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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시편 109편 26-31절) 

 

지난 주 설교 -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쓰시는가? 금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달은 우리는 모두 나무그릇, 질그릇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를 깨끗이 하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더럽히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다 깨끗한 그릇 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다 할 자가 없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열매이지 우리에게 숙제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때에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닌 은헤 아래서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은 시편 109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편 109편은 나 자신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설교중 하나이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지은 시이다. 시편 연구가들에게는 흔히 저주시라고 분류된다. 

다윗하면 아마도 성경의 인물 중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메시아상 - 다윗과 같은 왕, 다윗의 시대 

그는 인간관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다. 

그는 그를 죽이고자 달려드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에서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어찌 자신이 죽일 수 있겠는가하며 하나님의 손에 그를 의탁하고 두 번씩이나 그를 풀어주었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애도하고 슬퍼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당해 왕궁에서 쫓겨나 죽을 위험에 처해서도 그는 아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 슬퍼해서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그가 왕궁에서 피신하여 도피할 때에 일반 백성이었던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을 때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 아니할 지라도 혹시 그의 저주 때문에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주실까하여 작은 백성의 소리까지도 업신여기지 않았고, 왕이었지만 자기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고 씻지 못할 과오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장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그 잘못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도 뚜렷이 표현할 만큼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같은 오명을 주었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한 이후의 그의 행동을 사울왕이 사무엘에게 잘못을 지적당하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그의 중심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빼앗은 것을 모두 진멸하라. - 마치 가나안의 왕을 진멸하라 하신 것처럼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할 때에 불순종하고 좋은 것들을 감추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꾸짖고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버릴 것이라 선포한다. 그 때 사울의 반응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 범죄하였는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다. 

-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하나님이라 표현한다. 사무엘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 그런데 다윗이 나단에게서 죄를 지적받고 쓴 시- 시편 51편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소서.  

 

처음 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식한다.   

법궤가 성전으로 왔을 때에도 그는 백성이고 신하고 아내마저도 의식하지 않고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춘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 이외에 성경 어떤 인물도 이와같은 인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 

 

그는 원래 그런 성품으로 태어난 자인가? 어떻게 그는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도 다윗과 같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기준으로 시편 109편을 보면 좀 충격을 받는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이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고 적혀있다. 다윗 개인의 시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이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한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용을 좀 들어가보자.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1절) –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2-3절)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이다. 그가 사울인지, 누구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윗은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함께 읽기 거북할 정도로 저질적인 저주로 가득차 있다.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더 심해진다.  

9-15절 (봉독)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보인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7절에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된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대부분 성도의 기억 속에 잘 남아 있지 않다.  

 

어떻게 다윗은 이와 같은 시를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 기록하게 되었고, 후에 성가대와 함께 온 회중이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하였을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시를 성경에 기록되도록 허용하였을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 이토록 처절한 저주의 기도를 드려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어떤 목사가 강대상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아마 신문에 대문짝처럼 실리지는 않을까? 

이 기도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언어로 말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옷을 지어 자신을 가리고 바위 뒤에 숨는 것. 

죄인은 가린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민낯을 가린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무의식의 세계 

인간의 행동 너머에 있는 무의식적 표현 - 이드라고 하는 본능,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똑같이 식욕, 성욕, 탐욕이 인간 본성이다. 

 

사울처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의식한다. 벌거벗겨지는 것을 못견뎌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릴 것이 없다. 

진실하다는 것이 꼭 좋은 마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 속마음. 때로는 깊은 미움, 깊은 절망, 깊은 저주, 원망...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셨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고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한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다. 

 

2.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탁하는 기도

다윗은 자신이 복수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충분히 힘이 있어도 원수 갚은 것, 억울한 일을 푸는 것,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자 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도록 했다. 왜? 나도 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솔로몬의 판결 같은 훌륭한 재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죄악도 다스리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이 재판관되지 않았다. 판결의 권한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만큼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결은 정확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압살롬은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약 다윗이 그 일을 행했다면 잠시 통쾌할 진 모르지만 그의 손에는 피의 흔적이, 죄의식의 흔적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심판을 당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한 이유이다. 

 

3. 자신의 언어 속에서 똑같은 죄를 보았다. 

우리가 시편 109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다윗도 상대방 만큼이나 저주의 입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다 죄악 가운데 있다. 

