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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사무엘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모델이라고 하는 출애굽 사건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광야생활을 거쳐 드디어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일단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로서 타락하게 되는 과정이 사사기서이다. 사사기서의 주제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그리고 그 왕의 등장을 알리는 성경이 룻기와 사무엘서 

룻기는 이방여인이었던 모압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조상이 되는가하는 내용이고 사무엘서는 어떻게 다윗이 세워지냐를 다룬 책입니다. 

 

사무엘은 실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그 처소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부르기도 하고, 모세 이후의 첫 대 선지자로서도 여겨지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사에서 선지자로,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어찌보면 온 인류의 참 왕이신 예수를 예비했던 세례요한과도 같은 역할이 바로 사무엘 입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부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부친인 엘가나를 소개합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가 있었는데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었더라." (1절) 

이 족보가 나타내 주는 것은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레위 족속인 고핫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에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지만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나누어 주지 않고 6개의 도피성을 비롯한 전국에 퍼져 살게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국에 퍼져 있는 레위인은 퍼져 있는 장소에서 이른바 산당의 예배를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서를 보면 알다시피 이러한 산당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쉽게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기 일수 였습니다. 그나마 경건한 제사장들은 해마다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재교육도 받으면서 그들의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도 그런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 이었지만 실로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멀리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며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중앙에서 떨어져 변방으로 밀려난 레위인이었습니다. 

 

엘가나는 패역한 시대에 나름 레위인으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코자 한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가지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1)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사랑하는 아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인지 당시의 문화 때문인지 엘가나는 둘째 아내 브닌나를 두었는데 브닌나는 자녀를 생산한 여자였습니다. 문제는 이 두 여인 사이에서 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2) 두 번째의 문제는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년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년 가는 이 행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도 있지만 레위인으로서 영적으로 교육받고 무장받고 돌아와 자기 고장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육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지금 실로의 제사를 맞고 있는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로 성전에서 음행을 저지르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패역한 제사장들입니다. 

지금 훌륭한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돌아가도 한 해 동안 사람들을 인도하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자들이 가장 부패하고 패역한 제사장이라면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자들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은 엘가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불행이었습니다. 

 

  • 엘가나의 두 아내인 한나와 브닌나에게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첫째 아내였지만 자녀가 없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자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녀의 영혼을 괴롭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의 이름은 "은총"이라는 뜻인데 자식이 없으니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도 없는 듯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기업과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어딜 가서도 떳떳하지 못했고 남편이 사랑해도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브닌나와 그 자녀의 분깃보다 갑절이나 그녀에게 더 주며 물질적으로 그녀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허전함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남편이 주는 갑절의 물질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내인 브닌나는 자녀를 가진 아내였습니다. 4절에 "그의 모든 자녀에게"라는 표현을 보자면 브닌나는 여러명의 자녀를 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한나에게 가 있습니다. 여러명의 자녀를 낳아도 항상 한나가 더 많은 사랑과 보상을 받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여자에게는 수치 중의 수치 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마치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열매맺지 못하는 아내.... 두 여인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두 여인이 앙숙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면 그나마 평안할 텐데 사랑받지 못하는 브닌나는 "한나를 격붖ㄴ하게 하여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레위인인데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에브라임 산지에 머물고 있는 엘가나... 그나마 한 해의 영적인 무장을 위해 실로로 오면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더욱 영적인 침체를 벗어 날 수 없는 엘가나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린 은혜라는 이름의 여인 한나

자식이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여인 브닌나...

이들의 모습은 단지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주는 모습이요, 어찌보면 우리의 삶과도 대치해 볼 수 있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 문제를 향한 세사람 

세사람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문제는 이들의 힘으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엘가나 - 가장 큰 문제 : 가정의 불화 

이때 엘가나가 한나에게 하는 위로를 보십시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한나에게만 내가 니편이니 울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이 한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의 가장 큰 고통은 브닌나가 자기를 조롱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와서 그 원인도 묻지 않고 단지 내가 널 사랑하니까 다 참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나에게도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만약 브닌나가 이 광경을 보면 더욱 브닌나의 속을 뒤짚어 놓는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편애는 결국 갈등을 낳습니다. 이삭의 편애가 형제의 우애를 깨뜨리고 야곱의 편애가 오히려 요셉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줍니다. 

 

본문에 비친 브닌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요 탐심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가진 것에 분노합니다. 

