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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 2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4-26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ㄱ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l  유대 역사가 바벨론에서 귀환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는 지금의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c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29: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

 

,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에서, (11, 15, 19), 주에서 선지자로 (19),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공동체어떤 죄인도 받아들이는 공동체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까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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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3.25 04:51

    샬롬^^.
    진리의 말씀 감사합니다.
    우물가의 여인 "우물"에 이런 숨겨진 비밀이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평안한 한주 되세요.

참된 예배 (요 4:21-24) 


[요 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예배의 본질,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율법학자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많이 배우고 그가 열심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구원을 갈망해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를 주로 영접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알지도 못하고 찾아오지 않은 한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북왕국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그들과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이 여섯시쯤 되었더라고 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6시는 우리 시간으로 하면 정오입니다. 사막지역에서 낮 12시는 가장 더울 때입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 시각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르러 왔습니다. 그녀는 왜 남들이 다니지 않는 시각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렇듯 목이 마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감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영적인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우물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은 그러나 세상의 어떤 우물로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래도 성경을 알고 말씀을 통해서 미련하게 나마 예수님께 찾아오는 열심이라도 있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나마 무엇이 자기를 갈증에서 해결 해 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날도 자신의 공허함과 갈증을 매꾸고자 우물을 찾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길이 없어 갈급해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었지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주리라. 

그러니까 여인이 흥분해서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이런 수고, 이런 방황하지 않게 나에게 생명의 생수를 주소서.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한한 말씀을 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절)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절) 

뭐,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여기서 남편을 이야기합니까?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너에게 아무런 위안도, 해결도 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인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나- 말씀도 알았고, 체험도 있었고, 순종도 하였지만....그가 없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예배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이다. ) 

참된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찌니라." 


  • 영과 진리의 예배가 무엇인가? 

1)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의 예배를 드려라. -> 예배는 신자가, 성도가 드리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 믿으라고 서비스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 거룩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 살아계신 예수님을 앞에 모신 여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와 통하고 그를 경배하는 것. VS. 예수님을 알기 전의 여인-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누구 앞에서? 예수 앞에서... 바리새인, 유대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성전 모욕죄로 예수님을 무시, 고발.

눈 앞에 없는 예수-> 성령 안에서 예수와 교제하고 예배함.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예수. 

왜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그를 믿지 못하였는가? 너무 평범해서. 너무 초라해서.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그를 볼 수 있었다.  

21절)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어디서 예배합니까? 나를 믿으라. 


2)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라. 

 [롬 12:1-2]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삶을 드리는 예배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 3:23)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자기만을 가꾸며 살아가게 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했다. 

자기 만을 위해 살다가 드리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 

아벨의 예배: 양의 첫 새끼와 기름... 죄를 회개하는 예배.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배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라. 

[고전 2:10-12]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4) 입술의 열매 삶의 열매를 드려라 

[히 13: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마리아 여인 

- 남과 관계하지 않는 소극적, 소외적, 도피적 여인. 왜? 자신의 죄, 남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만 육신의 목마름을 가지고 뜨거운 중에 물을 찾아 갈망하는 여인 

- 사마리아땅에서 열광적인 예배를 드리는 여인이었지만 예수님은 예배를 통해서 그녀를 만나신 것이 아니라 일대 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서 그녀에게 찾아오신다. 

- 주님은 언제나 내게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찾아오신다. 물론 예배가 그 수단과 장소가 될 수 있지만 그 안에 속해 있다고 그 관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열쇠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고 대화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마리아 여인- 곧장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전한다. 

-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마을로 달려가 그동안 기피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 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사람들을 피하지 않는다. 예수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베드로에게 우리가 내려가자. 우리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만나기 위해 왔다고 증언한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또한 사람들을 만난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예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이고 세상 밖의 전도이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공동체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는 더 많이 만나고 어울리게 하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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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라 (요 4:5-26) 


지난 주에는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본문으로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결국 자신의 허전함과 도움을 아뢸 적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지난 시간 나누었던 본문의 연장선이면서도 또한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면서도 남성이고 또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들은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으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인이면서 또한 여성이고 남의 이목을 피해 대낮에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을 주님이 만나러 오셨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3절~4절을 보면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말하지요? 