부부관계에서도, 친구 사이에도, 어떤 관계에서도 갈등의 현장에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난 잘못이 하나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을 필터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다보면 상대방의 잘못이나 내 잘못이나 매한가지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나님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진실이 내어놓다보면 그 안에서 나의 죄악과 연약함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에 앞에 나를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차츰 언어가 바뀌게 된다. 진정한 내 모습을 대면하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변화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방으로부터 받아왔던 상처의 치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움이 이해로 바뀌고, 그의 언어가 나의 언어로 바뀌면서 용납하게 된다. 비로서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4.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다.

 

다윗의 시편을 읽다보면 유치하고 과장되게 느낄 때가 정말 많다. 왕인데도 늘 자신은 불쌍하고, 가난하게 표현한다. 대장부의 모습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도는 유치했지만 그의 삶은 고상하고, 그의 인간관계는 온전했다는 것이다. 

 

고상하고 거룩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고상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유치하게 기도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본 모습을 내어놓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언어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착해야 한다. 깨끗하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 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솔직하게 내 마음을 열고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 뿐이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참으면 - 몸에 병이 온다. 

남에게 말해서 풀거나, 다른 행동으로 풀면 부작용이 온다. 말이 꼬리를 물며 왜곡되고 내 앞에서는 나를 이해 해 주는 듯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또 다른 비수로 나를 찌른다.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거나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전념하면 대다수 중독이나 일탈하게 된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아픈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푸는 것이다. 필터링 없이 내 모든 언어를 들으 실 수 있는 분 앞에 내 모든 감정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난 모든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비로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 

 

아이는 밖에 나와 더러워 질 때 마다 엄마에게와서 더러운 몸을 보인다. 

그러면 몸을 닦아 주는 것은 부모이지 아이가 자기 몸을 닦을 수 없다. 

깨끗한 그릇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 보인 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래서 깨지고 상한 마음을 가진고 나오는 자의 예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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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된 성도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 새해 첫 주 - 개척예배에 주신 말씀 

무화과 나무와 성전 척결 - 교회가 맺어야 할 열매는 성령의 열매, 삶의 열매, 입술의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화평의 열매 

  • 지난 주 -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정체성 - 조각목 

가시많고 악마디 많고, 바짝말라 수분이 없는...

그런데 그 조각목의 껍질을 벗기고, 금테,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테로 우리를 싸매사 성전의 도구와 기둥이 되게 하시는 주님

껍질을 벗기고 믿음의 테를 두르자! 

 

  • 이번 주 -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도와 교회 

교회와 목회의 나침반과도 같은 말씀 

 

미국에 오게 된 배경 

신학대학원 4학년 때 - 결혼과 진로와 사역에 대해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면서 잠못이루고 있을 때, 마지막 수업과목 <교회 개혁의 역사> 시간에 방문한 봉쇄 수도원 

 

평생을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20-30년간 그 곳에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수련하는 사람들.  

 

외부에서 방문해도 한 두 사람만 면담이 가능하고 그 안에서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처음 인상 - 감옥과도 같이 무서웠다. 그리고 평생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 길이라고 여겨졌다. 왜 개신교 전도사와 목사님들이 이 곳에 와야만 하는지....

 

23년을 외부 출입없이 그 곳에서 수련하고 있다는 한 평신도 수도사와의 면담 - 목회자라고 특별히 긴 시간을 내어 주셨다. 

"저희들이 이상해 보이지요? 저희들도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개신교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듣고 접합니다탁월한 목사님들이 많고 설교를 통해 목사님들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지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물론 가톨릭 신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목사님들이 넘어지는 소리- 대개는 돈과, 권력, 그리고 여자문제로...) 

저희는 그것이 그 분들이 기도가 부족하거나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에 대한 훈련, 일상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지 않나...저희들은 평생 이곳에 있으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이 길이 모두가 가야할 길이라고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가 성도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배라면, 그 배가 바다 위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잃어버린 길을 찾는 등대같은 존재....아, 저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구나 하면서 바른 길을 찾는다면 평생의 수도생활에 가장 큰 면류관이라 생각합니다." 

 

잔잔한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지고 있었던 모든 짐들, 결혼과 사역과, 먹고 사는 일들이 그 앞에서 정말 스르르 녹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훈련이라는 말, 등대 같은 삶이라는 말이 마음 속에 깊이 박히고, 신앙생활의 긴 여정동안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야 할 길을 기준하는 하나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 말씀도 내 인생의 나침반 같은 성경 구절이다. 

