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민수기 21장 4-9절) 

 

[민 21:4-9]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수기 -  출애굽하여 시내산까지이 여정 - 출애굽기 

              시내산에 머물며 십계명과 율법을 설명한 것이 레위기 

               시내산을 출발하기 전 첫 번째 인구조사, 38여년이 지나 가나안을 앞두고 모압 평지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 

               "민수기"라 이름붙임 

               그러나 원래 히브리 성경에서 민수기의 제목은  "베미드바르" , "광야에서" - 광야 생활 38년간의 기록이다. 

 

광야의 역사 - 온 인류에서 가장 놀랍고 기적적인 일들이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기적의 장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을 하는 원망의 역사이다.  

오늘 나눌 민수기 21장의 내용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원망 사건의 가장 마지막 사건. 

 

언제? 광야에서의 오랜 지체됨 가운데 다시 가나안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려는 때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을 막아섰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가나안 족속 한 왕을 쳐서 완전히 멸하게 되었을 때에.

 

가나안 족속 - 신체적, 철 문화에 의한 병기, 지리적 홈그라운드.... VS 이스라엘 백성 - 전쟁의 훈련을 받지 않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이 대다수, 거기에 민족적으로는 허다한 잡족들이 모여있는...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그런 전쟁.  

 

[민 21:2-3]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가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니라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백성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 은혜의 때가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 다음 구절  -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니라 

  •  왜 마음이 상했는가?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4절) 

 

 에돔을 우회하는 길 - 우회했기 때문에 멀어서 상했는지, 홍해 길을 따라- 해변길이라 힘들어서 상했는지....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인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길 

 멀고 험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안심하고 가야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평탄대로가 열러지지 않으니 마음이 상했다. 

 

  • 마음이 상한 것의 결과 (5절) 

[민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하루 하루 광야 가운데 살아가는 은혜 - 하나님의 은혜 

그런데 매일 같이 그것을 누리면 그 놀라운 은혜 조차도 하찮게 여긴다. 

 

광야에서의 백성들의 원망 - 죽겠다.- 모세를, 하나님을 원망하는 표현 -죽겠다. 거기서 죽이지 왜 여기서 죽이냐... 

 

내가 먼저 죽고 말지...(부부 간에)

내가 너무 늙었나보다. 빨리 죽어야지 (부모 자식 간에) 

죽겠다는 말이 입에 붙은 사람들... 나이가 들어갈 수록....10대때 죽겠다는 말을 하는 것은 잘 못본다. 

 

주고 사는 일이 내게 달린 것인가?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러는가? 

 

  • 원망과 불평의 결과 

[민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죽겠다는 표현 - 불뱀을 내려와 백성들이 죽었다. 죽는 것을 보았다.

불뱀들을 보내어 - 적극적인 표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거기서 부터 불뱀의 환경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표현 - 모든 고난과 환란이 올 때마다 하나님이 보내시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걍팍케 하심으로...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 

그러나 실질적인 신앙의 현실 -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환경에...들어가는 것이다. 

 

죽겠다던 사람들이 정말 죽음이 닥치니까 어떻게 기도하는가? 

[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불뱀을 우리 가운데 사라지게 해 주세요 

백성들의 요구- 불뱀을 사라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응답 - 불뱀 (놋)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라. 

 

불뱀 -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 원망과 불평의 결과-> 사탄의 역사 가운데서 살아가는 모든 불행, 아픔. 죄의 결과 

 

뱀 - 사탄의 모습 -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종말의 때가 올 때까지 사탄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언제나 우리를 상하게 하는 존재 

예수 믿는 사람, 구원 받는 사람도 예외 없이 찾아와서 무는 존재이다. 

에덴을 떠난 모든 인류가 처한 운명 

 

우리의 영혼을 스캔하는 카메라가 있다고 하자. 

우리 영혼의 모습은 멀쩡할까?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우리 모두에게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상처 투성이가 아닐까? 

 

예수님이 올때까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불뱀의 문제는 이 번 한 번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되는 연속되는 언제나 찾아오는 문제이다. 

 

어떻게 불뱀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불뱀을 바라보면 죽는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돌려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다. 

 

니고데모-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의 교사였지만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어떻게 하여야....

그의 관심 - 어떻게 해야 영생을 누리는가?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가? 어떻게 해야 밤에 잠 좀 편히 잘 수 있는가? 

 

예수의 말 - 그것 없애려고 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불뱀에 물릴 때마다... 좌절, 낙심, 미움, 불면, 우울....

그것에 사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늘을 바라보고 시선을 돌려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 어려움 가운데서도 나를 항상 보호하셨던 주님. 

내 아픔 가운데서도 늘 내 기도를 들어주셨던 주님. 

