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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10-13 해와 달과 같은 빛이 되어

 

(아 6:10)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

  • 아가는 1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이 그 핵심입니다. 그리고 5장부터 8장까지는 다시 거듭되는 것입니다.
  • 술람미란 이름의 뜻은 '평화'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신랑 솔로몬도 '평화'라는 뜻입니다.
  • 마찬가지로 아침 빛, 달, 해, 깃발 세운 군대: 모두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킴과 동시에 그의 몸된 교회, 즉 성도들 하나 하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된 성도를 교회 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되게 하는 것은 오직 그 분과 연합되었을 때입니다. 순전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오직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만 향할 때에 우리는 주님이 가지신 주님의 성품에 연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 또한 빛과 달과 해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첫째날 이루어진 사역. 혼돈과 공허한 세상, 흑암에 둘러싸인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서 열리는 첫 사역의 시작 
  •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또한 우리를 세상의 빛이 되도록 부르셨다. 
  •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예수 닯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연합할 때에 우리 안에는 주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주님이 받으실 찬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때에 주님이 군대같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된다. 

 

(아 6:11)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 동산지기, 포도원 주인, 목자
  • 호도동산: 호도는 길르앗의 레바논에서 기르는 작물. 레바논은 천상의, 하늘과 땅의 공간에 있는 공간. 
  • 골짜기의 푸른 초목: 세상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자, 고난 가운데 피어 있는 열매, 광야 가운데 피어나는 열매, 주님께서 찾으시는 열매 
  • 포도나무에 순이 났는가? 주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 오직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라야 순이 날 수 있는 것. 그 가지에 생명이 열렸는가? 생명나무로부터 공급받고 있는가!  
  • 석류나무에 꽃이 피었는가? 석류 안의 씨앗에 과즙이 맺혔는가? 씨앗(말씀)에 붉은 과즙(십자가의 보혈)의 열매가 열렸는가? 
  •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자들을 찾아나선다. 
  • 두루 두루 동산을 거니시면서 주님의 자녀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찬란히 피어나고 있는지, 주님으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아 꽃을 피우고 있는지, 또한 주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들이 열매 맺고 있는지 살피신다. 

 

(아 6:12)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에 이르게 하였구나

  • 내 귀한 백성- 하나뿐인 나의 완전한 자 -> 주님께로만 향해있는 순결한 영혼. 
  • 내 귀한 백성의 수레- 수레는 우리 마음 속의 보좌입니다. 대부분의 수레에는 (예루살렘 여인들같은) 자기 자신이 앉아서 삶을 주관하고 있지만 이 술람미 여인의 수레는 주님을 위한 빈 수레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함입니다.
  • 이 수레에 이끌리어 주님은 여인의 수레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 마음 속 깊은 보좌를 비워두고 주님을 바라는 자에게 주님은 부지중에도 우리 보좌에 좌정하신다. 우리의 주가 되신다.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다시 신랑과 하나가 된 술람미 여인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미 술람미 여인의 중심에는 주님으로 다시 충만해져 있고 그녀의 보좌에는 왕되신 주가 앉아 있습니다. 

그녀와 함께 왕을 찾으러 왔지만 예루살렘 여인들에게는 왕도, 술람미 여인도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함께 왕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남은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왕은 그녀들에게 어찌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인을 보려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라반의 집을 떠나 에서를 만나기 전에 두려움에 떨던 야곱이 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천사- 하나님의 군사라고 여기고 에서를 향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짐 

그 위로자, 큰 도움을 약속받고 기뻐하는 여인들 - 술람미 여인을 통해 진정한 교제, 진정한 신앙에 대한 본을 따라 그녀를 찾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향한 메시지 

 

주와 주의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많은 양떼를 먹이시는 주의 동산, 주의 사역,

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춤 - 상대와 함께 호흡을 맞추고 걸음을 맞추는 것 - 

주와 동행 -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걸음을 맞추는 것. 

 

 

묵상을 위한 질문) 

1. 항상 주님만이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마음도 주님이 와서 앉으실 가장 귀한 수레가 준비되어 있는지....

