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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5:7-11: 염려를 던져 버리라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 배경 

베드로전서 : 불같은 시험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하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편지, 베드로의 인생 마지막 부분에 쓰여진 성경  

  • AD 64년 경 - 로마의 화제를 잠재우기 위해 그 희생양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극심한 박해와 핍박 
  • 고난 중에 있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던져버려라. 떠 넘기라. 

 

염려-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스스로 짊어지는 것-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태도를 교만이라 보았다. 

6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겸손은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이고, 염려는 내가 떠맡는 것이다. 

 

왜? 맡기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이 너희를 돌보심이라 - He cares for you 

1. 그가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

2. 그가 너희를 염려하기 때문.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성경은 일관되게 성도의 염려를 하나님께 아뢰고, 맡기고, 그치라고 말한다. -> 염려를 맡기는 것 -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의 겸손한 삶의 태도이다. 

 

그런데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 근신하라. 깨어라. (Be alert and of sober mind) 

조심해! 그리고 술에서 깨! 염려나 근심에 취해 있지 마!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할 이유 

  • 마귀가 우리를 삼키기 때문 

감정 - 우리를 사로잡게 한다. 

사탄의 방법 - 우리의 감정을 이용한다. 시기, 질투 (사울), 가인 (살기), 우울 (엘리야, 모세..) -> 우리의 생각을 통해 우리가 믿음 안에 있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는 감정이 내 것인줄 알지만 사탄은 영이 아닌 우리의 육신을 통해 (질병으로), 또 감정을 통해 우리를 삼키게 한다.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 거린다. 

감정에 중독된다. 

영성학교- 감정- 인정하고 흘러가도록 하는 것. 우리 안에 미움, 시기, 왜 그런 감정이 생기는가 바라보고 잘 흘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감정의 원인을 다스려야 한다. 

창 4:7)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라 (아벨에 대한 미움) - 그 근원은 하나님이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는가? (7절 앞부분) 

그런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그 미움의 대상인 아벨만을 바라본다. 왜? 감정을 바라보고 그 근원을 살핀 것이 아니라 아벨에 대한 그 감정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것 - 다 마찬가지다. 

 

어떻게 감정을, 마귀의 공격을 이기는가? 

  • 믿음을 굳건하게 하라. 

어떤 믿음 -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 난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 날 위해 근심하신다. 그 분이 내 짐을 맡아 주신다. 

  •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는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짐으로 마귀의 참소로부터 자유하게 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모든 권세는 무너졌다. 

그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단지 속이고 미혹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당하실 때에 하신 방법 

사탄아 물러가라. 

 

언제? 염려가 날 휘어잡으려고 할 때 

마귀가 날 삼키려고 할 때

나쁜 감정에 휘둘릴 때에...->  사탄아 물러가라.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온전하게 하다- 이미 끊어져서 쓸모없게 된 것을 다시 재생시키다. 처음 것 처럼 만들다.   
  • 굳건하게 하다-이미 깨어지고 갈라져서 소용없게 된 것을 틈을 매워 새것처럼 만들다. 
  • 강하게 하다 -  힘이 다 빠져버린 생명을 다시 재생시켜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다. 

[겔 37:7-9]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 기초를 다시 세워 건물이 건축되게 하다. 

 

-> 다시 일어나게 하는 능력, 부활의 능력,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여 새롭게 하는 능력 

 

베드로 -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의 인생에도 부활을 경험하는 인물 

 

예수님과의 첫 만남과 끝 만남 (똑같아 보이는 사건이 중첩되며 그의 삶을 감싼다) - 올해의 표어에 대한 말씀이다. 

 

1. 첫만남 

[눅 5:4-6]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2. 마지막 만남

[요 21: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상황 : 예수님의 부재,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십자가를 지시고 떠난 후에...물고기가 없는 상태, 부족한 상태, 지친 상태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주님의 말씀이 임함-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완전히 무너져 있는 상태에 그 분의 말씀이 임했다는 사실

- 순종: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을 내려놓고 순종). 이에 던졌더니...

-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눅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 잡은 물고기가 많아 그물이 다 찢어졌다. 그물은 무엇인가? 자기의 그릇, 자기의 역량, 자기의 기대와 소망 

고기 잡는 전문가. 자신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작은 은혜 하나에도 우리 그릇이 다 깨어진다. 부서진다. 

