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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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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9-29절  제자들의 고백 

 

어떤 원본에는 마가복음이 16장 8절로서 끝남 

9절부터 나머지 부분 - 추가로 들어간 부분

 

그 내용은 무엇인가? 

 

1. 여인들의 증언 

11절) 그들은 (예수의 12제자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꾸짖으시는 예수님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12제자들은 사도들로서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들 

예수를 친히 만나, 함께 동거동락하며 그 분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진 자들.. 

제자들의 권위가 강력했을 때에...

 

왜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제자들의 수치스러운 실패를 궂이 기록해야만 했을까? 

 

끝에 부분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며, 늘 실수하고, 다투며, 배반하는 모습들...

오히려 이방인의 믿음이, 여인들의 믿음이 복음서에서는 크게 부각된다. 

제자들 틈에 끼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구레네 시몬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신실하게 등장한다.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서의 기록자라면 자신의 리더십을 위해서라도 무용담 하나쯤은 추가하여 제자들로서의 위신도 세우고 권위도 내세울 수 있었을텐데....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고 

성령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그리고 있음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실패와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현장을 도망해야만 했던 처절한 죄의 고백이고 부끄러움에 대한 눈물의 참회록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실패한 그들에게 Great Commission, 바로 대 사명을 남기신다.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눅 24:48-4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하신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사명은 바리새인처럼 내가 남들보다 훨씬 잘 믿었다고 의기양양대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가 왔음에도 자기 자리에 급급해서 오히려 메시야를 죽였던 거짓 통치자들에게 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히 알아 주님 앞에 늘 겸손함으로, 나의 낮음과 그 분의 크심을 아는 자들, 경험한 자들, 그래서 오직 예수 앞에 서면 한없이 머리 숙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사명이다. 

그러한 자들만이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며

남을 정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워주고 보살피면서 주의 길을 가는 것이며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지난 두 달 넘는 기간동안 마가복음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의 길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감추어져있던 수많은 신실한 자들의 모습들과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였던 많은 리더자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의 교회, 그 교회에 서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느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찬양) 눈물의 참회록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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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1-8절  빈 무덤 

 

안식일이 지났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일찍

해 돋을 때에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간다. 

세 여인이 해 돋을 때에 모여 무덤에 간다는 것은 셋이 밤을 새었을 것이다. 

단지 죽은 예수의 시체가 썩지 않도록 향품을 바르러 간 것이다. 

 

마치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 "낭비"라고 하는 제자들의 원성을 들었던 것처럼 

남자제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사다두었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가를 여인 셋이 찾은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들의 무모함이 있었다. 

당시의 무덤은 땅 밑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동굴처럼 지상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입구에는 장정 몇명이 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큰 돌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여인 셋이 아무리 힘을 합쳐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큰 돌이다.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심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모두가 돌아서서 초라하게 죽은 시체 앞에 여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았을까? 

무언가를 바랬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 앞에 뿔뿔히 도망했다. 

여인들은 오히려 예수 앞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죽은 예수를, 그것도 뜬눈으로 밤을 새워, 자기 돈을로 향품을 사서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기도 하기 앞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을 비우는 훈련을 했다. 

자기 마음이 더러우면 예수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여"라는 한 마디를 내 뱉기 전에 마음 속에 조그마한 잡념이나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기도를 방해할까봐 자기 마음을 온전히 비운 후에야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하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훈련하고,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물론 기도는 어려워서는 안된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이기에 내 마음으로 다가가면 그 분은 내 기도를 들으신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기도를 들여다보면, 끝난 뒤에 무엇을 이야기 했는지, 주님이 느껴졌는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수두룩 하다. 

무언가 잔뜩 부르짖기도, 간구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내 마음의 한풀이로 자기 감정의 정화만을 남긴채 아무런 교제 없이 기도의 처소를 나올 때도 많다. 

여인들은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돌 문이 막혀 있음에도, 새벽 녁 자신들의 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바램 때문에 오히려 예수의 얼굴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르짖어도 내 뜻에 요동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에 실망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은가? 

그 바램이라는 것이 정말 주님의 존재를 대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인가? 

 

(요한복음 11장 38-39)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십자가의 사건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방해한 것은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다. 

 

죽은 예수의 무덤 앞에서 여인들 외에 아무도 예수의 무덤을 찾지 않은 이유도 아마도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돌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하고 이미 치워져 있었다. 예수님에게 무덤의 돌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장애는 그 돌 때문에 예수 앞에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내 의식이 문제이다. 

 

우리에게도 예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돌들이 있다. 

죄책감, 두려움, 누군가에 대한 풀지 못한 감정, 무지...

그런데 예수 앞에 서는 순간 그 모든 돌들은 사라진다. 수 많은 돌들은 그저 예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형틀인 것이다. 