 

2. 내 마음, 내 삶의 포도원은 잘 관리되고 있는가? 포도원의 주인(주님)으로부터 진액을 공급받으며 나는 청지기로서 나의 삶과 영혼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과즙이 열리는가? 

 

(찬양) 밫울 들고 세상으로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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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4-9 그 낳은 자가 귀중히 여기는 자 

 

(아 6:4)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디르사'란 므낫세 지파의 한 성읍으로서 '즐겁다' 또는 '기뻐받을 만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을 정도로 당시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졌고 이스라엘 왕들의 별궁을 두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순전하고 정결한 사랑을 통해 주님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처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름다운 존재인 만큼 사탄에게는 무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심으로 원수들은 우리들로부터 도망합니다. 평생 싸우면서도 한 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 자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서 자연스레 엄위한 군사가 됩니다. 

 

(아 6: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아 6: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4장 1절부터 나오는 신랑의 찬사와 거의 동일하지만 비둘기 같은 눈을 넘어 그녀의 눈은 더욱 강하고 순결하여 한 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신랑의 마음을 뺴앗습니다. 

누군가 마음에 들어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눈이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얼마나 놀랍고 또 가슴이 두근두근 하겠습니까? 

옆에 있으나 멀리 있으나 항상 주님만을 바라다보는 눈- 주님을 놀라시게 하는 눈. 우리의 시선이 그렇게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담은 눈이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강하고 순결하여 이토록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인의 머리털은 풍요와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여인의 머리털이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다는 표현은 풍요와 평화를 느끼게 합니다.

신부의 이는 희고 깨끗하며 쌍태의 양처럼 가지런하여 아름답게 보입니다. 

양식(말씀)을 소화(이해)하여 저장(기억)시키는 지체. 이해와 기억이 정결케 되어 혼동스럽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말씀 안에서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삶이 혼동하지 않고 단순하고 진실되이 말씀과 하나가 된다. 

또한 말씀은 곧 열매를 맺어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 6: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석류한쪽 같은 뺨: 석류는 많은 씨를 가지고 있는데 모두 한 쪽, 한 외피 속에 들어 있다. 모든 씨(말씀, 생각)들이 정결하고 온전한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 재정비 되어 있는 것이다. 

석류의 껍질은 밝고 붉은 색조를 띠고 있지만 안에 있는 열매와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석류의 아름다움은 바깥 열매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선명하고 진한 맛과 색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속이 아름다운 자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아무리 아릅답게 포장되어 있어도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아 6:8)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아 6:9)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신랑에게 속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 분을 아는 정도는 각각 다릅니다.

  •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 1장 6절)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 형제들의 시기를 받은 자 -> 누가 생각나는가? 요셉처럼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형제들의 미움을 받은 자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귀중하게 여겨 아들들에게 시기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더 나아가 그 낳은 자는 육신적 어머니를 넘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귀중하게 여기신다!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 보통 아비의 자식으로 불리는데 왜 어머니의 외딸이라 불렀을까? 

1절부터 형제들을 대할 때마다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의 자녀로만 불린다. -> 

어머니의 외딸 ->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님의 신부로서, 또한 친구로서 이젠 떨어질 수 없는 그 분과의 한 가족임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겠는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칭찬과 존귀함을 얻게 됨. 

구약의 시대에 이토록 칭찬을 들을 사람이 있었겠는가? 

오직 왕에 대한 순결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인해...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 역시 완전한 자가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고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는 주 안에서 완전하다. 

 

묵상 질문) 

1. 내 삶, 내 존재가 주가 거하시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고, 주가 나와 함께 나는 주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된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자. 그 말의 은혜를 깊이 느껴보자 

 

2. "난 부모로부터 귀중하게 여기는 자"라는 말을 생각하며 내 인생을 돌아보자. 그 육신적 부모보다 "내 하나님이 날 정말 귀하게 여기는 자"라는 말을 곱씹어보자. 그 말의 은혜를 깊이 느껴보자. 

 

(찬양)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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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1-3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아 6:1)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아 6:2)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아 6:3)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1. 달라진 예루살렘의 여인들 

1절: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아내의 찬사를 들은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조롱하던 말(5장 9절)을 거두고 함께 남편을 찾아나서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도 그 남편이 얼마나 사랑받을 만하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언자 사람이 움직이는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을 지켜 볼 때... 