어떤 마음의 상함 가운데서도 드리는 예배 조차도, 찬양 조차도, 기도 조차도 받아 주셨던 주님. 

 

  • 지난 주에 가장 마음이 상하는 일 

아주 선전하던 코로나 바이러스 감시 체계망이 대구의 신천지 한 교회로 말미암아 지금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상황 

 

이단이긴 하지만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장소가 한국 바이러스의 본거점이 된 것 - 목사로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마 다행인 것은 교회 안의 공동의 적이었던 신천지가 세상에 완전히 알려지게 된 것 

그들의 명단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하는 것 - 장기 결석 신자 때문이라고 발표 하지만 훈련 받아 각 교회로 파송되어 있는 신천지의 정체 때문이다. 

 

그런데 이단 신천지보다 더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이 엄중한 상황에서도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어 전국의 어르신들을 모이게 하면서 

"바이러스에 걸려 죽음으로 이 정권에 타격을 주는 것이 애국이다"라고 하며 소리치고 있는 한기총과 한기총 회장이라고 하는 전광훈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너무 말도 안되는 짓꺼리들을 많이 해서 외면해왔는데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물을 더럽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한기총의 현 실태를 알리는 것도 중요한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신천지가 활개 치고 다니는 데 있어서 한기총의 역할이 무시할 수 없다. 

 

신천지가 전도방법으로 삼고 있는 중요한 방법 하나가 한기총을 한국 기독교의 대표기구로 상정하고 그 타락성을 집중 부각시킴으로 한기총은 거짓이요 자신들은 참된 종교라고 주장함으로서 포교활동을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시면 한기총 하면 따라나오는 검색어가 신천지, 신천지 하면 따라 나오는 단어가 한기총과의 다른점이다. 

 

가톨릭이 로마 교황청의 감독하에 하나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기치아래 초대교회 흩어진 디아스포라 교회처럼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져 운영되고 있다. 

2014년 교회 연합회 주소록을 보면 한국 기독교 교단의 수는 252개의 교단이 기록되어 있고 2019년 시민단체에서 조사한 기독교 교회의 교단 수는 370여개가 넘는다고 하지만 이는 모든 이단 까지도 합쳐진 수이다. 그리고 250여개의 개신교 교단 중에서 장로교 이름을 가진 교단의 수만 204개, 감리교 계통이 10여개, 침례교 계통도 그 정도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때에 따라 개신교의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런 교단을 아우르는 기구가 있어야 될 필요성은 늘 제기되어져 왔다. 

한기총 전에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 (NCCK)가 `1924년부터 조직되어 주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대변하며 60-80년대 까지 권력과 불의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교회 협의회는 250개 교단 중 10여개의 교단들만 참여해서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진보적인 목소리에 우려를 표하는 보수적 기독교 목사님들이 모여 1989년 한경직 목사님을 명예 회장으로 모시고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 (한기총)의 시작이다. 

소수의 교단만 참여하던 교회협에 비해 한기총은 대다수 교단과 대형교회들이 함께 참여해서 기독교의 대표기구같은 모양새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설립 때 36개 교단 6개 단체가 참여했고 2010년에는 가장 절정기로 100여개 교단 및 회원수만 1200만명에 이른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보수화가 우려되기도 했지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기총은 막대한 교회의 후원과 조직으로 여러 사회 활동 및 북한 구호, 세계 선교의 일을 감당하였지만 

2010년 회장선거를 통해 그 동안의 금권선거가 알려지면서 회원 교단과 교회들이 탈퇴하기 시작헀습니다. 

당시 회장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10억에서 20억을 뿌려야만 당선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면서 이제 한기총을 문닫아야되고 오히려 한국교회의 폐해라는 주장이 계속적으로 제기 되어 온 것입니다. 

 

이에 가입되어 있는 주요 교단 들이 다 탈퇴를 하고 남아 있는 소속 교단 교회들의 성도들을 다 합쳐서 20여만명 정도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성 교단들이 탙퇴를 하고 나가자 그들이 모자라는 재정 및 회원을 늘리기 위해 했던 일들이 이른바 기존에 이단으로 처리되고 있었던 교회 및 교단들을 정상으로 복귀시켜 주면서 한기총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지금 전광훈 목사라는 사람은 그 사람의 학력도 다 거짓으로 판명되고, 그 동안 쏟나놓은 막말들도 사회 신문 지상에 걸쳐 여러번 소개된 한국 교회의 문제 인물. 

 

그리고 이러한 한기총이 무너지는 기간에 한기총을 기독교의 대표인 것 처럼 타깃을 삼고 집중 포교 활동을 펼친 것이 바로 신천지. 