유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예수님 태어나신 베들레헴이 있는 남쪽 지방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어릴적부터 쭉 자라신 지방이고, 또한 제자들을 삼고 복음을 전한 나사렛이 있고 가버나움이 있는 북쪽 지방입니다. 

이 남쪽유대와 북쪽 갈릴리 지방의 가운데 중부지방이 바로 사마리아 지방입니다.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북왕국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그들과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 성전마저도 지금은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북쪽 갈릴리 사람이 남쪽 유대 지방을 가거나 유대지방 사람들이 북쪽 갈릴리 지방을 갈 때에는 중부지방인 사마리아지방을 지나지 않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멀리 베레아 지방을 통과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그냥 지난 것도 아니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표현합니다. 영어로는 "HAD TO" 어쩌다가 사마리아를 지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지방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꼭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나머지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그 사건들에는 다 각각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 가나라는 동네에서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시어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이 예수의 첫번째 사역으로 나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 그들을 찾으러 오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러 오셨다는 것이지요.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포도주를 통하여, 즉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쪽 유다로 오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성전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도록, 연합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이후에 마치 신방을 꾸미듯이 하나님의 집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 말씀하시죠. 

무슨 소리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부활로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사건이 요한 복음 3장의 니고데모 사건과 오늘 나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즉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정통 유대인인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참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될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될지, 유대인들이 왜 신앙생활에서 실패했는지를 말씀하시고 오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구원 사역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어떤 곳입니까? 좀전에 말씀드렸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해서 함께 예배드릴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그래서 성전에 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없고 그들끼리만 모여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했던 자들이 모인 동네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깨끗이 하시면서 분열되어 있던 모든 자들이 예수님이 세운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유대인의 잘못과 한계를 지적하시고 이젠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와서 이젠 진짜 예배드릴 때가 왔다. 

누구 누구 빼지 말고 함께 다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자는 것이지요. 


4장 9절) 유대인이 사마리아 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더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그들은 천년 이상을 상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뿌리깊은 금단의 땅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가서 여인에게, 대낮에 다가가서 말을 겁니다. 

니고데모는 어땠지요? 누가 볼까봐, 밤에 몰래 찾아가 예수님께 자신의 영적인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 그에 비해 예수님은 아무도 가지 않던 땅에 그것도 대낮에 다가가서 여인과 긴 시간 대화를 하며 그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에는 누가 말을 겁니까? 니고데모가 먼저 말을 꺼내지요? 한 마디 꺼내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네가 거듭나지 못했다"하시면서 말씀을 돌리지도 않고 바로 그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굉장히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 

강한 자에게는 더 강하게 말씀하시고 의례적인 과정도 생략하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마라아 여인에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오니까 먼저 말을 건내십니다. 그것도 물을 좀 달라 하면서 도움을 구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를 공급하러 오셨는데 첫 마디가 나좀 도와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막 대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는 가차없이 직접적으로 훈계하시면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먼저 찾아가시고, 기다리시고, 그리고 말을 거십니다. 


아담이 타락해서 바위 뒤에 숨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할 자는 아담인데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피하고 숨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죄지은 아담을 찾아가시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시면서 그를 부르십니다. 

잠을 자고 있는 사무엘에게 "사무엘아 사무엘아?"하시면서 잠을 깨우시고, 광야에서 아무 낙이 없이 홀로 양을 치는 모세에게 "모세야 네 신을 벗어라?" 하시면서 그의 인생을 맡기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 오십니다. 아무리 내 처지가 어렵고 힘들고 낙망해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고, 자고, 피합니다. 

그럴 때 마다 언제나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말을 걸어 오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담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듭니다. 

김연아 선수... 금메달을 놓치고 은메달. 이젠 심판 뿐만 아니라 아얘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를 적으로 만듭니다. 

물론 러시아에서 열리는 경기라 홈 텃세도 있었고, 심판들의 판정도 나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올림픽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전세계가 함께 모여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자는 것이지요. '스포츠를 통해 평화를 만들자' 입니다.  

아주 좁게 말하면 우리 친목을 위해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하자해서 사람들이 다 모이게 합니다. 모여서 경기하는 것은 그냥 모이기 위한 구실이고 정작 목적은 친목도모이지요. 