 

1. 큰 집에는 

큰 집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주인 되신 집이다. 하늘나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이다. 

"그릇"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articles, 즉 재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금과 은도 가득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 중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말씀한다. 귀하고 천하게의 뜻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천한 목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당연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금그릇이나 은그릇은 존귀한, 아주 고상한 목적을 위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나, 아주 특별한 날에만 쓸 테이고, 나무그릇이나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아무 때나 쓰는 그릇이 되겠구나…. 이것이 상식적인 생각이고 또한 현실적인 해석이다. 

 

2.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전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21절) 

  •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 만약 사람이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하면 그는 거룩하게 되어 고상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고, 주인에게 유용하며, 어떤 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은 귀한 용도로 고상하게 쓰여지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은 하찮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그 재료에 상관없이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내가 내 재료가, 내 달란트가, 내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를 쓰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믿는가? 교회에서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만 진심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면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라고 말씀하십니다. 

 

  • 성경에서는 일관적으로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씀을 내 삶 속에서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왜 힘든가? 

 

사람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바라고 행해왔던 교육은 언제나 “큰 그릇이 되게 하는 교육” “금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만큼 1등을 좋아하고 최고를 좋아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올림픽 나가서도 금메달 아니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선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늘 남을 넘어서도록 교육받아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몇달 전 서울대 대학생이 아무리 공부해도 금수저를 달고 태어난 자들을 이길 수 없다 며 비관하며 자살한 사건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성경은 금그릇이 되어도 천히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이 되어도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증거한다. 그릇이 좋다는 것은 능력이 많다는 것이다. 스펙이 좋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재료가 좋다는 것이다. 금수저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라 할지라도 천한 목적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50대 재벌 중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는 가정- 1/3도 안된다. 다 혼외 자식, 이혼과 재혼.

잘 배운 검사, 판사, 기업인, 정치인- 정말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고 있는 것일까? 

 

바울, 예수, 12제자- 세상적으로 실패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귀하게 보신다. 

 

물론 기독교는 복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으로 창조하시고 부르셨다. 그런데 그 복은 성경에서,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부자가 되며,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보다는 애굽이, 바벨론이, 로마가 훨씬 복있는 민족이었을 것이다. 

 

시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 1: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8복을 이야기하실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 (마 5:1-10)이 복 있는 자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시편의 복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복을 하나님 말씀하신 복이라고 뚜렷이 증거하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예수 믿었더니 병이 나았더라, 가난에서 해방되었더라. 큰 차를 몰게 되었더라. 그건 그냥 부스러기처럼 따라오는 부록이지 중심이 아니다. 

예수는 그런 것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 그런 것을 축복이라고 하면 복음을 질 나쁘게, 값싸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세상의 기업가들이나 자본자들이 더 잘 베풀수 있는지 모른다. 

 

축복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찾고자 하는, 회복하고자 하는 열매이다.  

죄로 물든 나의 심령,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하늘나라의 심령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축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간증할지는 몰라도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그 분을 닮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분을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름을 팔고 예수를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닮고 예수를 따르는 자입니다.  

 

나폴레옹 예화) 네 이름을 바꾸던가, 네 삶을 바꾸어라. 

 

2. 두 번째의 반전은 20절의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의 이런 것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 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영어로 표현하면 “from the latter” 가 의미하는 것이 16절에서부터 19절에 나타나는 망령되고 헛된 것을 말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것에서부터 떠나라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전 절에서 나타나는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을 말하는지 분명치가 않다. 대부분의 해석은 내용상으로 16절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 우세했습니다. 그런데 문법상으로 보면 이런 것, 영어로 from the latter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시체를 받습니다. 그러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네게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에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면 거룩하게 되고,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쓰임 받을 것이고, 어떤 선한 일에 대해서도 준비할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성막에서 하나님은 성막 안의 언약궤를 비롯한 중요 부분을 반드시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명하십니다. 이 조각목은 바로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시 많고 상처많고 쓸모없는 나무가 조각목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는 흙으로 빚어서 만든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리가 모두 질그릇이요 나무그릇이다. 조각목도 질그릇의 특징은 무엇인가? 모두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조각목을 성막의 도구로 쓰실 때 거기에 금을 입히고 금 테를 둘러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입히워 사용하시듯, 질그릇에 보배를 담그시듯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영광스럽게 사용하신다.   

