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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8장 30-35절 - 에발산 언약의 갱신 

 

[여호수아 8장 30-35절]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1. 에발산에서의 율법낭독 

아이성과의 두 번의 전투가 모두 끝이 났다. 첫번째 전쟁은 이스라엘의 패배였고, 두번째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승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승리가 더 기쁘고 신났던 것은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성 자체를 제외한 성안의 모든 귀한 것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전쟁에 참가했던 3만명의 군사들은 저마다 아이성에서 취한 값진 전리품들을 손에 들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개선행진을 하며 돌아오고 있다. 

 남은 것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나머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도모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때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뜻밖의 일을 행한다. 

 바로 에발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이다. 

 

 전쟁을 기뻐하고 축하하기 전에 사람들을 모두 모으고 굉장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식을 행한다. 꽤 멀리 떨어진 에발산까지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왜 신나고 감격스러운 순간에 이런 일을 행했던 것일까? 신명기 27장에 그 근거가 나온다. 

 

  • 신명기  27:1-8

(신 27:1)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신 27:2)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신 27:3)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신 27:4)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신 27:5)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신 27:6)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신 27:7)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 27:8)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승리에 때에 그들은 승리에 도취되지 않고 하나님과 맺은 하신 언약을 기억했다. 

31절, 33절 모세의 명령을 재반영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온 이스라엘과 장로들과 관리와 재판장들이 본토인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궤 좌우에 섰다.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다.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고 명령한 것이었다. 

2. 반복되는 말씀 교육 

34-35절 율법의 낭독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낭독하였다. 곧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였다.

 

(레위기- 1세대, 신명기 - 2세대, 그리고 여호수아 - 또 새로 합쳐진 거류민, 새로 태어난 아이들...) 

-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나누는 하나님의 말씀, 교육은 윗 세대로부터 계속적으로 들려주는 말씀이다 .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바로 서지 못한다. 

죄에 대한 기록- 끊임없는 반복의 기록, 사사기- 또 죄를 범하였다- 또 짓는 죄. 

우등생 - 오답노트를 잘 정리하는 사람. 틀린 곳에서 또 틀리지 마라. 경각심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늘 넘어지는 곳에서 넘어진다. 

 

3, 다듬지 않은 돌 위에 단을 쌓으라 -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 변화 받는 것이다.  

특별히 다듬지 않은 돌 위에 단을 쌓고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제사를 원하심은 인간의 인위적인 가식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순수함 자체를 받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자연스럽고 온전한 제사를 원하신다. 불순물이 첨가되어 부자연스럽거나 온전하지 못한 제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출 20:25)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에발산에 세워진 제단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 그러니까 참된 헌신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본격적인 언약예식에 들어갑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돌 위에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다시 기록하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그렇게 이미 있는 율법을 다시 기록했고, 또 백성들에게 그 지루한 과정을 모두 지켜 보게 했을까요? 

 

4. 그리심산이 아닌 에발산에서 세운 언약갱신

이것이 이야기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채워지게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로 채워지게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언약 안에서 사는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모양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심 산에 세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에발산에 세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애석하게도 복된 쪽만 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쪽은 받아들이지 않을 방도는 없습니다. 34절을 보면 그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데요. 지금 전쟁에 승리해서 한 껏 기쁨과 흥분 속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모아놓고 여호수아는 ‘율법책이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축복의 말씀을 듣는 일은 참 즐겁고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을 더 높여주는 역할을 하겠지요. 그러나 저주의 말씀을 듣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런 기쁨과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이성이라는 한 장소에서 그들은 축복도 저주도 경험했습니다. 장소도 같았고, 이스라엘 백성도 같았고,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니님도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정욕과 탐심과 교만으로 스스로 행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느냐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열매가 달라진 것 입니다. 

 

축복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들려주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모두 불편하고 힘들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주의 말씀이나 경고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유쾌하게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도들을 마치 소비자나 고객으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교회들 안에서는 죄에 대한 이야기,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만 넘쳐나고 있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항상 가벼운 웃음 소리와 부담 없는 걸음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참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성도들을 그리심 산 앞에 뿐만 아니라 에발 산 앞에도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축복의 말씀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심판의 말씀도 가감없이 전해야 합니다.

