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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21.05.07 마가복음 16장 9-29절 제자들의 고백
  2. 2021.05.07 마가복음 16장 1-8절 빈 무덤
  3. 2021.05.07 마가복음 15장 42-46절 아리마대 요셉
  4. 2021.05.07 마가복음 15장 1-15절 본디오 빌라도

마가복음 16장 9-29절  제자들의 고백 

 

어떤 원본에는 마가복음이 16장 8절로서 끝남 

9절부터 나머지 부분 - 추가로 들어간 부분

 

그 내용은 무엇인가? 

 

1. 여인들의 증언 

11절) 그들은 (예수의 12제자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꾸짖으시는 예수님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12제자들은 사도들로서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들 

예수를 친히 만나, 함께 동거동락하며 그 분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진 자들.. 

제자들의 권위가 강력했을 때에...

 

왜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제자들의 수치스러운 실패를 궂이 기록해야만 했을까? 

 

끝에 부분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며, 늘 실수하고, 다투며, 배반하는 모습들...

오히려 이방인의 믿음이, 여인들의 믿음이 복음서에서는 크게 부각된다. 

제자들 틈에 끼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구레네 시몬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신실하게 등장한다.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서의 기록자라면 자신의 리더십을 위해서라도 무용담 하나쯤은 추가하여 제자들로서의 위신도 세우고 권위도 내세울 수 있었을텐데....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고 

성령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그리고 있음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실패와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현장을 도망해야만 했던 처절한 죄의 고백이고 부끄러움에 대한 눈물의 참회록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실패한 그들에게 Great Commission, 바로 대 사명을 남기신다.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눅 24:48-4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하신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사명은 바리새인처럼 내가 남들보다 훨씬 잘 믿었다고 의기양양대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가 왔음에도 자기 자리에 급급해서 오히려 메시야를 죽였던 거짓 통치자들에게 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히 알아 주님 앞에 늘 겸손함으로, 나의 낮음과 그 분의 크심을 아는 자들, 경험한 자들, 그래서 오직 예수 앞에 서면 한없이 머리 숙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사명이다. 

그러한 자들만이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며

남을 정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워주고 보살피면서 주의 길을 가는 것이며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지난 두 달 넘는 기간동안 마가복음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의 길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감추어져있던 수많은 신실한 자들의 모습들과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였던 많은 리더자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의 교회, 그 교회에 서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느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찬양) 눈물의 참회록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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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1-8절  빈 무덤 

 

안식일이 지났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일찍

해 돋을 때에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간다. 

세 여인이 해 돋을 때에 모여 무덤에 간다는 것은 셋이 밤을 새었을 것이다. 

단지 죽은 예수의 시체가 썩지 않도록 향품을 바르러 간 것이다. 

 

마치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 "낭비"라고 하는 제자들의 원성을 들었던 것처럼 

남자제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사다두었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가를 여인 셋이 찾은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들의 무모함이 있었다. 

당시의 무덤은 땅 밑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동굴처럼 지상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입구에는 장정 몇명이 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큰 돌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여인 셋이 아무리 힘을 합쳐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큰 돌이다.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심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모두가 돌아서서 초라하게 죽은 시체 앞에 여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았을까? 

무언가를 바랬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 앞에 뿔뿔히 도망했다. 

여인들은 오히려 예수 앞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죽은 예수를, 그것도 뜬눈으로 밤을 새워, 자기 돈을로 향품을 사서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기도 하기 앞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을 비우는 훈련을 했다. 

자기 마음이 더러우면 예수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여"라는 한 마디를 내 뱉기 전에 마음 속에 조그마한 잡념이나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기도를 방해할까봐 자기 마음을 온전히 비운 후에야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하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훈련하고,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물론 기도는 어려워서는 안된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이기에 내 마음으로 다가가면 그 분은 내 기도를 들으신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기도를 들여다보면, 끝난 뒤에 무엇을 이야기 했는지, 주님이 느껴졌는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수두룩 하다. 

무언가 잔뜩 부르짖기도, 간구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내 마음의 한풀이로 자기 감정의 정화만을 남긴채 아무런 교제 없이 기도의 처소를 나올 때도 많다. 

여인들은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돌 문이 막혀 있음에도, 새벽 녁 자신들의 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바램 때문에 오히려 예수의 얼굴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르짖어도 내 뜻에 요동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에 실망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은가? 

그 바램이라는 것이 정말 주님의 존재를 대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인가? 