 

예1) 다윗은 초라한 나무그릇, 질그릇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자신을 깨끗이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금으로, 은으로 덧입게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사울은 금그릇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자 그의 좋은 체격, 인물, 자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버림받아 저주받은 왕이 되었다. 

 

2012년 담임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한 안수집사님이 교회를 나가시면서 정목사는 목회 못할 사람이다. 사람 상대하려면 때도 묻고, 흙두덩이에도 뒹구를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순진해서 사람 상대할 줄 모르고 성경은 알지 몰라도 현실을 너무 모른다. 

 

그떄 그 말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성도가 늘지 않고 떠나가는 성도들이 생길 때마다 이 말이 귓가를 맴돌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도 흙두덩이에서 뒹군 흔적이라도 좀 보일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순진한가? 어리석은가?  고통스럽게 이 말이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었다. 

 

제작년에 10여년 만에 한국에 들어가 대학 친구들(일반대 나온 친구들)을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 말을 이야기 했더니, 때도 묻고 사람 잘 상대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너가 성도라면 흙투성이면서 사람만 잘 다루는 목사를 존경하겠냐? 하며 오히려 저에게 질문했다. 그 친구를 통해 흔들리는 내 방향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트레이시제일교회는 세상사람들이 보는 제일 number 1 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을 수 있는 number 1 교회가 되길 원한다. 금그릇, 은그릇은 하찮은 일 시키면 자존심 상해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슨 일이든 내가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깨끗한 그릇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금그릇, 은그릇을 만드는 교회가 아니라 조각목과 질그릇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 가진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그릇 되어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맘껏 쓸 수 있는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길 원한다. 그런 소망을 가진 자마다 함께 찬양하자.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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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교회 (출애굽기 25장 10-16절)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쨰내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지난 주 설교 혹시 기억나십니까? 

무화과나무의 저주 - 왜? 열매가 없기 때문에...

무화과 나무의 앞 뒤 -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 

즉,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열매맺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사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 - 

성령을 통한 인격의 열매, 빛된 삶의 열매(행위), 입술의 찬양의 열매, 의(바른관계)에서 나오는 화평의 열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는 죄의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 오늘은 교회의 구성원 성도, "나"가 포함된 성도의 정체성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오늘 다룰 중심 단어는 조각목입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27장 - 성막 안의 속죄소 (지성소)에서부터 성막의 문과 기둥, 뜰까지 성막에 대한 모든 설계

그 중심 재료가 되는 것 - 조각목 

25-27장까지 대략 9번의 조각목이 등장한다. 

 

  • 여러분이 설계사라면 성막을 지을 때에 가장 먼저 어떤 것을 언급을 할까? 

아마도 대개는 먼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서 전체의 모양을 구상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구상을 할텐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제시하신 것은 지성소에 있을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바로 성막의 기초고, 설계이고, 핵심이기 때문이다. 

  • 조각목은 언약궤의 중심 재료였을 뿐만 아니라 , 진설병을 두는 상, 성막의 널판, 기둥, 제단 등 성막의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사용되는 주요 재료였다. 

조각목이라 번역된 이 나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성경과 KJV만은 이를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하고 있다. 같은 종이지만 아카시아나무는 잎이 길고 넙적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중동지방의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싯딤나무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게 잎이 작고 꽃이 피지 않는다. 

흔히 라스베가스나 유타를 여행할 때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지만 앙상하게 있는 가시나무가 바로 싯딤나무이다.  

건축재료로서 이 조각목은 나무의 기둥도 두껍지 않고 가지는 가시가 많아 성경에서 성막을 만들 때를 제외하곤 목재로서 거의 사용할 수 없는 나무다. 그래서 디윗궁이나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는 이 조각목 대신 당시 가장 좋은 나무였던 백향목을 재료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궤를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다른 것은 백향목이나 금속을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만큼은 여전히 조각목을 사용케 하셨다. 

한동안 성막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일으키면서 성막의 하나하나의 재료나 모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가지 재료 중에서 이 조각목은 특히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은혜가 크다. 

 

  • 조각목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 보자. 

