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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사무엘서 강해)'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21.12.15 사무엘상 16장 14-23절 왕의 일
  2. 2021.12.10 한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13절)
  3. 2021.12.10 왕의 후회 (사무엘상 15:9-23절)
  4. 2021.12.10 어긋난 승리 (삼상 14장 36-46절)

사무엘상 16장 14-23절 왕의 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16장의 앞 부분을 다루면서 다윗의 기름부음을 받는 과정을 살피며 기름부음의 의미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의 대상은 왕, 제사장, 선지자의 세부류의 사람만 기름부음을 통해서 임명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할 때에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할 일이 있다. 그것을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특정한 일을 위해 세움을 받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특별한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울도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삼상 10:6-7)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0절에 보면 

(삼상 10:9-10)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그런데 오늘 읽은 16장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구절을 잘못 오해하면 하나님이 악령을 보내셔서 사울을 괴롭힌 것처럼 이해하면 하나님을 악령을 보내시는 자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크게 위배되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았을 때에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부으셨습니다. 왕이라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새마음과 새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5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 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함께 주셨는데 이제 그 뜻대로, 하나님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습니다. 

왕의 전령으로, 왕의 사자로서 파견되었는데 왕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러니까 왕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영을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거두시니까 자연스럽게 사울이 사탄의 종노릇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니까 사탄이 사울에게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를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의미 아닙니까? 

 

자, 사울의 불순종을 나타내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블레셋 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이 오기 전에 스스로 임의로 제사를 드리려다가 불순종한 죄요, 두 번째는 아말렉 과의 전쟁에서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가장 좋은 것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이것은 죄라고 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부도덕 하거나 부정한 일을 저지를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쟁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행한 일이요,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아니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일은 윤리적인,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철저히 예배에 관련된 죄입니다. 종교적인 죄입니다. 

사울은 전쟁을 치루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의 죄를 자꾸 지적할 때마다 저 백성들때문에, 저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고 변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때부턴가 스스로의 주권을 책임지고 자기가 그 일을 감당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쟁이 어느덧 자신의 명예와 목적을 이루는 전쟁이 되어 버리고 그 전쟁을 위해 예배가 도구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일과 예배 

자, 창세기의 첫 기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마지막 날 예배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예배 영성의 큰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동산에서 일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바울도 참 예배는 안식일날 하루 나와서 드리는 구별된 시간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 몸, 우리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파견된 거룩한 나라의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예수님도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연결된 자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 하기도 합니다.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했다가 하나님을 피하기도 합니다. 

 

일은 우리의 본질을 때로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 우리는 흔히 "무슨 일 하세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알기를 원하는 것 중 하나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삶의 태도와 삶의 테두리를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일은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생각, 인격, 태도 등을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 잘 살피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리기 일쑤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일과 예배를 하나되게 합니다. 일이 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잘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엿새를 일하고 칠일째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삶과 예배, 일과 예배를 구별하지 말고 하나로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자꾸만 엿새동안의 삶과 안식일의 삶을 구별하고자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지 주일날 나와 예배하면 만사가  ok인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건 주일 날 나와서 거룩한 말투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인것 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일반적인 대화를 할 때와 전혀 다른 말투로 기도하는 분들 있습니다. 흔히들 목사님 말투라고 기도할 때만 나타나는 말투....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이 대화를 하기 원하시는 것이지 시낭송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하는 변명이 무엇입니까? 

이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교회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면해 왔는지 모릅니다.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 깨끗하지 않은 인간관계, 모든 불순한 것이 교회라는 건물과 주일이라는 시간 속에 숨겨져 왔습니다. 