 

나는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에돔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우회길처럼 느리게 진행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다 시 한번 한국교회가 일어나고 회복되는, 부흥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

한국 교회가 바이러스의 본부가 되어버린 가장 충격적이고 가슴아픈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며 울부짖되 장대위에 달린 그리스도, 왜 놋뱀인가? 놋은 성경에서 심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를 기분나쁘게 놋뱀에 비유했는가? 

뱀을 심판하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심판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 신천지도, 한기총도 외면하지 말고 그 타락한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그들을 심판하고 우리의 불뱀의 상함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를 바라봄으로 진정 상해버린 우리 마음, 우리 교회에 진정한 구원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시편 8편 4-9절) 

 

한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던 점원이 백화점의 물건을 슬쩍 하다가 걸려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자기를 쫓겨내는 백화점에 분노하며 쫓겨나는 날 엉뚱한 장난을 쳐 놓았습니다. 

백화점 안의 물건들의 가격표를 감쪽같이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아이들 장남감에 붙여 놓아야 할 가격표를 컴퓨터 코너에 가서  붙여 놓아 800백불 되는 컴퓨터가 30불, 40불되는 아이들 장남감 레고가 400백불에, 300불 되는 카메라는 8.99에 이런식으로 엉뚱한 가격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날 백화점 문을 열었을 때, 이것을 알아채기까지 5시간이나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 다섯시간 동안 카운터의 점원들은 누구도 가격표를 의심하지 않고 계산을 했습니다. 자기는 그저 자기 일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알아차린 것은 고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싼 물건이 값싸게 되자 고객들은 장남감 가격이 되어버린 값비싼 물건들을 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장남감을 사기 위해 20불을 모아 레고를 사러 왔던 아이 하나가 그 레고 가격이 400불이 된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점원에게 말하게 되면서 백화점의 가격표가 이상하다는 것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쫓겨난 점원의 범죄도 기가막힌 일이지만 그 가격을 의심하지 않고 5시간이나 판매했던 점원들, 잘못된 가격인 줄 알면서도 문건을 사간 몇 몇 고객들...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린 이렇게 가격표가 뒤바뀐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가격표를 다 바꾸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해 전 탤런트 이순재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순재 하면 모범적인 원로 배우이고, 배우라면 누구나가 존경하는 탤런트계의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자기의 출연료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수없이 많은 드라마며 영화를 나왔지만 자기 출연료를 이야기하면 다들 놀랜다. 우리 때는 배우가 출연료를 높게 받지 못했고 처름부터 그렇게 받다 보니 지금도 적게 받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 어린 가수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면서 자기도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출연료를 받는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도록 하는 사회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많이 버냐 적게 버냐로 평가해버린다."

 

단돈 몇백만원에 회사의 운명이 담긴 기술이 담긴 문서들을 해외로 팔아넘기는 사람들, 빚진 돈을 갚으라면서 사람의 장기마져도 판매하려는 사람들, 

우리 사회의 가격표는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가격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치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대우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일- 바뀌어진 가격표를 다시 붙여주신 것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사람들이 돌로 치라 했을 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시고, 38년이나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보며 눈물 흘리시며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압권- 십자가 상의 강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효용성 면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그런데 그에게 천국을 보장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그저 사람이기에 사랑하신다. 외모를 중시하지도,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그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라면 대환영이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천국뿐만 아니다. 

 

예레미야 3장

3장의 시작은 신명기 24장의 율법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율법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장을 받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람이 다시 그 남편이 죽거나 헤어진다고 해서 전남편이 그 여자를 데려올 수가 없다. 그것은 땅을 더럽히는 가증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에 이렇게 쓰여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네 남편이고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온다면 나는 너희를 축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말은 선포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영적, 육적으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구하는 모습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 3:14-15) 

 

돌아만 오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부어 줄 것을 약속하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확인하신다. 
세상에서 허랑방탕하여 돌아올 낯을 일어버린 탕자가 눈에 보이자 아버지는 뛰어 오셔서 그를 반기실 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히고, 반지를 끼워준다. 새신을 신게 한다.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 만드신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리고 나서 감탄하는 소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왜 만물보다 한없이 초라한 우리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고, 주의 손으로 만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나이까 하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흔히들 예배드리며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하신다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면서도 같은 사람을 비하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 개만도 못한 인간, 기생충같은 인간.... 

상종할 사람과 상종못할 사람을 나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못믿을 사람을 나눈다. 

친하고 싶은 사람과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나에게 이익이 될 사람과 무익한 사람을 나눈다.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으로 짓고, 또한 그 분의 능력과 손길로 영화롭게 존귀하게 하신 사람을 우리가 스스로 가격을 매기고, 분리하고, 차별한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끼리 끼리 모이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점점 혼자가 된다. 

누구와도 어울리기 싫어진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워진다. 

