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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by 소리벼리 2023. 3. 12.

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l  애굽에 의해 400백여년을 노예로 살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출애굽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게 하고,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에 의해, 그리고 페르시아, 이젠 로마에 의해 긴 긴 한숨의 시간, 400여년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이끌 영적 리더자가 없는 그런 빈 공간의 상태를 지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l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l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l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l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l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l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l  이 오병이어의 현장에 들판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고 있고 전국 각처에서 장정만 5천여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말씀을 듣고 있다.

l  시간이 지나 해가 기울어져 간다. 예수님의 말씀은 끝나질 않고 모인 무리들도 갈 생각을 안한다. 아이들이 보태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자신들도 배가 고프기 시작한다.

l  보다 못한 한 성도님이 걱정하시면서 예수님께 다가가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서 식사를 준비할 수도 음식점도 없으니 이제 말씀 마치시고 무리들에게 돌아가거나 근처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시지요?"

l  이렇게 말하는 한 성도의 말도 사려깊고 예수님을 향해서도 무리들을 향해서도 걱정하며 하는 말일 것이다.

l  그런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그 성도를 향해 예수님이 "여러분이 먹을 것을 좀 주시지요?"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사건을 그저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나에게도, 지금 여기서도 일어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모델이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기지만은 않은 듯하다.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요한복음에 보면 이렇게 대답한 자는 계산이 밝았던 합리적인 제자 빌립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먼저 예산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예산을 채우기 위해 거기에서 모금을 할 수도 있다. 거기 앉아 있는 사람 중에 몇명은 모금에 동참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뜻이 없다.

 

"너희에게 떡이 몇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오천 명이라는 대상을 보지 말고 내가 지금 있는 것을 보라 하신다.

안드레라는 제자가 곁에 있던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온다. 

모세를 불러 바로에게 가라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가 자신은 능력이 없어 못 가겠다고 하니까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고 모세가 가진 지팡이 하나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실어주신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사왕 고레스왕의 칙령과 함께 성전을 지을 제목과 물질을 가지고 미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 처럼 예루살렘에 귀환한다.

귀환하여 가지고 온, 남이 준 물질과 제목으로 성전을 지으려고 하지만 얼마 안가서 몸도 지치고 물질도 떨어지니 성전 짓는 일이 중단이 된다.

그 떄 학개나 스가랴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다시 그들을 일으키는데 그 때 백성들이 비로서 자기가 지닌 것들을 모아 성전을 짓지 시작하자 고레스왕이 보내준 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했던 자원들이 단기간 내에 완성되는 기적을 일군다.

광야에서의 성막도,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도 결국은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이 모아 하나님의 전을 짓게 되는 것이다.

 

l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l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차원높은 서구의 학문으로 기독교가 소개 되었을 때는 흥미는 끌었을지언정 실패했따.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성경으로, 선교사들의 피로 문을 여니 예수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주님은 능력있는 어떤 제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일하실 수 있는 순전한, 믿음있는 제자들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다.

 

l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있는 자가 나누어줄 수 있는 자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나누어 주는 자다.

나누어주는 사람은 이미 부유한 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이 세상에서 자유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2지파의 정탐꾼 - 가나안땅을 정탐하라.

각 지파의 가장 지혜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한다.

열명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땅을 보고 자신을 본다. 그 땅은 너무 좋지만 자신들은 너무 약하다.

그들은 거인이고 자신들은 메뚜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땅도 나쁜 땅이라고 폄하한다. 지혜가 그들의 앞길을 막은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땅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을 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본다.

나는 약하지만 그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을 보니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은 나를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소망을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2년 남짓한 기간동안 우리는 광야를 지내왔고, 없는 중에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혐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개척 3년차를 맞아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믿음을 넘어 "누군가를 먹일 수 있는 사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을 정말 사랑하고 성도님들이 걸어오셨던 인생의 모진 이야기들을 들으며 더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한 사람도 쉽게 사신 분들이 없다. 모지고 고되게 여기까지 오셨다. 그리고 그 모진 인생을 믿음으로, 신앙으로 버텨 오신 분들이기에 더 깊이 사랑한다.

 

교회는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곳이 아니다.

나보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마음만 열면 내가 그 속에서 일할 것이다. 나와 같이 일할 자가 누구인가? 자신의 능력을 넘어 하늘의 권세로서 살 자가 누구인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기념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먹이게 하신다.

 

주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먹이는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