 

디모데서에서 말하는 직분자의 기준은 주일날 예배드리는 모습을 통해 직분자 뽑으라 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건전한 자인가? 성실한 자인가? 인정받는 자인가? 오히려 그의 일상과 일터에서의 모습을 통해 직분자를 뽑으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영성, 일과 예배, 삶과 예배의 일치된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의 특별한 언어로만 이해되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은 베들레헴의 말구유, 갈릴리의 고기잡이 배, 삭개오의 집, 나사로의 무덤, 사마리아의 우물가 등 우리의 일상의 언어와 환경과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다윗의 기름부음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새로운 일터로 불려 나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첫번째 일터은 왕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울을 섬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20여년간 왕으로서의 일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인턴십 과정으로 나뿐 왕, 실패한 왕을 섬기게 합니다. 

왕으로서의 첫번째 코스는 왕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기업의 총수의 아들이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밑바닥 부터 일을 가리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왕의 일과 종의 일은 전혀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으로서 섬기는 일이 곧 왕으로서 통치하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라"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사울을 섬기면서 왕의 직책은 곧 섬기는 직책임을 깨닫습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때만다 후보자들은 국민을 받들겠습니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 말들을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또한 다윗은 사울을 보면서 왕이 하나님의 뜻을 떠났을 때에 어떤 일이 발생되는지를 온몸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의 죄를 지적받았을 때에 그가 외친 기도는 사울처럼 "나를 왕에게게 물러나게 마옵소서"라든가 백성들에게서 내 죄를 감추소서가 아니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아닌 주의 성령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참 일에는 섬김과 통치가 하나로 이어집니다. 

왕이라는 직분은 우리가 가진 역할이고 그 방법이 바로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시달리는 영혼에게 찬양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도록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탄의 지배를 받던 사울이 다윗의 찬양을 통해 그가 상쾌하고 (씻김) 낫고 (치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회복) 라고 증거합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임명하시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완성, 즉 그 The Messiah, the Christ가 됨으로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은 자의 대표성을 띈 것은 사도였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대사, 특정한 일을 위해 임명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고백을 다함께 선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도로 임명된 자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거룩한 직분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표현하고 드러내도록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혼돈에서 질서를 이루며, 정결해지고, 치유되며, 회복되는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왕이라는 일을 위해 기름부음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실패한 삶이요, 사탄에게 지는 삶입니다. 

일을 위해 예배를 도구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요 타락한 예배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타락한 죄인을 섬기는 왕이 되었습니다. 무질서한 영혼에게 질서를 공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달리는 영혼을 상쾌하게 해주는 도우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위해 나를 세우셨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정에서의 일이건, 회사에서, 가게에서, 자동차 안에서의 일이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그 일을 통해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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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13절) 

 

작년 말에 올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무엘상을 택하게 된 이유... 

시편과 함께 다윗의 삶과 영성을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갈망때문에. 

이제 2017년 전반기를 지나고 7월이 되어서야 사무엘상 18번째 강해로서 다윗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의 배경을 살펴 본 후에 몇 가지 구절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그 다음 이 사건과 구절들이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역사적 배경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그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회개하지 않고, 거짓으로 변명으로 자기의 잘못을 감추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마을로 보내어 이스라엘의 새 왕을 뽑게 하신다. 

사무엘이 도착하자 베들레헴은 긴장이 흐른다. 

사울을 꾸짖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 사무엘이 이름없는 마을에 온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읍 장로들이 떨며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4절) 

하나님의 진로와 심판이 두려웠던 장로들을 안심시키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함께 제사하자. 예배하자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으로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예배에 참여했지만 사무엘의 관심은 오직 이새의 아들들에게 가 있었다. 

엘리압에서부터 아비나답, 삼마, 그 뒤의 모든 아들들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유명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7절) 하시면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지 않으신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초대받지 못했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게 한 후에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다. 

 

2. 말씀 들여다 보기 

  • 내가 그를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니...(1절) 

 

사울의 실패 - 

그는 겸손한 자였다. 성실한 자였다. 그리고 충성된 자였다. 용기있는 자였다. 

한 마디로 해서 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자였다. 

그런데 왕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자질을 다 감추어 버렸다. 자리가 그를 망쳤다. 