 

(요한복음 11장 38-39)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십자가의 사건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방해한 것은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다. 

 

죽은 예수의 무덤 앞에서 여인들 외에 아무도 예수의 무덤을 찾지 않은 이유도 아마도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돌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하고 이미 치워져 있었다. 예수님에게 무덤의 돌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장애는 그 돌 때문에 예수 앞에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내 의식이 문제이다. 

 

우리에게도 예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돌들이 있다. 

죄책감, 두려움, 누군가에 대한 풀지 못한 감정, 무지...

그런데 예수 앞에 서는 순간 그 모든 돌들은 사라진다. 수 많은 돌들은 그저 예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형틀인 것이다. 

 

묵상질문) 

1. 오직 예수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바램이 없었기에 예수의 부활에 동참한 여인들을 묵상해 봅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바램들은 무엇입니까? 

 

2. 나로 하여금 예수 앞에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은 무엇입니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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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42-46절 아리마대 요셉 

 

고난 주간에 겹치는 부분이 많고 또한 매해 돌아오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해 예수의 죽음은 남겨두기로 하자. 

오늘 나눌 중심인물은 아리마대 요셉이다. 

 

불과 일 주일 전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는 환호와 기대였다.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는가? 오병이어 때와 마찬가지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다. 자기 유익을 구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다.

 

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주를 떠나고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무리들이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니까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치는 군중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이 때에 돌연 나타나 주님과 함께 했던 자가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 -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던 자 - 요한복음 3장에 밤 중에 예수를 찾았던 자 - 니고데모처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자 -

 

누가복음 23장 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복음 15장 43절)

 

마가복음의 기사 - 당돌했다. -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 - 에스더서에 보면 왕비라 할 지라도 왕에게 요구하는 것 - 목숨을 건 행동

 

그리고 행한 것 -자신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냄

마태복음 27장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

 

당시의 무덤 - 개인의 묘라기 보다는 가문, 가족의 묘

예수 - 공식적으로는 사형수

 

  • 요셉의 행동- 목숨을 담보로 한 당돌한 행동

- 가문의 명예를 실추 할 수 있는...

-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다 잃을 수 있는 행동

그런데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 -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였음을 숨겼던 그가 죽은 시체가 된 예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의 시체를 장사 지낼 뿐만 아니라 모두가 버리고 간 예수의 시체를 위해 자신의, 자기 가족의 무덤을 내어 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복음서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헌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헌신했다는 말이다. 

 

  • 외경 - 빌라도 행전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후에 예수의 시체를 빼 돌린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서 40년형을 선고

감옥 속에서 예수가 나타나 예수의 피가 담긴 성배를 주고 가서 그 성배의 힘으로 감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언급

초대교회 유명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감옥에서 풀려난 아리마대 요셉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하고 있고 영국은 실재로 아리마데 요셉을 영국 기독교의 창시자로 정하고 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성배를 찾아 기사들이 모험하는 내용이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인 그 유명한 아서왕 이야기.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에나 존스도 그 성배를 찾아 떠나는 여행 - 그 영화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한복음 19장 41절)

At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there was a garden, in the garden a new tomb, in which no one had ever been laid.

 

눈에 띄는 대목 -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에는 무덤이 있는데 사람이 놓여 있지 않은 무덤이다.

 

  • 성경에는 동산이리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 동산은 히브리어로 "칸"이라고 부르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칸이라는 말을 낙원 (paradise)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 고대 교부 가운데 시릴(Cyril)이라는 사람은 에덴 동산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철학자 파스칼도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에덴동산은 그 뜻이 "즐거움, 기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그 동산을 파괴하였다. 아무도 거할 수 없는 동산이 되어 버리게 했다. 최상의 장소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최악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멸망의 동산이 되었고. 추방의 동산이 되어 버렸고 죄의 발원지가 되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동산을 회복하신다.

요한복음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고 한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다. 요한복음 19:41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말한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바로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 동신에 있었다.

 

겟세마네라는 의미는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이다.

감람 열매의 기름을 짠 곳이므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몸의 진액을 짜면서 기도하셨다.

구원은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왜 에덴 동산에 무덤이 있었는가?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덤에 사람을 죽게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떠나있게 한 후에 그 무덤의 주인으로 예수를 눕게 하신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그 무덤 속에 장사지내었다가 그 무덤은 영원한 빈 무덤, 즉 생명이 된다. 

