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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  (열왕기하 5장 1-8절) 

 

지난 주 말씀 -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라. 

                  - 얕은 물이 아닌 깊은 물의 은혜, 반석 위의 믿음,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폭풍우가 쳐도 요동치 않는 믿음, 성도 

                  어떤 성도는 고난이 오면 완전히 흔들려서 시험에 드는 성도

                  어떤 성도는 고난을 잘 극복하였다가 편안해지면 시험에 드는 성도 

                  "빈곤에 처해도 풍부에 쳐해도 자족할 줄 아는 믿음" 그리스도에게 배운 믿음. 

                  

오늘 다룰 사건- 나아만이 엘리사로부터 문등병을 고침받는 사건을 통해 한 영혼이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는 예를 성경의 예를 통해 바라보고 묵상해보자. 

 

1. 나아만 -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He was a great man in the sight of his master and highly regarded, because through him the LORD had given victory to Aram.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 아람왕의 군대장관 – 이방인, 왕의 신하

->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아람왕의 군대장관- 높아보았자 누구 밑이다. 그는 신하이다. 그리고 크고 존귀하지만 누구의 눈에, 그 주인의 눈에만 크고 존귀한 자다. 대통령도 집 안에서는 천대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의 모든 직책이 누구의 눈에 높아보이는 것이다. 한 도지사 - 소방관에서 전화해서 "나 도지사인데...""네, 말씀하세요...." 

-> 그 주인의 눈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그가 크고 존귀한 이유는 아람왕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 - 주관적, 상대적, 제한적 존귀함이다. 

  • 크고 존귀한 자 –> 여호와께서 그가 아람을 구원하게 하심-> 왕 앞에 존귀하게 된 것도 결국 누가하신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아람왕에게 존귀하게 하신 것이다. 세상에서 크고 존귀한 것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그 스스로 높아진 것이 아니다.  그를 통해 엘리야를 만나 아람과 북왕국에 하나님을 알리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 저는 큰 용사나....문등병자였다. He was a valiant soldier, but he had leprosy.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문등병자였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하지만 누군가 앞에서만 필요한 자요, 그리고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아픔이 있다. 밖으로 보여 줄 수 없는 은밀한 어두움이 있다. 

 

당시의 문등병 - 저주받는 질병. 죄인의 표상. 아무리 왕의 눈에 높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그는 죄인이다. 저주받은 인생이다. 

성경에서의 질병 - 그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징후이다. 

소경 - 눈이 있어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

귀머거리 -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결코 듣지 못하는 자. 

중풍병자 - 머리가 지시하는 바를 몸이 따르지 않는 자 (머리이신 주님이 말해도 따르지 않는 자) 

혈기 마른 자 - 무감각,

 

그러나 그 모든 질병 중에서도 가장 죄인을 대표하는 질병 - 문등병 

  • 문등병이 걸리면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
  • 머리를 풀어해치고, 옷을 찢고, 윗입술을 가리고 누군가 앞에 지나가면 자신에게 오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외쳐야만 했다. 
  • 왜 문등병이 치명적인 죄의 병인가? 육신이 썩어들어가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모른다.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고, 사망의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모르고 걸어들어간다. 

 

나아만이 아무리 아람 땅에서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이나, 그러나 그는 문등병자였다라는 마지막 한 마디가 인간의 실존을 보여준다. 그가 아무리 존귀해도  "그러나"의 문제를 피해가지 못한다. 한나가 아무리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아이를 얻지 못하니 행복이 없다. 라헬도 마찬가지다. 삭개오가 세라장이라도 그가 백성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예수를 벗어난 모든 인간에게, 아니 신앙 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인간의 문제. "그러나" 의 문제이다. 

 

2. 두 왕 이야기 (4-7절) 

  •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이르되 (4절) (나아만과 아람왕) 
  •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5절) (아람왕과 이스라엘왕) 
  •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6절) 
  •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7절) (이스라엘왕과 하나님) 

 

-> 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소개해주는 일, 부탁하는 일...어쩔 땐 누군가 소개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큰 백이나 된 것같고 일이 술술 풀릴 때도 있지만 결정적인 '그러나'의 문제 앞에서 왕이라도 해결을 주지 못한다. 

두 왕이 있지만 두 왕 사이에도 권력이 지배한다. 큰 왕이 있고, 작은 왕이 있어서 작은 왕은 할 수 없음에도 큰 왕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왕이라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왕들 위에는 더 큰 왕이 있다. 트럼프 위에 트럼프를 움직이는 권력이 있고, 그 권력 위에는 또 다른 권력이 있다. 결국 위로 올라가면 사탄과 하나님과의 싸움이다. 

세상에서 가장 높다하는 왕 둘이서 나아만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미룬다.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없으니 미루는 것이다. 그리고 왕의 입술을 통해 고백케 한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때로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인다고 하지만 정말 진정한 생명 앞에서 돈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모든 "그러나"의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자 - 하나님이시다. 