왕이라는 자리로 말미암아 그는 겸손한 자대신 사무엘의 영적인 자리를 탐하는 교만한 자가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백성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가 되었고, 자기의 속 마음을 숨기는 거짓된 자가 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 불렀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신학적인 용어로 이 세가지 부류를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인도하는 자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죄를 예배를 통해 사하도록 하는 중보자였다. 

 

결론적으로 기름부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나타내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기도를 말씀드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울은 이 역할을 망각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 

하나님께 백성의 소리를 전하고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마저도 백성에게 돌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 하나로서 그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 (1절 후반) 

누구도 다윗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조차, 그의 형제들에게 조차 다윗은 주목받지 못한 자였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역할을 잘 감당할 기름부은 자로서 합당한 그의 존재를 보았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다리 역할, 메신저 역할, 통로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시편 23편 - 목동으로서 경험한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만족했고 충만했고 풍요했다) 

그가 나를 푸른 풀 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는 롯 처럼 좋은 땅,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이다. 그 땅을 그는 쉼이 있는 땅, 안식의 땅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 평안을 준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다. 그 인도하심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경험을 한다.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때로 자기가 부족해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뢰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때로 인생의 고난이 와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능히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미 그는 기름부은 자였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를 통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하면... 산다는 것은 함께 거한다는 것.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동행하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꾸밈이 없다는 말이다. 첨가되지 않은, 인공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이 중요한가? 죄를 지은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포장하고 가리고 숨기고 외식하기 때문이다. 

외식하는 자들을 주님은 독사의 자식, 죄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부르셨다. 

사울은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다윗은 목동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였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대로였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었다. 기름부음 받기에 합당한 자였다. 

 

  •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12절) 

이것은 언뜻 보면  7절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외로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지목하기 전에 누구도, 사무엘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를 데리고 오자 비로서 그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감추었던 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씨의 시처럼 하나님의 안목을 통해 그의 존재가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감추었던 존재가 꽃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었던 우리 존재를 드러내 주신다. 숨겨졌던 우리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신다. 

나를 부정하고 더럽게 생각했던 나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해 주신다. 

ex) 피부병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던 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셨다.

 

  •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절) 

여기서 막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카탄"이라는 말은 the youngest, the least, 

가장 적은, 혹은 가장 작은,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람들 대다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업신여기는, 그런 존재이다. 

그의 존재가 하찮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가 하는 일이 정말 하찮은 일이라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시는 자는 이런 하찮은 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그 어린아이, 하찮은 존재가 바로 막내라고 번역된 카탄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쳐주지 않는 양을 지키는 일, 그렇지만 그 양을 지키는 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접하고 전하게 된다. 가장 작은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충실히 행했던 그 자를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감당하는 왕으로 부르셨다. 

사울이 자기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고 사무엘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선하자 하나님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셨다. 

하늘나라의 왕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가장 작은 자이다. 

 

3. 적용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쓰신다. 하찮은 자를, 연약한 자를, 작고, 적은 것을 쓰신다. 

그런 자를 왕으로 부르시고 기름부은 자를 만들어 주신다. 

이것은 단지 작은 자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는 성공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 앞에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야기 할 수 있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큰 전문적인, 능력있는 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포장되고, 과장되고, 왜곡되어지는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그들이 드리는 중보기도는 외식적인, 자기 합리화와 변명에 일관한 그릇된 중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중보자가 필요없다. 성령 외에는 참 선생이 필요없다. 

내가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도같은 목사, 목사 같은 성도는 우리가 주 안에서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무언가 특별한 목사를 기대하는 성도는 종교라는 물건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좋은 상품이 나오면 열광하면서 달려들지만 거기에 하자가 발견되면 반품하고, 항의하고, 언제나 손님으로서 왕노릇 하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언제나 신상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종교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런 성도를 기대하는 교회와 목사는 종교라는 포장된 물건을 파는 상인일 뿐이다. 