술람미 여인과 왕이 서로 함께 할 떄- 부러워할지언정 그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없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잃어버린 자신의 주를 찾아헤멜 떄에 주위의 여인들은 5장에서 "네가 사랑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를 그토록 찾는가?"하면서 그녀에게 다가옵니다.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주를 설명하며 "이게 내 사랑하는 자요 내 친구다"라고 하자 함께 그를 찾으러 나섭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여인들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하며 함께 주를 찾기 위해 따라자서고자 합니다. 

 

세상: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내가 얼마나 높아지고...그럴때 전도가 되고, 남들이 부러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언제 사람들이 감동받는가? 참 사랑의 모습이 이루어질 때.. 

술람미 여인: 자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분에 대한 설명, 묘사를 함. 이것이 전도이다. 

우리의 태도: 내가 그 분을 믿고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전도를 할 때에도 오직 "나의 모습"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부족하여도 온전하신 분은 그분이다. 그 분을 증거하고 그 분을 사랑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 분에 대해서 궁금함을 느끼고 찾아나선다.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라는 말을 보면 오히려 예루살렘의 딸들이 더욱 적극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기꺼이 나설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녀들에게 있어 술람미 여인의 신랑인 솔로몬을 찾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와 함께 찾으리라'라는 말에서 '함께'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서로 같은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주, 참된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1) 사랑하는 자와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 속하였고'라고 하여 자기의 사랑의 감정을 설명하였고, 이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라고 하면서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즉 서로가 사랑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사랑하는 자를 소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이지만 신앙생활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함께 거할 때에 성령의 열매가 일어나고 나의 삶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주님 안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정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오해하기 쉬운 것. 

1. 내가 그 분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나만 열심히 하면 그 분은 언제나 나를 받아주시는 분. 그 분은 상수, 변수는 항상 나. 

-> 아니다. 내가 문을 열어도 그 분이 침묵하실 때에 우리는 주님의 부재를 통해서 더욱 주님의 주권을 이해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 분이 오실 때에 오시면 원하실 때 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2. 난 없고 오직 그 분이 날 다스리는 것. 

-> 그 분은 내 자유의지를 꺽지 않으신다. 강요치 않으신다. 하나하나 나의 자원하는 심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내 의지, 상황을 넘어서는 그 분에 대한 신뢰는 나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꺾는데 있는 것이지 정복당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스스로 내 의지를 정복함으로서 그 분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 부인, 자기 포기: 이것은 스스로 부인하고, 스스로 포기하는 자원하는 순종함이지 결코 주님이 나를 정복하지 않으신다. 

 

2) 신랑이 하는 일에 대해 그녀는 표현하기를 '양떼를 먹이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양떼를 먹이는 일'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입니다. 양떼를 먹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위치를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는 목자로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한 마리의 양만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양들은 모두 그의 보살핌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목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인류의 목자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앞에 나아가는 자마다 푸른 생명의 양식으로 배를 채울 것이며, 풍요로운 삶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백합화

백합화처럼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생활을 상징하며 또 하나님의 돌봄 아래 사는 믿는 이들을 상징하고 있다.  

백합화 같은 교회 생활은 보잘 것 없는 아주 낮은 위치의 사람이며, 이러한 사람을 그리스도는 타락하여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귀하게 여긴다.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은 너무도 중하고 귀한 표현이다. 다른 누군가를 통한 것이 아닌 내가 만난 하나님, 나를 구워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그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은 결코 아니다. 

은사가 많고, 카리스마가 많은 몇몇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증거하며 마치 자신만이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한 것 처럼, 자신에게만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말한다. 

나의 하나님은 또한 우리 하나님이요, 당신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 크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양 떼가 되는 것이다. 

 

묵상질문) 

1. 당신의 신앙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 함께 잃어버린 길을 찾아 나설 이가 있는가? 누가 나와 함께 주를 향한 여정에 함께 할 것인가? 

 

2. 주가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듯이 나도 다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주의 동산에서의 사역을 존중하는가? 나만의 주가 아닌 우리 주, 너의 주로서의 주님의 크신 사역을 기뻐하고 있는가? 