1.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면 가시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특히 바람불고 고요한 밤에는 그 소리가 더 시끄럽다. 

2. 사막에서 자란 조각목은 수분이 부족해서 바짝 말라 있고, 그 결과 가지가 앙상하다 못해 비틀어져 있는 나무가 많다. 가시가 많은 것도 모자란 수분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3. 조각목은 또한 모래와 바람 등 사막에서의 험한 환경으로 가지가 곧지 못하고 중간 중간에 악마디가 많아 뿌리로부터 진액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 들어보니까 괜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가? 맞다. 조각목은 바로 우리 인생을 닮은 나무다. 

1. 우리 또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가시투성이의 존재가 되었다. 

평안할 때도 문제지만 바람불고 인생의 밤이 되면 이 가시는 시끄러울 정도로 서로를 찔러댄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모난 성품, 쓴뿌리 투성이인 인생인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까지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모나게 찔러대며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른다. 남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도 를 찔러서 상처투성이를 만들 때도 많이 있다. 

2.  수분이 말라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은 은혜를 잃어버린 인간의 영적 갈증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르다. 세상은 영적 갈증으로 목마른 곳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지식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도, 그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더 우리를 목마르게 한다. 영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 영적 갈증을 해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이유는 여전히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3. 가지가 곧지 못하고 악마디가 많아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기 못한다는 것은 우리 성품에도 이 악마디가 많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고립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이 많은 성품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들이 무슨 권면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주려 해도 세상에서 너무 많이 얻어맞고 속아서 그런지 교회에 와서도 ‘그것이 사실일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라는 진액을 순수하게 공급받지 못한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른다. 물론 믿지 못하게 만든 교회나 목사, 성도들의 책임도 있지만 구약의 모세나 다윗, 그리고 예수님조차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인간 안의 악마디가 말씀을,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타당한 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완악함이 악마디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고립해 성장을 방해한다. 

 

  •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다른 나무가 아닌 바로 이 쓸모없어 보이는 조각목으로 교회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듯 백향목을 쓰지 못하셨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내 전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조각목 가지고 만들어라 하고 아얘 율법으로 정하셨다. 

 

1. 조각목처럼 남에게 계속 상처주고 시비하며 찔러대는 근성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교회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담은 그릇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성전 기둥으로 쓰임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2. 하나님께서 말라비틀어진 조각목을 성막 건축 목재로 선택하신 것은, 사막의 조각목과 다름없는 우리 인간이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3.  악마디가 많아 진액이 공급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언약궤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 어떻게 조각목은 성전의 도구가 될 수 있었을까? 

1.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해야 비로소 은혜가 임한다. 

정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소리: 이 교회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다 비정상이다. 다 상처투성이다. 이 말은 자신은 정상이고 다 괜찮은데 남들이 다 이상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백향목인데 남들은 다 조각목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의 실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은혜도 모르고 구원의 진리도 모른다. 늘 자신이 낫기에 축복도 더 받아야 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못하기에 혹시라도 잘 되면 이해하질 못한다. 

그런데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러기에 예수의 은혜가 갈급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바로 예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조각목임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 나 자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못나고 어리석어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껴본 사람만이 살려는 본능으로 주님을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 하듯 하나님을 찾는다. 난 다 괜찮으니까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 이 부분만 좀 도와 주세요. 이 문제만 좀 해결해 주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성형수술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바꾸기 위해 오셨다. 조각목을 성전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바뀌어야 할 조각목들이다. 

 

2.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한다. 외식과 위선, 남들을 의식하는 것, 남들과 비교해서 교만하던가 열등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 모두 나 라는 껍데기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한다. 하나님께서 내 울타리를 깰 수 있도록 말씀이 날 부술 수 있도록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조각목을 소용에 맞게 치수대로 잘라 쓰듯,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각 도구마다 한 규빗 반, 어떤 것은 여섯 규빗, 규격이 있는데, 난 세 규빗이니까 그대로 쓰시오 하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무엇에도 쓸 수가 없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한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한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이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모세도 기드온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못해요 했지만 그 떄마다 하나님은 내가 할 것이다. 너는 그냥 나만 따라오라 하셨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할 때 두려움이 앞설 때가 정말 많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신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3. 금테를 두르고 금 고리를 걸어야 한다. 

 조각목을 언급할 때마다 함께 같이 등장하는 것이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를 달라는 것이다. 

