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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향한 기적인가!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병이어라고 불리는 예수의 사건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도, 그리고 그 분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기적이다.

 

나도 2015년도 교회의 표어를 "너희가 먹이라!"라고 정하면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여러번 오병이어의 사건을 설교를 통해서 전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에수님이 기적을 보이시고 병자들을 고치자 예수의 소문이 예루살렘 곳곳에 퍼진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33절에 보면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예수님께로 모여든다.

 

  • 그리고 그들은 때가 저물때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듣는다.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며 모여드는 자들을 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을 사모하여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그 곳을 떠나지 않고 매달려 본 적이 있는가?

 

그저 예배시간 한 시간도 지겹게 힘들게 예배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들었을까?

그들은 처음부터 오병이어의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여든 것은 예수를 보기 위해서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예수가 하시는 말씀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들었다.

 

은혜는 갈급함에서 온다.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는 자에게 베데스다 연못에서도, 성전 미문에서도 기적이 임한다.

 

  • 예수님은 영적인 은혜만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들이 날이 저물도록 말씀을 듣고 떠나지 않자 그들이 구하기 전에 주님께서 그들의 배고픔을 알아채셨다.

신앙은 영의 것을 구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육적인 문제도, 이 세상의 문제에도 결코 소흘함이 없다.

우리의 일상을 무시하지 않는다.

 

  • 마을로 가서 이들로 무엇을 사먹게 하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주님은 갈 것 없다 하시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신다.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다. 그러자 요한복음에 의하면 한 아이가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축사하시고 그들 모두를 배부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두 광주리를 채워 가신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각도로 해석되고 설교되어져 왔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에 대한 대표적인 기사로도 소개되었고 어린아이의 헌신에 맞추어 우리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강조하며 헌신에 대한 대표적인 구절로도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의 역할은 극히 외면되었다.

그들은 이 사건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아닌 작은 어린아이라고 표현된 자의 헌신을 통해 오천명을 이루신다.

 

성경에서 어린아이는 "순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무력함" "존재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이기도 하다.

 

  • 오늘은 제자들의 각도에서 이 사건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빈들"이지만 요한복음은 이 사건이 "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요 6:3)

 

산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다. 이 땅의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는 장소,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면하고 오직 주님으로만 채우는 장소, 골방, 내면의 빛, 기도의 시간, 성경은 산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그 중심엔 주님과 대면하고 주님의 임재로 가득찬 장소이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본문에서는 특별히 이 곳에 있던 제자들을 제자라고 명하지 않고 사도라고 명한다.

사도라는 말은 사도행전 이전엔 쓰지 않던 표현이다. 유달리 이 사건에서만 성경은 제자들을 가리켜 사도라 명한다.

 

사도는 주님의 특별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 30절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 (막 6:30)

이 구절은 앞선 7절부터 13절까지 예수께서 이들을 둘 씩 짝지어 보낸 사건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그들은 특별한 사명을 띠고 파송받아 지금 돌아와 있다. 주님은 그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는다. 임무를 주시는 예수는 그 임무를 이룰 능력을 미리 주신다.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병자들을 치료할 권능을 주시고 또한 선포할 말씀을 주신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도인 것이다.

 

사도로 파송된 그들이 돌아와서 의기 양양하게 자랑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들에게도 예수처럼 능력이 나타남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좀더 신령한 자가 된 듯 했을 것이다.

 

영적으로는 한 껏 들떠 있었지만 한껏 육신적으로 피곤해있던 그들에게 주님은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육적 피곤함을 아는 주님은 그들에게 쉼을 주신다. 안식하게 하신다.

 

  •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물론 주님은 그들이 안식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음식을 먹는 시간으로 표현되지만"

예수님께 적용하면 주님은 "따로 한적한 곳"에 다다를 때마다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기도하셨다.

 

주님에게 안식은 단지 육신적인 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창조기사에서 안식은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구별되고 구별된 것에 인간이 거했을 때에 주어지는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결코 육신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질 때에 우리는 안식한다.

 

그 분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다면 아무리 유람선을 타고 배 속 깊은 곳에서 잠을 잔다하더라도 그것은 고통의 시간이지 안식이 될 수없다.

 

  • 안식을 주신 주님이 이제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바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다.

왜 주님은 그들에게 이 말을 하셨을까? 어린아이를 돋보이게 하시려고?

그들 아니어도 주님의 행하시는 것을 강조하시려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그 표현에 주님의 진심이 들어있진 않을까?

