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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다니엘 6장 10절 창문 열고 드리는 예배

by 소리벼리 2023. 3. 12.

다니엘 6장 10절 창문 열고 드리는 예배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다니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시대를 산 인물 

나라를 빼앗기고 성전이 불태워지고 포로의 신분이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온 무리들 중의 하나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자신을 추스릴 수가 있을까? 낙심을 넘어 자포자기. 자신을 방치.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지금 나라도 빼앗기고 교회는 불탔는데...그리고 좀 괜찮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바벨론의 궁에서 죽지 않고 그런데로 맛난 음식도 먹고 이스라엘에서보다 더 좋은 교육도 받아가면서 살만한 세상을 만난 듯, 어차피 이스라엘은 망했으니 이젠 바벨론에서 살 길을 찾는 것이 보통 주변 사람들의 심정.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바벨론의 세상에 융화되지 않으려 뜻을 정했다. 바벨론의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부흥의 시대에 이런 결심을 해도 잘했다 칭찬할텐데...믿음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모든 사람이 믿음에 회의를 느낄 때에, 다시 말해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도무지 보이지 아니할 때에 뜻을 정했다. 

 

바벨론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왕의 음식으로,,,, 그 왕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는 상관없이 그 왕은 곧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자요,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운 자. 그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에 취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겠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 

어떻게 이러한 때에 자신을 지키리라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오묘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바벨론의 왕 느부가넷살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지만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러니까 온 나라의 술객과 술사들을 불러 그 꿈을 해석하라 명하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는 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다 죽게 되는 현상. 

 

그 때 다니엘이 나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꿈을 해석하여 왕에게 발탁되어 바벨론의 총리가 된다. 

이 때부터 다니엘은 기도에 취한 자가 된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계시록이다. 

사도 요한이 모든 사도가 죽고 홀로 남았을 때에 밧모섬에서 기도를 통해 신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듯이,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사무엘이 "내 평생에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기를 원하나이다"기도하며 새 시대를 열었듯이, 다니엘은 모든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시대에 뜻을 정하여 기도하는 자가 되어 계시록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미래의 일을 기도를 통해 볼 수 있는 자가 된다. 

 

6장은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느부가넷살왕의 뒤를 이은 다리오왕 때에도 여전히 총리직을 수행하며 나라를 이끌고 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왕은 다니엘의 지혜가 필요하니까 중용을 하지만 다니엘과 경쟁해야 하는 고관들은 다니엘이 영 불편하다. 

어느 나라이던지 귀족들은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그 세상에 이방인이 끼면 왕따를 시킨다. 재벌가에 평민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누이들이 구박하고, 줄이 없는 자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줄 가진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영문과에 다닐 때에 졸업하고 비행기 승무원이 된 여동기생. 

한 2년 다니다 그만 두었는데 물으니 항공운항과가 아니여서 같이 다닐 수가 없어서....

성적은 훨씬 우수해도 그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니 버틸 수가 없다. 

 

바벨론의 고관들이 다니엘을 보니 이방인인데 두 왕조에 걸쳐서 총리가 되니 이젠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그를 몰아낼 궁리를 한다. 

 

[단 6:4]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가 일하는 데에선 어떤 허물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약점이 될만한 것 하나를 발견한다. - 바로 그가 믿는 신앙이다.  

 

[단 6: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그는 바벨론의 왕보다 하나님을 더 경배하는 자라는 것. 

교회 안에서는 이런 자가 칭찬 받지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은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자로 보이는 것. 

 

왕을 찾아가서 법령을 만드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어라"

 

다리오 왕의 입장 -  왕위에 오르자 마자 신하들이 자기 왕위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받아들여 덜컥 승낙하게 된다. 

 

다니엘의 입장 -  이 법령이 자기를 향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법령이 자기를 고발하여 죽이고자 하는 음모라는 것 

그리고 그 법령에는 묘한 유혹도 있었다. 그것은 30일 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 

 

여러분이 다니엘의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겠는가? 

 

비가 오면 우선 피하자. 바람이 불면 몸을 낮추자. 

30일만 참자. 30일만 숨자. 멈추자. - 우선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 하나님도 이해하시지, 내 중심을 아시지....

그런데....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 이게 법이다. 이걸 어기면 죽는다. 
  • 전에 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 그는 이전에 늘 하던 대로...여전히 기도한다. 어떤 감사를 드렸을까? 지금이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인가? 그런데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거리들을 찾는다.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오늘도 나와 함꼐 하시는 하나님...

  •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특별이 내 눈이 멈춘 구절...) 

창문을 닫고 조용히 기도하면 되잖아.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기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구태여 창문을 꼭 열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다니엘을 칠 수 있는 빌미이지 않은가? .. 너무 나간 것 아닐까? 

 

창문을 여는 것 - 오늘 컬럼에서도 보듯이 창문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세상을 보는 눈, 통로이다. 

다니엘에게 창문을 연다는 것 -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연다는 것, 하나님꼐 내 시선을 고정하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 바벨론을 다시 보겠다는 것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 바로 하나님의 비전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그 열린 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 온 마음을 쏟아 붓고 그 열린 창을 통해 하나님과 함꼐 다시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 

열린 창은 그의 신앙 고백 

남의 시선 때문에 창문을 닫는다면 하나님 앞에 그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

 

포로로 잡혀와서 지금 총리의 자리까지 온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런데 지금 자기가 위험하다고 하나님꼐 대한 기도를 쉰다면 그것은 자기 삶을 부인하는 것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자기 목숨을 드리는 감사, 자기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감사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해주실 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는 차라리 죽음에 맞서 신앙의 고백을 드리는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위험을 무릎썼다. 