 

3. 어린 계집종 (2-3절) 

  •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2절) 
  •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나병을 고치리이다. (3절) 
  •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4절) 

 

  • 세상에 사로잡힌 자, 수종 드는 자. 종, 노예
  • 그러나…    나아만의 문제를 풀 열쇠를 아는 자 
  • 주인의 신뢰를 얻는 자 (아내, 나아만, 아람왕…)

-> 세상에서 보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자이지만 나아만에게 있어서 어린 계집종은 두 왕들 보다 의지할 자이다. 왜? 해결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힘과 권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을 그 소녀는 알고 있었다. 

 

4. 엘리사 

  •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 When Elisha the man of God heard that the king of Israel had torn his robes, he sent him this message: "Why have you torn your robes? Have the man come to me and he will know that there is a prophet in Israel.

 

  • 문제를 떠맡는 사람, 문제를 찾아가는 사람
  • 사마리아 지역, 아합왕 다음 여호람 왕때에...북왕국 이스라엘의 타락의 가장 중심에 
  • 그러나....그는 해결자

 

여전히 세상은 그러나로 가득차있습니다. 문명은 더욱 발달하고 세상은 점점 더 편해져간다고 하는데 범죄의 질은 날마나 극악해져가고 사람들의 정신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갑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의 계집종처럼 당신을 치유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라는 것을 믿고 외쳐야 합니다. 엘리사처럼 그런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어야 합니다.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님들은 세상의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 있다. 내가 그 분을 안다 소개시켜줄 수 있는 어린 계집종이요. 기도함으로, 중보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런 문제를 찾아 갈 수 있는 엘리야입니다. 그러나로 가득찬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로 가득찬 세상에 교회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그러나의 문제가 없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듯이 살고, 괜찮은 듯 살고, 행복한 듯 살지만 남에게 밝힐 수 없는, 꺼낼 수 없는, 드러내면 고통스러운 그런 그러나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나아만은 어떻게 그러나의 문제를 극복합니까? 

 

  • 에필로그 1 - 나아만과 엘리사 (왕하 5:9-10절)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노라.

- 나아만의 생각: 내 생각에는 - 신앙생활에 제일 방해가 되는 것 - 내 생각에는...세상에서 닲고 닲은 그 경험->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나의 방법을 넘어선다. 다르다. 

-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요단강이 어떤 강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했던, 법궤를 앞에 두고 제사장들이 앞장 서면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가야 했던 순종의 강, 성화의 강, 나를 부인하고 정복해야 하는 성령의 강

- 일곱번 씻으라: 온전히 자기를 비우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요 2:7, 9)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

- 온전한 순종 뒤에 은혜를 맛본 자만이 주님을 안다. 진정 주님을 경험한다. 나보다 크신 주님. 나를 정복하신 주님 

 

Epilogue 1. 나아만과 엘리사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그의 죄가 사해지고 거룩을 경험한다. 성결의 은혜다. 

 

Epilogue 3. 나아만의 하인과 엘리사의 사환 

13절)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라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20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이다. 

-> 나아만은 이방인이었고, 문등병자였지만 지혜롭고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그의 신하의 입술을 통해 나아만은 요단강의 성결의 은혜, 거룩의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게하시는 엘리야의 사환이었다. 사환이라고는 하지만 선지자의 사환은 곧 인턴, 부교역자였다. 그런데 그는 엘리야의 영성을 닮지 않고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다.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까지 하면서 나아만에게 가서 그가 가지고 온 제물을 받고 대신 그의 병을 물려 받는다. 이방인인 나아만은 고침을 받았는데, 엘리야의 사환 게하시는 문등병자가 된다.

세상의 아이러니이고 교회의 아이러니이다. 

당시 선지자 - 가난하고 궁핍했다. 게다가 나아만은 풍족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그의 병을 완전히 고침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권리를 말할 수 있었을 수 있었고,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엘리야와 함께 거하는 선지생도의 형편을 위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의 사환이면서도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믿음, 자기 생각을 의지했다. 

나아만이 끝까지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면 그는 결코 문등병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게하시는 엘리야 밑에서 자기 믿음, 자기 생각대로 행하다가 결국 문등병에 걸린다. 죄인이 된다. 

가장 은혜의 중심에서 가장 사악한 인류의 배신자 가룟유다가 나온다. 은혜의 중심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나아만의 문제- 은밀한 문제, 그것이 밝혀지면 그도 군대장관의 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심각한 문제. 

왕과 자신만이 알고 있었을 문제...그런데 계집종의 소리에 그 문제를 자신의 신하들 앞에 꺼내 놓는다. 

죄인은 감춘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드러낸다. 그리고 수술 받는다. 

 

문등병 - 피부병

어릴 적 백일 때 홍역 예방 주사를 맞고 온 몸에 퍼진 피부병 

어릴 적 - 친척들이 부른 별명이 욥

"쯧 쯧, 제가 어른 노릇 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피부병으로 인해 어쩔 떈 한달 이상씩 결석

혼자 놀기, 시쓰기.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쓴 시 

 

- 외로움. 

까만 밤 홀로 앉아 오늘도 밤을 지새운다. 

누군가 있는데 내 옆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가서 내 몸을 상처내며 논다. 