 

각자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물고기와 떡으로 먹이시고 채우신 후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사도로 세우신 후에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셨던 주님께서

 

사도로서의 사명을 맡기시고 경험하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무리를 맡기시고자 진심을 다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하고 계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주님의 말씀이 임하면 우리의 삶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때론 지진으로 임하고 때론 불로도 임하고 때론 세미한 음성으로 주님의 음성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다가오지만 공통적인 것은 우리 삶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갈등을 주고 우리의 일상을 흔들고, 선택을 요구하고 때로는 이삭을 바치는 것 같은 포기를 원하시기도 한다.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대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불손종할 핑계를 찾기 위해 자신이 포기 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것과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전자를 택했다.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백데나리온이라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없음을 이야기하고

자기들이 이미 일을 다해 피곤하다는 육신적인 이유를 대기도 한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정탐하라 (자신을 살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떤 이는 "그 땅은 정말 좋은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능히 저 땅을 정복하자" 하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너무 강하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다 라고 하면서 스스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스스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우리의 현실을 보여준다.

 

  •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나바호 선교

우리에게 먹이라고 붙여준 사람들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작년에 우리가 처음 참석하면서도 앞장서서 리더의 역할을 했었는데 올해엔 갈 사람이 없다.

첫날 모임에 고민 고민 하다가 "올해 우리 교회 여건이 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말하려고 참석했는데

예배 가운데 주신 감동

계속 생각나는 부담과 그들의 소리.

 

사도들이 외면하면 어떤 어린아이, 아니 돌맹이라도 사용해서 일하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다가서서 "너희가 주어라. 난 너희가 그들을 먹이기를 원한다"하고 말씀하시는 소리 .

 

올해 제가 라이드 팀장

큰 차가 없기 때문에 어차피 12인승을 빌려가야 하는데 타고가는 사람은 고작 네 명.

 

각자가 힘들고 어려운 사정이지만 난 이 차에 적어도 우리 교인 열 두 명을 채우고 떠나고 싶다.

 

오병이어 현장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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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6.16 04:35

    샬롬^^
    바쁜 한주를 보냈습니다.
    12인승 차량에 동승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사도, 목자 없는 양을 먹이다!(마가복음 6장 30-44절)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교회 2015년도 표어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이 말씀을 늘 기도하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먹일 수 있는 선교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번 우리가 첫 번째로 함께 사역한 나바호 선교를 준비하면서, 또한 사역을 감당하면서 저는 정탐꾼의 심정이 되어 우리가 이들을 먹일 수 있을까, 아니 해야만 하는가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지역, 산호세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이었고, 이곳에서부터 강제 이주 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살기 힘든 땅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곳에서 다른 세계와 차단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백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한이 서려 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자기들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려면 한두 시간 도시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의무 교육인 고등학교조차 가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조상때 부터 써오던 나바호어를 젊은 세대들은 잃어버리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조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 한국 땅에 온 선지자들은 "이 땅에도 과연 복음의 빛이 비췰 수 있을까?"하는 의아심에도 그들의 목숨을 바쳐가며 우리 나라에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이 땅 미국의 원주민을 향한 복음의 장에 초대되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 연약한 우리지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 위에 축사하셔서 수 많은 영혼들을 먹이고 남는 것이 없게 하신 후, 낭비 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교회가 쓰기에 넉넉하도록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실 것입니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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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1. 기쁜소식 (이스라엘과 복음)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밤- 어두운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집으로... 또 내일 걱정)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선포>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은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2015년도의 우리 로고스교회의 표어는 바로 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었다. 

처음 이 말씀을 나눌 때에는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단지 먹이라는 말에 누굴 먹여야 할지, 어떻게 하여야 할지 기도했다. 

그러던 중 주신 지혜, 너희 교인 가운데서 가장 필요한 연령이 어디이냐? 

아이들이 없고, 30대 어른들이 너무 없어요. 

그럼 너희 주변에 어린 아이들과 30대를 위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공부방. 아이들 숙제를 돌봐 주는 사역. 

그런데 전반기 지날 때까지 마음만 있는데 자원이 없었다. 

하고는 싶은데 아이들 숙제를 봐줄 자원 봉사자도 없었고, 혼자 하려니 엄두도 안났다. 

그런데 갑자기 수련회를 앞두고 한 집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이 지역 elementary school 학부형인데 한글학교 자리를 알아보고 다닌다는 것

그분을 통해서 한글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글학교 시작되면서 그 분은 나오질 않고 연락이 끊어졌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교회 안의 관계- 섬겨라, 발을 닦아 주어라! 낮아져라. 그러면 산다. 

가정- 배우자! 너희가 먹여라. 내가 먹일 존재라고 생각하면 화평하다. 

서로 상대방을 통해 내가 먹으려 하니까 사랑이 아닌 거래가 되고 늘 내가 대우 받지 못하는 것 같구...

 

 우리를 통해 열방을 먹이시는 주님! 

 2015년 그 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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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2015년도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교회의 사명,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말씀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한 3년동안 우리는 광야를 지내왔고, 없는 중에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혐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가 저들을 먹이라 하신다. 

아직까지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모른다. 단지 기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로고스 교회, 로고스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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