 

우리에게 다시금 에덴을, 기쁨을,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 주신 최상의 것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파괴의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는 그 무덤을 다시금 빈 무덤 되게 하신다. 광야를 에덴 되게 하신다. 죄악으로 무너진 모든 것을 다시 에덴으로, 축복으로, 구원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무덤의 주인, 자기가 죽어야 할 그 무덤을 주님께 드린 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지위를 잃고 죄수가 되지만 결국 무덤에서 나와 영국이라는 기독교 국가의 복음의 전설이 된 사람. 

그가 버린 모든 지위는 결국 자기가 죽어 놓일 무덤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을 주께 드리자 모든 인류가 잃어버렸던 실낙원, 에덴이 회복된다. 

 

묵상 질문) 

1. 늘 예수를 따르다가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를 버린 사람들과, 늘 피하는 자였지만 십자가의 현장에서 주님을 장사지낸 자를 묵상해봅시다. 늘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의 현장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2. 예수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놓아 버리지 못하는 자신 만의 무덤이 있습니까? 

 

찬양) 짐이 무거우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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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1-15절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영어로는 (Pontius Pilatus) 서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한 로마로부터 파견된 유다의 총독 

사실 로마의 역사의 기록에 빌라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를 유대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닐까 하는 말들까지도 있었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그의 이름이 유다의 총독으로 새겨진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어 그가 실존인물임에는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거의 매주 수억명에 해당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장본인으로 그의 이름이 저주에 가깝게 등장하지만 복음서에 기독된 모습을 보면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예수에게 일어난 재판 

1. 정치적 재판 - 종교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 사형이다. "신성모독죄" 그런데 로마의 치하에서 그들에게 사형권이 없자 유다를 다스리는 빌라도의 법정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2. 정치적 재판 - 빌라도, 로마법에 의해서 당시 식민국의 종교문제에 포용적이고 중립적이었던 로마의 법상, 예수를 처형할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 덧붙인 것이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가이샤에게 세금을 거부토록 했다. 백성을 소란케 했다는 등 여러가지 죄목을 붙여 고소한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빌라도의 법정이 간략히 소개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서 빌라도의 행적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23장 - 빌라도의 재판 

  • 1차 무죄선고 

4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1차 무죄 선고) 

  • 2차 무죄 선고 

14-16절) 이르되 너희가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  3차 무죄선고

22-23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태복음에는 이 재판의 이면에 일어난 좀 더 자세한 배경을 소개합니다. 

마 27:18-19)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리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마 27:24-25)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합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빌라도는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로 인해 고소가 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메시지를 통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정말로 원치 않았던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나름대로 예수를 놓아주려고 세 번이나 무죄를 선고했고, 유월절 사면을 통해서라도 또 한 번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손을 씼으며 말했던 것 처럼 "이 정도까지 했으면...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 의해"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 진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이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참 억울할 것 같은 일이다. 

 

여러분이 빌라도, 혹은 빌라도의 후예라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에게는 두 가지 소리가, 또 두가지 선택이 항상 있었다. 

하나는 그의 양심과 그의 아내 (영적으로는 자기의 내면의 소리라가 할 수 있는) 예수에 대한 고백이 있었고

그리고 대 제사장 및 소위 무리들이, 군중들이, 여론이, 남들이 내는 소리가 있었다. 

 

우리 내면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가 일치 할 때는 힘든 일이 없다. 그저 그 소리에 순종하면서 가면 된다. 

그런데 우리 내면의 소리, 혹은 빛의 소리, 양심의 소리, 성령의 소리가 우리 외부의 소리, 다른 사람들의 소리, 여론과 갈등할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빌라도는 재판장이었다. 그는 모든 재판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물론 백성의 소리와 고소인, 피고인의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결과에 대한 결정권자로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를 행동하고 선택하게 되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 그런데 이런 소리와 다른 소리를 내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도 무리들의 소리, 나를 움직이려 하는 더 큰 세력들이, 권세자들이 내는 소리. 

그러나 우리가 결정짓는 모든 행동의 책임은 결국 내가 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의 결과는 핑계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모든 상황보다 우선해서 섬길 수 있는가? 순종할 수 있는가? 따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선택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다. 바로 주 앞에서 내가 하는 고백인 것이다. 

 

질문) 

1.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앎에도 블구하고 다른 환경이나 사람들의 소리로 인해 불순종한 기억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는 깨달음과 교훈은 무엇입니까? 

 

찬양) 나 무엇과도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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