하나님을 모든 환란 중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분임을 믿지만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식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일까? 

3절에 보면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므로..." 

아니 그는 그 나라의 그 어떤 자보다 지혜로왔다. 

그는 이 절체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어떤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사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바벨론에 왔을 때의 다니엘 15살 전후.... 

그곳에서 아마 그역시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기도했을 터이다.

모두가 바벨론의 궁에서 현실에 순응하며 왕의 진미와 포도주에 취해 있을 때에 그는 뜻을 정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그는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영생이요, 천국인 것이었을 것이다 

 

기도하는 다니엘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니엘의 신앙을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다니엘에게 순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고 자신 답게 사는 것이었을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왜 이렇게 위험한 길을 가십니까?" - 사방에서 죽음의 경고가 쏟아질 때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 영혼이 자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게 사는 것! 

 참 나답게 사는 것!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주님께 붙잡혀 사는 것! 

 

 그 모든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것. 기도하며 예배하고 사는 것

 그것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처음 바벨론에 왔을 때에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좋았듯이 

 총리가 된 이후에도 그 모든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 

 

  황충의 재앙의 결과 -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아 

 [욜 1:9-12]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포도원을 가꾸는 자들아 곡할지어다 이는 밀과 보리 때문이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

  • 황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결과 : 예배가 사라진다. -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다-> 사람의 즐거움이 마르다. 상황이 힘들어 예배가 사라지니까 결국 사람의 모든 즐거움도 마르고 만다. 

 

그런데 똑같은 재앙 속에서 고백하는 또 다른 선지자의 고백 

[합 3:16-18]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 종교 생활 -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자기 만족 행위, 영혼 없는 신앙, 결국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다. 
  • 신앙 생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 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어디에서 즐거움을 누리십니까?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가? 

다니엘이 처한 현실 - 사방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로 가득찬 세상 

                             - 위축될 수 밖에, 움츠려들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 모든 현실을 놓아버린다. 창문을 열고 온 마음을 하나님께 열고, 그 창문으로 하나님을 초대한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난 안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으신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경험하길 원하시지 고난에 빠져 허우적 대는 꼴을 보지 못하신다. 

그 고난을 뚫고 나오기를 기다리신다. 아니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신다. 

 

  • 다니엘의 결말 

기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는 사자굴에 던져진다. 

기도했다고 금방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현실은 그의 대적들이 생각했던 대로 사자굴로 그를 내몬다.  

그러나 모두가 죽음을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에 사자는 다니엘을 죽이는 존재가 아니라 다니엘의 친구가 된다. 

모두가 사자가 다니엘을 죽이리라고 기대하는데 사자가 다니엘의 친구가 된다. 고난이 믿는 자의 친구가 되어 그를 상하지 못하게 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다니엘을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하는 자가 된다. 

 

[단 6:18]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왕을 의지하고 사는 땅의 사람이었다면 다니엘의 생명은 그가 의지했던 한 왕의 시대였을 뿐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왕은 바뀌어도 다니엘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그는 바벨론이 바사제국에게 망할 때까지 총리를 지내다가 바사제국 고레스왕때까지도 그의 영향력이 그치지 않는다. 

 

물론 예언서에 예언된 내용이기 때문에 바사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국으로 귀한 시킨 것을 우리는 자연스런 결과로 보지만 세속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은 유래를 찾을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승전국이 그의 식민지 사람들을 조건없이 귀국시킬 수 있는가? 

그것도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함께 보내고 그것에 성전 지을 제목과 제물까지 얹어서.... 

 

이방왕이었던 고레스가 그러한 결정을 한 것에는 왕조가 바뀌어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했던 한 사람 

다니엘을 통하여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입을 모은다.  

 

[단 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떄까지 이 세상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을 인정한다. 

이른바 세상 권세는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바벨론의 지배 하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서 믿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세상에 무관심하고 오직 골방에 갇혀 숨어지내야 하는가? 

 

구약성경은 가장 강력한 제국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믿음을 담대히 지켰던 자들이 바로 그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는 사람이 되었음을 증거한다. 

애굽이 당한 7년 기근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요셉

가장 악랄한 제국이었던 바벨론은 끝까지 다스렸던 총리 다니엘...그들이 그 땅을 다스린 것은 타협과 변명이 아닌 믿음과 결단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자가 어느 환경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하신다. 

 

현실에 주눅들지 마시라. 

그 모든 현실 속에서 뜻을 정하여 마음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늘을 향해 창문을 열면 어떤 상화에서도 감사의 이유가 보인다. 

감사를 발견하는 인생은 이미 승리한 인생이다. 

그리고 그 삶 가운데 즐거움을 찾으라. 

즐거움은 내 삶의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내부에서 샘솟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잠긴 문을 열어 놓으신다. 

세상과 담쌓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 아니다. 

문을 열고,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볼 떄 우리는 당당히 세상에 맞설 수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현실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다. 

 

잘 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잘 죽기 위해 믿는 것이다. 

결국 잘 죽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이 천국의 사람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남겨진 어떠한 삶 속에서도 창문을 열고 예배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