그리고 나서 하는 고백 - 나는 죄인이로서이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 신앙 생활의 시작이다. 

이제 고기 낚지 말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 만남을 통해 자기의 그물이 다 찢어서 쓸모없는 그물이 되었다

아니 깨어져서야 비로서 주님의 일, 사람 낚는 일이 시작된다. 

주님의 일은 그물이 찢어지는 데서 시작한다. 깨어지고 부서지지 않고 사용되지 않는다.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를 높이리라." -> 겸손하지 않으면, 네가 무너지지 않으면 너를 쓰지 않는다. 

 

  •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 정말 찢어진 그물같은 인생 아닌가? 십자가 상에서 세번씩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 

언제나 행동이 앞서던 제자. 

다시 찾아와서 그 찢어진 그물을 이젠 영원히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게 하시는 주님

 

온전하게 하다. (카타르티조) - 회복시키다. 수리하다. 그물을 수선하다

 찢어진 그물 같은 베드로를, 그리고 우리를, 나를....

 찾아오셔서 

 찢어진 곳을 기워주시고, 무너진 곳을 다시 세워주시고, 다시금 주님의 교회가 건설될 수 있는 견고한 터를 세워주시는 주님

 

 염려로 인해 무너져 있지 않은가? 

 감정에 취해 지금 마귀에게 삼킨 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염려도 교만이라는 것을 아는가? 주님은 맡기라 하는데 우리는 염려하며 내가 하겠다 한다.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 하는데 우리는내가 열심히 일할테니 잠자코 계시라 한다. 그리고 열매맺지 못한다. 

 쉬지도 못하고 열매맺지 못하고 찢어진 그물 마냥 아무런 고기를 낚을 수 조차 없다. 

 

 지칠 땐 무엇 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품에 안기어라. 

 걱정될 땐 잠잠히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그 분의 품을 느껴보라. 

 그 분의 말씀이 임하면 그 때 순종하라. 그 때 움직여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 - 잠깐 당하는 고난 

 1. 시간적인 표현 - 어떤 고난도 지나간다. 

 2. 임시적, 일시적-> 돌아갈 처소가 있다. 우리가 머물 장소가 아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될 곳 - 주님이 주인 되신 하나님 나라. 

 

 

성도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염려의 문제가 없을 순 없다. 

그런데 염려의 문제가 생길 때에, 바울은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 염려의 언어를 기도의 언어로 바꾸라고 처방한다. 

오늘 베드로는 염려 자체가 교만함이다. 하나님께 내어 버리라고 처방한다. 

어떤 염려든 거기에 중독되어 있지 말라 하신다. 염려따위 치워버리고 던저버리라고 더욱 강하게 말씀한다. 

맡기고 말씀하실 때에 움직이자. 

그 일을 해결하시든지 새로운 길을 여시던지,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요, 창조자 이시다. 없는 길을 내시는 이시다.  

함께 근신하고 깨어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신다. 

찢어진 그물을 깁듯이 이젠 영원히 찢어지지 않는 그물이 되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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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이채굴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2.01.17 02:12 신고

    안녕하세요. 파이채굴러입니다.
    요기조기 구경다니다가 들어왔는데,
    포스팅 진짜 잘하시는거 같아요.👍👍👍
    저도 배워갑니다.
    시간되실때 제 블로그도
    한번 들려주세요.🤗🤗🤗

내 영혼의 중재자 (욥기 16:18-22, 호세아서 6:3-6)

 

1. 중재자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서의 본문을 보면 고난 당한 욥이 누군가 나를 위해서 나와 친구들 사이에, 나와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있었으면 간절한 바람이 나옵니다. 왜 욥은 중재자가 필요합니까? 