 

(질문) 

1. 신앙 여정에서 난 주님께 약속한 것들을 신실히 지키고 있는가? 

2. 반복적으로 말씀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내게 맡겨진 가족과 영혼에게 그 말씀을 또한 나누는가? 

3. 다듬지 않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를 드리는가? 내 예배에는 가식과 위선이 없이 진실한 모습으로 드리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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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6장 - 여리고성 정복

 

모세의 적 (중생) - 애굽, 아말렉 족속 : 세상, 세상의 가치관, 죄의 유혹들...

여호수아의 적 (성화, 성결) - 가나안, 여리고성 - 내 안의 죄성, 나 자신의 연약함, 깨어지지 않는 내 자아

                       하나님께 굴복되지 않는 내 자아- 그것을 나타내는 것 - 여리고성 

                       

 가나안 -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 

               그 땅의 정의- 황금 송아지 사건 이후 

(출 33:15-16)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 하나님의 응답 

[출 33:21-23]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가나안이 가나안일 수 있는 전제조건- 하나님이 함께 하심- 임마누엘 

그 응답 - 반석 위에 서라. 

               반석 위에 있으면 죄를 덮고 가리우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할 수 있게 하심. 

               그 반석, 임마누엘은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내 맘에 함께 할 수 있게 하는 것 - 여리고성 점령. 내 마음을 온전히 주께 열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성령의 열매를 얻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 나 자신의 여리고성 

(민 13:28)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그 자아는 애굽보다 강하다. 

중생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가 자기를 정복하지 못하면 광야 인생으로 끝난다. 

이 땅에서의 평안이 없다. 안식이 없고 즐거움이 없다. 신앙생활은 늘 짐이고 부담이고 염려이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고 그 분이 날 점령하시면 참 가나안의 은혜가 임한다. 

임마누엘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아가 너무 강하다. 

그 성은 너무 견고하다. 틈이 없다. 그리고 내 속의 공간은 너무 넓다. 수많은 나의 인격들이 그 곳에 거한다. 

 

(수 6:1)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왜 문을 닫고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5장 1절의 내용이 그 근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오면 변한다. 그가 오면 나를 지배한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성을 닫게 한 것이다. 

 

요나가 왜 니느웨로 가지 않는가? 그들이 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자들이 용서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말씀이 떨어지면 변한다. 성경은 말씀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사례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 중의 하나는 사람은 참 안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변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의 교회 현장은, 삶의 현장은 안변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가? 

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고 반응하는가? 

바로 말씀을 가로막는 장벽, 우리 안의 여리고성 때문이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내가 필요할 때에만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내 부분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한 부분만 소유코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을 내 주인으로, 왕으로, 전부로 맞이하는 것이다. 

내 전부를 그 분 앞에 내어드리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한 부분만을 고치고 싶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지신 어떤 것, 그분의 힘, 능력, 지혜, 풍요, 평강, 하나님의 극히 일부분 중 자기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 만을 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받으시면서 동시에 그분의 전지전능을 체험케 하신다. 그 열매가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이름을 바꾸는 것이다. 내 존재의 터전, 그 근원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한다.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말씀과 죽어도 안변하려는 우리 인격의 격전지가 교회다. 그곳이 바로 여리고성이다! 

 

2-5절 :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작전 명령

6-7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내린 작전명령 

3절: 약속의 확인, 그 땅을 너에게 주었다. 내가 너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성령을 받아라. 

        너는 내 것이다. 

(수 6:3-5)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예배의 모습이다. 

나팔- 은나팔은 백성들이 진격할 때 (민 10:6) 

         양각나팔은 주로 제사 의식때.

         시내산의 나팔소리 (하나님의 임재) 

(출 19:16)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여리고성 점령- 내 삶을 예배하는 산 제사로 드려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케 하라 .

                        내 중심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로 채워라

                        

(수 6:8)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ㅡ 찬양과 말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가장 중요한 예배

 

챤양은 우리의 감정을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이다. 