물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남편을 통해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언제나 한나에게 가서 화풀이를 하고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녀의 질투는 남편의 사랑보다도 한나에게 돌아간 갑절의 물질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러한 시기와 탐심으로 한나를 대하면 대할수록 남편의 사랑은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가?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어찌보면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전가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탓이요 변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기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엘가나에게 탓하지도 않고 브닌나와 맞서서 싸우질 않습니다. 오직 자기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문제를 만난 세명의 인물은 이제 한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문제를 키우고야 마는 엘가나

모든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 앞에 있고 그 해결 역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그 앞에 엎드리는 한나...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우리는 중요한 두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룻과 한나라는 두 여인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모압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베들레헴으로 와서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한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서 자기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며 그 앞에 업드림으로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사람의 대명사가 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흘려도 보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런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큰 구렁이에 빠지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잉태치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선택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고 또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문제가 닥쳤는데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와 브닌나가 되지 마시고 한나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https://youtu.be/IisEzxxHHOg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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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30-32절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막 6:30-막 6:32]

(막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막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막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사도 - apostlle - 대사, 파견된 자, 청지기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 - 6장 7절-13절에 이어지는 말씀 

예수 공생애의 초창기 - 그들이 많이 배워서 가르치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파송하여 사역하게 함.

 

제자- 배우는 자, 따르는 자 Vs 사도 - 일하는 자 

 

  •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한적한 곳- 붉은 순교의 시대가 끝나고 흰색 순교의 시대. 한적한 곳을 찾아 사막으로, 또 사막으로..., 흰색 순교의 시대를 지나 녹색 순교의 시대 

 - 한적한 곳은 장소가 아니라 내 심령의 빈 공간이다. 세상 것으로 가득찬 마음이 아닌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온 우리의 영혼의 공간이다. 

한적한 곳에 나와 하는 일 - 쉬고 음식을 먹으라. 쉼(안식), 음식을 먹으라 (말씀을 들으라) 

왜? 세상에서는 오고 가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 방향을 잃은 사람들, 정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음식 먹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ex) 승구야, 말씀을 읽어라 하시는 말씀.... 

 

  •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갈새 

배- 교회를 상징한다. 노아의 방주,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주님, 내 삶에 들어오신 주님. 

한적한 곳-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곳, 로뎀을 지나 호렙산으로, 안식일은 쉼을 지나 임재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 오이코스 인텐시브 코스 - 학기마지막 수업 - 레이크타호에서 1주일간의 합숙 수업 

                                   -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미국에 체류하기 위해 있는 학부모 

                                   - 1주일간을 집을 떠나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든 사람들... 

                                   

  • 한적한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은 곧 예배이고 그 예배는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다.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 삶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예배를 통해 안식하고 말씀으로 채워진 자에게 주님은 영혼을 먹일 능력을 주신다.

 

야외예배의 의의 

1. 작장인 선교회 박홍일 장로 

주일, 예배당, 성직자 중심의 예배 -> 예배당을 벗어나 함께 어우러지는 교제도 역시 예배이다. 

(인하대 알레데이아, 군대군종, 그리고 징검다리) - 교회 밖에서의 사역) 

 

2. 계시 :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 

일반계시 (성경), 특별계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연계시 (자연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 

 

3. 안식과 예배 (마태복음 12장 1-8절) 안식일날 밀밭 사이로 지나며 이삭을 먹던 제자들) 

  • 예수님과 제자들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회당이 아닌 밀밭, 이삭을 잘라 먹는 일 

 

바로 이전 구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밀밭 사이로 갔는가? 지치고 시장한 자들이 쉬고 먹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눈에 그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회당이 아닌 밀밭에서 이삭을 먹는 것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주일날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 주님과의 소중한 약속 

그런데 반드시 거기에 얽메일 필요는 없다. 

때로 예배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고, 때로 순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런 때라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께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임을, 어느 장소, 어느 순간에서도 주님을 향해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온전한 삶의 예배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은혜 

- 예배가 멈추어지거나 식어가는 때에 개척하게 한 은혜 

-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할 그런 상황에서 한 주도 빠짐없이 이영자 권사님, 케이티 집사님 짐에 함께 모여 안전히 예배하게 하신 은혜 

- 그 중점에서 아름다운 예배처소를 얻게 된 은혜 

-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또한 야외예배까지 드리게 된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https://youtu.be/q_FaqwDSmRs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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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씨름인가?  (창세기 32장 22-32절)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대인들마다 각각 인간의 정의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각 문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인간을 사람 인(人) 자와 사이 간 (間) 자를 써서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 인자 하나를 보아도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따 만든 상형 문자이며 여기에다가 사이 간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사람들 사이라는 사회성,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유학와서 명어로 쓰거나 말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교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라는 말 속에 나를 숨겨서 표현하는) 누가 그랬데....

