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자 (눅 5:4-5)
교회에 대한 비전 = 한 성도를 교회로 세우는 목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교회된 성도
교회가 무엇인가 할 때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 베드로
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8절, 예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니"
반석- "베드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
그 지역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수장으로 여기는 로마 교회가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하면서 교황권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주장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세운 집 - 반석은 그리스도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이다. -> 개신교의 해석
베드로의 삶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연약한 한 인간을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끈질김, 그리고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특별히 오늘 소개하고 있는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생을 이끌어가신다. (오직 누가복음만이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1-2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3절에 보면 두 척의,배 중 한 배는 바로 시몬의 배였다.
1. 분명 예수가 말씀하시는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부터 듣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2. 바닷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또다른 자들을 주목하고 계셨다.
그곳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는 있지만 앉아있기는 한데 말씀과 상관없이 그물을 닦는 자들이 있다. 바로 어부들의 무리다.
어부는 고기낚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우선순위는, 관심은 오직 고기낚는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관심이 그물에, 고기에, 먹고 사는 일에, 오늘 잡히지 않는 고기에, 내일 걱정에 꽂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있는가?
-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1. 시몬의 배에 올랐다.
배에 올랐다는 것은 내 인생에 그가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 내 인생에 개입하셨다. 언제나 주님이 먼저 오신다.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찾아오신다.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다.
2.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무리와 베드로 사이에 서 계시던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멀어지셨다. 육지에서 멀어졌다는 표현은 땅의 관심에서 베드로를 떨어뜨린 것이다. 땅에 것에 꽂혀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앞에서 말씀하셔도 그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 밭이 돌짝밭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서 떨어진 것은 무리에서 멀어져 베드로에게 오신 것이다.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라는 한 인격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씀은 여전히 무리들을 향한 말씀일 뿐이다.
-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다.
오늘 걱정도 걱정이지만 또 내일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데도 그물을 닦았다.
허탕치고 그물을 씻는 기분이 어떨까? 좋을리 없다. 짜증은 짜증대로 깊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또 그물을 씻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모습은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세월좋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내 배에 올라오신다.
기분이 좋았을까? 아니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라 명령하신다.
그물 다 씻어놀고 내일 준비 다 해놓았는데, 계획도 다 세워놓고 이젠 쉴 일만 남았는데 또 배를 움직이라 하신다. 평소 베드로 성격이라면 벌컥 화를 낼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릴리 없다. 억지로 순종은 하지만 주님은 날 보며 말씀하시는데 아얘 귀를 닫고 외면한다.
그래서 주님은 더욱 베드로와 가까워 졌는데 말씀은 여전히 무리를 향한 말씀으로 표현된다.
-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 더 이상 무리를 향한 말씀은 끝이 났다. 이젠 직접적으로 말씀이 베드로를 향한다. 핑계될 구석이 없다. 마치 불순종하는 요나의 귀에 대고 하나님이 소리치는 것처럼 애써 성질 참아가며 억눌르며 피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2. 이 말씀은 불순종할 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시간적으로 이제는 피곤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고, 작은 고기배로 가기엔 말두 안돼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시고, 그리고 그물도 다 씻어 정비해 놓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말두 안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불순종할 이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일어났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고 그물을 낚던 그가 말두 안되는, 정말 상식밖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도 불순종의 반응이 아닌 순종의 반응
- 5절) 선생님 (Master, 주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한 마디로 시몬의 인생은 한낱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 그것도 사람낚는 어부 중에서도 예수의 수제자, 반석이라 불리는 자가 된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의 공통점 - 둘 다 모두에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친다.
고난이 없다는 말이 없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온다. 반석같은 믿음이 있어도 고난이 오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에게도 고난은 온다. 우리의 착각 -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고난이 오나요?
열심이 믿으면 고난 안받는다고 어디 나와 있는가? 성경은 열심히 믿는데 나요?
반석 위의 사람과 모래 위의 사람 - 둘 다 듣는다. 말씀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씀을 외면하면 아얘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고 은혜 받았다고, 깨달았다고, 반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석은 순종할 때 주어지는 은혜다. 행동의 열매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 말씀 듣고 간증을 들으면 나도 믿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감정이 움직인다고 내 믿음이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 완성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약 1: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나에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애쓰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도 넘어짐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없고 끝까지 자신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고 더욱 말씀을 붙잡는다. 세상의 여건과 환경이 나쁠 때 더 실력발휘를 하고 더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 깊은 데로 가라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얕은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것이다.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살고 있다. 깊은 곳에는 조금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 얕은 물이 안전하니까.. 깊은 물의 파도를 두려워 하고 단지 쉽게 피할 수 있는 얕은 물 가에서 산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고난 없기 위해, 남들처럼 살기 위해...
