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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목자 없는 양을 먹이다!(마가복음 6장 30-44절)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교회 2015년도 표어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이 말씀을 늘 기도하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먹일 수 있는 선교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번 우리가 첫 번째로 함께 사역한 나바호 선교를 준비하면서, 또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저는 정탐꾼의 심정이 되어 우리가 이들을 먹일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가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지역,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이었고, 이곳에서부터 강제 이주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살기 힘든 땅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곳에서 다른 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이 서려 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려면 한두 시간 도시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의무 교육인 고등학교조차 가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조상때 부터 써오던 나바호어를 젊은 세대들은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 한국 땅에 온 선지자들은 "이 땅에도 과연 복음의 빛이 비췰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에도 그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우리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 땅 미국의 원주민을 향한 복음의 장에 초대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 연약한 우리지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 위에 축사하셔서 수 많은 영혼들을 먹이고 남는 것이 없게 하신 후, 낭비 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교회가 쓰기에 넉넉하도록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실 것입니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 너희들이 주어라

본문 : 마가복음 6 30-44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시간적 배경: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30)

è  6 7절과 댓구를 이루는 말씀:

(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전도하러 보냈더니 제자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함.

è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 일은 했지만 자기의 양식을 얻지 못하였다. 사역은 했지만 말씀으로 충전되지는 못했다. 순종의 사역은 있었지만 온전히 자기화 되지 못한 믿음이었다.

è  그렇기 때문에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는 말씀은 너희가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말씀으로 더불어 새롭게 하라는 것.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가지라는 것.

또 다른 배경

[ 6:3-4]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è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산상수훈을 기억나게 하는 말씀. 무리에서 떼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말씀.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l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고 믿음의 식구들이 모여 유월절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

l  기억하다 (Remember) – 단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사건의 멤버가 되는 것. 그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

-       첫 번째 유월절 때 예수님의 행적

[ 2:13-1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è  성전 척결 사건: 유월절 제사의 제물이 되는 동물들을 사고 팔기 위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시는 사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16)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19)

è  유월절 제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       마지막 유월절 때의 예수님의 행적

마지막 만찬:

( 22:7)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하라.

è  베드로와 요한에게 명하여 유월절을 지낼 장소를 얻게 하심- 마가의 다락방

è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2:19)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22:20)

è  자기들의 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시는 것.

 

그 사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두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

(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è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 그들을 먹이시길 원하시는 분

두 양자의 예화

마음씨 좋고 존귀한 한 가정에서 두 명의 양자를 얻었다. 한 명은 아주 존귀한 가정의 양자로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전의 삶을 버리지 못하고 고아원에 있을 때와 똑같이 싸우고, 말썽 피우고 험한 말들을 하며 부모의 속을 썩였다. 부모는 이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고 뒷바라지도 해주곤 했지만 그 아이의 삶이 변할 때까지 더 큰 재산을 맡기거나 큰 일을 시킬 순 없었다. 그 자녀가 이전의 행실을 버리고 자신들의 아들로서의 존귀한 삶을 살아가길 기다렸다.

또 다른 아들은 앞서 아들로 인해 부모가 속상해 하는 것을 보고는 혹시라도 이 부모가 자기도 싫어하면 어떡할까, 자기를 버리면 어떡할까 늘 근심하며 그 부모 앞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늘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할 때에도 혹시라도 고아원에서 하던 습관들이 나오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으며 늘 부모를 의식하며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다. 부모는 늘 그에게 네가 어떻게 하던 늘 우리는 네 부모이고 널 버리지 않을 꺼라고 했지만 두 번째 자식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질 못했다. 늘 첫 번째 아들을 바라보며 그와 비교하면 내가 형보다는 잘하니까 날 버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아들은 무리의 신앙, 변하지 않은 신앙생활, 여전히 죄악 속에 살아가는, 영적인 기쁨을 전혀 알지 못하는 신앙생활.

두 번째 아들은 위선의 신앙, 강박관념의 신앙, 바리새인의 신앙. 자유가 없는 신앙.

제자들- 여전히 영적인 기쁨을 알지 못하고 죄악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도 아니고, 거꾸로 늘 비교 하며 강박관념 속에서 자유 없이 살아가는 신자도 아닌 주님과 동행하고 그 분과 함께 일하고, 그 분의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 예수님을 목자로 삼은 자.

 

23: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è  그 분이 내 목자라는 신뢰가 있는 자. 그 분과 함께라면 언제나 안전하고, 보호받고, 평안하다는 확신이 있는 자.

무리의 신앙과 제자의 신앙은 다르다. 무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확신. 내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리를 위한 사명감과 그들을 위한 사랑.

예수님의 무리를 향한 마음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사니까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4)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이 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è  예수님과 같이 그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다. 그들을 책임지려는 마음이 없다.

è  예수님의 반응: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6:5)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에게 물음.

1)     빌립의 대답) 6:37-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è  예수님의 우리’: 예수님과 제자들

è  빌립의 우리: 예수님을 뺀 제자들. 능력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빼고 자기들의 할 일로 생각

2)     빈들의 축복

빈들- 광야: 하나님과 내가 단독으로 서는 곳.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곳. 런데도 이 곳에서 빌립은 정작 필요도 없는 돈의 액수만을 따지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지금은 살 곳이 없는데 그런 곳에서도 계속해서 인간의 문명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40년간 광야 생활 중에서 그들은 항상 애굽의 문명, 애굽의 음식, 애굽의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먹은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와 매추라기와 물이었습니다. 그것도 배고픔이 없이 풍요롭게 말입니다.

3)     너희가 먹이라.

마지막으로 내리신 질문은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2만 명이나 되는 이 배고픈 사람들은 우리가 책임지고 먹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물으심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가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제자 중 하나가 말합니다. 참 합리적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각자가 얼마나 먼지도 알 지 못하는 마을로 내려가 돈있으면 실컷 먹고 없으면 알아서 하라는 말입니다. 이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주님 앞에 가면 이런 명령들을 받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나아가서 구원을 나누어 주어라. 병든자를 고쳐 주어라. 가난한 자를 네가 책임지어라. 외로운 자를 찾아가 위로해 주어라.” 물론 듣고 안 듣고는 각자가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신실한 자에게 다가가서 똑같이너희가 가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l  떡을 떼었다-> 밥을 먹었다. 이 땅에 밥으로 오신 분,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을 기억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