자기의 억울함, 자기의 풀리지 않는 신앙의 회의를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 욥과 고난의 시작 

욥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나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1) 

 

자녀들에게도 신앙 교육을 엄격히 시키면서 항상 예배하기를 즐겨하고, 열심내어 신앙생활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자기에게 모든 고난이 닥칩니다. 우리는 욥기서 1장을 통해 사탄이 욥의 삶에 훼방놓는 일들의 배경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욥기 1장의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장면은 신학적으로 큰 논쟁과 위험을 지닌 부분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하고 당신의 자녀를 사탄이 장난치도록 허락하시는 장면은 하나님이 악의 방관자인가하는 큰 의문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고난이 있고, 그러한 삶에도 실패와 죽음이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기에 욥기서 1장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신앙적 물음에 대한 답중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여하튼 하루아침에 욥은 자녀들이 죽고, 재산은 날아가고 몸은 병들고 아내마저 그를 떠나가는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욥은 

[욥 1:21-22]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3. 욥의 친구들 

그런데 멀리서 욥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러 와서 욥의 곁에 거합니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욥의 당한 처지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그냥 할 말을 잃고 함께 울어주며 일주일을 유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한 두 마디씩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두 마디씩 하는 그 친구들의 말에 욥이 상처를 입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어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난 당한 자 앞에서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라 권합니다. 

 

친구들의 말을 듣다 보니까 점점 감정이 격해집니다. 내 앞에 이런 일이 실제로 닥친다면 어떻하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왜 욥이라고 자신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자신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신의 삶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제사하며, 교제했을 때에 분명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임을 경험해왔기에 자신이 당하는 문제를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을 아신다. 그가 나의 증인이시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 친구들은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나를 조롱하고 내 삶의 증인되시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니 난 눈물만 흘린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 나와 하나님 사이를 누가 좀 중재해 달라. 내 친구와 나 사이에 쌓인 장벽을 누가 좀 치워달라"

 

4. 중재자의 필요 

 

사람의 말 - 우리의 생각을 다 표현할 수 있는가? 생각의 총량과 말의 총량은 다릅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을 선택하여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해도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목회하면서도 가장 힘들 때, 아니 살아가면서 제일 힘들 때- 말을 해도 내 생각이 전달되지 않고, 내 생각을 말로 다 표현 못할 때에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사람 사이 뿐만 아니라 때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 분의 뜻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기도가 내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바벨탑의 사람들에게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의사소통의 단절이었습니다.  

결국 욥기서 끝에 가서야 하나님은 욥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의 물음에 답하기 보다는, 온 우주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게 함으로 생각으로만 믿어오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욥기의 클라이막스 

욥 42: 4-6)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소통이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간접적 믿음이 아닌 직접적 관계)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당신께 품었던 분노와 억울함을 풀고 다시 주를 바라보겠나이다)

 

결국 누가 중재자가 되었습니까? 하나님 스스로가 욥과 하나님 사이를, 친구들과 욥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저 섬김의 대상인줄로만 알았던 하나님이 결국 자기와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섬김의 대상, 예배의 대상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인간과 소통코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성탄이고 성육신입니다. 중재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창조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중재하시는 소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흔히들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많이 듣던 말이 "그냥 믿어! 믿으면 알아..."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을 반지성적이고, 비이성적인가 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아는 것에 근거해야 하고,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야 합니다. 다른 왕도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호세아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성경은 절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알고 믿으라고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합니다. 제사도 번제도 다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예배 잘 참석했으면 신앙생활의 본분을 다 한 것이라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 생각은 않고, 주일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한 주간의 신앙을 떼웁니다. 물론 그것조차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보다 우선하는 것이 하나님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모르면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덮어두고 자기 소신껏 예배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신이라고 합니다. 미신이나 무속에는 말씀이 없습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그 대상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신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빌면 됩니다. 치성만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소원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미신이고 우상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소원 이전에 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기도하며, 살기를 바라시는지를 알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기호, 판단, 생각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과거 미신 믿던 버릇이 남아있어서 알려고 하지 않고 치성만 드리려고 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도 미신스럽게 믿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믿어’, ‘신앙은 원래 무식하게 믿는거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알고 기도하고, 알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속신앙입니다. 다른 데는 관심이 없고 내 소원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좋은 데 취직하고, 자식 잘 되고, 결혼 잘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이게 목적은 아닙니다. 미신이나 무속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성경을 통해 깨달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다른 은혜는 거저 받습니다. 굳이 내 소원에 목을 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복무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모르기에 자기 소원에 매달립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는 만큼 신앙합니다. 모르는 만큼 못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덮어 놓고는 못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기 대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자기 느낌으로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뢰입니다. 신뢰는 상대를 알아야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신뢰가 생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결단하게 됩니다.