간증)
고 3 때 수련회 떄, 강원도 수련회에서 그 지역 초등학생들 앞에서 물에 빠진 경험.
수치와 두려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때까지 물을 피했다.
프리몬트에 처음 이사해서 얻은 아파트 바로 문 밖에 공용 수영장. 작은 수영장이었는데도 물이 깊은 데는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한솔이가 초등학교 2학년, 한별이는 K.
여름에 더우니까 거의 매일같이 수영하자고 조른다. 난 아이들을 보고...아이들이 물에서 같이 놀자고...
애들 앞에서 창피하니까 두려운 기색 않하고 들어갔다. 애들은 내 키가 넘는 깊은 데를 겁도 없이 들어간다.
매일같이 애들을 보니 조금 오기도 나고 정말 더운 날씨에 나도 수영도 하고 싶었다. 좋은 물안경도 구입하고 얕은 물에서부터 잠수도 했다.
조금씩 적응하며 물에 익숙해지다가 그만 발이 안 닿는 데까지 들어갔다. 허우적 거리고, 처음에는 애들 앞이라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발이 안 닿으니 점점 겁이 나고...
그 때 한솔이가 날 보다가 소리쳤다. "아빠 힘 빼,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물에 떠....손도 발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물에 누워..."
그 소리가 내 귀에 박히듯이 들렸다.
힘을 쓰고 용을 쓸 때는 점점 빠져 가던 내가 힘을 빼니까 물에 뜨기 시작했다.
물에 빠졌을 때도 힘을 빼고 눈을 뜨니까 물 속의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별세상이었다.
찬송가 302장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보네
- 믿음의 삶: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모험적인 삶, 위험한 삶.. 그래서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길 주저한다.
-> "만일 내가 주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면 그분은 나를 광신도로 만들어 버리실 거야. 그럼 내 가정도 내 삶도 엉망이 되겠지… 친구들도 다 떠날거야. 적당히 믿어야지…" -> 얕은 물 신앙. 너무도 많은 신앙의 비밀들을 놓치고 만다.
- 하나님의 계획: 좋은 것, 완전한 것,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한 것
- 지금도 원하시는 예수님의 요청: 나를 네 배에 태우라. 네가 어디로 가든 너의 사업, 너의 가정, 너의 결혼을 비롯한 네 삶의 모든 영역에 내가 함께 하게 하라. 내가 널 온전케 하리라."
- 결말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낚는 어부(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음.
자기가 최고의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던 것을 순종하니 주님이 이루심.
주님 따르며 세상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내가 온 힘을 쏟아도 얻을 수 없는 세상도 얻는다. 왜? 세상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이지만 그건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 지금 너무 힘들다.
-> 그런 힘듦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힘들기에 날 따르라는 것이다.
힘드니까 이젠 너의지 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너의 집을, 너의 배를 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안되는 길로 가면....
난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얕은 물이 아닌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개척을 위해 기도할 때 주신 비전이다. 그렇게 깊은 물의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고, 그런 목회를 하리라 기도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귀만 발전하는 교인이 아니라, 듣고 행하여 내 것이 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와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자들이 되기를...
성경에서 물은 이중의 의미다.
하나는 고난과 죽음이고, 동시에 그 물은 구원이고 세례다.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나누었지만 물을 건너는 사건이 성경에 여러번 등장한다.
모세-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 (중생의 은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여호수아- 법궤를 앞에두고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제사장이 먼저 발을 담그라. 말씀 따라, 리더 따라 순종하는 믿음
엘리야와 엘리사 - 옷을 가지고 물결을 가른다. (옷은 곧 능력)- 순종을 넘어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긴다.
베드로 - 물결 위를 걸어간다. 파도는 여전히 친다. 그런데 그 파도 위를 주님 바라보고 걷는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해가지 않고, 고난 위를 묵묵히 걷는다.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신앙이다.
유일하게 물을 건너면서 실패한 예를 남긴다. 베드로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한 원인을 주님을 바라보다가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성경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사건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다.
너희는 그 물을 건널 수 있느냐? 난 이미 답을 주었다. 어떤 물도 주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신다.
나에게도 트레이시 제일교회의 사역은 내 인생의 마지막 항해이기를 꿈꾼다. 여기 계신 두 분의 장로님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도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함께 하는 이 항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어떤 바다를 건널까? 얕은 물 가에서 안전히, 빠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길을 갈까? 아니 그 길이 과연 편안할까?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 배는 작지만 깊은 물을 향해 나아가 볼까? 함께 하는 항해라면, 그리고 분명 주님이 계시기에 외롭지 않고, 정말 기대가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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