 

묵상질문) 

1. 오직 예수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바램이 없었기에 예수의 부활에 동참한 여인들을 묵상해 봅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바램들은 무엇입니까? 

 

2. 나로 하여금 예수 앞에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은 무엇입니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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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42-46절 아리마대 요셉 

 

고난 주간에 겹치는 부분이 많고 또한 매해 돌아오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해 예수의 죽음은 남겨두기로 하자. 

오늘 나눌 중심인물은 아리마대 요셉이다. 

 

불과 일 주일 전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는 환호와 기대였다.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는가? 오병이어 때와 마찬가지로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서다. 자기 유익을 구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다.

 

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주를 떠나고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무리들이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니까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치는 군중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이 때에 돌연 나타나 주님과 함께 했던 자가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 -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던 자 - 요한복음 3장에 밤 중에 예수를 찾았던 자 - 니고데모처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자 -

 

누가복음 23장 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복음 15장 43절)

 

마가복음의 기사 - 당돌했다. -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 - 에스더서에 보면 왕비라 할 지라도 왕에게 요구하는 것 - 목숨을 건 행동

 

그리고 행한 것 -자신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냄

마태복음 27장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

 

당시의 무덤 - 개인의 묘라기 보다는 가문, 가족의 묘

예수 - 공식적으로는 사형수

 

  • 요셉의 행동- 목숨을 담보로 한 당돌한 행동

- 가문의 명예를 실추 할 수 있는...

-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다 잃을 수 있는 행동

그런데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 -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였음을 숨겼던 그가 죽은 시체가 된 예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의 시체를 장사 지낼 뿐만 아니라 모두가 버리고 간 예수의 시체를 위해 자신의, 자기 가족의 무덤을 내어 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복음서는 모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을 위해 헌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삶을 헌신했다는 말이다. 

 

  • 외경 - 빌라도 행전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후에 예수의 시체를 빼 돌린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서 40년형을 선고

감옥 속에서 예수가 나타나 예수의 피가 담긴 성배를 주고 가서 그 성배의 힘으로 감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언급

초대교회 유명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감옥에서 풀려난 아리마대 요셉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하고 있고 영국은 실재로 아리마데 요셉을 영국 기독교의 창시자로 정하고 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성배를 찾아 기사들이 모험하는 내용이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인 그 유명한 아서왕 이야기.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에나 존스도 그 성배를 찾아 떠나는 여행 - 그 영화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한복음 19장 41절)

At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there was a garden, in the garden a new tomb, in which no one had ever been laid.

 

눈에 띄는 대목 -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에는 무덤이 있는데 사람이 놓여 있지 않은 무덤이다.

 

  • 성경에는 동산이리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 동산은 히브리어로 "칸"이라고 부르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칸이라는 말을 낙원 (paradise)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 고대 교부 가운데 시릴(Cyril)이라는 사람은 에덴 동산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철학자 파스칼도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에덴동산은 그 뜻이 "즐거움, 기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그 동산을 파괴하였다. 아무도 거할 수 없는 동산이 되어 버리게 했다. 최상의 장소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최악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멸망의 동산이 되었고. 추방의 동산이 되어 버렸고 죄의 발원지가 되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동산을 회복하신다.

요한복음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고 한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다. 요한복음 19:41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말한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바로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 동신에 있었다.

 

겟세마네라는 의미는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이다.

감람 열매의 기름을 짠 곳이므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몸의 진액을 짜면서 기도하셨다.

구원은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왜 에덴 동산에 무덤이 있었는가?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덤에 사람을 죽게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떠나있게 한 후에 그 무덤의 주인으로 예수를 눕게 하신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그 무덤 속에 장사지내었다가 그 무덤은 영원한 빈 무덤, 즉 생명이 된다. 

 

우리에게 다시금 에덴을, 기쁨을,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 주신 최상의 것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파괴의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는 그 무덤을 다시금 빈 무덤 되게 하신다. 광야를 에덴 되게 하신다. 죄악으로 무너진 모든 것을 다시 에덴으로, 축복으로, 구원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무덤의 주인, 자기가 죽어야 할 그 무덤을 주님께 드린 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지위를 잃고 죄수가 되지만 결국 무덤에서 나와 영국이라는 기독교 국가의 복음의 전설이 된 사람. 

그가 버린 모든 지위는 결국 자기가 죽어 놓일 무덤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을 주께 드리자 모든 인류가 잃어버렸던 실낙원, 에덴이 회복된다. 

 

묵상 질문) 

1. 늘 예수를 따르다가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를 버린 사람들과, 늘 피하는 자였지만 십자가의 현장에서 주님을 장사지낸 자를 묵상해봅시다. 늘 예수를 따르며 십자가의 현장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2. 예수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놓아 버리지 못하는 자신 만의 무덤이 있습니까? 

 

찬양) 짐이 무거우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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