 

내 자아가 어떘을까? 

내 몸이 싫고, 감추는데 익숙하고 부정적인....

중학교 때 수련회가서 주님을 만났다. 세개의 못 "그 때 그 무리들이" 

뜨겁게 기도하며 방언도 받고 회개기도도 했다. 

집에 혼자 있으면서 대화같은 기도, 기도 같은 대화. 

 

아무도 없을 때 - 샤워하고 상처난 온몸을 바라보며 연고를 바르려고 하는데....

주님이 "승구야 내가 널 사랑한다." 

난 날 안사랑해요. 내 몸좀 깨끗하게 해 주세요. 

난 네 몸도 사랑한다. 

내 몸은 너무 더러워요. 

"너를 위해 난 십자가를 졌고 내 피로 너의 몸과 너의 모든 것을 깨끗이 했다" 

 

그말을 듣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똑같이 상처난 내 몸이 

주님꼐서 사랑하는 몸이라는 그 말에 싫어했던 내 몸이 그냥 괜찮아 져 버렸다. 

아름답진 않았지만 내 몸이 더 이상 싫지 않았다. 

 

그 때 부터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팔옷, 반바지를 입었다. 

드러내놓고 다니니 피부도 점점 나아졌다. 신경을 안쓰니 더 이상 내 그러나의 문제가 내 인생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요즘도 스트레스 받고 그러면 또 다시 피부가 올라오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방해하지 않는다. 

 

여러분에겐 어떤 그러나의 문제가 있는가? 

언제까지 짊어지고 살 것인가? 

해결하고 싶지 않은가? 

요단강에 가서 몸을 담그라. 

예배의 은혜에 빠져 버려라. 

찬양의 은혜에 빠져 버려라. 내 영혼을 담그고, 내 문제를 담그고, 내 모든 질병과 어두움과 과거와 상처를 담그고 그 분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라. 

주님이 만지신다. 그 분이 내 그러나의 문제를 고쳐 주신다. 

트레이시 제일교회는 성도 여러분의 그러나의 문제를 방관하지 않고 어린 계집종이 되어 주를 알리고, 엘리야가 되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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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자 (눅 5:4-5) 

 

교회에 대한 비전 = 한 성도를 교회로 세우는 목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교회된 성도 

 

교회가 무엇인가 할 때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 베드로 

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8절, 예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니" 

 

반석- "베드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 

그 지역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수장으로 여기는 로마 교회가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하면서 교황권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주장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세운 집 - 반석은 그리스도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이다. -> 개신교의 해석 

 

베드로의 삶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연약한 한 인간을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끈질김, 그리고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특별히 오늘 소개하고 있는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생을 이끌어가신다. (오직 누가복음만이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1-2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3절에 보면 두 척의,배 중 한 배는 바로 시몬의 배였다. 

 

1. 분명 예수가 말씀하시는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부터 듣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2. 바닷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또다른 자들을 주목하고 계셨다. 

그곳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는 있지만 앉아있기는 한데 말씀과 상관없이 그물을 닦는 자들이 있다. 바로 어부들의 무리다. 

어부는 고기낚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우선순위는, 관심은 오직 고기낚는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관심이 그물에, 고기에, 먹고 사는 일에, 오늘 잡히지 않는 고기에, 내일 걱정에 꽂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있는가? 

 

  •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1. 시몬의 배에 올랐다. 

배에 올랐다는 것은 내 인생에 그가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 내 인생에 개입하셨다. 언제나 주님이 먼저 오신다.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찾아오신다.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다. 

 

2.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무리와 베드로 사이에 서 계시던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멀어지셨다. 육지에서 멀어졌다는 표현은 땅의 관심에서 베드로를 떨어뜨린 것이다. 땅에 것에 꽂혀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앞에서 말씀하셔도 그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 밭이 돌짝밭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서 떨어진 것은 무리에서 멀어져 베드로에게 오신 것이다.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라는 한 인격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씀은 여전히 무리들을 향한 말씀일 뿐이다. 

 

  •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다. 

오늘 걱정도 걱정이지만 또 내일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데도 그물을 닦았다. 

허탕치고 그물을 씻는 기분이 어떨까? 좋을리 없다. 짜증은 짜증대로 깊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또 그물을 씻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모습은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세월좋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내 배에 올라오신다. 

기분이 좋았을까? 아니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라 명령하신다. 

그물 다 씻어놀고 내일 준비 다 해놓았는데, 계획도 다 세워놓고 이젠 쉴 일만 남았는데 또 배를 움직이라 하신다. 평소 베드로 성격이라면 벌컥 화를 낼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릴리 없다. 억지로 순종은 하지만 주님은 날 보며 말씀하시는데 아얘 귀를 닫고 외면한다. 

그래서 주님은 더욱 베드로와 가까워 졌는데 말씀은 여전히 무리를 향한 말씀으로 표현된다. 

