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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21.04.09 마가복음 10장 32-45절 세번의 십자가 선언과 제자들의 반응
  2. 2021.04.09 마가복음 8장 27-38절 (Turnig Point)
  3. 2021.04.09 마가복음 8:1-14절(칠병이어)
  4. 2021.03.26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마가복음 10장 32-45절 세번의 십자가 선언과 제자들의 반응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 베드로의 고백 (예수의 공생애와 마가복음 전체의 Turning Point)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때, 비로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보여주신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그리고 부활의 길 

 

  • 세 번에 걸친 십자가와 부활의 길 선포 

1. 첫번째 죽음과 부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2. 두번째 죽음과 부활 (막 9:31-3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무이더라.  

제자들의 반응 :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영적 반응) 

육적반응: 누가 크냐? -> 여전히 세상의 원리, 황제의 원리. 

 

3.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의 선포 (막 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 

 

  • 에수의 십자가 선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1. 첫 번째 (막 8:32-34)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 예수에게 대항하다. 예수를 꾸짖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너희도 이 길을 가야한다) 

 

2. 두 번째 제자들의 반응 (막 9: 32-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ㄹ한 것이 무엇이냐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 왜 묻지 않는가? 관심이 없기 때문에...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그 일은 내가 싫어하므로....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복음은 이미 우상숭배이다. 샤머니즘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우상숭배 -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 자기 우상이다. 

 

3. 세번째 예수님이 세 번째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는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은밀히 찾아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른바 은밀한 청탁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반응이 없는 것

아픔이 있어도 반응하지 못하는 병, 

불에 디어도, 살이 썩어도 반응하지 않는 병- 문등병. 죄악의 병, 저주의 병 

 

말씀하시는데 반응하지 못하는 병은 죽음의 병이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다. 

주님은 점점 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죽음을 향해 가는데, 제자들은 처음엔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급기야 반응하지 않는다. 

 

  • 똑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죽으러 가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고 계속해서 높아지고만 하고 그것도 점점 더 은밀해져가며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를 하려고 한다. (세상의 방법으로 높아지려 하는 것)  

 

이 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막 10:42-4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너희를 주관하고 명령하고 통치한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잘보이려고 알짱 거리고 아부하고 또 끊임없이 청탁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저 어린아이를 섬기듯이 사람들,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 

 

내가 너희를 섬김같이 너희도 섬겨라. 

 

묵상질문) 

1. 같은 목적지를 향해 동행하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예수와 제자들을 깊이 생각해보자. 내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과 그 방향인가? 

 

2.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아얘 반응하지 않는 제자들을 바라보자. 말씀속에서 내가 듣기를, 반응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말씀은 없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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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27-38절 (Turnig Point) 

 

16장 마가복음의 정확한 중간지점. 

 

유대인의 지역에서 오천명을 먹이시고, 또 이방인의 땅에서 4천여명을 먹이신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신다. 

이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이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한다. 원형경기장이 있어야 하고, 신전이 있어야 한다. 바로 크고 대리석로 치장한 화려한 신전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초라한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반응-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 -> 그들의 공통점-> 예수를 뛰어난 사람으로는 보았지만 그 분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눈에 기적이 나타나고 병고침을 보아도 사람의 일로 보았다. 사람이 하는 일로 보았다. 운이 좋아서, 어쩌다가 되는 일로 보았다. -> 어쩌다가의 끝-> 이 지구, 은하계, 나아가 나 자신도 어쩌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완벽한 작품을 보고서도 사람의 일로 본다. 우연으로 본다. 

 

사람의 한계 안에서 메시야를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영성이라는 것 -> 물질적이고 육신에 갇힌 삶을 살면서 영이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성품. 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했으니까...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서 영적인 것을 빼앗아가려 한다. 왜? 

영적인 능력이 없으면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니까... 영적인 질서 안에서 천사는 우리를 섬기는 자다.. 돕는 자다.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아 그 분이 맡기신 생육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서 영성을 빼앗아가려 한다. 

예수를 인간으로서 따르게 한다. 메시야라는 고백을 할 수 없게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은 그들에게 다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친히 가서 증거하게 하시고,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그리고 귀신을 쫓게 하신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병든 자를 치유하고 5천명을, 4천명을 친히 먹이시는 하나님임을 보게 하신다. 

왜? 그들이 영적인 존재로 태어났음을... 하나님의 일을 나눌 사람들이 바로 그들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있는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에서 

 

 로마의 상징: 힘(권력, 군사력, 경제력), 지식(대형 도서관, 서재의 크기를 자랑함)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조각상 즐비) 거대주의, 성공제일주의, 황금만능주의

  그 상징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신앙의 고백을 듣는다. 