호세아 4장 6절 말씀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예배한다고는 하는데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앙생활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한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대로 어떤 사람은 자기 느낌대로,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 성경을 보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생활합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가 승리합니다. 

 

새해의 첫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주제로 말씀을 전할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중재자 되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힘써 알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정했습니다. 

 

의사마다 자기 전공이 있듯, 목회자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정승구 목사를 생각할 때, 말씀을 잘 전하시는 목사,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쓴 목사, 그 말씀대로 목회하려고 힘쓴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트레이시제일교회 하면 말씀 잘 배우고, 말씀대로 살도록 훈련받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교회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왜 말씀이 곧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라면 교회의 본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치고 배우고, 훈련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침묵상과 금요예배를 통해 성경 66권을 차곡 차곡 경험할 것이고 주일예배를 통해 그 때 그 떄 우리가 힘써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하나의 예화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8세기의 영국의 웨일즈 지방에 메리 존스라는 8살짜리 소녀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산간지방 시골에 위치한 곳으로 대부분의 집이 가난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힘든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메리에게는 매 주일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로 성경이 번역되어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실재로 일반인이 집에서 성경을 가지고 읽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성경책의 값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산골지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메리의 동네에는 마을에 성경책을 가진 사람은 몇명 되지 않았습니다. 주일날 성경공부를 하고 메리는 자기가 배운 것을 확인하고 성경을 더 읽고 싶어가지고 매주 토요일마다 에반스 아주머니 집에 가서 성경책을 읽곤 했습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메리는 내가 돈을 모아서 꼭 성경책을 사야지 하곤 했지요. 

메리는 성경을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아버지 병세의 악화와 집안 일로 돈을 모으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굴하지 않고 6년간 각종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은 끝에 결국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30km나 되는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 당시 성경을 보급하던 찰스 목사님을 만났지만 더 이상 판매할 수 있는 성경이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메리는 절망감에 울음을 터트렸고, 이를 안타까워하며 지켜보던 찰스 목사님은 자신의 성경을 메리에게 건네며 격려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메리의 성경』을 상 위에 놓고 공경하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 즉 성경에 대한 메리의 열망에 깊이 감동한 찰스 목사는 사람들의 갈급한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고 1802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기독교서회 회의에서 메리존스의 이야기를 전하며 성경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1804년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력으로 대강절 두번째 주에 지키는 성서주일의 유래입니다. 

 

이후 세계 여러나라에서 성서공회가 생겨 세계 여러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저가로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우리나라에도 존로스라는 선교사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아 첫 성경인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되었고 1899년 우리나라에도 성서공회가 생겨 일반에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한 권을 갖기 위한 한 소녀의 간절한 소망과 눈물과 노력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결국 성경을 갖지 못하는 세계 수많은 영혼들의 말씀의 공급처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늘 성경을 곁에 두고 말씀을 살아가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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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물고 온 새 잎사귀 (창 8장 6-11절) 

 

노아의 홍수와 방주 사건은 인류에게 임한 첫 번째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홍수의 사건에 있어서 교회의 상징적 모델로서의 방주의 역할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방주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 홍수의 때, 즉 심판의 때까지 사람들은 노아가 만들던 방주를 주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롱했다는 것 -> 예수: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빛을 외면했고, 십자가 위에 있는 그를 조롱했다. 
  • 사람들은 방주를 외면했지만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 평생의 작업이었고, 동시에 외로운 작업이었다. -> 십자가의 길, 교회를 세우는 길
  • 방주는 산꼭대기에서 만들어져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졌다. -> 사람들이 외면함과 동시에 조롱과 비난의 대상 -> 외면함과 동시에 주목의 대상: 역설적 대상 
  • 그 문은 늘 열려 있었으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홍수가 났을 때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 때가 이르기 전에는 누구에게든 열려있지만 그 때가 오면 닫힌다. -> 열처녀비유,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 그 곳의 내부는 홍수의 기간동안 모든 생명을 안전히 지켜주었지만 그 안의 환경은 결코 좋을 수는 없었다 (동물들의 소리와 냄새, 식량의 한계, 홍수로 인한 눅눅함, 햇빛을 쬐지 못하는 환경. 어쩌면 곰팡이와 악취와 소음으로 가득찼던...그런데 그곳이 바로 가장 안전했던 곳) -> 교회 역시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회는 없다. 그 곳은 하늘에서 완성된다. 