 

라틴어, 영어권에서 인간 -human- humus - 흙, 먼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성경에서 근거한 어원이지만 결국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덧없음, 먼지, 허무주의, 니힐리즘... 

히브리인- 인간- Ish (욕망, 불덩이) - 인간은 곧 육망하는 존재. 

 

이 욕망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욕망은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의 근원이기도 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선악과의 해석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잘못된 욕망은 곧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고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교만이고 곧 죄의 근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정의 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면서 바라는 말씀에 근거한 선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욕망을 Lust, greed등을 표현하면 죄와 연관되지만 desire, hope등으로 표현하면 선한 갈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한 갈망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큰 갈망은 곧 passion이다. Passion은 그 의미가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가리키는데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그 의미를 보여준다. 

 

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욕망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욕망, 열망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열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볻받으며 따르는 삶 역시 passion 이다, 거룩한 열망을 가지는 삶이다. 

 

이 욕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스리엘 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욕망) + Rah (보다) + El (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 야곱처럼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이겨야지"하는 마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이기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한 잘못된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표현했을까? 

당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32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Ish를 사람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란 의미이지만 어원 그대로 욕망,갈망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영성적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닮기를 갈망하는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도 야곱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왕 다윗, 모세와 엘리야 같은 지도자는 존경해도 자기 롤모델이 야곱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야곱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장면이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신다. 이 씨름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가다듬이 가시는 씨름이 시간이고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옛 성품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씨름이다. 힘겨운 씨름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씨름하시고 우리는 안변할려고 불순종하려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면케 하기 위해서 씨름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바로 우리 안의 죄된 본성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잘못된 욕망에 이끌린 자. -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린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이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끝을 보면 드러납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룹니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악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계속 두려움이 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 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럴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응답해주십니까? 

우선은 내가 자격없고 엉터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야곱은 이제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자격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육탄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돈도 없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최후의 보루로 결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질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길들여 진자. 말씀으로 훈련된 자.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뚝 절뚝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고치고 싶은 것 - 성형 수술 하듯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부분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이름을 바꾼다. 내 본질을 바꾸신다. 

나를 부모의 유전이나, 세상의 풍습에서 떼어 하나님의 가지에 접붙인 자가 되게 하신다. 

 

https://youtu.be/p8xqOlamQDQ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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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영향력 (마태복음 5:13-16) 

 

인간-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으로 지음받은 자.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다. Image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은 물리적인 형상이 아니라 "성품이요, 영이요,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요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존재요,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 나니아 연대기 "를 지은 C.S. 루이스" -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의 친구 

창조의 목적 - 삼위일체로 계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확대시켜 인간을 통해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도록 하는 것 - 왜? 참 사랑은 퍼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기 때문에. 영향력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으로 창조된 사람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듯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곳에 죄가 사라지고, 어둠이 사라지고, 기쁨이 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이미지, 즉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게 하는 대신에 "거짓 이미지, 보이는 형상으로 현혹"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형상으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바울을 그들의 신으로,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포장해 버립니다. 

 

구약의 에스겔이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사의 네 가지 모습 - 사자, 황소, 독수리, 인간 

하나님의 특성을 네가지 동물들에 빗대어 표현 

사복음서의 특징을 이 동물들의 특징을 통해 설명 

사자 - 왕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소 - 종 -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 - 지혜 -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독수리 - 가장 높이 나는 신령한 - 영이신 그리스도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 왕, 인간, 독수리-> 아니다. 오직 자기를 위해 종처럼 일하는 하나님 - 무엇으로? 황금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말은 영이요, 사랑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인데 사탄은 세상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황금으로, 황소로, 아름다운 보석이나 물질로서 바꾸어 섬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 십자가의 형상....

 

세상이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에게 심어놓는 것- "영향력"이 아닌 "보여지는 이미지"에 집중하게 하는 것

 

본질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쓰게 하는 것 

화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의 몸짓 하나하나- 이미지...아이돌-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업- 각광받는다. 이미지를 통해 신화를 만든다. 

 

  • 우리나라 - 양반문화, 체면문화-> 이미지를 중시하는 문화.
  •  성경에서 이미지에 가장  신경쓴 사람

- 사울 - 그의 가장 큰 관심사-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가 범죄했을 때에 먼저 생각한 것-사람들 앞에서 망신....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다윗 : 그의 가장 큰 관심사: 하나님과의 관계. 참 이미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춤을 추고, 하나님 앞에서만 진정 회개하고.... 그의 눈의 관심, 초점- 하나님과의 관계.... 참 이미지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자- 무리를 뚫고 나오는 자- 무리를 뚫고 옷에 손을 대고, 무리를 뚫고 뽕나무로 올라가고, 무리를 뚫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이미지를 버리는 자. 이것이 참된 이미지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 말씀하신 것

소금이 되라. - 소금의 의미가 무엇인가? 소금이 되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 아이들은 설탕을 좋아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금 - 설탕은 성인병을 유발하지만 소금은 치료.. 인간의 몸은 물과 소금... 

