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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시편 109편 26-31절)

by 소리벼리 2021. 1. 28.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시편 109편 26-31절) 

 

지난 주 설교 -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쓰시는가? 금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달은 우리는 모두 나무그릇, 질그릇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를 깨끗이 하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더럽히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다 깨끗한 그릇 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다 할 자가 없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열매이지 우리에게 숙제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때에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닌 은헤 아래서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은 시편 109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편 109편은 나 자신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설교중 하나이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지은 시이다. 시편 연구가들에게는 흔히 저주시라고 분류된다. 

다윗하면 아마도 성경의 인물 중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메시아상 - 다윗과 같은 왕, 다윗의 시대 

그는 인간관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다. 

그는 그를 죽이고자 달려드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에서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어찌 자신이 죽일 수 있겠는가하며 하나님의 손에 그를 의탁하고 두 번씩이나 그를 풀어주었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애도하고 슬퍼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당해 왕궁에서 쫓겨나 죽을 위험에 처해서도 그는 아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 슬퍼해서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그가 왕궁에서 피신하여 도피할 때에 일반 백성이었던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을 때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 아니할 지라도 혹시 그의 저주 때문에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주실까하여 작은 백성의 소리까지도 업신여기지 않았고, 왕이었지만 자기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고 씻지 못할 과오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장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그 잘못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도 뚜렷이 표현할 만큼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같은 오명을 주었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한 이후의 그의 행동을 사울왕이 사무엘에게 잘못을 지적당하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그의 중심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빼앗은 것을 모두 진멸하라. - 마치 가나안의 왕을 진멸하라 하신 것처럼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할 때에 불순종하고 좋은 것들을 감추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꾸짖고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버릴 것이라 선포한다. 그 때 사울의 반응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 범죄하였는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다. 

-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하나님이라 표현한다. 사무엘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 그런데 다윗이 나단에게서 죄를 지적받고 쓴 시- 시편 51편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소서.  

 

처음 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식한다.   

법궤가 성전으로 왔을 때에도 그는 백성이고 신하고 아내마저도 의식하지 않고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춘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 이외에 성경 어떤 인물도 이와같은 인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 

 

그는 원래 그런 성품으로 태어난 자인가? 어떻게 그는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도 다윗과 같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기준으로 시편 109편을 보면 좀 충격을 받는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이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고 적혀있다. 다윗 개인의 시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이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한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용을 좀 들어가보자.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1절) –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2-3절)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이다. 그가 사울인지, 누구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윗은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함께 읽기 거북할 정도로 저질적인 저주로 가득차 있다.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더 심해진다.  

9-15절 (봉독)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보인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7절에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된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대부분 성도의 기억 속에 잘 남아 있지 않다.  

 

어떻게 다윗은 이와 같은 시를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 기록하게 되었고, 후에 성가대와 함께 온 회중이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하였을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시를 성경에 기록되도록 허용하였을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 이토록 처절한 저주의 기도를 드려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어떤 목사가 강대상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아마 신문에 대문짝처럼 실리지는 않을까? 

이 기도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언어로 말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옷을 지어 자신을 가리고 바위 뒤에 숨는 것. 

죄인은 가린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민낯을 가린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무의식의 세계 

인간의 행동 너머에 있는 무의식적 표현 - 이드라고 하는 본능,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똑같이 식욕, 성욕, 탐욕이 인간 본성이다. 

 

사울처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의식한다. 벌거벗겨지는 것을 못견뎌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릴 것이 없다. 

진실하다는 것이 꼭 좋은 마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 속마음. 때로는 깊은 미움, 깊은 절망, 깊은 저주, 원망...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셨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고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한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다. 

 

2.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탁하는 기도

다윗은 자신이 복수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충분히 힘이 있어도 원수 갚은 것, 억울한 일을 푸는 것,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자 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도록 했다. 왜? 나도 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솔로몬의 판결 같은 훌륭한 재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죄악도 다스리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이 재판관되지 않았다. 판결의 권한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만큼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결은 정확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압살롬은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약 다윗이 그 일을 행했다면 잠시 통쾌할 진 모르지만 그의 손에는 피의 흔적이, 죄의식의 흔적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심판을 당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한 이유이다. 

 

3. 자신의 언어 속에서 똑같은 죄를 보았다. 

우리가 시편 109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다윗도 상대방 만큼이나 저주의 입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다 죄악 가운데 있다. 

부부관계에서도, 친구 사이에도, 어떤 관계에서도 갈등의 현장에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난 잘못이 하나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을 필터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다보면 상대방의 잘못이나 내 잘못이나 매한가지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나님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진실이 내어놓다보면 그 안에서 나의 죄악과 연약함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에 앞에 나를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차츰 언어가 바뀌게 된다. 진정한 내 모습을 대면하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변화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방으로부터 받아왔던 상처의 치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움이 이해로 바뀌고, 그의 언어가 나의 언어로 바뀌면서 용납하게 된다. 비로서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4.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다.

 

다윗의 시편을 읽다보면 유치하고 과장되게 느낄 때가 정말 많다. 왕인데도 늘 자신은 불쌍하고, 가난하게 표현한다. 대장부의 모습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도는 유치했지만 그의 삶은 고상하고, 그의 인간관계는 온전했다는 것이다. 

 

고상하고 거룩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고상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유치하게 기도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본 모습을 내어놓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언어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착해야 한다. 깨끗하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 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솔직하게 내 마음을 열고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 뿐이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참으면 - 몸에 병이 온다. 

남에게 말해서 풀거나, 다른 행동으로 풀면 부작용이 온다. 말이 꼬리를 물며 왜곡되고 내 앞에서는 나를 이해 해 주는 듯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또 다른 비수로 나를 찌른다.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거나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전념하면 대다수 중독이나 일탈하게 된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아픈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푸는 것이다. 필터링 없이 내 모든 언어를 들으 실 수 있는 분 앞에 내 모든 감정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난 모든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비로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 

 

아이는 밖에 나와 더러워 질 때 마다 엄마에게와서 더러운 몸을 보인다. 

그러면 몸을 닦아 주는 것은 부모이지 아이가 자기 몸을 닦을 수 없다. 

깨끗한 그릇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 보인 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래서 깨지고 상한 마음을 가진고 나오는 자의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