - 기독교가 유일하다.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인가? 

No!

구약에서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 

예수님 때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로 - 죽어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죽은 냄새가 나는 자가 살아남) 

 

그런데 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나? 

주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첫 모델이기 떄문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선언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2. 부활을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도 주의 재림의 날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이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뿔뿡히 흩어졌을 지라도 그들이 제자들로서 주님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래도 열 두 명 중 몇명이라도 부활을 기다리고 믿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어느 제자도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힘을 잃고 하늘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가 열렸는지 모르지만 부활의 바로 그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는 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3. 부활의 증인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부활을 가장 기다리며 걱정했던 것은 뜻밖에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 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 또한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 그들은 메시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지위, 체면, 사회적인 안전만을 위해서 예수를 죽였고, 부활하신 예수마저도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2.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돌이 막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도 무작정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 - 빈 무덤을 본다. 

그리고 무덤에 흰 옷 입은 청년 - 천사

6-7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9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3. 제자들의 반응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절)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에 자세히 소개) 

->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 

 

또 요한복음을 보면 20장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나타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보왔다고 하는데도 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는 것 -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주님의 말도, 믿음의 형제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누군가의 증언도 아닌 자기가 믿고 싶은 것, 자기가 되고 싶은 것만을 믿은 것-> 마음이 완악하다. 

 

  •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4. 막달라 마리아 

이에 비해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에서 유독 눈에 띠는 한 사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막 16장 1절에서도 여러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맨 처음으로 언급하고, 9절에도 그녀의 이름을 따로 언급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에게 보이심. 

 

기독교 역사상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여인 

1) 예수를 부정하는 안티 기독교 입장 - 그녀의 증언을 신빙성 없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거짓증거를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가? 그 장면을 같이 본 막달라 마리아...어떻게든 로마병사와 종교지도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믿지 못할 여인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습니다. 

 

카잔차스키라는 작가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많은 안티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얻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시 유명한 귀족 부인이었으며 "예수의 부인"이었고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곧 성배였다는 결론까지 이르릅니다. 

기독교계와 학계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지만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과 호응을 일으키기에 딱 알맞은 주장이었습니다. 

 

2) 기독교 공동체 

열 두 사도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 

그녀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합니다(요한 8,1-11).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또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 12:1-8)과 동일인으로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1절은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 11장)로 혼동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여인일 뿐이었습니다(눅 8:2). \
  •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류가 이 여인을 그릇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1년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언급되는 “죄 많은 여인”을 지칭하며, ‘죄인’을 이르는 헬라어 ‘harmartolos’를 ‘창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porin’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9년에야 이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 표현되고 교회역사가들의 평가 - 초대교회의 중요한 여성리더 

 

"가장 먼저"라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사실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소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꾸며낸 일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를 첫 번째 증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 기록해 두었던 시  

 

 "마리아의 고백"

 

까닭을 묻는 이에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답한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편애하시고 또한 그녀에게 나타나서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러셨을까?"하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어요(막15:40).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고요(막15:47).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답니다(마태 27:61외).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막16:1-2).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한20:11)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이 최초로 나타나신 그곳, 그곳에 나는 또 약속처럼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요한20:13-18)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순간,

이어 철저한 실패자로 종을 친 그 비통의 순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그분은 내 일생의 유일한 의미였기 때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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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은 항상 "나"였다. 

주님이 왕이 되면 내가 받을 상급, 내가 얻게 될 지위. 

예수가 죽자 그들은 생각은 이제 예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뭘하고 살지...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항상 "나"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분" "주님"

사도바울..마리아... 살아있을 때에.. 어쩌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서럽게 억울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주님을 생각했던 자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주님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는 매 주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도 항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새긴다.  

매일 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여러분이 없으면 찾게 되고 앞으로도 찾을 것이다.  

무슨 일일까? 아픈가? 속상한 일이 있는가? 시험에 들진 않았을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고 항상 바란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파격적인 임무를 주신 이유;

오직 그녀 만이 언제나 주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그녀에게 보이셨다.  

 

여러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로마 총독이 아닌 제사장들을 찾아간다.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부활을 알고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병사를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도, 부활한 예수 앞에서도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메시야를 언제나 거부했다. 

예수의 제자들 - 마리아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증언해도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는데도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세상으로 향한다. 

모두의 관심이 예수가 아닌 "나 자신"에게 가 있었기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예수를 따라다닌 자들도 예수를 통해 자기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증인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을 때도, 십자가를 질 때도, 죽었을 때도, 돌문이 막혀있는 무덤가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킨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부인하는 공동체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마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예수 부황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를 통해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폭풍우가 몰아쳐도, 때론 침묵하고, 내 인생이 힘든 상황이라도 그 분 안에 있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린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되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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