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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방주교회 (창 6:11-7:3)

by 소리벼리 2023. 1. 8.

방주교회 (창 6:11-7:3) 

 

1. 서론 - 안전치 못한 사회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교회가 입은 가장 심각한 타격: 

교회가 감염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바이러스 - 호흡을 통해, 접촉을 통해 감염 

             - 모여 교제하고 기도하는 곳 -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통로 

             - 물론 교회만 사람들이 모이는 것 아니다. 학교, shpping Mall. 

             -> 교회의 안티 세력의 전략일 수도 있고 희생양이 되기도 하고, 억울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런 비난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직도 예배가 정상화 되지 못한 교회들이 많고, 성도들 스스로 조심하며 몸에 조그만 이상이 있으면 출석을 삼가하기도 한다.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 그 중심에서 개척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중심에서도 안전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성도들 모두 조심하며 올 수 있었던 것 -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 사람들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심 가치 중의 하나 - 안전, Safty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그리고 안전한 곳에 거하십니까?  여러분이 사는 집은 안전하십니까? 

과학은 날로 발전하고 교육도 사람들은 더 많이 받게 되었는데 시대는 점점 불안하게 흘러 갑니다. 

안전하지 못합니다. 

가장 편안히 거해야 할 가정도 안전하지 못하고 가족 구성원들 끼리도 서로 믿지를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살인 범죄 중의 상당량의 퍼센티지 - 가족 안에서 

부모와 자녀간에, 부부간에.....

 

제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생소했던 단어 - 데이트 폭력, 결혼이라는 구속력도 없이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에서 폭력행사? 

층간 소음으로 갈등 - 살인 

 

이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모도 자식도 서로 함께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어하는 이면에는 너무 일찍 부터 떨어져 지내와서 같이 있어도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같이 있으면 편안해도 계속 함께 사는 것은 불편하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 있으려 한다는 보고서도 올라오곤 합니다. 

 

서울 인구의 40% - 일인 주택, 일인 가구 - 홀로 사는 가정 

미국 뉴욕, 선진국일수록 누구랑 같이 있는 것에 대해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점점 고독해지고, 사회성은 점점 사라지고, 이기적인 성향은 더욱 강화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연결되지 못한다. 자꾸만 끊어진다. 

 

2. 본문 

기독교는 예수님의 승천 후 마가 다락방의 성령이 임하시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라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구약을 통털어서 인간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제시하고 있는 최초이자 가장 잘 보여준 본문과 사건은 바로 노아의 방주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처소로서 노아에게 방주를 명하십니다. 

성경은 노아에 대해 "당대에 완전한 자라" (창 6:9)라고 증거합니다. 

당대에 완전했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도 노아만큼은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을 예배 했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 받고, 예배 하는 때에 예배하는 것도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것은 남들은 안하고 떠나고 외면하는 데에 꿋꿋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방주를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세 가지를 명하셨습니다. 

1)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4절) 

칸들을 막는 것은 질서를 세울 것을 말합니다. 배 안에 노아의 가족들과 각 동물의 종류대로 함께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각기 칸을 만들어 무질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존중받아야 할 개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함께 거하기 위해서는 때로 칸들이 필요합니다. 

각 개인의 은사에 맞는 역할이 필요하고 직분을 통해 믿음의 분량에 걸맞는 책임도 필요합니다.

또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는 것은 배 밖의 물이 세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교회 안의 성도들을 뒤흔들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역청은 무엇입니까?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다져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질서 안에 함께 거하면서 믿음으로 무장하는 곳. 이것이 제일 사명입니다. 

어제 송구영신 예배 - 초대교회의 교제 

무작정 사랑하는 교제가 아니라 -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떡을 떼며 기도에 힘쓰는 교제

역청으로 칠하라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도 말씀과 기도로 인해 거룩함을 유지하고 세상의 욕망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2) 15절에 말씀하고 있는 방주의 규모는 한 마디로 하면 "모든 종류의 생물을 담을 수 있도록 안이 넓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좁으면 안됩니다.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한 가족, 몇가족이 좌지 우지 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남들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 날마다 우리 자신을 깨뜨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이 올라갈 수록 점점 더 폐쇄적이 되었습니다. 남들과 구별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언젠가부터 교회가 세상과 마찰이 일어날때마다 교회 안의 언어, 교회 안의 사고방식만을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갔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이해 할 수 있는 상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별히 재정이나 직분 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합니다. 

직분을 주는 데에 상식적이지 않은 차별을 두어선 안됩니다.

교회의 씀씀이나 목회자의 처우에 있어서도 신앙적 상식에 맞아야 합니다. 

어떤 것도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불투명하고 불건전하며 불확실 하면 교회의 거룩함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3) 16절에는 세 층으로 나누어 각기 창을 내고 문을 낼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창을 가지고 있아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닫는 삶을 살게 해선 안됩니다. 각자의 신앙에 맞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상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오래 하고 깊어질수록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깊이 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숙할 수록 나를 보는 눈도 깊어지고, 이웃을 보는 눈은 더 세심해 지고, 세상을 보는 눈은 더 지혜로와 져야만 합니다. 

많은 한국교회가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아얘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멀어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도 따로 떨어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찾아다니셨습니다. 

