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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고독 너머의 기쁨 (열왕기상 13장 3-13절)

by 소리벼리 2022. 10. 9.

고독 너머의 기쁨 (열왕기상 13장 3-13절) 

 

'고독'이라는 말 

고: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 -'고아'라는 의미 

독: 늙어서 자식을 잃은 사람 - '독거' 

그 의미가 합쳐져서 생긴 단어 - 고독 : 홀로 외로이 지내는 쓸쓸함 - 고독을 나타내는 사전적 의미

 

그런데 그 고독은 단지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나 상태가 아니다. 

여러 사람 사이에 둘러 싸여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때,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사이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길 때,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른다거나 할 때

연락처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저장되어 있는데 막상 전화를 하려거나 만나려고 할 때 그 중 아무에게도 전화할 상대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

- 소외감, 혹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고독을 느낄 때, 마치 담배를 한 번에 15개피 피우는 것 만큼 인간의 신체가 노화한다는 연구를 여러 대학이나 단체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저출산, 고령화, 결혼 가치관의 변화, 과학기술의 발달과 100세 장수시대의 도래, 그리고 코로나와 같은 팬데믹의 일상화로 1인 가구 중심의 고독한 삶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집 안에서도 바깥세상의 리얼리티를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과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등의 첨단기술로 실내에서 경험을 할 수 있고, 사람간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SNS를 통해서 가능한 시대입니다. 이제 고독은 일상적 삶의 양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울 도심 - 비싼 원룸에서 홀로 사는 젊은이 - 모든 가구 중에서 1인 가구 비율 - 40 %를 넘겼다. 

뉴욕 - 원룸의 렌트비 6700불 - 대부분 혼자 살아가는 직장인 

늙어서는 어디서? 양로원이나 병원에서 홀로 죽는 인구 비율 - 해 마다 늘어간다. 

 

가족의 품에 둘러 쌓여 유언을 남기고 슬퍼하는 장면이 희귀해 지는 세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오늘 말씀은 고독이 점점 더 깊어가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성경은 어떤 질문과 대답을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서 고독을 - 혼자 있는 쓸쓸함, 외로움으로 정의하였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영성가들은 이 고독의 두 측면을 구분하며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했다. 

loneiiness - 인간 존재의 홀로 있음 - 쓸쓸함과 소외감에 대한 부정적 표현 

solitude -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음" 

나 혼자 홀로 있느냐,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창 2장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 즉 죄가 있기 전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 좋았더라 - It is good이라고 하셨던 하나님이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보고선 창조 이후 처음으로 It is not good - 으로 표현하신 것 

아담이 내가 외롭다고 탄식하거나 요청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님이 혼자 있는 아담을 보시고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 그래서 주신 것 - 돕는 베필 

 

그런데 돕는 베필로 주신 사람이 죄가 들어가니까 서로 탓하고 싸우고 급기야 죽이기까지 한다. 

처음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기의 속 모습을 서로 보여주고 바라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던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죄가 들어가니 숨기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사람 사이는 늘 숨긴다. 옷으로 숨기고 화장으로 숨기고, 때로는 학벌로, 직업으로, 교육으로, 위선으로 서로의 모습을 숨기면서 그 사이에서 더한 고통을 쌓아간다. 

 

하나님이 없는 홀로 있음도 좋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도 좋지 못하다. 아니 더 좋지 못한 경우들이 많다. 

 

고독은 산이 아니라 길에 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인간 '사이'에 있다. 

고독은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공간과 같은 것이다. 

 

미키 기요시, <인생론 노트> 가운데

 

사람 가운데 있어도 여전히 고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을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홀로 됨을 바라만 보시지 않는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고립되어 홀로됨으로 고독을 느끼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영혼의 고독을 느끼던 그분은 고독한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 

 

1. 옐리야의 고독

열왕기상 19장 본문 - 로뎀나무 사건 (몇 번 설교도 하고 심방가서도 전한 본문) 

앞선 18장에서 850명이라는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하여 이기고 승리했던 엘리야에게 급작스런 침체가 찾아온다.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는데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이세벨은 자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850 대 1 로 상대해서 승리했던 엘리야가 이세벨 한 사람의 말에 낙심해서 도망치기 시작한다. 

함께 하던 사환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죽기를 청한다.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극심한 고독의 순간에 하나님만 바라보던, 하나님 주신 사명만을 바라보던 엘리야가 스스로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들어간다. 