끊임없이 소비자의 입맛대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출시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비싼 가격을 요구하면서 소비자가 가진 돈과 시간과 마음을 빼앗으려 하는 악독 기업주일 뿐이다. 

 

다윗은 구약에만 600번이상, 신약에서 60번이상 그 이름이 나타난다. 

영어권에서 가장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름이 다윗과 요한이다. 

흔하디 흔한 이름, 가장 하찮은 이름. 그 이름을 하나님은 왕으로 부르셨다. 

 

다윗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자세히 다룬 인물이다. 

그런데 다윗의 일생을 보면 거기엔 어떠한 기적의 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처럼 100세의 나이에 아이를 갖는 이야기도, 홍해를 가르는 이야기도, 태양을 멈추는 사건도, 불이 나와 우상과 적을 뿌찌르는 일도, 하다못해 병자들을 치유하는 일도, 어떤 신비한 기록도 다윗의 삶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 기다림의 연속, 방황의 연속,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괴로와하면서, 자식때문에 걱정하고, 우정을 나누며, 춤추고, 울고, 슬퍼하고, 때로는 증오하면서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담은 가장 평범한 삶을 보여준다. 

그는 가장 평범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 모두가 다윗이고 다윗이 될 수 있다. 

가장 거룩한 영성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고, 신령한 것에 잠겨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장 평범하고 일상으로 가득찬 것이 가장 깊고 거룩한 영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서 있었던 기름부음의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새도, 아니 다윗 마저도 사무엘이 행한 것이 어떤 의미의 일인지 알지 못하고 사무엘은 그 자리를 떠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한 왕을 찾으신다. 

한영혼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기름부어 주신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세상을 보며 타이틀에, 성도수에, 성공을 표현하는 세상 앞에서 때때로 초라해지지만 다윗의 영성은 가장 작은 나를, 가장 연약한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를 왕으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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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후회 (사무엘상 15:9-23절)

 

  •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로 하여금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멜렉은 블레셋보다 더 오래된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난 후에 시작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자 마자 사탄의 시험을 받듯이 하늘의 양식인 만나, 즉 말씀과 반석의 물, 은혜를 맛본 이스라엘 민족들이 비로서 만나게 되는 대적이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의 후손입니다. 즉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늘의 축복을 팔아넘긴 육적인 욕망 덩어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말렉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제자였지만 돈 궤를 맡다가 도리어 돈에 눈이 어두어 은 삼십냥에 예수를 팔아 넘기는 돈의 노예가 됩니다. 신앙인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언제나 돈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해서 신앙을 타협하고 포기하고 외면하면 결국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물리쳤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기도해서 돈이 나오냐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 중에서도 평상시에는 기도하다가 정작 문제가 닥치면 기도하지 못하고 해결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은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문제에 압도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 사람의 육적 욕망을 의미하는 세력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 하나님은 실수하고 범죄한 사울에게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음에도 제사하며 승리를 구했던 사울에게 불완전하지만 요나단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주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음식을 먹지 말것을 명령하여 그것을 어긴 요나단을 죽이야만 했던 사울의 거짓 서원에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1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또다시 사무엘을 보내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돌아옴의 표시로서 아말엑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안의 육적인 욕망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체를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욕망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자기 안의 모든 육신적 욕망,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탐욕과 정욕을 못박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아말렉과 승리하게 하신 후에 아말렉은 천하에 기억도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승리이시다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 바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육신과 싸워 이기는 자입니다.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는 예수의 승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리라. (9절) 

 

아각은 아말렉의 왕의 칭호입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 로마의 왕을 가이샤라고 말하듯 아말렉의 왕을 아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말렉을 치면서 왕을 멸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의 모든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고 자신이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서를 통하여 기드온의 실패를 나누었습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쳤던 기드온의 실패는 미디안의 남긴 보물들을 자신이 소유하고자 했던 탐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보물로 에봇을 만들어 물질을 섬겼습니다. 물질을 섬기니까 그 물질의 자녀 아비멜렉으로 말이암아 집안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용사를 실패하게 하는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여기에서 지면 어떤 은혜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육신과의 전쟁에서 실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자 11절에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를 따르지 않고 내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자기 소욕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찾아온 사무엘에게 사울의 첫 마디가 무었입니까? 