 

홍수의 내용 

  •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2) -둘째 달 열 이렛날 시작 
  • 그리고 물이 백오십일 동안 줄지 않고 땅에 넘쳤다 (7:24) 
  • 열째 달 초 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다. 
  • 그리고 나서 또 40일 후에 노아는 드디어 창문을 열었다. 
  • 언제 밖으로 나오는가? 육백 일년 1월 1일 - 물이 걷혔다. 2월 27일날 땅이 말랐다. 일 년하고 열흘 만에 마른 땅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40일 홍수나고 좀 지나서 곧 방주를 연 것이 아니라 비가 쏟아진 날만 40일이고 150일 동안은 그 물이 하나도 줄지 않고 땅에 가득했으며, 일년이 지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방주 안의 사람들은 거의 일년 내내 방주 속에 갇혀 지낸 것. 

 

동서남북이 모두 물

그 안에서의 삶 -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코로나 정국을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때 보다 조금은 그들의 답답한 삶이 더 잘 이해할 만한 상황. 

동물들이 가득 있었지만 있는 식구는 딱 노아의 가족 - 노아와 아내 세 아들과 그 며느리,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10명도 채 안되는 가족이 일년 내내 방주 속에서 먹고 이야기하고...

그 때에는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아니 라디오나 TV, 신문이나 잡지도 없다. 오직 배 안에 갇혀 자기들끼리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야 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코로나가 길어지며 못견디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런데 방주는 나갈 수가 없다. 나가면 물이다. 

코로나 불화, 코로나 이혼...

 

얼마나 답답했을지....그들이 그 안에서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노아가 처음 배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낼 때 심정이 어땠을까? 

마치 우리가 언제 가게 문 여나, 식당 문 여나, 교회 문 여나 그러한 기분보다 몇 갑절은 더 기대와 염려가 교차했을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식당에 갈 수도 있고, 조심은 할 지언정 거의 대부분의 일상이 회복되었다. 

그런데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우리의 마음을 늘 짖누른다. 

 

첫 번째 까마귀를 내어 보내고 물이 많아 앉을 곳이 없자 좀 날다가 곧 돌아오고..

두 번째 비둘기를 보내자 비둘기 역시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곧 돌아온다. 

 

그 오랜 기간 날기를 원했을 새가 훨훨 날다가 앉을 곳이 없어 다시 배로 돌아오는 광경도 생각하면 참 딱하지 않은가!

 

돌아오면 또 비둘기를 보내는 노아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칠 일을 기다렸다는 것은 비둘기가 돌아오자 실망한 마음을 또 참는 기간 - 하필이면 완전 수 칠일이란 말로서 낙심 뒤에 또 인내하는 지극히 신앙적인 표현이다. 

 

동 서 남 북이 물로 가득찬 세상에서 기다리며 인내하며 비둘기를 보내는 삶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엘리야가 기다렸던 작은 구름 조각 하나같은 소망을 갈급해하는 표현일 것이다. 

 

  •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역시 여러가지 인생의 홍수를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다녔던 직장을 잃고, 건강했던 몸이 상하는 일,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의 정국을 빠져나오질 못했고, 오미클론이란 신종바이러스로 또 한번의 긴장을 하고 있다. 

백신을 다 맞고 부스터샷까지 다 맞았는데 또 다시 오미클론이라는 바이러스 앞에 움츠려들 수 밖에 없다.  

 

이 때 방주를 열고 비둘기를 보내는 마음 - 바로 소망을 찾는 마음이다.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새벽같이 보낸 비둘기가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다. 점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 그의 마음은 무슨 사고가 있나...걱정 반 기대 반이었을 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서 돌아온 비둘기...그런데 11절에 보니 "그 잎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물려 있었다. 

 

감람나무 잎사귀 하나! 비둘기는 단지 잎사귀가 아니라 소망을 물고 온 것이다. 어딘가에 마른 땅이 있다는 증거를 물고 온 것이다. 