출애굽의 사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를 사는 내 삶에 임하도록, 체험토록, 노래하는 것이요, 그 사건의 승리가 내 삶의 승리가 되도록 고백하는 것이다.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임을 확신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수 6:10)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한꺼번에 외치는 것과 한꺼번에 조용히 하는 것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외치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침묵은 길다. 인내해야 한다. 자신을 죽여야 한다. 

왜 침묵하라 하는가? 

그들은 불평하여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배로 채워지지 않는 소리는 소음이고 불평이고 실패다. 

찬양이 우리 삶에 끝나면 남는 것이 바로 불평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소리는 절망의 탄식뿐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때 (침묵할 때) - 

여리고성 내의 사람들- 점점 더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고 무시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 점점 초조하고 불안해 진다. 이 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소리치기 시작하면 그 불안함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여리고는 또다시 닫혀지고 은혜는 사라진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다.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 - 아합의 시대 때 여리고성을 지음.      

불순종할 때마다, 우상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을 멀리 할 때 마다 우리 안에는 또 다른 여리고성이 세워진다. 

다시는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같이 여리고성을 쌓는다. 바벨탑을 쌓는다.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은 온전한 예배이다. 

우리 안에 찬양이 넘칠 때에, 말씀이 가득 찰 때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할 때에 우리의 여리고는 무너지고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무너져야 한다. 

부서져야 한다. 

깨져야 한다. 우리 모두 여리고를 무너뜨리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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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5장: 할례...내 신을 벗는 것. 

 

5장 - 가나안을 정복하는 관문...여리고성 

지난 시간까지 나눈 것- 요단강을 건넘 

 

신앙 생활에서 건너는 두 개의 강 

  • 홍해 

- 홍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중생. 일생에 단 한 번. 

- 성경에서도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유일한 단 한번의 사건으로 소개

- 그것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멈추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불평불만으로 정말로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처럼 신앙생활한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언제나 마음은 애굽에 가 있다. 끊임없이 애굽과 비교하면서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애굽이 더 좋았더라고....예수 안믿으면 내가 더 맘껏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 탄식한다. 그러나 그 탄식은 자신을 속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생각이다. 

-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그들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부끄러운 구원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다. 성화되기 위한 목적, 온전한 성도가 되기 위한 목적을 상급에 두면서 천국의 모습을 이 땅에서 자기들이 행한 일로서 위 아래로 나누는 일이다. 물론 성경은 상급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처럼 상급으로 위아래가 나누어지고, 계급이 생기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구원은 완전한 것이요, 영광스러운 것이다. 

 

  • 요단강

-요단강은 성화의 강이다. 홍해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그저 바라보고 믿는 것이라면, 요단강은 법궤를 앞에 두고 건넌다.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순종함에 대해서, 가톨릭은 어떻게 보면 이 순종이 신앙의 목적이 된다. 순종에 따라 예수님을 닮는 정도가 결정된다. 이 순종을 위해 금욕하고, 훈련하고, 자선을 베풀고, 헌신한다. 

 

그런데 개신교, 특별히 웨슬레의 신학의 영향을 받는 감리교와 우리 성결교는 이 순종함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둔다. 성결교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정의한다. 아무리 할려고 해도 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고, 멈추어져 있는 것 같은 그런 순간에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은혜를 부어 주실 때가 있다. 그 은혜가 임했을 때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순종이 성령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중생을 경험했을 때처럼 뜨거운 회개와, 뜨거운 은혜가 또 다시 임할 때가 있다. 중생은 인생에 한 번 임하는 것이지만 이 성결의 은혜는 거듭 임할 수 있다. 홍해는 한번의 사건으로 성경에 기록되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여호수아를 거쳐 엘리야, 엘리사로, 나아만 장군으로, 세례요한을 거쳐 예수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 말한다. 

 

요단을 건너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제 출애굽하여 세상의 노예,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 광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하는 삶을 통해 점점 더 성화의 길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서 안식하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여기에도 안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소속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면 차라리 가나안 이주라고 해야 할 텐데..우리는 가나안 땅에 이주했다거나 정착했다라고 하지 않고 가나안정복이라고 말을 한다. 