"13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그가 남긴 양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의 죄를 지적하자 사울이 뭐라 말합니까?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자기의 책임을 누구에게 넘깁니까? 백성에게 넘깁니다. 무리가 가져왔다고 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뭐라 말합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 

21절에도 똑같이 백성이 그랬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그랬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끝까지 사울을 돌이키려 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17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십니까?" (19절) 

 

사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실로 (진짜, 정말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텅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20-21절)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고 남에게 전가하고 결국 하나님께 탓을 돌립니다. 

이젠 내가 이거 해서 너의 하나님께 제사할 꺼라고.....

 

ex) 땅 잘팔리게, 도박하여, 복권에 당첨되어 헌금내야지.....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무엘은 그  유명한 구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음이라."(22-23절) 

뭡니까? 

 점치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래 입니다. 내가 이것 해 줄테니 결국 나 잘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사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를 원하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만 갖다 놓으면 전쟁에 이길 것으로 생각하듯 사울에게 하나님은 제사만 잘드리면 복 주시는 분, 헌금만 많이 내면 복주시는 분....그것은 결국 점치는 우상숭배, 샤머니즘 신앙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언제 후회합니까? 

 사무엘이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이제 왕이 못될 것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내가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범죄하였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안된다고 하니까, 이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자기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 하니까 잘못했다고 자기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말을 두려워하여 백성의 말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어디 그가 백성의 말을 두려워했습니까? 

 

사울이 사무엘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30절) 

 

아 어떻게 이렇게 까지 뻔뻔할 수 있을까?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있으니까 예배 잘 드리는 척이라도 하고 가라고 지금 바지자락을 붙잡고 비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는다는 소릴 듣기가 두려워서 자기 무기든 소년에게 죽여달라고 하는 것과 사울이 후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에게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죽는 것, 결국 자기 체면, 자기애로서 가득찬 인간의 비굴함과 연약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그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아는 겸손한 자였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효자였고, 또 성실히 일하는 자였습니다. 

왕이 될 만한 자질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리가 사울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습니다. 

왕이라는 자리가 사울의 인격과 양심과 모든 신앙을 더렵혀 놓았습니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내어 신앙생활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세상에서의 기득권과 축복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해서 하나님보다 성공을 붙잡고 살다가 이제 그 자리가 위태하니까 회개하는척 하다가 신앙을 회복하려 하기 보다는 세상에서의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려다가 더 큰 수치를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안주실까?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복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세상의 복, 물질의 복, 성공의 복이 오히려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망쳐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의 제목은 왕의 후회입니다. 

사울왕은 지금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다 영원한 왕의 자리를 잃어버릴 지경에 온 자신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빼앗겨 버렸던 아말렉의 시조인 에서처럼 사울은 탐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아닌 또 다른 왕의 후회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말을 떠났고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자유는 그 분 안에 거할 때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탐심 때문에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지금도 팥죽 한 그릇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말렉은 진멸시켜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나의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적은 없었을까? 

 

제가 어느 새벽예배때 받은 은혜를 적은 글을 나누고 설교를 맞칩니다. 

 

 

어느 새벽기도 시간에.....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들고

너무 가난해서....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갈급하고

앉으면 "주여!" 한마디에 가슴이 매어지고 

한 마디 말할 수조차 없어서 한숨만으로 이루어진 기도를 드리는 

 

그저 날 불쌍히 여겨달라고

날 좀 구해달라고 

하는 그런 숨막히는 공간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가장 순수하며 

가장 진실하며 

가장 갈급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때라는  

감동이 

위로가 

하나님의 따스한 격려가 

 

오늘 

나에게 주어졌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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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승리 (삼상 14장 36-46절) 

 

어제 우리는 믹마스 전투에 임하는 사울의 태도를 통해 그의 조급함이 어떻게 믿음 생활에 악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명하신 하나님과 이미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위해 사울이 지켜야 했던 것은 7일이 될때까지,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어 사무엘이 도착하여 하나님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사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모여들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흩어지고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사울은 다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7일째가 되자 마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다가, 사무엘이 도착하여  "네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마치 자식을 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갈을 취하여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급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는 데서 오는 불신앙이고 그 약속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교만함에서 나옵니다. 