 

극심한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오는 소망의 메시지.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아무 이상 없답니다. 

내가 빌려줄 테니 빨리 해결 해. 

내가 도와줄테니 같이 해보자. 

 

삶의 홍수와도 같은 그러한 절망의 현장에서 작은 소망으로 다가오는 그런 소식. 

비둘기가 물고 온 잎사귀는 그래서 고난당한 자에게는 복음인 것이다. 

 

  • 우리가 왜 예수의 이야기를 복음이라 하나 - 감람나무 잎사귀 - 복음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을 보자. 

그녀가 남자를 유혹했을지, 남자가 그녀를 겁탈했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요즘처럼 미투운동으로 자기의 침해된 인권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대면 모를까! '

불행히도 당시 여인들에게는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걸렸다는 것은 간음하고 있는 현장에 사람들이 들어닥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악의 현장에 더한 책임이 있는 남자는 그 현장을 슬며시 빠져 나가고 여인 홀로 사람들의 온갖 수모와 시선을 맞으며 지금 돌에 맞아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때 어디에선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뜻 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예수와 여인 둘만 남는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천국의 비둘기처럼 나타나 감람나무 잎사귀를 내미시는 것이다. 

 

오라비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제자들에게, 38년된 병자에게, 바디메오에게, 문등병자에게, 이방 사람 백부장에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심지어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죄수에게조차 주님은 비둘기처럼 나타나서 그들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신다. 

 

그리고 지금 또 다른 인생의 홍수를 만난 우리들에게도 그 분은 여전히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내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 성도로서의 노아 - 소망을 갈급해하는 노아, 비둘기를 날리는 성도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홍수를 만난 이 세상에서 교회 라는 방주에 거하며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같은 인생들이다.

비둘기를 날리는 것은 무엇인가? 소망을 찾아 말씀을 갈급해하는 것이고, 주의 음성 듣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자이다. 우리가 날려 보내는 비둘기는 다름아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향기나는 기도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고백이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람나무 새 잎사귀, 보장된 소망의 약속을 주신다. 

성경은 잎사귀가 가득한 바구니다. 그 곳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망의 메시지가 넘쳐난다. 

 

  • 성도로서의 비둘기  -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온 잎사귀를 어떻게 했을까?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그냥 방주 밖으로 던져 버렸을까? 아니면 호주머니에 귀하게 넣고 자기 홀로 간직했을까? 

아니면 가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 잎사귀를 보여주며 땅이 말랐다고, 드디어 나갈 수 있다고 외쳤을까? 

 

주님이 원하시는 증인된 삶은 결코 숙제가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를 훈련하고, 전도 구절을 암기하고....

그런 부담을 가지고 주님의 증인 되기를 원하시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복음. 나에게 날라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그 좋은 소식을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믿는 자들은 너두 나두 크고 작은 홍수에서 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그 남은 생존자들에게는 각각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그런 새 잎사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왔던 그런 풍파를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두려울 것 없다고 고난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가진 잎사귀,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잎사귀가 지금 당장 필요한 자도 있을 것이다. 

혼자 절망하며 잠 못 이루는 남편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는 한 마디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내가 기도하고 있어요. 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되심을 난 믿어요"라는 그 따스한 한 마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자에게 조그마한 정성을 담아 격려하는 일, 모두 우리 자신이 비둘기가 되어 잎사귀를 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비둘기 같은 존재가 되게 하신다. 

성탄은 하늘 보좌를 떠나 아기예수가 되어 내가 너희들을 위해 지금 왔다는 비둘기가 된 하나님의 선물이고, "나를 따르라"는 그 분의 초대는 예수 믿는 우리가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 감람나무 잎사귀를 전하는 비둘기가 되라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고후 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그가 먼저 우리를 위로하셨고, 그 위로를 가지고 또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신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인내할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게 한다. 

 

[히 13: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의 구주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내가 주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의미있는 존재가 된 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닌가? 

 

아침마다 전하는 아침묵상 -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목회자들도 이 기간을 쉬는 기간으로, 매일 묵상을 하는 목회자가 줄어들고 있다. 