왜 무슨 전쟁이 또 남아 있는 것일까? 

성화의 단계에서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가나안 땅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건들이 있다. 요단강, 또 우리가 다음 시간에 나눌 여리고성, 아간의 죄...

중생이 사탄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한 사건이라면 성화의 단계의 정복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이다. 

애굽이라는 세상의, 외적인, 사단의 세력에서 우리를 끊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라면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우리의 싸움 대상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성, 여리고는 다름 아닌 꽉 막힌 우리 자신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 (계 3:20)은 믿지 않는 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인들, 믿으나 온전히 믿지 못하는, 믿으나 순종하지 못하는 그런 믿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왜 우리 자신을 정복해야 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유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 그의 상태는 죄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범죄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그 자신의 연약함이 있었다. 

선악과를 통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통로는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정욕이다.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전쟁은 물질을 향한 탐욕과 개인 안에 숨겨진 은밀한 음란함으로 나온다. 

 

5장에서 나타나는 주요 세가지 사건이 있다. (할례와 유월절과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나는 사건이다) 

이 세가지 사건이 주는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 

2-9절 : 할례를 행하라

10-12절: 유월절을 지켜라 

13-14절: 하나님의 군대장관-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2절- 그 때에: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진치고 있을 때

                     가나안 백성들의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라합의 말이 성취 되었을 때에...) 

 

-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이 섰을 때. 우리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때, 적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가나안 땅 정복이 눈 앞에 왔을 때. 

                그 때에 할례를 행하라! - 

                마치 전쟁 중에 안식일을 지켜라 하는 것과 같은.

                그것도 일주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명령. 

                

   cf) 사울왕: 블레셋을 치려하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는다. 지금 나가서 싸우면 이길 수 있겠는데, 지금 나가지 아니하면 패배할텐데.... 내 생각과 환경과 감정이 아니라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말씀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 것....

     그러나 사울은 결국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드리고 전쟁을 치루려 한다. 사울은 그 사건으로 사무엘에 의해서 왕으로서의 자격을 박탁당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고 있는지 확인하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없이 뛰어들지 말라. 

       급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또 급한 일이 닥치고 있는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또한 얼마나 힘든가? 

      

  • 할례의 시작은 언제인가? 

       1)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자녀를 낳기 위한 자기의 모든 방법이 끊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처음 명한 것이 바로 할례...

창 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 17: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2) 모세

- 애굽으로 가서 바로에게 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가 드디어 결단하고 십보라와 함께 애굽으로 가려는 찰나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를 죽이려 한다. 이에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와서 갑자기 모세의 아들의 할례를 시행하면서 "당신은 나의  피남편이라"하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신다. 그리고 성경은 피남편이라 함은 바로 할례 때문이더라는 이해하지 못할 설명을 붙인다. 

- 왜 십보라는 모세가 죽을 위험에 처하자 갑자기 아들의 할례를 행했을까? 다시 창세기 17장으로 가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창 17:12-14]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살면서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굽에 가면서 먼저 그 가정에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할례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 - 

(수 5:9)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애굽의 수치: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겠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고 약속된 땅에서 살게 하겠다. 

1세대- 불순종과 원망으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민족- 수치의 백성. 

길갈- 굴러간다. 넘어간다. 

 

불순종은 수치의 삶으로 귀결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순종하면 수치의 백성이 된다. 

한국교회 - 세상의 수치.... 왜? 불순종하기 때문... 

 

  • 유월절 -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우리 신앙생활의 순간마다 가장 토대가 되고 시작이 되는 사건- 유월절 

광야 생활의 시작- 유월절을 통해서 

광야생활의 끝- 유월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 영적 여정의 시작과 끝이다. 우리의 신앙이 이 십자가의 사건에서 멀어지는 것이 곧 영적이 타락이다. 우리의 은혜의 회복 역시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에서 회복된다. 그 구원은 오직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 네 신을 벗어라! 

모세에게도 똑같이 하신 말씀....너의 권리를 내게 넘겨라. (룻기서) 

주님이 왕되시게 하는 것...