우리 또한 남에게 어떻게 평가 받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을 그렇게 평가하면서 결국 우리도 그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인간관계 자체를 두려워한다. 

앞으로는 더욱....더 더욱 그런 사회가 될 것이다. 

 

사탄이 이 땅에 들어와 저지를 범죄는 하나님 창조하신 동산의 모든 가격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다스렸던 만물을 섬기게끔 우리를 속였다.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 어떻게 속인 것일까? 

우리에게 영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심어 준 것이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이 세상은 죽으면 끝이라고....그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준 폭탄이다. 

그 의심은 인간의 모든 가치체계를 왜곡시켰다. 

인간의 삶의 방향을 잃게 하고 목적지도 바꾸어 버렸다. 

 

죽으면 끝이니까 옳고 그름의 기준도 항상 현재이다. 

지금 재미있으면 선하고 지금 재미없으면 악이다. 지금 재미있기 위해 아내와 남편을 배반하고 아이들을 버려도 상관이 없다. 

지금을 즐기기 위해서 남이 어떻게 되는 것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위해 재산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즐기기 위해서 모든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한가? 현재를 즐기니까 건강해졌는가? 

 

현재는 즐기면 즐길수록 만족이 없고 고통스럽다.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같은 즐거움에 만족이 없다. 더 큰 자극, 더 큰 환락, 더 큰 쾌락을 원하다가 스스로 멸망한다. 자기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즐기면 즐길수록 나는 점점 황폐해져 간다. 

우리는 영원을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 금방 살다 사라질 존재가 아니다. 

마라톤을 뛰면서 100 미터 달리기 하듯 달리면 반환점에도 다다르지 못하게 된다. 

 

  •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나를, 사람을, 한 영혼의 가치를 그렇게 크게 생각해주는 분이 없다는 것. 어떤 종교나 철학사상, 세상의 문화를 보더라도 하나님보다 사람의 가치를 중하게 생각하는 곳이 없다. 

 

성경의 언어, 특별히 구약의 언어-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늘 심판, 죽음, 징계를 경고하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우리는 이 언어를 대하면서 때로 왜 하나님은 자기만 믿으라고 할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풀어주지 않으실까? 

왜 저토록 무섭게 심판하실까? 왜 겁을 주실까 하면서 때로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본다. 

왜 하나님은 우라를 옴짝 달짝 못하게 하실까? 불편해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셨는가? 

내 삶을 옴짝 달짝 못하게 하셨는가? 

 

다른 사람은 내가 모르지만 나 자신을 바라보면 그분은 날 너무 내버려 두셨다. 

난 수십번, 수 백번 탕자가 되어서 뛰쳐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책망치 않고 반겨주셨다.

나를 책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다. 

왜? 나갈 때마다 난 세상으로부터, 상처입고, 내 가치를 잃어버렸고,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언어는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겪어야 했던 탕자들의 언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겪었던 체험의 언어이다. 

 

  •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1) 하나님이 보시는 나의 가치를 재발견 하는 것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감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을 믿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 사람-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린 유다 사람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장차 돌아올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범죄중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에서도 그들의 미래를 보시면서 말씀하신다. 그 분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로 인해 즐거이 부르시며 기뻐하신다" 

내가 누구이기에, 내가 무엇이관대 나로 인해 그렇게 기뻐하실까? 

 

속썩이는 남편, 속썪이는 아내, 속썪이는 자녀, 속썩이는 친구들이 있는가? 자신을 떠난 유다 백성을 보시면서 "돌아온 그들을 생각하시면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노래를 함꼐 불러보라. 

그들의 미래가 이미 하나님의 노래 안에서,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2)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 가치를 회복한 주의 자녀들이 힘써 만들어 가는 곳- 교회 

사람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곳 -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교육의 양으로, 직업으로, 성격으로, 연봉으로, 출신으로,,,할 수 있는 모든 기준을 가지고 나누고 평가하고, 평가절하하지만 

교회의 기준은 오직 하나 - 그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므로, 하나님 안에 속한 자이므로....세상의 모든 가치를 초월해서 사람이기에 대우 받을 수 있는 곳이 되게 하는 곳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 새 언약- 서로 사랑하라.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섬겨라. 

그 한가지 목적은 잃어버린 가격표를 다시 붙여 주어라. 

 

어느 공동체든지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 - 나는 여기에 쓸모가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자녀가 가정에서 쓸모없음을 느낄 떄 - 가출한다. 

직장인이 직장에서 쓸모없음을 느낄 때 - 결국 사직서를 제출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란 없다. 

성도의 가장 큰 쓸모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늦동이 한나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 

무언가 일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받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꾼이 아닌 자녀로 불러주셨다. 