 

  •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 더 이상 무리를 향한 말씀은 끝이 났다. 이젠 직접적으로 말씀이 베드로를 향한다. 핑계될 구석이 없다. 마치 불순종하는 요나의 귀에 대고 하나님이 소리치는 것처럼 애써 성질 참아가며 억눌르며 피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2. 이 말씀은 불순종할 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시간적으로 이제는 피곤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고, 작은 고기배로 가기엔 말두 안돼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시고, 그리고 그물도 다 씻어 정비해 놓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말두 안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불순종할 이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일어났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고 그물을 낚던 그가 말두 안되는, 정말 상식밖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도 불순종의 반응이 아닌 순종의 반응 

 

  • 5절) 선생님 (Master, 주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한 마디로 시몬의 인생은 한낱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 그것도 사람낚는 어부 중에서도 예수의 수제자, 반석이라 불리는 자가 된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의 공통점 - 둘 다 모두에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친다. 

고난이 없다는 말이 없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온다. 반석같은 믿음이 있어도 고난이 오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에게도 고난은 온다. 우리의 착각 -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고난이 오나요? 

열심이 믿으면 고난 안받는다고 어디 나와 있는가? 성경은 열심히 믿는데 나요? 

 

반석 위의 사람과 모래 위의 사람 - 둘 다 듣는다. 말씀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씀을 외면하면 아얘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고 은혜 받았다고, 깨달았다고, 반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석은 순종할 때 주어지는 은혜다. 행동의 열매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 말씀 듣고 간증을 들으면 나도 믿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감정이 움직인다고 내 믿음이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 완성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약 1: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나에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애쓰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도 넘어짐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없고 끝까지 자신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고 더욱 말씀을 붙잡는다. 세상의 여건과 환경이 나쁠 때 더 실력발휘를 하고 더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 깊은 데로 가라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얕은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것이다.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살고 있다. 깊은 곳에는 조금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 얕은 물이 안전하니까.. 깊은 물의 파도를 두려워 하고 단지 쉽게 피할 수 있는 얕은 물 가에서 산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고난 없기 위해, 남들처럼 살기 위해... 

   

간증) 

고 3 때 수련회 떄, 강원도 수련회에서 그 지역 초등학생들 앞에서 물에 빠진 경험. 

수치와 두려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때까지 물을 피했다. 

프리몬트에 처음 이사해서 얻은 아파트 바로 문 밖에 공용 수영장. 작은 수영장이었는데도 물이 깊은 데는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한솔이가 초등학교 2학년, 한별이는 K. 

여름에 더우니까 거의 매일같이 수영하자고 조른다. 난 아이들을 보고...아이들이 물에서 같이 놀자고...

애들 앞에서 창피하니까 두려운 기색 않하고 들어갔다. 애들은 내 키가 넘는 깊은 데를 겁도 없이 들어간다. 

매일같이 애들을 보니 조금 오기도 나고 정말 더운 날씨에 나도 수영도 하고 싶었다. 좋은 물안경도 구입하고 얕은 물에서부터 잠수도 했다. 

조금씩 적응하며 물에 익숙해지다가 그만 발이 안 닿는 데까지 들어갔다. 허우적 거리고, 처음에는 애들 앞이라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발이 안 닿으니 점점 겁이 나고...

그 때 한솔이가 날 보다가 소리쳤다. "아빠 힘 빼,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물에 떠....손도 발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물에 누워..." 

그 소리가 내 귀에 박히듯이 들렸다. 

힘을 쓰고 용을 쓸 때는 점점 빠져 가던 내가 힘을 빼니까 물에 뜨기 시작했다. 

물에 빠졌을 때도 힘을 빼고 눈을 뜨니까 물 속의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별세상이었다. 

   

찬송가 302장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보네 

                   

  • 믿음의 삶: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모험적인 삶, 위험한 삶.. 그래서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길 주저한다. 

-> "만일 내가 주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면 그분은 나를 광신도로 만들어 버리실 거야. 그럼 내 가정도 내 삶도 엉망이 되겠지… 친구들도 다 떠날거야. 적당히 믿어야지…" -> 얕은 물 신앙. 너무도 많은 신앙의 비밀들을 놓치고 만다.

  • 하나님의 계획: 좋은 것, 완전한 것,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한 것
  • 지금도 원하시는 예수님의 요청: 나를 네 배에 태우라. 네가 어디로 가든 너의 사업, 너의 가정, 너의 결혼을 비롯한 네 삶의 모든 영역에 내가 함께 하게 하라. 내가 널 온전케 하리라." 

 

  • 결말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낚는 어부(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음. 

자기가 최고의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던 것을 순종하니 주님이 이루심. 

주님 따르며 세상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내가 온 힘을 쏟아도 얻을 수 없는 세상도 얻는다. 왜? 세상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이지만 그건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 지금 너무 힘들다.
-> 그런 힘듦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힘들기에 날 따르라는 것이다. 

힘드니까 이젠 너의지 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너의 집을, 너의 배를 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안되는 길로 가면....

 

난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얕은 물이 아닌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개척을 위해 기도할 때 주신 비전이다. 그렇게 깊은 물의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고, 그런 목회를 하리라 기도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귀만 발전하는 교인이 아니라, 듣고 행하여 내 것이 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와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자들이 되기를...

 

성경에서 물은 이중의 의미다. 