  너에게는 내가 저 로마의 모든 것보다 훨씬 값지냐?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 보다 나의 것이 더 좋으냐? 

  

  주는 ->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로마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과 지식이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리스도시요-> 당신만이 나의 구원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400여년동안이나 말씀이 끊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다윗의 예배를 기뻐 받으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들-> 당신이 메시야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다. 

  

이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다. 

교인은 누구인가? 교회 나오는 자들이 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는 자가 교회이고 교회의 교인이다. 

 

이 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생명력은 상실된다. 예수가 정말 내 주인인가? 난 주인에게 충성스런 종인가? 

이 고백을 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하늘의 크고 놀라운 비밀들을 알려 주신다. 

 

가장 높은 자가 가야할 가장 낮은 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 

 

더 깊은 길로 인도하는 주님 앞에 항변하는 베드로 (Peter took him aside and bagan to rebuke him.)

그가 예수를 끌고 가서 그를 꾸짖었다. 화를 내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로 육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로 가라. 지름길로 가라.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 광야를 거치고 연단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 십자가의 길로만 가야 한다. 

죽지 않고 천하를 얻으려 하는 생각

 

썩어져 가는 씨앗이 되라! 왜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가? 왜 죽지 못하는가? 한알의 밀알이 되지 못하는가? 

 

내일 살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내일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가이사랴 빌릴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다. 자기만을 위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묵상 질문) 

1. 왜 하필이면 가이사랴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고백을 들으셨을까? 

2.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꾸짖는 베드로를 바라보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을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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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1-14절(칠병이어) 

 

1.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본문에 나와있는 사건 - 이른바 칠병이어의 사건, 갈릴리 호숫가에서 이루어진 사건 

오병이어의 사건과 유사한 사건 - 떡이 다섯개에서 일곱개로 늘어났을 뿐 나머지 기사는 오병이어의 사건과 거의 비슷한 사건이다. 

 

왜 비슷한 기사를 마태와 마가는 두 번씩 기록했을까? 

어떤 이들은 이것이 같은 기적의 중복된 표현이라고도 하지만 분명 다른 사건이다. 

6장의 기록이 이스라엘 안에 거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건이라면,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예수님을 외면하는 유대인들과 반대로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모하며 갈급해하는 이방인들의 기사를 계속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 다는 선민의식에 쌓인 유대인들의 교만과 잘못된 믿음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해가 저물 때 까지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이라면 이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사흘을 함께 한 자들입니다. (2절) 

그리고 이들 중에는 멀리서 온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3절) -> 멀리서 온 자들->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 

훨씬 더 멀리서 와서 훨씬 더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방인의 믿음이 오히려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을 미묘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교회 생활 오래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항상 깨어 있지 않다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신앙은 항상 "지금, 여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오병이어의 다섯개의 빵은 구약의 모세 오경을 가리키고 일곱개의 떡은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촛대, 즉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에서 남은 바구니가 12광주리이고 여기에서 남은 바구니가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도 유대인의 12지파와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함한 7교회를 말한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땅에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지만 유대인들의 태도는 점점 더 냉랭해집니다. 

3장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예수님을 외면하고 6장에서는 고향에서 배척당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돌아갑니다. 

가족에서부터 고향사람들, 그리고 이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에 비해 이방인들의 태도는 한결같이 예수님을 간절히 바랍니다. 사모합니다. 깊은 믿음으로 도우심을 구합니다. 

죽음을 무릎쓰고 살기 위해 주님에게 간구하고 달려듭니다. 

 

신앙 생활을 거듭할 수록 난 유대인처럼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점점 더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2. 제자들의 믿음 

 

또 하나 살펴 볼 것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아와 사람들을 걱정하며 마을에 가서 밥을 먹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간곡히 제자들에게 그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3절) 

 

이미 6장에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쳐서 죽을 뻔했던 그들 앞에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주님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한차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보았고,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작은 소년의 헌신이 얼마나 크게 역사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후에 생명을 살리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말 못하는 자를 말하고 듣게 만드시는 예수님도 경험했습니다. 

 

이미 같은 일을 겪었을 제자들 중 어느 하나도 "그 때처럼 주님께서 축사해 주세요."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기적을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우연으로 보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빌립처럼, 인간적인 계산하지 말고 믿음으로 응답하리라 한 제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보여 주어도 그들의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3. 바리새인들

 

표적을 보여 주세요!!!

메시야 되는 증거를 계속 대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를 못 보고 못 들었을까요? 