그런데 경기하다가 서로 적이 되면 아얘 안모이니만 못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애 반해서 김연아 선수는 얼마나 의젓하게 대처합니까? 본인은 4년을 준비해서 엄청난 땀과 피로서 고생하며 이 날을 준비하느라 억울할 만도 한데, 또 은퇴 무대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난 괜찮다. 참가해서 기쁘고 실수 안하고 내가 준비한 것 다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다. 얼마나 대인배입니까? 

올림픽의 정신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산 가족 상봉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제 분단된지 60년이 훨 지난 시간동안 그저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걷지도 못하는 80대 90대 어르신들이 휠채어를 타고 버스를 타고 먼 여정을 떠납니다. 신청자가 12만명인데 한번이라도 상봉한 사람들은 2만명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80대 이상이지요. 이제 그 분들마저 세상을 떠나면 누가 북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겠습니까? 마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처럼 서로 으르렁 거리고 안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혹이라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할까봐, 그 자존심이 무너질까봐, 제자들도 멀리 보내고 먼저 와서 기다리시면서, 그녀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키고 너도 날 도울 수 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나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여인 

- 날마다 먹어도 먹어도 갈증나는 것을 길으러 오늘도 뜨거운 뙤약볕에 홀로 물을 길으러 오는 죄인의 모습.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의 인생, 날마나 끝이 없는 하루 하루의 갈증을 채우기 위한 삶

-> 예수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자기 인생의 고단함에 대한 한탄, 간구...그러나 니고데모와 같이 그 생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지요. 


그러자 예수의 직접적인 질문: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

네가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냐? 넌 무엇에 기대어 사느냐? 너의 주인은 무엇인가? 

"난 남편이 없나이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거짓일 수도 있고 진실한 고백일 수도 있다. 다섯명의 남편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내게 안식을 주지 못하고 나의 참 주인이 되어주질 못했다. 

그렇지만 삶의 갈증을 채울 수가 없어서 여전히 또 남편을 두고 살고 있다. 

영적으로는 내가 기대어 살고 있는 우상- 넌 무얼 기대고 사는가? 무엇에 의지해서 사는가?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라는 선포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고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몰래 다니던 여인이 예수를 만자지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는 자가 됩니다. 이젠 사람을 피해다니지 않고 증거하는 자, 찾아다니는 자가 됩니다. 

이게 구원받은 자의 능력

아, 난 예수님은 믿는데 사람들이 싫어서 교회는 안 다닐래요. 집에서 고상하게 혼자 설교 듣고 성경읽고 기도할래요. 사람들이 무서워요...

예수 만나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열매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빋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5-7, 12) 


사마리아 성읍 전체에 부흐으이 불길이 솟아 오름. 

(행 8:15-17)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예수의 다가가심,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 빌립의 전파, 베드로와 요한의 성령세례 ... 이런 단계를 거쳐서 사마리아 온 마을에 성령의 세례가 부어짐. 


(엡 2:14-16)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은 담을 허물러 오셨다. 우리 인생에 사마리아의 지역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돌아다니는 삶 밖에 살 수 없다. 나의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나의 사마리아는 어디인가?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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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5 23:09

    우리를 먼저 찾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마리아여인이라 생각이 되어서 너무나 감사해요 말씀에 은혜가 넘칩니다 ~!

  2.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6 10:11 신고

    부족한 말씀,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시길...

  3. 사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7 18:58

    요4장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대표죠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를 보면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 예배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 아는 것으로 예배 드림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죠

  4. 사랑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02.27 19:03

    내가 그라심은
    요4:19여자가 선지자로 알아보니 하신 말씀으로 깨달음 인정하시는 예수님
    여자는 다시
    요4:25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님께서 드러내심 내가 그로라

    •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2014.02.28 16:07 신고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말씀의 비밀은 읽을 때마나 늘 새로운 의미, 샘솟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일것입니다.
      부족한 글 속에서 사랑 님의 지식 위에 한 가지라도 보탬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참된 예배 

[요 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들어가는 말)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리러 오십니까? 받으러 오십니까? 

좀 말이 불편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시간과 여러분의 물질과 여러분의 정성을 드리러 오십니까? 아니면 위로 받으러, 은혜 받으러, 축복받으러, 그도 아니면 점심 먹으러 오십니까? 

