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문을 부수는 복음 (사도행전 16장 21-26절)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 믿는 그리스도 공동체, 즉 교회의 시작 및 그 복음이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지를 기록한 생생한 신앙의 역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 사도행전 16장의 기사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을 다루며 어떻게 기독교가 유럽에까지 전해지는가에 대한 배경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을 통해서 사람의 계획과 기대를 넘어 뜻밖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순간을 함께 나누어 볼까 합니다.
1. 자신의 계획하지 않은 땅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도착한 땅- 마게도냐의 첫 번째 도시 빌립보
자신의 계획 - 1차 선교여행지를 되돌아 보자! (자신이 친숙한 땅 아시아, 이스라엘 인접한 도시 -> 전혀 알지 못하는 마게도냐 땅으로 인도) ->
거기서 두아드라 출신의 옷감장사-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세탁소를 운영하는 루디아를 만나 그 집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
2. 그 곳에서 점 치는 한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서 "이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라고 며칠이고 소리치며 다님 ->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행 16:17-18)
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외치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심히 괴로워 했을까?
그녀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실이 아닌가?
오히려 귀신 들린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며 선전하는 것은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심히 괴로워 했을까?
저 같으면 하나님께서 귀신들린 자의 입술을 통해서라도 전도의 문을 여시는구나 하지 않았을까?
바울 뿐만 아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때에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가 다가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하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곧 귀신을 나가게 합니다.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건 그 말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과 삶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구주가 되어 그 분의 길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화려한 미사여구요 공치사일 뿐입니다.
주의 종이 세상의 이런 칭찬과 공치사에 취하게 되면 겉으로는 인정받는 것 같지만 아무런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복음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지 그 분을 따르지 않는 귀신이나 이방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3. 귀신들린 자가 나오자 주인은 오히려 화를 내고 신고하여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갇히게 한다.
귀신을 쫓는데 왜 그들을 감옥에 갇히게 하는가? 그들은 구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배요, 이익만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귀신의 정체요, 또한 세상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건,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건 그것은 딴 세상의 이야기이지 자신들의 이익을 해하면 그들이 누구이건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거라사 지방의 군대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쫓았을 적에 그 마을 사람들은 귀신 쫓은 자를 바라보며 기뻐하거나 그를 낫게 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과 함꼐 몰살당한 돼지로 인해 예수를 그 마을 밖으로 몰아냅니다.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복음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 바울이 그렇듯 때로 다른 세계관, 신앙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
그들은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이라 하며 복음을 거부합니다" (21절)
자기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세상에 속한 자들 앞에서 복음은 받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못할 길입니다. (때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왜 이 좋은 복음을 믿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때로는 한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기적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한 영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때로 복음을 전하는 자, 복음대로 사는 자가 세상에서 다치고 갇히고 고난을 당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예수믿는 일세대, 가정에서 제사 드리지 않는 자라고 가족 모임에도 가지 못하고, 또 기록을 보면 귀신들을 섬기는 가정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 가족 가운데 병들거나 죽는 일도 생겨 가족들로 부터 모진 고난을 받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었는데 그런 일을 만나면 당황스럽고 왜 예수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나타날까 곤혹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음의 능력과 결과는 그들이 고난을 피해간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어떻게 맞이하고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생의 물과 불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 가운데를 지나고 불 가운데를 지나도 주께서 함꼐 하시면 주와 함께 이겨가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믿는 자의 능력입니다.
4. 그 감옥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매 맞았고, 그들의 발은 차꼬에 체워졌고 간수들이 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듯 합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는 자유를 제한 받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을 제한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감옥 속에서도, 쇠사슬에 매인 채로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찬양은 죄수들의 영혼을 울리고, 감옥의 문을 열며 간수장들을 얼어붓게 합니다.
간수가 바울과 죄수를 가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감옥을 다스리는 간수장들이 찾아와 바울과 실라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도움을 구합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자가 기도하는 자가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31절)
나는 이런 일들이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 환경이 나를 가둘 수 없습니다.
감옥과도 같은 환경 속에서 기도와 찬양을 통해 감옥문을 부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의 일들을 통해 감옥 속에 갇힌,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매인 것들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자들이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고 믿음의 비밀을 묻습니다.
- 추수감사절의 유래
오늘은 추수 감사절 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와는 다른 미국에 정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날입니다.
부패된 가톨릭과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성공회에 의해 핍박당하던 영국의 청교도 100여명이 메이플라호라는 배를 타고 한달이 훨씬 넘는 항해를 통해 절반가까이는 배 속에서, 또는 도착하여 한 해를 보내는 중에 죽고 남은 자들이 한 해 동안의 모진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그들에게 열매를 주고 믿을 수 있는 자유를 기뻐하며 인근의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함께 드린 예배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이플라호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몇 번은 들어보셨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메이플라호를 타고 아직 전혀 개척되지 않은 북미로 가는 사람들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또 다른 개척지 남미로 향하는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목적이긴 했지만 그들이 남미로 향한 또 다른 큰 목적은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입니다.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하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언제나 그들의 우선순위는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믿음 앞에 물론 큰 고난도 많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들이 드린 첫 예배는 모든 개신교가 함꼐 기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활금을 찾아 헤메다가 황금이 주는 향락 속에서 서서히 믿음도 잃어버리며 어떠한 영향력도 발하지 못하는 잊혀진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남미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 - 아마존이라는 풍부한 물과 북미보다 훨씬 풍부한 지하광물과 축복된 자연환경에서 이렇게 가난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풍부한 환경에 취해 신앙을 잃어버리니 물질이 그들을 보장헤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라집니다.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처음 몇년은 남미로 간 사람들은 북미의 청교도들보다 좋은 선택을 했다고 안심하며 물질적인 풍요를 즐겼을 것이지만 그런 과정 중에 한 번 잃어버린 신앙은 도무지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국을 떠나는 믿음 -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믿음,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 찾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여정은 아브라함이나 다른 신앙의 위인들이 보여준 것처럼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여정, 고통의 여정, 죽음의 여정이었습니다.
- 그런고 그 여정 끝에 드리는 감사와 나눔의 예배가 바로 추수 감사절이었다.
- 그들은 무엇을 감사했을까? 죽은 사람들을 기리며 어떻게 슬픔을 극복했을까?
- 어떻게 그들은 그 와중에 예배 했고, 그 와중에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랑을 나누었고, 그 슬픔 중에 기도하며 찬양했을까?
- 이런 고난의 여정을 통해서 그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이길 수 있는 마음, 어떤 어려움도 맞서며 극복할 수 있는 개척자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신앙의 밑바탕이 있었기에 훨씬 오랜 후에 똑같이 황금을 찾아 떠나는 서부 개척시대를 맞이할지라도 그들의 믿음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고 신앙의 부흥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는 상황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다. 공치사가 아니라 하나님 신앙의 적극적 표현이다.
주보에 실린 글....
우리 삶에 감사가 없다면....행복이란 없을 것이다. 감사는 곧 행복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고난 중에 기적을 잉태게 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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