하나는 고난과 죽음이고, 동시에 그 물은 구원이고 세례다.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나누었지만 물을 건너는 사건이 성경에 여러번 등장한다. 

모세-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 (중생의 은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여호수아- 법궤를 앞에두고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제사장이 먼저 발을 담그라. 말씀 따라, 리더 따라 순종하는 믿음 

엘리야와 엘리사 - 옷을 가지고 물결을 가른다. (옷은 곧 능력)- 순종을 넘어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긴다. 

 

베드로 - 물결 위를 걸어간다. 파도는 여전히 친다. 그런데 그 파도 위를 주님 바라보고 걷는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해가지 않고, 고난 위를 묵묵히 걷는다.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신앙이다. 

 

유일하게 물을 건너면서 실패한 예를 남긴다. 베드로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한 원인을 주님을 바라보다가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성경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사건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다. 

너희는 그 물을 건널 수 있느냐? 난 이미 답을 주었다. 어떤 물도 주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신다. 

 

나에게도 트레이시 제일교회의 사역은 내 인생의 마지막 항해이기를 꿈꾼다. 여기 계신 두 분의 장로님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도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함께 하는 이 항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어떤 바다를 건널까? 얕은 물 가에서 안전히, 빠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길을 갈까? 아니 그 길이 과연 편안할까?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 배는 작지만 깊은 물을 향해 나아가 볼까? 함께 하는 항해라면, 그리고 분명 주님이 계시기에 외롭지 않고, 정말 기대가 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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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받는 삶 (마태복음 25장 14-30절)

 

1. 복습과 문제제기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 - 깨끗한 그릇 

어떻게 깨끗한 그릇이 되는가? 

시편 109편 - 우리의 죄악된 모습 그대로, 감추지 말고 하나님께 드러내라. 

빌립보서 4장 4-7절: 연약한 감정을 기도의 언어로 바꾸라. 

 

오늘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누구나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쓰임받는다. 

어떤 이는 선한 일을 위해, 어떤 이는 악한 일의 도구로 쓰임받는다. 

내가 어떤 일의 도구로 쓰임받는가?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쓰임받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함꼐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이다.  

달란트는 화폐 단위로서의 달란트가 있고 그 외에 흔히 talent라고 말하는 재능, 능력, 혹 은사라는 의미도 있다.

달란트라고 하면 두가지, 물질과 재능 모두 포함이 된다. 

 

언뜻 이 비유를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재능이나 물질을 주셨는데, 잘 사용하여 이윤을 남긴 자는 칭찬하고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시고,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고 남겨 둔 자는 책망받는 내용으로 다가온다. 이 이해는 자칫 복음의 내용을 변질 시킬 위험이 있는데, 하나님의 칭친을 받으려면 열심히 일해 이윤을 남기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책망을 받는 행위구원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 은혜를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믿음과는 상응할 수 없는 하나님 이해이다.  

 

말씀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남긴 자는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자"라는 칭찬을 들었고, 하나도 남기지 못한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꾸중을  듣는다. 더욱 유심히 볼 것은 꾸중의 내용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한 자는 꾸중을 넘어  '무익한 종'이라는 이름으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것은 결국 지옥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다. . 

 

남긴 자가 칭찬을 받고 못남긴 자가 꾸중을 받은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가 갈 만히디. 그런데 남긴 자가 "성실하다, 잘했다"를 넘어  "착하다"는 칭찬을 들을 만한가? 못남긴 자가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그의 성품이 "악하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이윤을 남긴 자는 선한 것이고, 남기지 못한 자는 악한 자인가? 그런 논리라면 세상에서도 장사 잘 하여 성공한 사람은 다 착한 자들이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악한 자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  

거기다가 그것이 돈이 되었건 재능이나 은사가 되었건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 자가 꾸중을 들을 순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지옥으로 간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원의 복음마져도 결국 "우리가 맺은 열매대로"라는 "행위 구원"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신앙과 말씀의 메시지가 어긋날 때에 우리는 이 구절들을 넘기지 말고 세심히 살펴야 한다. 세상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 이 비유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깊히 묵상해야 한다. 이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재능이나 은사를 잘 활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결론 짓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2.  전체 장의 맥락을 보라.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을 이해하려면 그 사건 전후로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가?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의 맥락 안에서 그 구절들을 살피는 것- 전통적인 성경 연구 방법이다. 

마태복음 25장은 이른바 천국의 비유장이다.  

첫 부분에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가 나오고 달란트 비유 다음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결국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자로 나뉠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비유들이다. 

열처녀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천국은 일상적으로 깨어있는 자, 늘 준비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일상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살았는가?하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거하다가 결국 갈라지듯이 깨어있는 자와 깨어있지 못한 자,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가 결국 갈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와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리이다. 

 

성경에서 지시하는 마지막 때, 세상에 대한 심판에 앞서 교회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어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이 갈린다. 코로나 19- 믿음 있는 자는 더욱 깊은 믿음에 거하고 반석 위에 서지 못한 자들은 결국 흔들리며 요동하며 갈라서게 되어 있다.  