그 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도 우리가 무언가 큰 일을 해서 십자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사랑을 누리고 경험하며 하나님 안에서의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공허한가? 외로운가? 

내 존재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가 있는가? 

내 삶의 끝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이 몰려오는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내가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그 분이 그 분의 손길로 나를 만드신 것과 

나의 삶을 바라보시면서 때로는 걱정하고

떄로는 격려하며, 때로는 천사들을 보내고,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 때로는 때에 맞는 날씨와, 환경과, 물질까지도 부어주시면서 내가 기뻐했던 모든 순간을 바라보시면서 같이 즐거워하는 존재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 아버지는 

내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늙지도 쇠하지도 죽지도 않고 나와 함꼐 영원이라는 삶을 함꼐 하실 분이라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를 그 분이 지금 마련해 두고 있음을 생각하면 

오늘 하루도 두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보다 더 즐거운 내일을 기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기억되리라 (마가복음 14장 3-9절)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사건 - 사복음서에 다 기록 - 가장 잘 알려진 사건, 그 의미가 중요하다. 

그런데 각각의 복음서에 표현된 서술이 조금씩 다르다.

 

1. 장소 

마태, 마가 - 베다니의 문등병자 시몬의 집 

누가 - 갈릴리의 바리새인 시몬 

요한 - 베다니이긴 하지만 누구 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2. 어디에 부었나?

마태, 마가 - 머리에 부었다. 

누가, 요한 - 발에 부었다. 

 

3. 누가 부었는가? 

마태, 마가복음 - 한 여자 

누가-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 

요한 - 마리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찬송가 211장 - 값비싼 향유를 주께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AD. 그레고리우스 1세가 교황이 되었던 다음 해 즉 AD 591년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과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라고 설교한데서 비롯됩니다. 오랫동안 교황의 말은 오류가 없다, 이른바 교황 무오설이 신봉되면서 그의 설교도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어 막달라 마리아가 곧 창녀였던 여자로 표현 되었던 것입니다. 

1969년 가톨릭 교회는 조용히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사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오류이다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가에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여인이라 찬송. - 수정되어야 할 사항 

 

오늘은 그 사건을 마가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 가장 짧으며 또한 가장 먼저 기록된 책 - 원형이 되는 책 

 

4. 사건의 주요개요 

때 - 유월절 이틀 전에 - 최후의 만찬이 목요일 저녁,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은 화요일 

장소 -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 예루살렘 인근의 빈민촌 , 가난한 자들의 집이라는 뜻 

          나병환자 격리 처소가 있는... 

          그 시몬이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분명치가 않다. 

사건 - 예수와 무리들이 식사하실 때에 마리아인지 혹은 한 여인으로 표현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 - 삼백 데나리온 

당시의  하루 품삯 - 한 데나리온 

삼백 데나리온 - 장정 한 사람이 안식일을 제외하고 일년을 모아야 벌 수 있는 금액 

 막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 장정만 오천, 약 2만여명의 식사를 살 수 있는 금액 

 

-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가)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마태복음) -> 요한복음에는 이 제자의 정체가 다름아닌 가룟유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마태복음 26:8절) 

   무엇을 보고 분개한 것인가? 모두들.... 예수의 머리로 쏟아진 그 값비싼 향유....

   

 5. 질문 

자, 그 사건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베다니의 한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기사를 보면 당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수 많은 사람들이 나와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하고 예수님을 극진히 영접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은 요한복음 12장 9절에 보면 예수님만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나사로도 함께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한 여인이, 그것이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나사로의 누이이건 혹은 다른 여인이건 예수님이 식사하고 계신 중에 그 머리 위에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스프레이로 좋은 향기가 나라고 뿌린 것도 아니고, 손에 적셔 살짝 묻힌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머리에 부었습니다.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당황스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수님 괜찮으세요?" 수건을 가져오고, 그런 일을 행한 그 여인에게 왜 그랬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 제자들, 그 중에 가룟유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당황스런 일에 그들의 눈은 어디에만 가 있습니까?

 

순전한 나드 한 옥합....

지금 당황스런 일을 당한 그 자리의 주인공 예수님께는 아무도 괜찮냐고 묻거나 다가와 닦아주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다 쏟아진 향유에만 관심이 가 있습니다. 

 

6. 베다니에 있던 순전한 나드 한 옥합 

베다니 -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빈민촌. 가난한 자들의 집. 비싼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그 곳에 나드 한 옥합이 있었다.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마도 이 향유는 결혼식 때에 받았을 혼수품이 아니었을까, 혹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품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한다. 다른 곳으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받은 물건이 아니라면 그 곳에 있을 수 없는 귀한 물건이라는 것!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의 관심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값진 향유에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 같다. 