구약의 거룩함 - 불리됨, 성과 속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그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룩한 곳에서 내려와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자칭 거룩한 자들이 멀리하고 상대하지 않은 사람들과 장소에 가시고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나가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구절은 6장 19절과 7장 2절의 말씀입니다. 

6장 19절에는 "혈육 있는 모든 생물, 암수 한쌍씩 들여오라고 했는데 7장 2절에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들여보내게 합니다. 

6장의 말씀은 방주를 지을 때에 하신 말씀이고 7장은 이제 방주로 들어갈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셨는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처음 배를 지을 때는 오직 노아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자.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을 낳고 그들을 결혼 시킴. 뭘 하면서? 배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런데 의로운 것은 노아 하나였다. 그의 아내와 자녀와 심지어 며느리는 오직 노아를 통해서 방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심지어 노아 마저도 창 6:8절에 보면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증거한다. 

즉 노아도, 노아의 식구들도 방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던 것이다. 

 

부정한 짐승도 방주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부정한 사람도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들어오라는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못 들어온 것 입니다.

 

 

처음 방주는 의인만 들어갈 수 있도록 지어졌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문을 열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얘 내가 의인을 구하고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부정한 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그들이 선한 사람들과 어울려 선한 영향력 안에 들어와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 일곱 있는 곳에 부정한 곳 2명이 들어오면 그럭저럭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정한 사람 7에 선한 사람 둘이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직들은, 제자들은, 성도가 되어서 새신자들, 부정한 자들을 선하게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배를 짓는 기간만 거의 10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홍수 때에 배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아주 쾌적하고 즐거웠을까요? 

밖에는 비가 내려 습기가 가득하고 온갖 종류의 동물들의 소리며 냄새하며 아무리 칸막이가 있고 역청이 발라져 있어도 아수라장 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성막생활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만 해도 고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주 까탈스럽게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성막을 짓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동할 때마다 제일 먼저 성막을 챙기게 하십니다. 40년동안 그 성막을 짊어지고 가는 곳마다 성막을 세우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삶은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교회생활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해야 할 것도 많아 죽겠는데 교회와서도 이것 저것 시키면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거기는 사망의 처소입니다. 홍수가, 애굽이, 가나안의 험한 민족들이 노려보고 있는 곳입니다. 

우는 사자가 먹이감을 노리고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불편함 속에서 훈련하고, 불편함 속에서 구원의 귀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완성된 교회가 있을까요?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것은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완전함을 추구할 때, 이제 되었다고 외칠 때, 그 때 타락이 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순간, 이스라엘의 타락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후에 지어진 스룹바벨, 포로기때에 사람들이 지었던 성전이 더 영화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헤롯이 지은 성전은 더 크고 화려했지만 그곳엔 참 예배가 없었습니다. 

오직 세상 앞에 무릎꿇은 거짓 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만이 로마에서 주는 양식을 먹으며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방주가, 성막이, 스룹바벨 성전이 솔로몬의 성전보다, 헤롯이 지어준 성전보다 더 아름답고 온전한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완성하는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어나가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완성은 하늘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약한 자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나누고 싶은 트레이시제일교회에 대한 비전 

* 방주같은 교회- 이 곳에만 들어오면 안전하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교회. 

이 곳에만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 분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다른 교회는 다 타락했고 우리 교회만 깨끗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곳이랑 비교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없고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도 적어도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예배 드리는 그 교회에 내가 머물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줄 수 있는 교회를 세워가자는 것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어떤 목회자들은 그럽디다. 

교인들 중에 10%만 잘 이끌어도 성공한 목회고 건강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크나 작으나 신실한 자 10%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 분은 자기에게 오는 자, 자기에게 맡기신 영혼, 잃은 양 하나라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맡긴 영혼 단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다시 살리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까지 구원의 선포를 계속하셨습니다. 

비록 배반할 것을 알고, 떠나갈 것을 알았어도 끝까지 가롯 유다의 발을 씻겨가며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세번씩이나 부인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던 제자를 불러 네가 날 사랑하냐? 네가 날 사랑하냐? 세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분이 맡긴 영혼을 의탁하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생명같이 여기고 있는 사명.... 

내게 맡긴 영혼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안전한 교회, 하나님의 방주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러면 여러분, 방주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교회 안으로, 신앙 안으로, 예배 안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꼭대기에서 배를 세우는 노아를 바라보며 비웃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배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은혜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정욕과 욕심과 죄악과 부패와 포악을 벗어던지고 

더 깊이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도록 기도로 역청을 바르고 세겹 층으로, 성도들의 삽겹줄 사랑으로 교제 가운데 거하며, 파도 위를 걸어가면서도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파도 위를 떠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기도하고, 성도들이 아무리 애쓰고 권면해도 결국은 구원은 본인이 받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나의 모든 죄를 그 분 앞에서 사함받고 그 분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렇게 예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하고 영접할 수 있도록 예배와 말씀과 교육을 통해서 거듭되는 복음의 기회를 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 보십시오. 병원에서도 못고치는데 오직 하나님만 고칠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내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부패하고 포악한 친구들 사이에서 병들어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쫓아다니면서 친구들을 멀리하게 하여 아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병들지 않도록, 부패하고 포악해 지지 않도록 방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은혜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세상의 폭풍우가 침범치 못합니다. 하늘을 향해 창문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런 방주 안의 성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평안함과 안식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