 

그러면 앞 뒤 비유와 맥을 같이해서 다시 이 본문을 가지고  달란트 비유에서 나타내고 있는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착하고 충성된 자의 삶의 자세와 악하고 게으른 자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 보아야 한다.  

 

  • 14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새 

어떤 사람은 곧 주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가 지금 타국에 갔다고 이야기한다. 종들 입장에서는 타국이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로 간 것이다. 바로 아버지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자리로 가신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정체가 드러난다. 즉 우리는 그곳을 가보진 못했지만 그곳은 이곳과는 다른 나라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그리스도가 데려가실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청지기이다. 단지 정해 놓은 기간동안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이고 이 시기가 지나면 주님과 함께 그 나라로 가야 할 존재들이다

 

  • 14-15절: 자기 소유를 각자의 재능대로 맡겼다. 

우리가 기진 모든 것은 그 분 것이고 그분이 내게 맡긴 것이다. 어떤 자에겐 많이 맡긴 자도 있고 적게 맡긴 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분량대로 맡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라고 결코 적은 양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달란트는 그 당시 돈으로 6000데나리온이다. 

그 당시 장정 하루의 일당이 바로 한 데나리온 이었는데 한 달란트는 6000일에 대한 품삯이니까 연수로 따지면 15년- 20년치의 수당이 바로 한 데나리온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장정만 오천명 모인 그 현장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했을 때에 빌립이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장정만 오천이면, 여자들과 아이들 포함하면 2만여명 쯤 된다고 하니까 이만 명 먹이는데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만여명을 30번 먹일 수 있는 금액이 한 달란트이다.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것이 그 만큼 넉넉하게, 크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작게 맡긴 자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도 부족함이 없게끔 맡기셨다. 모두에게 크게 맡기시고, 크게 주셨다. 

그리고 크게 맡기신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ex)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 받는다. 땅을 분배 받는 것만 해도 큰 은혜이다. 자기 들이 세우지 않은 도시를 받고, 심지 않은 열매를 얻을 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들어가서 더 큰 땅을 개척하라 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라 하신다. 분배받은 것을 기반으로 생육하고 다스리고 번성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 한 달란트 남긴 자 

그는 주인에게 받은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재능, 은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감추어 두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살았다면 과연 그는 무엇으로 산 것일까? 

종이 주인의 것으로 살지 않으면 그는 자기 재산을 숨겨 두었거나 세상의 다른 것을 가지고 먹고 산 것이다.  

세상의 것,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요구에 맞추어서 산 것이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주인이 왔을 때에 그가 한 변명은 무엇이었나?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소리인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생각한 주인은 "자기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자 하는 굳은 사람, 나쁜 주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존재로서 주인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열심히 해서 주인이 이득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 반대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어떠했는가?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장사했다. 누구의 장사인가? 주인의 이름으로 장사한 것이다. 

장사하여 이득을 남긴 자들은 주인이 없어도 늘 주인의 이름을 가지고 주인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준 것으로 자기도 풍성하며, 주인에게도 풍성하며, 이 장사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풍성하게 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준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의 삶을 영위했다. 주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삶을 살았다. 

결국 주인의 은혜를 모두 땅에 묻은 자는 육신적으로 게을러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불신과 편견으로 고의로 불순종하여 자기 멋대로의 삶, 탕자로서의 삶, 세상 속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달란트 비유에서 말하는 충성과 게으름이란 결국 주인을 신뢰하고 천국에 소망 둔 삶을 사는가? 주인을 불신하고 이 땅에 소망 둔 삶을 사는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에 근거가 되는 내용의 비유가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 나옵니다. 

눅 19:12-13)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

14절)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주인을 배신할 음모를 꾸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그를 심판하면서 하는 말이 

27절)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결국 그가 왜 악한 종인가?  그는 달란트를 받을 때부터 주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신자가 왜 불신자인가? 

여러분, 만물은 하나님의 손길로 가득 차 있다. . 

육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가 다 하나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런 신비에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게으르고 심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 공전, 물이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자들에게 주인이 말한 것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되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좀 전에 우리는 한 달란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큰 은혜이고,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인지를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그 큰 것을 주님은 "적은 일"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한달란트 가진자가 열달란트 가진 자를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 속에서 열등감과 불행함을 맛볼 것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한달란트도, 열달란트도 그저 적은 것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많이 가졌다고 교만할 이유도, 적게 가졌어도 비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 아버지는 온 세상을 창조한 만물의 주인이요, 난 그 분의 자녀이면 만사 끝이다. 

 

그런데 그 마음 중심.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분께서 주신 것을 통해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큰 것을 맡기신다 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그것이 고을을 맡기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이 땅의 의미를 벗어나는 일이다. 어린 양들을 맡겨 충성을 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맡기시는 것과 같을까?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왕이신가? 선한 왕이신가? 나를 구하시기 위하여 이 조각목각도 같은 쓸모없는 존재에게 하늘의 귀한 것을 맡기시고 살게 하신 분, 하늘 나라로 가게 하신 분....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나님 주신 힘과 능력이 아닌 내 힘으로 일하는 사람 

  • 떨기 나무에서 만난 모세 - 애굽의 왕자의 신분으로 애굽 병사 한 사람 죽이고 도망하여 40년을 숨어살던 자 
  • 로뎀나무가의 엘리야- 내가 열심이 유별하여 나만 홀로 남았더니....