특별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방문한 자들이 주는 헌금과 예물과 식사로 삶을 유지하던 제자들에게는 그 향료가 혹시 오늘 우리에게 돌아올 예물은 아닐까? 적어도 돈궤를 맡고 있던 가룟유다에게는 그것에 눈이 갔었던 것 같다. 

 

그것에 눈이 꽂힌 순간 그 잔치의 주인공은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도 아니다. 그 자리는 의미없고 그 식사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향료에만 관심이 가 있다. 

 

그런데 그 향료가 예수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는 놀라시고 당황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예수께 와서 예수의 머리를 가리려고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쏟아진 향유만 쳐다보고 화를 낸다.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련만.... 그것이 자신에게 왔을 때에 정말 그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까? 

그러한 그들의 심령을 꼭 집어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요한복음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라. 

 

7. 예수님의 반응 

누구보다도 당황하셨을 예수께서 이 자리를 정리하시기 시작하신다. 

막 14:6절)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붓는 사건 - 좋은 일을 하였다. 

Beautiful thing to me - 옳은 일을 하였다 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좋은 일 - 적절한, 아름다운... 보시기 좋았더라. 

 

그 자리, 그 때에 꼭 맞는 일을 하였다. 왜? 

1-2절- 예수를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10-11절: 가룟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유다가 에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유월절 십자가 사건의 이틀 전에. 사방에서 그를 죽이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자기 앞의 가룟유다 역시 예수를 넘겨주려 할 때에...

 

향유 - 여인의 머리와 피부를 손질 - 또 다른 목적 - 몰약과 유향과 더불어 장례를 치르는데... 

8절)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 가만 두라 (Leave her alone) 

그녀를 홀로 내버려두라. 건들지 말아라. 방해하지 말아라. 

여인의 입장-여인이 자기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을까? 

이틀 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살아계신 예수님께 시체를 향한 일을 행했을까? No

 

그녀에게 향유를 붓는 사건 

- 왕에게, 선지자에게, 제사장에게...(당신은 나의 메시야이십니다) 

- 그리고 민수기 말씀 - 머리를 풀어 발을 씻는 사건 - 나는 죄인입니다. 

 

이 두가지 고백 - 나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나의 메시야, 구원자이십니다. 

 

그녀라고 식사 중인 예수님께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그녀에게도 그 향품은 그것이 신랑이 준비한 혼수품이건,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품이건, 그리고 또다른 의미

아가서 강해를 통해 술람미 여인과 왕이 서로를 바라보며 맡았던 순전한 나드 향기 - 바로 그 삶의 향기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은 그 여인의 전부다. 

 

얼마나 망설였을까? 사람들의 시선도, 자신의 부끄러움도,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녀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그 안의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식사하고 계시는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 아닐까? 

 

8. 짐 엘리엇의 이야기 

시카고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 학교인 휘튼 대학(Wheaton College)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수직을 받게 된 짐 엘리옷은, 어느 날 남미 에콰도르의 야만적 원시 살인족인 아우카족이 너무나 흉악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글을 접하고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아우카족에게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짐 엘리엇과 4명의 선교사들은 핼리콥터를 타고 에콰도르 동쪽에 있는 쿠라라이 강가에 착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들어간 후 몇 달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찾기 위한 수색대가 편성되었고, 그곳을 수색한 결과 그들은 참혹하게 창과 도끼에 찢겨져 죽어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 잡지 'Life' 지는 복음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원주민들에 의해 29세의 나이로 살해된 짐 엘리엇과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과 유품 사진을 크게 보도했고, 온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때의 기사 제목은 "이 얼마나 헛된 죽음인가?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였습니다. 

 

그러나 짐엘리엇의 아내는 남편의 일기장을 보여주며 다시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낭비입니다. 그러나 제 남편은 꿈을 이루었습니다. 감히 그가 이룬 꿈을 낭비라 하지 말아 주십시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아내가 간호사 훈련을 받고 두 자녀와 함께 아우카 족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두 자녀는 남편이 살해당한 그 강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한 자녀는 인디언과 결혼하여 그 지역에 남았습니다. 남편을 죽이는 데 가담했던 인디언이 그 지역의 1호 목사가 되었고 모든 인디언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결론

 

세상은 효율성으로 가치를 매깁니다.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붓는 것- 효율성으로 보면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며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그 일이 아름답다 하시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서나 그 여인이 행한 일도, 그 여인도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신앙생활 하면서 사람들은 그 시간, 그 헌금, 그 헌신이 헛되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 열심으로 다른 것 하면 얼마나 큰 일을 할까 하기도 합니다. 