 

찬양) 참사랑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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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5:7-16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 5:7)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1장에서 술람미 여인이 신랑의 거처를 묻자 사람들은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말했다. 

주님을 따르는 또다른 신앙인들의 길을 따라 (양떼들의 발자취) 올바른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3장에서 또다시 신랑을 찾아 헤멜 때 신부는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3:3)를 주저하지 않는다. 

성안의 파수꾼, 즉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따라가 신앙의 길을 묻는 것이다. 

주님의 부재의 순간에 신앙의 동료들이나 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자들은 우리의 길을 찾도록 인도한다.

그런데 때로 그들마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위로하러 왔지만 오히려 욥의 마음을 쳐서 상하게 하듯이 때론 신앙인의 위로나 권면이 더 깊은 영적 상처를 발할 수도 있다.  

"성을 지키는 자들에 의하여 상처 입은" 자신의 모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고통을 줄 수가 있다. 그런데 때로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을 맞게 하신다. 

이젠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요구하시기 위함이다. 신앙의 깊이에 따라 주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깊은 친밀함을 요구하신다. 

 

(아 5:8)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예루살렘 딸들은 누구인가? 주님 곁에 머문다하지만 허영심과 이기심으로 자신만을 치장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찾아가서 부탁하는 장면은 언뜻 이해가지 않는 장면이다. 

그들은 신랑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정작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었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 이었으며, 자신을 힘들게 한 자들이 아닌가? 

보통 내가 아플 때에, 고난 당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숨긴다. 더군다나 나를 힘들게 한 자 앞에서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을 주의 부재의 순간, 자신의 허물을 가장 잘 아는 자에게조차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위해 도울 것을 부탁한다.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도움을 처한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에 그들에게 자신을 숨김으로 자신의 허물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아프고 고난 받는 것은 오직 주를 사랑함임을, 자신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분만을 바라고 있음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자신의 마음을 가장 표현하기 힘든 자에게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며 주님을 갈망한다. 

 

(아 5:9)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술람미 여인의 고백을 들은 예루살렘 여인들은 그겋게 많은 재앙 가운데에서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의아해 한다.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사랑하는가?"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가? 

누군가에게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는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토록 주님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그저 "내가 누구이길래 나같은 것을 사랑하시나요?"하며 그 분의 사랑에 감격한 적은 있어도 한 번도 그 분이 누구이길래 내가 그 분을 그토록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본적은 없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도전을 준 적도 없다. 

내가 그 분의 살과 피를 마실 뿐만 아니라 그 분 또한 내 삶의 살과 피를 원하신다는 것, 

그 분만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나도 그 분을 그토록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오직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나이지만 그 은혜를 받은 나 역시 은혜 가운데 부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진실한, 온전한, 순전한 사랑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다. 

 

10절부터 16절까지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이 사랑하는 주, 왕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던 4장의 묘사와 대칭을 이룬다. 

그녀의 표현을 보자. 

 

10절) 내 사랑하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 젊고 깨끗하며 혈기 왕성한  

- 그리스도적 해석 - 주님이 나에게 가장 사랑스런 이유는 그 분의 거룩하심과 더불어 날 구원하신 그 분의 보혈때문이다. 

 

11절) 머리는 순금 같고 - 만왕의 왕되심. 가장 가치있는 

 

12절) 비둘기 같은 눈 -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왕이 자신을 비둘기 같은 눈이라고 표현했듯이 그녀 역시 왕을 바라보며 비둘기 같은 온유한, 평화로운, 자신을 향하는 눈빛을 바라본다. 

 

16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의 사랑-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신바 되며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 날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분 

나는 그런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난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내가 경험한 주님의 모습을 종이 한장에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 연애편지: 그가 없을 때, 그를 생각하며 쓰는 글, 마치 옆에 있는듯이, 그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분을 관찰하는 것

 

묵상) 

1. 누군가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본 적이 있나됴? 주님께 깊이 나의 사랑을 고백해 본 적이 있나요? 

 

2. 술람미 여인이 예루살렘 딸들에게 전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나의 주가 어떤 분인지를  표현하는 글을 한 번 구체적으로 기록해보자.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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