-> 자기 열심으로 일한 자들은 넘어지거나 교만해진다. 

  • 자기가 이룬 성과로 하나님께 창찬받으려는 자

-> 한나가 자기가 만든 요리라고 주면 한 두 번은 맛있는 척, 먹어주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러면 혼을 내 줄 수 밖에 없다. 

 

주인의 즐거움

- 장사해서 이윤 남기는 것? 

아니다. 하나님이 준 것으로 풍성하게 하고도 남아 이웃까지 풍성하게 하는 것 

오병이어의 기적 - 거기 있는 사람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주신 힘으로 일할 때, 우리 자신만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까지 축복이 흘러 넘치게 하신다. 우리가 예배 끝에 부르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 

 

간증) 

우리 아버지가 주셨어요....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풍성함.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 분께서 하시고 우리는 누린다. 그 분을 통해 우리가 풍성하고, 우리의 풍성함이 주위를 풍성하게 한다. 쓰임받는 삶이 가진 기쁨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들끼리 이 시간 동안 예배하게 하실까? 

누가 일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는 전통이 세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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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염려를 은혜로 바꾸는 언어 (빌 4:4-7) 

 

지난 주 시편 109편 - 어떻게 깨끗한 그릇이 될까? 

다윗의 영성의 비밀 

그 안에도 우리와 똑같은 분노와 억울함, 저주와 입에 담지 못할 욕이 마음 속에 넘쳐났다. 

그런데 그 어둔 감정, 미운 감정, 저주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 그의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냈다. 

우리는 반대다.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를 감추고, 그 안에서 해결받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감추지 못한다. 

얼마간 참다가 퍼붓고, 분노하고, 저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회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언어도 받으시고, 우리가 내어드린 우리의 어둔 심령을 그의 은혜로 바꾸어 주신다. 

기도는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언어가 내 안에 들어와 내 안에 그 분의 생명을, 빛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의 속마음을 바꾸는 기도의 연장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신약, 빌립보서의 본문을 가지고 이 기도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 보고자 한다. 

 

빌립보서 4장 4절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6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기뻐하는 것, 염려하는 것 - 감정의 문제다. 감정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외부의 환경이나 충격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감정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쁘고, 문제가 생기면 염려하는 것, 당연한 인간의 반응이다. 

 

‘염려’와 ‘기쁨’은 ‘어둠’과 ‘빛’같아서, 한 공간에 같이 머물 수 없습니다. 염려가 들어오면 기쁨은 사라지고, 기쁨이 들어오면 염려가 사라집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염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기쁨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염려를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언제나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끊임없이 이 감정을 다스리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하라. 

우리의 인간이 지(knowledge), 정(emotion),  의(will)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랑이라는 가치는 어떤 순서로 우리에게 경험되는가? 

감정(호감)이 먼저 오고 그러면 상대방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지식이 축적되게 되고, 나중에는 의지를 가지고 결혼을 하거나 결실을 맺게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순서를 과감하게 바꾼다. 

사랑하라는 말씀 (지식)을 먼저 준다. 그리고 그 말씀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순종한다. 그러면 가장 마지막으로 감정이 따라오게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다 이런 순서대로 열매맺는 말씀들이다. 

 

결론적으로 말씀(지식)에 의지적으로 순종함에 의해서 감정을 다스리게 한다. 

왜 성경은, 하나님은 일관적으로 말씀을 통해 감정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실까? 

말씀 - 로고스: 원리, 근원, 논리적이다. 

감정 - 외부 작용에 대한 반응이라고는 하지만 무논리, 무원칙, 항상 변화한다. 

저 사람이랑 다신 안살어, 말도 안해야지 하면서 모든 관계를 끊어버릴 듯 하면서도 말 한마디에 풀린다. 

도무지 사람의 감정은 종잡을 수 없다. 

속담)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신앙생활에서도 은혜 받을 때 보면 세상을 다 이긴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금새 집에 가다가 말 한마디에 결심을 놓아버린다. 성령의 은혜를 닫아버린다. 

 

그 많은 감정 중에서 신앙생활을 가장 흔드는 감정 - 염려이다.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고 은혜를 마르게 하는 원동력이다. 

 

염려에 대한 중국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기원전 12세기경 중국의 주(周)나라가 은(殷)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다. 새 왕조의 창립자인 무왕(武王)과 그 아들 성왕(成王)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를 직접 통치하기 힘드니까 친족과 공신들에게 하나씩 떼어 나눠주었다. 그 가운데 기(杞)라는 아주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주(周)왕조의 인척이나 건국공신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까마득한 시절에 정복된 망국의 유민들이 모여 살던 나라였기 때문에 따로 왕을 파송하지 않고 계속 그 나라를 유지하도록 했지만 설움과 천대가 이만 저만 아니었다. 항상 주나라 임금이 자기들을 어떻게 할까봐 사람들은 불안 가운데 살았다. 그 중에도 유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의 걱정은 “올려다 보면 장엄하게 돌고 있는 저 하늘, 그리고 우리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이 땅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이었다. 기우(杞憂)는 기인지우의 준말로 그러한 기 나라 사람의 걱정을 나타내며, <쓸데없는 근심>, <괜한 걱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 격언 으로도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다.