실재로 그 여연의 그 비싼 향유가 예수의 머리에 부어졌을 때에 수많은 가치가 땅에 쏟아지는 것같은 허망함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 역사 속에서 퍼져 나갑니다. 그 향기가 그 모든 장소를 적십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값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아니 과연 가치를 매길 수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이 예수에게만, 예수의 사랑에게만 맞추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인과 같은 짐 엘리엇과 같은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않은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 그런 삶, 그런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신예주 2022.06.10 17:37

    안뇽

창세기 37:23-24절 상실 너머 형통으로  

 

요셉 - 라헬로부터 난 아들, 사랑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 성경은 특별히 사람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에 대한 기사들이 많다. 

솔로몬 - 밧세바, 잘못된 관계였지만, 다른 처들 - 거의 정략결혼,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다른 아들들보다 솔로몬을 가장 사랑했다. 

사무엘 -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아들... 

 

우리 성도의 위치 

[시 2:7-8]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누구로부터 나은 자식인가? 

[행 13:32-3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우리는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그 분의 자녀가 된 자들. 사랑받는 자. 

 

요셉 -

  • [창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자. 홀로 집에 남아 아버지와 함께 유하고, 남자이면서도 혼자 채색옷을 입고....형들은 일하러 가고. 편애 중의 편애..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형들에 대한 배려도, 형제우애도 잃어버리고(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자신이 사랑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인격적으로 볼 때 미성숙한 자. 형제들 사이에서 밉상.  

cf) 사도 요한 -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 그런데 그는 성령 받은 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를 받들고, 마리아를 받들고, 자신의 범위를 넘지 않고 섬기는 자, 사랑의 사도

여기에 비해 요셉은 사랑받는 것을 통해 남들의 미움을 받는다. 

 

자기의 꿈을 가감없이 형제들에게, 두 번씩이나 고함으로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받았을 터인데 꿈이야기를 통하여 이젠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형들 위에 군림하려는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 수 벗다.

  •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그의 꿈보다 더 미운 것, 그의 말...진실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배려가 없는 진실은 오히려 남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말을 통해 배려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형들이 악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느날 야곱이 세겜 땅에서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밥을 갖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평소 때와 같이 감시자로 보낸다. 고자질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고하게 한다. 이미 다른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형들은 아버지에게 이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머물면서 양들을 친다. 

아버지는 편애하고 형들은 불순종하여 아뢰지 않은 다른 곳에 진치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가오는 요셉을 보고 유명한 말을 한다.  

 

  • [창 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구절을 잘 기억해 두자.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채색옷 - 요셉이 사랑받음을 벗기는 것, 그가 가진 모든 사랑을 벗기고 빼앗아 버림. 

그리고 구덩이에 던진다. 구덩이는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이다. 누가 꺼내주기 까지는 나올 수 없다. 

깊은 낙망, 깊은 우울증. 깊은 슾픔, 깊은 절망 -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설명을 붙인다. 그 구덩이는 빈 것이고 그 속에 물이 없다. 

왜 이 구절을 붙였을까? 무언가 의미를 주고자 함이다. 빈 것이고 물이 없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물이 없음은 이제 받아왔던 모든 은혜가 사라진 상태다. 

이후로부터 요셉의 삶은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것 마냥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옷이 벗겨진 채로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는 인생이 된다. 

꿈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사는 이유도, 희망도 사라진다. 꿈이나 비전같은 말은 요셉의 삶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사치가 되었다.  

                           

적이 아닌, 악인들이 아닌 형들에게 배반당한 요셉 -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다 사라져 버림., 

아버지의 사랑이 속수무책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원인을 찾아보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야곱이다. 

 

상실 - 자발적인 포기는 상실이 아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갖고 있는 것, 강제로 빼앗기고 사라져 버릴 때 - 우리는 그것을 상실이라 한다.  

요셉은 지금 전형적인 상실의 삶을 살아간다 - 그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을 지는 상실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 

부정, 저항, 포기, 낙심, 우울, 생의 의욕이 완전히 꺾여짐.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 - 잃어버린 것을 그 것보다 더 한 것으로 채우는 것 (욥- 나중 받는 것으로 이전 잃어버린 것들을 극복한다)  

가치 없는 것으로 그 상실을 극복하고자 할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중독과 일탈과 타락의 삶으로 더 깊숙히 추락한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다.  

 

반전 - 

  • 보디발의 집에서 적응한다. 그럭저럭 삶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도록 노예의 삶에 잘 적응한다. 눈에 띠는 노예가 된다. 

요셉은 집에서 궂은 일을 해 본 일이 없다.그런데도 이방 땅, 다른 문화, 다른 언어의 사람에게 팔려가서 온갖 굳은 일을 해가며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는다.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노예로서의 삶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경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하나의 구절을 통해 힌트를 준다. . 