 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곧장 금테로 싸야한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이다. 또다시 조각목의 특징으로 돌아가기 전에 껍질 벗긴 조각목은 바로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를 걸도록 했다. 

 순금으로 싸라는 것은 예수 안에 있으라는 것이다. 믿음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 금고리를 걸라는 것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 따라 살라는 것이고, 또한 성령과 함께, 그리고 성도들과 형제들과 함께 거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팅긴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한댜. 그리고 예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협력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교회 

  • 제사장, 레위인, 왕이 중심된 교회: 세습되고, 폐쇄적이며, 구별된 존재들 

 

예수님의 제자

  • 갈릴리 어부, 새리, 여인들, 이방인들, 병자들 
  • 신약의 교회 - 어부들이 사도가 되고, 성령받은 여인들이, 이방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된 교회

아수라장- 그런데 성령 안에서 연합하고, 사랑하고, 로마를 무너뜨렸다. 로마의 왕과 귀족들을 변화시켰다. 

조각목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 받아서....

 

  • 결론 

성도된 우리는 내가 조각목이듯 서로 조각목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조각목과 같은 인생들을 부르셨다. 

그렇기에 때로 교회에서 찔리고, 상처나고, 쓴뿌리가 보이고, 악마디같은 근성을 경험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떄로 저를 보면서도 실망할 수 있고, 믿었던 믿음의 선배나 동료들에게도 실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때, "교회가 왜 그렇냐? 성도가 왜 그렇냐?" 그렇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또 그렇기에 교회가, 주님이 필요함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조각목 같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우리의 껍질을 벗겨 위선과 외식을 벗고, 주님 앞에 진실해야 한다.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테를, 성령의 테를, 그리고 그 위에 성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주님은 조각목같은 우리를 중심에 둔 교회를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그 분의 피로 우리를 싸시고, 그 피가 금같은 믿음이 되어 우리의 모습을 예수의 뜻대로 사용하신다. 그런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그렇게 조각목같은 우리를 통해 세워져 가는 트레이시 제일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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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12-14절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 

 

  • 11장의 개요 -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베다니에 갔다가 중간에 우리가 오늘 다룰 무화과 나무 사건이 나오고 곧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성전 척결 사건이 등장하고 마지막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성전에 대해서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한다,  

 

권위라는 것은 영어로 "authority" 결국 누가 이스라엘의, 누가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냐를 두고 대제사장과 예수께서 대결하는 것이다. .

 

[막 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주님은 성전에 머물지 못하시고 베다니로 와서 주무신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마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 촌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남매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예수님이 그 가난한 마을 베다니에 가셨다. 그것도 최소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한꺼번에 열세 명을 대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예수님은 한 끼라도 부담을 덜어주시려고 아침도 드시지 않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길을 나선다. 아침을 거른 상태에서 예루살렘까지 3km정도를 걷게 되니 12절에 보니까 예수님이 시장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지나가시다가 무화가 나무를 본 것이다.  

 

  • 베다니에 가신 이유

왜 번거롭게 이렇게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베다니를 왔다갔다 하셔야 했을까?

예루살렘에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곳에 주님이 머무실 거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주님은 성전부터 찾으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으로 직행하신다. 

성전은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관심은 성전에 있었다. 그런데 성전에 주님이 거할 거처가 없었다. 

 

  • 무화과 나무 

무화과 나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전 척결의 사건 사이에 삽입된 별개의 사건인가? 하나의 주제를 가리키는 사건인가?  문맥을 통해, 그리고 그 단어의 용도를 통해....(나다나엘-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다) 

 

당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흔한 나무여서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었다. 무화과 나무는 유대 땅에 널려 있었고, 길 거리에 있는 무화과 열매는 누구든 따 먹을 수가 있었다. 시장하신 예수님도 무화과 열매로 식사를 대신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나무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통 뚜껑을 열었는데, 밥이 없는 것과 같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밥통을 열었는데...그 실망감이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1:2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는 잎만 시들해지고 줄기만 마른 것이 아니라 뿌리째. 아예 뿌리째 말라버린 것이다. 