걱정을 하다보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중 2 병, 고 3 병, 산후우울증, 이러한 염려가 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의 염려는 영어로는 "anxiety"로 번역했다.  "anxiety"의 뜻 중에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 '미래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 공포(fear)와 불안 (anxiety) : 특정한 대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 

 

사실 빌립보 교인들의 상황은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교회 외부적으로는 이제 로마로부터의 핍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복음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고, 영적인 리더인 바울도 지금 감옥 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내적으로는 교회가 분열되어 하나되지 못하고 어지러웠다.  

안팎으로 편할 날이 없는 때이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부터 편지가 날라왔는데 그 편지 속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낙천적이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가? 상황을 무시하라는 것인가? 어떻게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일까? 

어떻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까?

 

바울의 권면

 

1.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 주 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6a) 

염려를 중단하라는 명령이다.  ‘염려하며 사는 것이 싫으냐?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라!’는 것이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뜻이다. 사실 사람들은 처음에 언급한 기나라 사람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초조해한다. 조그마한 문제도 자꾸 묵상하고 생각하고 확대해석하면 어느새 문제가 눈덩이같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여러분, 염려라는 감정이 일어날 때 거기에 휩싸이지 말고 중단하십시오. 아니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이 염려를 기쁨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2. 염려대신 기도하라. (핵심) 

…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b)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제와 염려의 자료를 기도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말 ‘문제화’시키지 말고, 오히려 ‘기도 제목화’시켜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고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놓고도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하거나’, 아니면 ‘기도하거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 대신 염려합니다. 문제를 염려로 바꿉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 대신 기도합니다. 염려를 기도 제목으로 바꿉니다. 내가 염려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는지를 보면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우리의 인생길에 염려해야 할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염려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 때에 기도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 - 기도하라 하면 당연히 기도하지요 하면서 불쾌해 한다. 그들의 기도는 단지 한숨이다. 염려 가운데, "주여~~~' 후렴구 처럼 내뱉는 한숨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기도는 염려의 대상이나 상황, 내 감정이나 문제를 소상히 아뢰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내 염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염려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그리고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게도 한다. 

 

바울은 기도를 하더라도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말한다, 즉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기도제목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죽고 사는 큰 문제만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일들도 주님께 가지고 나오라는 것이다. 

‘다만’이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다만’은 ‘오직’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라는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우선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염려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3.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라. 바울은 기도하고 나면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장에 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제야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행복과 기쁨을 보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하나님은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강을 먼저 맛보게 하신다. 해결을 먼저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약속을 먼저 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맏음을 통해, 그 약속을 성취하신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정한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의 때에 틀림없이 해결될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허락해 주신다.  그때가 언제가 되든지,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평강으로 응답해 주신다. 해로운 상황도 결국 나의 유익으로 변하게 하신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더 이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 일부터 시작하신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보내는 편지마다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어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In Chrust, 라는 말입니다. 

"주 안에" 이것이 바울의 능력이었고, 확신이었고, 그리고 체험이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라는 찬송가(370장) 가사처럼, 주 안에 있으면 근심이 없습니다. 문제가 없어서 근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기 때문에 딴 근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뒤집어도 진실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없으면, 즉 주 밖에 있으면 그때부터 나에게 딴 근심이 생겨납니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하고 기쁨이 충만한 삶. 

각 지파 중에서 수령을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초짜배기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들을 보냈다는 것. 

그들 중 10명의 보고 

[민 13:32-33]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들의 보고: 그 땅, 그 곳의 백성-신장이 장대하고 거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 메뚜기...난 아무 것도 아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 

(민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들을 보았지만 이들이 본 것은 여호와... 그들은 보호자가 없지만 우리는 여호와가 함께 있다. 하나님이 우리 보호자시다. 

 

하나님의 행하심.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그들이 취한 행동, 말한 내용대로 행하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메뚜기라고 한 자들은 그렇게 죽어갔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말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을 취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신앙의 법칙. 

우리가 취한대로, 선택한 대로....하나님께서 또한 일하신다. 

 

그래서 염려가 생길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고 끝으로, 결론적으로 

(빌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워라. 옳은 생각, 신앙적인 생각, 깨끗한 생각, 유익한 생각, 남을 세우는 생각을 해라.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오늘 배운 바를 실천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평강을 줄 것이다. 잠 잘 것이다. 잘 먹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제일 큰 피해 - 성도들의 기도가 준다. 

목회자인 나에게도 기도가 절실하다. 

아침 묵상과 더불어 기도의 훈련을 하자. 

기도는 우리 그릇을 꺠끗하게 만들어준다. 

기도는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지만 기도라는 언어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시고 만나시고, 역사하신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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