우리는 어느덧 또다시 주님을 몰아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나 중심적인 이기적 신앙으로 돌아온다. 

 

(묵상 질문) 

내 마음의 중앙에는 주님이 계신가? 내가 앉아 있는가? 

난 그 음성에 순종하는가? 내 열심, 내 의를 고집하지는 않는가? 

십자가 지고 가는가? 그 피를 의지하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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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둥이맘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3.08 12:27

    여호수아 5장을 이해하는데 너무 귀한 도움글입니다. 할례, 유월절, 군대장관에 대한 글 읽고 은혜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호수아 4장 - 두 곳에 세운 돌 

 

1. 홍해와 요단강 

 

출애굽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큰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할 때에 건넜던 홍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본 요단강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으로 볼 때에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는 중생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의 문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도 홍해와 요단강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구약의 사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구속론적 관점, 구속론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이러한 구속론적 해석을 중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홀해를 건넌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홍해를 건넌 사건을 구원의 사건, 세례의 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삶, 중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성화되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신앙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은 성화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은혜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중생의 강을 넘어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지만 요단강은 우리가 매일 건너가야 하는 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에 대한 사건은 단 한번 기록되어 있지만, 요단강에 대한 사건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이외에도 엘리야, 엘리사때 옷을 치며 건넌 사건,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을 고치게 되는 사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 등 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남의 완성이 홍해의 물세례를 거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2. 두 곳에 세운 기념비 (오늘 나눌 4장) 

요단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말씀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가 오늘밤 유숙할 그곳에 두게하라." (수 4:2-3)

 

그리고 6절에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적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표징이고, 물고기가 사람 낚는 물고기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듯이 돌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라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징입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단물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때의 요단 물은 어떤 물입니까? 생명을 삼키는 물입니다, 고난의 물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 고난이 어디서 끊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고난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인생의 파도가 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낙망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말씀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유혹이 역사합니다. 

사람을 기대다가 실망하게 되고, 돈을 의지하다가 탐욕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은 형식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처럼 되다가 급기야 믿음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는 모든 강과 장벽을 말씀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이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볼 때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2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으니" (23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4절) 

 

모든 표징은 우리로 하여금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삶을 통해 알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사이에 서있는 그 자리에서 돌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길갈이라는 땅으로 와서 거기에 돌을 세우고 기념하게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또 한 무더기의 돌을 세웁니다. 

 

9절을 봅니다. 

(수 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한 돌입니다. 

이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요단강 중심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상상해 봅시다. 

이 광경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9절에 보면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증거하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차면 그 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 장소, 언약궤가 서 있던 장소에 돌을 두어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왜 여호수아는 요단 물밑에 보이지도 않는 돌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까? 

강물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옛생활은 장사지내고 마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기라. 

그렇지만 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르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돌..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우리의 죄입니다.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가나안, 홍해, 요단강, 법궤, 성막, 계명, 기념비와 같은 수 많은 신앙의 상징물들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신앙의 상징물들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더불어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고난임과 동시에 세례이고 은혜입니다. 

물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 거리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곧 은혜로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세례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 애굽의 나, 광야의 나는 죽고 이제 이젠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거듭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강을 건넙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첫 번째 세례, 바로 중생의 강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를 통해 예전의 나를 죽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성화의 강, 우리 성결교회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세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호수아는 두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는 요단강 가운데 묻어두었던 숨겨진 기념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내 옛 죄와 옛 자아를 죽이고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게 합니다. 

이돌은 은혜가 덮이면 항상 가리우지만 은혜가 마르면 다시금 튀어나와 우리를 자꾸만 옛자아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구원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 살리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건너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여기로 인도하셨다는 찬양의 돌, 확신의 돌, 영광의 돌입니다. 

영광스러운 돌입니다. 산돌입니다. 

 

요단의 강을 건너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기억해야 할 두 가지 기념비, 요단강 가운데 십자가와 함께 장사지낸 우리의 죄, 우리를 새롭게 한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 길갈에 세운 기념비, 오늘의 우리,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통치의 기념비가 항상 우리의 심령안에 새겨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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