 

아니, 아무리 열매가 없어서 실망하셨다고는 하지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은 아직 무화가의 때가 아니라고 까지 설명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상했던지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한다. 마태복음에 보니까 이 구절은 의문문으로 어찌하여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까?하고 묻는 구절로 나온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이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기적은 남을 살리는데만 사용하셨다. 본인을 위해서는 어느 기적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실 때에 마귀가 떡을 가지고 와서 돌로 만들어 먹으라 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배고픔에 연연치 않으시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하시고 배고픔의 시험을 이기셨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배가 고파서 때가 아닌 무화과의 열매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니 곧 뿌리째 말라버린 것이다. 이것이 표면적인 이 구절의 내용이다.   

 

순식간에 무화나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 놀랍기도 하고 또 제철이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행위 또한 이상했기에 질문한 것이다. 

 

어떤 의도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단지 주님이 배고프신데 배를 채울 수가 없었기에 화가나서 아직 제철도 아닌 나무를 죽기까지 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의 문제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이다. 자신이 배가 고파서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에게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혹은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 성전은 화려해지고, 성전에서 매일같이 제사가 드려지고, 성전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잎사귀 뿐이었던 것이다. 참 열매없는 형식만 남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모습이 바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지자 마자 관심을 가지고 돌아본 것이 바로 성전이다 그런데 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도저히 그 곳에 머물수가 없어서 날이 저물면 베다니로 피신하셨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신다. 도저히 주님이 머물 수 없게 되어 버린 성전. 왜?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화화 나무 사건을 사이로 두고 그 가운데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성전 정화의 사건이다. 그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그 이면에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 먼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이 더럽혀지게 된 이유- 처음엔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아니 이방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까지 그들은 예루살렘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제물, 양과 염소와 같은 가축, 성전세....그런데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로만 납부...각 지방마다 화폐의 기준이 달랐다. 

오는 길에 제물은 상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기 위해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에 환전상과 장사치를 허락한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 같은 절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만 백만명 이상- 환전이나 매매를 통해 이루는 수입이 어마어마...-> 결국 이 수입을 놓고 제사장들과 세금을 걷는 관리들, 장사치들이 서로 뒤엉킨 이익집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였다.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어지고 있었고 그 곳에서는 수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도, 그 분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그들의 전통이나 고집하며 주님을 오히려 죽이는데 앞장을 섰다.  

 

그래서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로 들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성전이라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말라버릴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경고대로 이스라엘은 황폐한 시기를 보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같은 심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만 해당하는 것일까? No! 

 

(마 7: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 구절은 교회가, 성도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의 때에 세상으로, 사탄으로 넘어갈 수 밖다는 심각한 경고를 한다.  

 

[계 13:6-계 13:10]

(계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계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계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그 때에 사탄이 수많은 성도들을 미혹해서 이기게 되고 땅에 속한 자들을 지배 할 것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때에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되듯 바르지 못한 교회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그리스도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심지어 교회와 성도들 마져도 무엇이 잎사귀이고 무엇이 열매인지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무성한 입사귀가 뜻하는 것과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가 우리 신앙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혼동이 일어나니까 신앙생활도 혼동스러운 것이요, 목적이 뒤틀리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내 삶에 열매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가 이룬 성과에 맞추어져 있다. 공부해서 그 만큼 성적이 나와야 열매가 있는 것이고,  일하는 자에게는 그 만큼 소득이 있어야 열매를 거둔 것이다. 농사 짓는 자에게는 그 만큼의 소출이 열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신앙생활의 열매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앙 생활을 통해 거둔 내 소득, 내 성과를 먼저 생각한다. 내가 신앙생활해서 얼마나 부유하게 되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열매는 숫자와 업적과 함께 합니다. 교회의 열매를 얼마가 모이는지, 교회 재정은 얼마가 되는지 모든 것이 숫자와 이익으로서 집계가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본 열매와 무성한 잎사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삶의 열매는 무엇이고, 잎사귀는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고, 또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바른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고 잎사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무성한 잎사귀입니까? 

  • 성전의 주체: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지어가고 있는 성전이었다. 그 때의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훨씬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지게 되는데 그 목적은 성전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목적이 하나요, 로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로마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세상의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 사람 수: 예루살렘 성전은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거기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고, 오히려 넘쳐났다. 아이들과 여인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부정한 자들이나 병자들의 출입은 제한 되었다. 