매일 녹화를 해도 점점 더 그것을 듣고 시청하는 성도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매일 아침 예배하고 말씀을 전하는 나라 - 한국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전하는 것은 이 엄중한 시대에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고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그 전하는 말씀을 듣고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자로서의 내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목사에게만 한정된 일일까? 

이 어려운 때에 믿음 있는 자들이 함께 자신의 의미를 찾는 일 아닌가? 

 

  • 잎사귀의 역할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으며" 

의문을 품고 사다리를 올랐던 노아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고난이 지나고 소망의 때가 되었음을....

복음을 경험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산다. 

성령의 역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며 확신시키시는 영이시다. 

 

소망이 필요하신가? 비둘기를 날리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를 올리고, 그 분의 잎사귀를 얻기 위해 성경을 펴자. 

잎사귀를 얻었는가? 

그러면 주위의 사람과 함께 그 잎사귀를 나누자. 전해주자. 

우리의 그 한 마디가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릴 수도 있다.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히는 홍수의 한 복판에서 개척된 교회이다. 

마치 방주에서 일년넘게 가족끼리만 생활했던 노아의 가족처럼 우리 또한 한 해를 가족처럼 그렇게 살았다. 

때론 함께해서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일년이라는 세월이 때론 너무 길고 지루해서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갈 때도 있었다. 

 

이제 2022년도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향해 비둘기를 날려야 할 해이다. 

이 홍수같은 세대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과 사명을 찾기 위해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구하고 또 날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은 은혜를 서로 나누고, 안 팎으로 전할 때에 이 홍수는 끝날 것이다. 

아니 코로나가, 오미클론이 우리의 소망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부르심과 소명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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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빛이 세상에 오다 (요 1:9-14) 

 

[요 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태: 아브라함과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아브라함에서부터

누가: 그 족보를 아담으로까지 거슬러 감

요한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창세기와 비교해서 시작 

창세기의 태초 - 모든 것의 시작 

요한복음의 태초 - 시작이 없는 영원한 근원. 

 

말씀이 있었다. - 하나님은 영이다. 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인간에게 감각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감각되는 표현 방법- 말씀, 말씀으로 들려지는, 말씀으로 경험되는,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뜻이 표현되는 방법 - 말씀 -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말씀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곧 예수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예수를 통해 펼쳐진다. 영이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예수를 통해 이루어가신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표현되지 않는다

성탄 이전에 그 예수는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그리고 성탄은 통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 거했다는 것은 임마누엘 -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현이다.  

 

성탄은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다.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예수가 인간에게 임한 결과가 생명과 빛으로 표현되어 진다. 

 

말씀이 임하기 전 세상 

  • [창 1:2-3]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혼돈- 무질서 /공허 - 없음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 혼돈- 엉망진창, 많이 가진 것 같은데 하나도 없는 것 Vs 아무 것도 없는 것)   

흑암의 깊음- 블랙홀 - 무엇이든지 그 안으로 들어가면 Kaos와 Nothing이 되어 버리는 것 - 하나님의 영,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곳의 현상이다.  

 

빛이 있으라- 무질서한 삶에 질서가 잡힌다. 무의미한 삶에 의미가 생긴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가지를 내듯이 열매를 낸다. 

이것이 빛과 생명으로 표현된다. 

 

  •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런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해져 있는 삶은 이 말씀, 이 말씀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고통이다. 

창조- 빛과 어둠을, 하늘과 땅을, 땅과 바다를 나누고, 그 곳에 거하게 하는 것 - 그 결과 주어지는 것 - 안식, 샬롬!  

엉망진창으로 살던 인생은 질서를 반가와하지 않는다. 

노숙자에게 깨끗한 집을 주어도 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빛이 와도 어둠은 반기지 않는다. 왜? 어둠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무질서에 익숙한 인생은 질서를 반기지 않는다. 질서에는 규칙이 필요하고, 규칙에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질서를 통해서 참자유가 주어지는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한 인생은 질서 없는 자유, 혼돈이 자유인 줄 안다. 

 

질서와 안정, 의미있는 삶은 빛이라는 말씀이 내게 와서 역사하여 얻는 결과이지만 그 과정은 고통이고 갈등의 연속이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혼돈과 공허의 삶-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일해도 자기에게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40여년의 시간이 걸린다. 40이라는 숫자는 육신의 한계의 시간이다. 