반대로 신앙은, 믿음은 조여오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느긋함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고 간절한  목마름입니다. 

 

  • 이제 14장에서는 믹마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울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믹마스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때때로 우리가 실수하고 불완전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결과가 나타날 때에 안도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나의 불완전한 믿음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사울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 지금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믹마스라는 지역에 블레셋 군이 주둔해 있고 지금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직 베냐민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병거만 삼만이고 군사는 바다의 모래와 같은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삼천명쯤 모였었다가 지금은 그나마도 도망하여 600여명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 그런데 이 상황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처신이 극한 대조를 일으킵니다. 

먼저 사울은 사무엘을 대신하여 아히야를 자기 옆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삼상 14:3) 

그런데 이 아히야는 어떤 자입니까?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적에 패하자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다가 이기려고 하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이사봇,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가봇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꾸중을 들은 사울이 찾아 제사장으로 세운 자가 바로 이 가문에 속한 이가봇의 형제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제사장을 세운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군사 진영이 혼란스럽게 되자 18절에 보면 아히야에게 시켜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명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짓을 똑같이 저지르게 되지요. 

이것은 무슨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참 제사장이라면 이 법궤 앞에 서는 것 조차 두렵고 떨릴 일이요,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은 지기의 필요에 따라 법궤를 이리 가지고 왔다 저리 가져갔다 합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면 법궤를 가져다가 하나님보고 도와달라 하고 필요없으면 눈앞에서 치워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누가 누구를 부리는 것입니까? 철저히 자기가 주인되어 하나님을 부리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주인된 신앙입니다. 

 

  • 이 때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든 자, 즉, 보디가드, 호위무사를 앞세워서 단독으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나타나는 행위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1절) 이요, 자기의 군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면서 블레셋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진격하여 내려오면 올라가지 말고 도망할 것이요, 만약 블레셋 군사들이 요다단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표징으로 알고 올라가자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행위는 미디안 군사들을 향해 승리했던 큰 용사 기드온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은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대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요, 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표징을 구했던 기드온의 모습과도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단 가운데 역사하시어 블레셋 군사들을 일대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14절, 15절 보십시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자절 갈이 땅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명 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여러분 지금 블레셋 군사가 몇명입니까? 셀 수 없이 많은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죽인 자는 고작 20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여금 블레셋 모든 진영과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땅이 진동하였다고 말합니다. 큰 떨림이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이런 영향력입니다. 언제 이런 큰 떨림이 일어납니까? "주의 말씀 선포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하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에 이런 큰 떨림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이지만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드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그 지역의 모든 자들을 먹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큰 떨림이 있고 땅과 하늘이 움직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 다시 사울로 돌아옵니다. 파숫꾼이 보니 블레셋 진영의 무리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합니다. 점호를 해 보니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게 합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것처럼 법궤를 가져와서 전쟁을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세워서 전쟁을 승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니까 블레셋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어도 그들 스스로 죽이고 흩어지고 하니까 사울이 뭐라 하냐면 아히야에게 "네 손을 거두라" 무슨 의미냐면 이젠 법궤도 필요없다. 이젠 우리가 이겼다...철저히 자기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법궤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승리로 말미암아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1절) 세상으로 타협하며 나갔더 자들이 다시 신앙 안으로 돌아옵니다. 23절에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벧엘의 다른 이름으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면 벧아웬은 우상의 집, 속이는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자기를 구원하여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집"이란 벧엘로 이름붙입니다. 그런데 이 벧엘이 나중에 북왕국이 갈라져 나오면서 북왕국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벧엘에 황금송아지를 세워좋고 거기서 예배드림으로 "벧엘"이란 명칭 대신에 "벧아웬"이라 이름 붙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황금 송아지로 바꾸어 철저히 세상적인, 자기 성공적인 신화를 꿈꾸는 장소로서의 기복신앙, 우상숭배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말이 벧아웬이 된 것입니다. 자기 상황에 따라 블레셋에 붙었다 하나님께 붙었다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단상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사울의 신앙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사울은 한가지 명령을 더 하는데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리"고 합니다. 이전에 이런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하거나 할 때에 태양을 멈추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기까지 끝까지 싸우게 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의 큰 오점을 무엇입니까?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사울은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으로 보고 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원수를 갚는 자기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전쟁을 치루면서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점점 더 피곤하여지고 지쳐갔습니다. (26절) 