 

1. 소금은 흔하다. - 낮은 자에게, 보통 사람에게 주신 말씀. 부패방지 

세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그런데 성경은 통치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문제투성이인 애통하는 자를 불러내어 세상의 평화를 만들고 부패를 방지하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지쳐 밥먹을 시간 조차 없었던 제자들에게 수많은 무리를 가리키시며 "너희가 주어라 "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성령께서 함께 그 일을 이루어 가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어부, 농부들과 같은 서민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세상이 부패되는 것을 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밑에서부터의 개혁,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를 살았던 이스라엘을 통해 로마가 복음으로 정복되었습니다.  

 

2. 맛을 내라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살맛 나는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싱거운 남편을 멋과 맛을 내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내의 소금역할 입니다. 싱거운 아내를 멋과 맛을 내는 아내로 만드는 것이 신앙 있는 남편이 할 일입니다. 무엇으로 맛을 내게 합니까?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통해서 싱거운 세상, 더러운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어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맛을 내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이 죽어 세상의 맛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3. 살리는 자가 되라 (공동체) 

소금은 우리의 인체에서도 음식물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지만 소금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이 중요하다 해도 소금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의 진정한 맛은 자신의 짠 성질로 인해 다른 것을 살릴 때에 그것이 비로소 소금의 진정한 맛입니다. 즉 소금은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이란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과자에 들어가면 과자의 맛을 살리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을 살리고, 여러 가지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을 살립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서 그 음식의 본래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그것이 소금의 맛입니다.

만약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다른 양념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짠 맛만 나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소금이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이 나야지 소금의 짠 맛만을 내면 이미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소금 그 자체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소금은 아무 매력도 없는 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은 짠 맛이 아니라 살리는 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의 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 성품이 녹아져서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내가 녹지 않고, 소금 그대로의 맛을 내려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입니다. 자기만을 나타내는 인생, 자신만을 드러내고 인기를 누리는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영성의 완성은 홀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성도는 별거 없다. 공동체를 잘 이루면 그 성도 영성이 참 좋다 생각하면 100% 맞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사는 지역에 마을 공동체, 일터 공동체, 가정 공동체를 잘 이루는 사람이 진짜다." 

한국교회 영성에 큰 영향력을 준 동교동 교회 음동성 목사의 말 

 

반대로 맛을 잃어 어디에도 쓸모없는 소금이란 바로 자기 자존심에 갇힌 사람입니다. 자존심만을 꼭 쥐고 있어서 자신이 항상 잘하고 자기 말이 항상 맞는 틀림 없는 말이며, 자신만이 항상 깨끗함을 나타내는 사람은 맛을 낼 수 없는 소금과 같이 후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자기 맛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결국은 음식과 함께 버려지고 맙니다. 나도 죽고 공동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들의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 그 자체가 악이므로 나를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고 그를 높여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힘은 자존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자존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누구에게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귀한 여인이 되도록 받들게 됩니다. 또한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이 고귀한 사람으로서 어디에 가든지 존경 받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이 영광 받으실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빛이 될까를 위해 자기를 녹입니다. 
  •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행복하고 고귀하게 자라게 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남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자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나에게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생명이므로 반드시 자라게 합니다.

자존심은 생명을 막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막습니다. 남을 막다가 나도 죽고 남도 죽고 공동체도 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 혼자 서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정의 자체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 인자는 누군가 있을 때에 내가 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세워 줄 때에 나도 서고 그도 섭니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라지 못합니다. 자존심 가진 사람이 당할 것은 곧 죽음입니다. 남을 자라지 못하게 하므로 나도 자라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빛이 되라 하십니다. 

  •  빛은 비추기 위해 있습니다. 남을 비추기 위해 있는 것이지 자기 자랑을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비추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런데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멉니다. 태양의 빛은 비추어 주는 사물을 통해 태양을 아는 것입니다. 내 빛이 아무리 빛나도 비취는 대상이 없다면 내 빛은 남의 눈을 멀게 하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자신을 비추고 빛을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등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교회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제 역할을 하는지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곳은 사찰입니다. 문화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갖가지 명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찰이 부패했다고 조사하며 신문에 내고 방송에 내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기 저기서 감시합니다. 억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산 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 위에 두어서 세상을 비취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https://youtu.be/idN2LL1YvCM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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