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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15장 1-15절 본디오 빌라도

by 소리벼리 2021. 5. 8.

마가복음 15장 1-15절 본디오 빌라도

 

본디오 빌라도, 영어로는 (Pontius Pilatus) 서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한 로마로부터 파견된 유다의 총독 

사실 로마의 역사의 기록에 빌라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를 유대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 아닐까 하는 말들까지도 있었지만,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그의 이름이 유다의 총독으로 새겨진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어 그가 실존인물임에는 여지가 없게 되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거의 매주 수억명에 해당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장본인으로 그의 이름이 저주에 가깝게 등장하지만 복음서에 기독된 모습을 보면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를 놓아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예수에게 일어난 재판 

1. 정치적 재판 - 종교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 사형이다. "신성모독죄" 그런데 로마의 치하에서 그들에게 사형권이 없자 유다를 다스리는 빌라도의 법정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2. 정치적 재판 - 빌라도, 로마법에 의해서 당시 식민국의 종교문제에 포용적이고 중립적이었던 로마의 법상, 예수를 처형할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 덧붙인 것이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가이샤에게 세금을 거부토록 했다. 백성을 소란케 했다는 등 여러가지 죄목을 붙여 고소한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빌라도의 법정이 간략히 소개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를 종합해서 빌라도의 행적을 살펴보자. 

누가복음 23장 - 빌라도의 재판 

  • 1차 무죄선고 

4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1차 무죄 선고) 

  • 2차 무죄 선고 

14-16절) 이르되 너희가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  3차 무죄선고

22-23절)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태복음에는 이 재판의 이면에 일어난 좀 더 자세한 배경을 소개합니다. 

마 27:18-19)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리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마 27:24-25)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합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빌라도는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시기로 인해 고소가 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의 메시지를 통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정말로 원치 않았던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나름대로 예수를 놓아주려고 세 번이나 무죄를 선고했고, 유월절 사면을 통해서라도 또 한 번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손을 씼으며 말했던 것 처럼 "이 정도까지 했으면...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에 의해" 혹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운 진술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이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우리는 고백한다. 

참 억울할 것 같은 일이다. 

 

여러분이 빌라도, 혹은 빌라도의 후예라면 억울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에게는 두 가지 소리가, 또 두가지 선택이 항상 있었다. 

하나는 그의 양심과 그의 아내 (영적으로는 자기의 내면의 소리라가 할 수 있는) 예수에 대한 고백이 있었고

그리고 대 제사장 및 소위 무리들이, 군중들이, 여론이, 남들이 내는 소리가 있었다. 

 

우리 내면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가 일치 할 때는 힘든 일이 없다. 그저 그 소리에 순종하면서 가면 된다. 

그런데 우리 내면의 소리, 혹은 빛의 소리, 양심의 소리, 성령의 소리가 우리 외부의 소리, 다른 사람들의 소리, 여론과 갈등할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빌라도는 재판장이었다. 그는 모든 재판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물론 백성의 소리와 고소인, 피고인의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결과에 대한 결정권자로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를 행동하고 선택하게 되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다. 

우리의 양심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 그런데 이런 소리와 다른 소리를 내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도 무리들의 소리, 나를 움직이려 하는 더 큰 세력들이, 권세자들이 내는 소리. 

그러나 우리가 결정짓는 모든 행동의 책임은 결국 내가 지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의 결과는 핑계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모든 상황보다 우선해서 섬길 수 있는가? 순종할 수 있는가? 따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선택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다. 바로 주 앞에서 내가 하는 고백인 것이다. 

 

질문) 

1.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앎에도 블구하고 다른 환경이나 사람들의 소리로 인해 불순종한 기억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나에게 주는 깨달음과 교훈은 무엇입니까? 

 

찬양) 나 무엇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