 

상실을 대체하는, 누군가가 그에게 있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요셉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등장

사랑받는 자녀였을 때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등장한다. 언제? 그가 상실의 극한에 있을 때에

꿈을 잃어버렸을 때에, 형들에게 배반당했을 때에, 물이 없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 

 

그런데 그 전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자신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에게 경험된 하나님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비로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만난다.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 분은 언제나 존재하시지만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경험할 때 그 존재는 현존, 임재, 동행이 된다.  

 

포기 할 만할 때에 그의 삶에 생명력이 들어온다. 

아버지의 집에서도 하지 않던 남의 집을 자신이 관리한다. 자신이 청소하고 운영한다. 모든 것을 관리한다. 놀라운 생명력이다. 포기의 순간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시간이 된다. 

 

형통 - 찰라흐 

외적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영과 혼이 만족되면서 오는 만족과 기쁨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형통이다. 

삶에 동기가 생기고 생명력이 생긴다. 

그런 형통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한다. 

 

  • 또 한 번의 시험 - 두 번 째 상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힘. 

죄를 이겼는데 그 죄값을 치룸,. 

이제 그 집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 집을 빼앗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상실이 찾아온 것이다. 어떤 상실이 더 큰 상실일까?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었다.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했다. 그래서 신나게 일하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칭찬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첫 번째 상실이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상실이라면 두 번째 상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실이다. 어떤 상실이 더 컸을까? 

두번째 상실은 그간 버텨온 요셉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상실이다. 

첫번째 상실이 그의 외적 환경을 빼앗는 상실이면 두 번째 상실은 그의 내면을 뒤흔드는 상실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첫 번째 상실을 신앙으로 극복하지만 두 번째 상실을 만나게 되면 무너진다. 넘어진다. 일어서질 못한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창 39:2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떤 상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견뎠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을 때에....

그런데 그 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상실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상실을 통해 요셉이 얻은 승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 넘어에서 행동하시는 분이니까... 그 분의 행동은 내 생각 밖에서 움직인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겪는 가장 흔한 실수 

-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꺼야... 자신이 주도하고 해답을 내리고 하나님을 이끌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안되면 넘어지고 화내고 실망한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의 자람은 내 마음대로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이다. 그 때에 비로서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난다. 내 존재 위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 전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결국 내 믿음, 내 신념을 기대사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내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더하신다. 은혜를 받게 하신다. 요셉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포기하지 않도록, 그에게 사랑을 주신다. 

 

17살에 끌려와서 27살 떄 그 감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또 붙든다. 

 

성도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도 오히려 내 삶이 무너질 때 

 

내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상(Image)일 뿐이다.  

내 과거의 믿음을 넘어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부활 전의 예수님의 상에 갇혀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제의 믿음을 깨뜨리고 오늘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실날처럼 보여진다

말씀이 새롭게 보여진다. 그 분의 어떤 말씀도 허투로 보지 않는다. 내 경험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 안에 내 영혼을 드린다. 

 

감옥에서 3년만에 총리가 된다. - 

 

[창 42:8-9]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꿈을 붙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루 하루를 살았더니 어느날 문득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결국 자신에게 주신 말씀, 자신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꿈에 매달리면 조급해지고 그 꿈이 자기 계획대로 안될 떄 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 안의 꿈도 잊고 오직 하나님꼐 집중할 때 지나고 나서 바라보면 내가 그 분 안에서 꾼 꿈이 다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갔을 때에 그는 과거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말도 잃어버렸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꿈을, 비전을 잃어버려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여호와로 경험하는 삶이다. 

 

처음 신앙을 가지고 꿈을 위해 기도했고 노력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 시인, 소설가: 글을 통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리라 

고등학교 때 - 음악가 - 글 보다 더욱 직접적인 

대학교 때 - 상담가 - 더 직적접으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터치 

그러다가 신학을 하게 되고 목사가 되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내 꿈들이 생각나면서 불완전하고 어리숙하게 꿈을 꾸었던 나를 목사의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는데 

순간 하나님 주신 음성같은 깨달음 - 난 네가 꾸었던 꿈을 하나도 소멸시키지 않았다. 목사라는 소명을 통해 

글을 통해서도, 찬양을 통해서도, 상담을 통해서도, 무엇보다 목회를 통해서 이 모든 꿈을 이루신 것이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난 후에 알게 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에 형들에 대한 사무친 억울함과 원망도 사라지게 된다. ㅅ

빙빙 돌아온 인생, 견디기 힘들었던 상실과 실패가 지금의 나를 위한 통로로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상실을 넘어 형통으로, 상실을 넘어 화평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꿈이 다 허물어져 버렸는가? 

열심히 살았는데,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뜻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났는가? 

아직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상실을 통해 내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기대고 있던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을 보게 하신다. 상실을 넘어 형통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허울 뿐인 신앙인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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