내가 죽는 시간이다. 

어둠에 빛이 비추기가 그렇게 어렵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렵다.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삶에 예수가, 말씀이, 빛으로서 왔는데 어둠이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빛을 몰아내고 죽이려 한다. 

  • 성탄이 되어 예수가 오셨는데 교회 안의 제사장들이 동방박사의 전해주는 소식에도 무감각하다. 
  • 열처녀 처럼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리를 들으면 뛰어 나가 맞이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삶이 달라질까, 자기 위치가 변할까 두려워하며 그를 죽이는데 앞장을 선다. 
  •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방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 
  • 예수는 부활해서 하늘엔 난리가 나고 오히려 로마의 정부와 속물이 된 제사장들은 난리가 소동이 났는데 제자들은 하루 하루의 삶을 위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다시 물고기 낚는 어부가 되고자 한다. 

하늘엔 난리가 나고 잔치가 이루어 지는데 세상에 빠져 있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났는지 무감각하다. 

 

이러한 안타까움이 9-11절까지 계속 나열된다. 

[요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의 말씀, 예수의 생명, 예수의 빛으로 지음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다시금 혼돈과 공허 속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질서와 안식을, 열매와 생명을 주려는 예수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접지 아니한다. 

영접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하면 거절했다는 것이다. 걷어 찼다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내팽겨쳤다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오늘의 삶,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기만 있었기 때문

생명이 뭔지도 빛이 뭔지도, 열매가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중에....

 

  •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는 자,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 이것이 당연한데도 당연치 못한 시대에 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오직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독생자 예수다. 예수처럼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권세를 주셨다. 권리를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 

 

  •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무엇일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고 싶은 권세는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높은 권세. 권위..

다시 마태복음 20장 -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구하고자 한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좌편에 앉게하고 싶은 그 권세의 자리. 

(마 20:22)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 권세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잔이 무엇인지 주님이 보여주신 그 권세, 그 잔의 정체

 

  •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권세, 정체- 십자가 지는 권세, 예수 따르는 삶, 예수 닮는 삶

 

요 21:15-23절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치라. 

-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 사람낚는 어부의 완성.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장면 

[요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가 하고 싶은 데로, 네 열심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삶으로 가라. 

 

결론 

  •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험되는 말씀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 
  • 그 말씀이 하는 일은 혼돈과 공허로 점철된 우리 삶을 질서와 의미의 세계로 이끄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의 성취가 안식이다. 
  • 그런데 혼돈과 공허에 익숙한 인생은 그 말씀의 역사가 고통스럽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혼돈과 공허가 창조의 질서와 평강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고통의 연단이 필요하다. 
  • 때론 혼돈과 공허로 뭉쳐있던 것들이 나뉘어져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뉘어진 세계에 다시 위치 시키신다. 
  •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다
  • 그 권세는 세상적으로 보면 십자가 지는 고통의 삶이고, 낮아지는 삶이고, 때론 핍박받고 외면받는 삶일지 모르지만 그 삶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 주님을 닮는다. 내가 선택하고 구하는 삶이 아닌 남이 내게 띠 띠우고 때론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게 하신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는 그 곳에 다름 아닌 주님이 계신다면 그곳이 곧 하늘 나라이다. 

 

  • 우리는 지금 다시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성탄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곳에 빛이 임하면 곧 혼돈과 공허는 끝이 난다. 질서와 안정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창조이다. 
  • 혼돈과 공허가 질서를 갖으려면 부득이하게 고통의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깨어지고 수술되는 시간, 광야 40년, 그리고 여리고를 깨뜨려야 한다. 
  • 3년동안 열심히 주를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지금껏 네 맘대로 갔다. 이제부터는 내가 널 사용할 것이라는 것이다. 모세에게처럼, 여호수아에게 처럼... 우린 주님 앞에서 열심히 했는데 주님은 여전히 네 맘대로 살았다고 하실 때가 있다. 마지막까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주님께 진실해야 할 이유이다. 
  • 힘들지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빛을 사모하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을 주님의 빛 안에 내어 놓자.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질서, 평안, 기쁨을 구하자. 이것이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는 성탄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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