예수님의 기적을 하나도 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계속 계속 보기만을 원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식지 않도록,  잊어 먹지 않도록 또 보고 또 보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기는 하나도 안 변할 테니, 자기는 하나도 믿음이 안자라고 안변하고, 난 가만히 있을테니 계속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이 없어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내리시고 물을 공급하시는데 자기들이 원하는 것 하나라도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르 죽이려고 한다...별 소리들을 다 합니다. 

오천명을 먹이시고 사천명을 먹이셔도 그들은 당장 자기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힐난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당신이 날 다 채울 수 있느냐? 하면서 자기의 탐욕과 정욕을 불태웁니다. 

 

이런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시고 그들을 떠나..건너편으로...

 

남미, 아프리카-> 표적과 기사 

그러나 오래 믿은 나라-> 표적과 기사가 사라진다. 

우리나라 -초창기: 표적과 기사...시간이 지나면서 표적과 기사는 사라진다. 

계속적으로 표적만을 구하는 자-자라지 않는다. 성숙하지 않는다. 표적은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않는다.

 

묵상질문) 

1. 떠나가는 유대인과 다가오는 이방인...난 지금, 현재, 주님에 대한 갈망과 사모함으로 다가오고 있는가? 

 

2. 주님이 내 인생에 행하신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자. 그 안에 표적과 기사가 없는가? 많은 것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난 지금도 또 계속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찬양) 예수 이름 높이세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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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마가복음 7:31-37)

 

1. 두로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1절) 

두로 지방을 간 것 만도 이방인의 땅, 더럽혀진 땅을 간 것으로 유대인들의 선긋기, 자기 기준, 자기 방어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건인데 예수님은 두로 지방 뿐만 아니라 시돈,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였다고 전한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도 않고 그 땅을 밟고 지나왔다는 것이다. 소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돈에서도 데가볼리 지방에서도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죄악가운데서, 질병 가운데서 구원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도, 그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다. 고향 땅, 그들이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고향에 왔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귀를 먹고 그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닫혀져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를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마치 자폐아처럼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계와, 외부와 , 그리고 하나님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하지만 자기 만의 신학, 자기 만의 신앙,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의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앗수르에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이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나? 

오직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할례 받은 자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하신다...

 

자기는 지금 1000년 가까이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난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희들은 심판받을 백성이다. 이 믿음이 놀랍도록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소문이 그치질 않고 더욱 퍼져 나가자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와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 거룩한 자들만 상대할 줄 알았던 그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장로들의 전통도 지키지 않고, 급기야 세리와 창기들,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과도 어울리며 그들을 고쳐 주니까 많은 사람들은 떠나가거나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닫혀진 이유는 그들이 붙들고자 하는 말씀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땅, 또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구원자임을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잘못된 신념으로 말씀을 들을 귀를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비로서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구나, 할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나라 밖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오히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유대인들보다 예수를 더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구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닫혀 있는, 귀가 닫혀서 입마져 닫아 버린 유대인을 데리고 옵니다. 

왜 그가 귀가 닫히고 입이 닫혔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우리 마음이 열리기 원하시는데 사탄은 우리를 닫아 놓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집착하게 하고  전염되게 하고, 중독되게 하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마귀들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묶고, 마음을 묶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로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 버리고 다른 무엇엔가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로, 이웃에게,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세계로 열게 만듭니다. 여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갈릴리 지역에서 만난 한 사람은 철저히 닫혀 있는 사람입니다. 귀가 닫혔다는 것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 소통이 막혔다는 것이고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두려운 것입니까? 

들어도 말못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면서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이 듣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귀가 닫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과 대화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혹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들려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철저히 닫혀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열린 사람이 되니까 시키지 않았는데 마을에 가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나가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듣는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33절) 

무리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를 무리에서 분리해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무리도 중요합니다. 어떤 무리 속에 있느냐가 신앙의 좋은 시작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냐,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 있어도 신앙은 결국 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리가 날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나야 됩니다. 내 부모가 내 신앙에 유익을 줄 순 있어도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한 셜교에서 "하나님께선 아들만 있지 손자가 없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날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히 닫혀진 인생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그와 따로 시간을 갖습니다. 끊어졌던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따로 떨어진 곳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4.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데시며... 

접촉하신다. 아가서 입맞춤- 하나님과의 연합.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신 인간을 만나는 것- 그것이 회심이고 중생입니다. 

그분이 날 만지십니다. 

혹자는 이것을 세례로 표현합니다. 

하늘의 물로 우리를 씻기시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5.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리라. 

하늘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탄식하시다. -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며 

                 - 깊은 숨을 들어쉬시며, 제자들에게 깊은 숨을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보십시오. ‘에바다’ 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자 귀가 열렸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열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웃을 향해 입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의 혀가 풀려서 기도가 줄줄 나오고, 불신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서서 ‘에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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