 

  • 재정: 또한 그곳은 수입이 넘쳐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받은 제물은 가난한 자들에게 되팔아져 또 부정한 소득을 거두었고 성전세를 환전하는 것도 그들의 마음대로 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잎사귀의 모습이 확실해 집니다. 

교회의 크기, 교회의 사람 수, 교회의 제정....이런 것들이 바로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교회의 열매를 교회 크기, 사람 수, 그 교회의 제정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은 잎사귀이지 열매가 아닙니다. 

 

말로는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결국 교회의 건강함의 판단 기준,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의 기준은 그 교회 성도수, 건물, 재정...들을 바라봅니다. 

성도들도 그렇고 목회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딜레마에 빠지고 그런 것에 만족이 없을 떄에 늘 불안하고, 낙심되며, 남들로부터도, 스스로도 고민하게 됩니다. 

80-90년대 -교회 성장 연구소

그 전제 - 바르게 믿으면 부흥한다. 그 부흥은 물론 숫적 부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숫자가 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제를 반박하는 통계와 결과들이 더 이상 그 전제를 주장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서 제안된 이론은 무엇입니까? 

어릴적부터 청소년때까지는 밥을 먹고, 운동을 하면 키가 자라고 몸무게가 자랍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아니 그 때는 더 자라면 비만이 됩니다. 오히려 살을 빼는데에 집중합니다. 

그때 부터 중요한 것은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여기서 찾고자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예루살렘 성전에게서 찾고자 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한 답은 성경을 좀 두루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열매의 첫번째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1)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 성품의 열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겉모양인 잎사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직분을 받았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판단하는 것입니이다.  성령의 열매는 외적으로 여는 열매가 아니라 성품의 열매요 삶의 열매입니다.  

 

2. 빛의 열매 - 행실의 열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다. 또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빛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 빛의 열매는 우리의 행실로 나타납니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행실이 빛의 열매입니다. . 

 

3. 의의 열매  - 화평의 열매, 의의 열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9)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야고보 사도는 여기에 덧붙여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을 심는데, 그때 맺는 것이 의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에게 의의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공동체를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불화를 주고,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킨다면 그 사람은 의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다.  

 

4. 입술의 열매 (히 3:15)  - 말의 열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5. 회개에 합당한 열매  - 회개의 열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아니, 하나의 열매도 맺기 어려운데 이런 다섯가지 열매를 어떻게 맺습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난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열매맺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무진장 애써야 되는가? 

 

(막 11:22)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제사장과 서기관들, 장사치들, 환전상들이 그렇게 성전 안에서 사리사욕을 탐하고 욕망에 눈이 멀었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돈을 더 의지했고, 권력을 의지했고, 자리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당장 이익 앞에서 말씀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자기 당장 앞의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삶의 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행위가 기도이다.  

 

(막 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다. 기도해서 구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기도가 안된다? 왜 기도가 안되는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의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말씀- 목회자로서의 내 삶을 붙잡아주는 말씀이자 현실에서 나를 늘 갈등하게 만드는 말씀. 

트레이시 제일교회 

코로나 중심의 때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여는 교회

건물 중심, 주일 중심, 목회자 중심이 아닌 개인이 교회가 되기를 목적하는 교회 

 

교회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 반석: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는 고백 (UNDERSTANDING이 아닌 DOING, EXPERIENCING이다) 
    • 마 7:24-27 -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저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모래 -흙: 먼지 -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육체가 생령이 된지라. 
    • 성령이 없이 육신으로만 지은 집, 헤롯이 지은 집, 인간의 힘과 숫자로 채워진 집- 무너진다. 

 

성도가 교회가 된다는 것 -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아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 그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자 

감정에, 상황에, 욕망에 흔들리는 신앙 - 모래 신앙. 

 

개척- 시작, 조급해하지 말자. 그리고 숫자에 흔들리지 말자. 

내가 복이 되면 그 복은 주위로 흘러 넘친다. 

내가 복이 되지 않으면 자꾸 숫자에, 재정에, 환경에 의지하게 된다. 

숫자와 재정은 잎사귀이다. 잎사귀가 아무리 많아도 열매가 없으면 말라 죽는다. 

열매는 성령의 아홉가지 성품의 열매요, 빛이 되는 삶의 열매요, 우리 입술에 원망과 불평이 아닌 찬양의 열매요,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회개의 열매이다. 열매맺는 교회가 되자. 열매맺는 성도가 되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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