비교와 낙심, 고독과 우울감은 엘리야를 점점 더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 때 극심한 그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처방 

5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 구운 떡과 한 병 물 - 주님의 살과 피? 

7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두번씩 와서 그를 어루만진다. - 병간호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 떄로 사람이 하지 못할 돕는 베필의 모습을 하나님꼐서, 그 분의 천사를 보내 하게 하신다. 

일어나 먹으라 - 내 살과 피를 받아 마시라. -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 음식물의 힘으로 어디까지 인도하시나? 하나님의 산 호렙 - 

홀로 남아 인생의 가장 깊은 고독, loneliness- 를 경험하는 엘리야를 하나님을 대면하는 고독, 바로 solitude로 인도하신다. 

 

그렇다고 로뎀나무 아래에는 하나님이 없었는가?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셨고, 그곳에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의 만남 - 무너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로 볼 수도 자신을 바로 볼 수도 없는 그런, 자신 안에 갇힌 고독의 순간이었을 뿐이다. 

 

호렙에 가서야 그는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일방적 탄식이 아닌 비로서 하나님과 대화한다. 기도는 일방적 요청이 아닌 대화이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그가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과 전쟁할 때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 불도 아닌 물도 아닌, 지진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또 다시 말씀하신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키에르케고르 - 죽음에 이르는 병 - 고독 끝에 다가오는 절망 - 실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독 끝의 절망으로 죽음에 이르르는가 

그런데 그러한 고독 끝에 절망하고 있는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루만지시고, 먹이시며 하나님 앞으로 오게 하신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의 소를 듣게 하신다. 그 분의 소리는 살리는 소리이다. 더 이상 인생을 외롭지 않게 하는 소리다.

 

2. 야곱의 고독  

한 군데 본문만 더 보자. 

창세기 32장 이른바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이야기 

 

32장 1-2절)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라반의 집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데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형 에서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다. 그렇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사하며 그 군대를 이끌고 에서에게 나아가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3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1절의 하나님의 사자 - (the Angels of God) 

3절의 사자 - Messengers 

 

그는 자기 사자들을 에서에게 보내며 은혜를 구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도 자신을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자기가 그동안 모았던 모든 가축이며 예물들을 남김없이 에서에게 보내어 살기를 간구한다. 

 

20-21절)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자기가 번 모든 예물 - 형의 감정을 위한 - 그도 장담하지 못하는)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 전전긍긍 - 전혀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들...

 

22-23)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그 밤에 급히 자기 제물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식구들까지도 다 보낸다. - 막다른 상황이다. 절대적 고독의 순간이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1, 2 절에 나왔던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천사 

야곱은 더 나아가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까지 표현 

 

언제? 자신의 모든 것, 물질과 가족까지도 다 보내고 홀로 남았을 때 - 절대 고독의 순간 그가 누구를 보았나. 

바로 하나님의 얼굴 - 그는 그를 보고 이스라엘이 된다. 그의 인생이 바뀌고, 본질이 바뀐다 

고독 너머에서 참 인생을 만난 것이다 

 

 

3. 결론 

만약 자신의 다리로 일어설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한다면, 

그 상대가 생명의 은인이 될지 몰라도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혼자 있으려는 노력이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가운데

 

홀로 있음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홀로 있음을 보고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누군가와 같이 있으려고 살아간다. 

 

그런데 죄로 인해 우리는 같이 있으면서도 온전히 교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관계하지 못한다. 

감추고 가리고 외식하고 위선적으로 만난다. 

그러한 만남은 점점 더 우리의 삶을 고독하게 만든다. 

홀로 있음으로 고독한 것은 좋지 못함이지만 

같이 있는데도 고독한 것은 고통이고 절망이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있음으로 살아가건, 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독을 느끼는 자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은 우리가 고독한 존재로만 살아가게끔 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그분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서, 그분 앞에서만 홀로남기 위해서 우리는 고독의 순간을 이겨야 한다. 

그곳에서 내가 그동안 써왔던 내 페리조나, 교육이나 말투나, 직업이나 명예로 가려왔던 내 모든 옷을 벗어 버리고 

그 분 앞에 홀로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 안에서의 진정한 고독, 바로 solitude이다 

그 고독 너머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는 죽음을 자처했던 엘리야가 끝까지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힘과 목적을 주고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어도 안심하지 못했던 야곱의 이름을, 그의 본질을 이스라엘로 바꾸게 하신다. 

 

가을은 고독한 계절이다. 

이 계절에 고독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그분이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