 

그런데 이 명령을 누가 어깁니까? 바로 요나단입니다. 

"27절)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그런데 그가 꿀을 먹을 때에 함께 했던 백성 중 한 사람이 왕의 명령을 이야기하니까 뭐라 말합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을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결국 피곤한 군사들이 참지 못하고 탈취한 물건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채 먹게 됩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고 이 피로 말미암아 제사하지 때문에 이스라엘 율법은 동물들을 피 채로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잘못된 명령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백성들이 탈취한 동물들을 잡아 피채로 먹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울이 백성들의 행위를 보고 나서야 "그들이 믿음없이 행하였도라." 원문을 보면 "그들이 신의를 깨뜨렸다. 율법을 어겼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돌을 가져다가 거기서 잡아 먹게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35절) 

 

 요나단의 용기로 말미암은 승리- 사울이 흥분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제 동틀 때까지 쫓아 남기지 말고 전멸하자! (36절)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그래도 제사장이라고 하나님께 묻자고 제안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심(37절) 

 왜? 아니 다 정해좋고 마음대로 행하면서 왜 묻기는 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지 않은가? 

 이 물음은 자기 결정에 확답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므로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지를 가린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누가 뽑힙니까? 요나단이 뽑힙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45절을 통해서 반대하니까 또 죽이지 않음.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끝맺지 못한 전투) 

 

 무언가 신앙의 행위를 하기는 한다. 

 제사장을 뽑고 법궤를 가져오게 하고, 명령을 하고, 묻기도 하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가 먹으니까 이젠 다 먹게 하고, 법궤를 가져오게 했다가 블레셋 군이 스스로 흩어지니까 멈추라고도 하고 요나단을 정녕 죽으리라 했다가 백성이 만류하니까 또 그만두게도 하고... 

 

 그의 삶엔 일관성도 없고, 원칙도 없다. 

 블레셋의 전투도 "내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고 

 요나단을 죽이려는 의도도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릴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한 신앙은 철저히 자기를 위한, 자기를 향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니다. 

 

[삼상 14: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통해서도 승리를 주신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신다. 전쟁을 이김으로 사울이 행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다. 

 

(삼상 14:52)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전쟁이 나면 날 수록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요나단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참지 못해 단신으로 들어가 그들을 대적했는데, 사울의 관심은 늘 자기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우리를 통해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사명을 주셨다. 

우리가 다 완전할 수 없어서 물론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실수하고 또 넘어진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승리하는 살게 하신다. 

 

그런데 선한 의도에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과 의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정말 다른 것이다. 

사울은 신앙의 행위는 이렇게 저렇게 행하였지만 그의 의도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 자신을 향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염려하고, 자기의 원수 갚는데 앞장 서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다. 

 

 이런 때 주워지는 승리는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운 승리이다. 이런 승리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사울의 악한 의도는 점점 더 극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에 차라리 그의 생이 끝났으면 사울은 그래도 업적이 많은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악한 의도는 다음 장에 가서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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