그러지요.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 예배 받으러 왔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지 우리 자신이나 전도 대상자나 그 밖의 어떤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신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성가대가, 혹은 설교자가, 친교대장이 성도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시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우리를 구원하신 것과 우리를 보호하신 그 은혜에 우리가 감사드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기념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가 어디서부터 오느냐? 예배의 본질이 바뀌니까 신앙이 흐트러지고 믿음이 식고 교회가 능력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지 않는 자를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는 예식도 아닙니다. 한 때 한국교회에서 열린예배 혹은 음악예배의 붐이 분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형 교회의 예배 실황을 경험한 한국의 몇개 대형 교회의 목사님들이 예배를 기획하여 창안한 예배의 모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초청해서 교회가 가까워지게 하려고 될 수 있으면 찬송가대신 잘 알려진 복음송이나 그도 아니면 건전가요를 부르게 하고, 설교 말씀은 생략하거나 아주 짧게 하고 복음의 메시지를 연극이나 뮤지컬, 동영상이나 성가대의 찬양으로 대신한 예배입니다. 철저히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예배로 바뀐 것이지요. 

처음엔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형식에 치우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전도해도 잘 안 되었던 사람들을, 교회는 딱딱하고, 엄숙한 줄로만 알았는데 편하고 재미있고 잘 섬기는 예배,,,, 

철저히 불신자나 초신자, 새신자를 섬기는 예배...

그런데 그것이 참된 예배일까? 과연 누구를 위한 예배일까? 

그런 예배에 익숙해져 버리니까 점차 믿는 신앙인들까지도 예배를 드린다기 보다는 예배를 통해서 자꾸만 무언가를 얻으려고만 합니다. 자기 감정이 채워지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자기가 무언가 얻어가지 못하면 예배 잘 못 드렸다고 예배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예배의 본질,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론)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율법학자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그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많이 배우고 그가 열심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구원을 갈망해도 자기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를 주로 영접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알지도 못하고 찾아오지 않은 한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북왕국에 위치한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고 때로는 그들과 혼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도착해서 보니 시간이 여섯시쯤 되었더라고 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6시는 우리 시간으로 하면 정오입니다. 사막지역에서 낮 12시는 가장 더울 때입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그 시각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르러 왔습니다. 그녀는 왜 남들이 다니지 않는 시각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렇듯 목이 마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였기 때문에 영적인 만족감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영적인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우물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 목마름은 그러나 세상의 어떤 우물로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눈과 귀가 멀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래도 성경을 알고 말씀을 통해서 미련하게 나마 예수님께 찾아오는 열심이라도 있었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나마 무엇이 자기를 갈증에서 해결 해 줄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날도 자신의 공허함과 갈증을 매꾸고자 우물을 찾은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길이 없어 갈급해 하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었지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을 주리라. 

그러니까 여인이 흥분해서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이런 수고, 이런 방황하지 않게 나에게 생명의 생수를 주소서. 간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한한 말씀을 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절)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절) 

뭐,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여기서 남편을 이야기합니까?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너에게 아무런 위안도, 해결도 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이지요.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인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상이 문제인 것이다.) 

참된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찌니라." 


  • 영과 진리의 예배가 무엇인가? 

1)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의 예배를 드려라. -> 예배는 신자가, 성도가 드리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 믿으라고 서비스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 거룩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 살아계신 예수님을 앞에 모신 여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와 통하고 그를 경배하는 것. VS. 예수님을 알기 전의 여인-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누구 앞에서? 예수 앞에서... 바리새인, 유대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성전 모욕죄로 예수님을 무시, 고발.

눈 앞에 없는 예수-> 성령 안에서 예수와 교제하고 예배함.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장으로서의 예수. 

왜 예수를 눈 앞에 두고도 그를 믿지 못하였는가? 너무 평범해서. 너무 초라해서.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그를 볼 수 있었다.  

21절)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어디서 예배합니까? 나를 믿으라. 


2)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라. 

 [롬 12:1-2]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삶을 드리는 예배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 3:23)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자기만을 가꾸며 살아가게 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게 했다. 

자기 만을 위해 살다가 드리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 

아벨의 예배: 양의 첫 새끼와 기름... 죄를 회개하는 예배.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배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라. 

 

[고전 2:10-12]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4) 입술의 열매 삶의 열매를 드려라 

[히 13: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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