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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절 (제자들의 배에 임한 풍랑) 

 

  • 그 날 저물 때에...(35절)

그날은 어떤 날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자라나는 씨, 겨자씨 등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여러 씨앗의 비밀을 통해 말씀하시던 그 날입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또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느라 수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저물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밤이 왔고 조금있으면 풍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이 왔는데도 쉬질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배에 태운 채로 건너편을 향하여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무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로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자기도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의 선지생도의 아내의 이야기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열심내던 남편이 갑자기 빚만 남기며 죽게 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노상 우상숭배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기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반드시 인과응보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세친구들은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그렇다 하며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섭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지요. 지혜자라 하는 솔로몬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일을 보며 능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 8: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신앙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당신이 잘못 믿어서 그래...라고 하면서 마치 욥의 친구들 처럼 사람들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밤이 왔을 때에, 풍랑이 왔을 때에, "왜? 하나님이 왜? 내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 계속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인생의, 밤은, 풍랑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풍랑을 맞고 어떻게 풍랑을 이기는가입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차게 되었더라 (37절) 

큰 광풍(Furious squall) - 어디에서인가 모르는 고난, 폭풍...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 우리의 통치 밖의 일이다. 

문제는 큰 광풍 자체에 있지 않다. 

광풍이 만들어 내는 파도가 우리에게 부딪히면, 곧 그 파도가 우리를 때리고, 평안을 잃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파도가 배에 부딪치며 배를 물로 가득 채운다. 

마음을 채우고 심령을 채워서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이 그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낙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광풍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릴 때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군가? 

그런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오직 예수이다. 

풀수 없는 자에게 가서 아무리 넉두리 하고 푸념하고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 있을 때에 대부분은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자에게 가서 푸념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물 가운데로 가득차게 된다. 

 

제자들은 어부였다. 그것도 갈릴리 출신 어부였다. 

바다와 배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들이었다. 

광풍이 불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파도가 일어 배에 부딪칠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찾았는가? 

배에 물이 가득차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까지 침묵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에 잠자고 계셨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자기가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운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우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왜 알아서 미리 미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 왜 거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빌립보서기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하며, 근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아니면 힘에 부치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도 하나님께 아뢰거나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이 왜 이 지경까지 우리를 내버려 주시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원망의 소리다. 

우리가 주를 배에 싣고 이렇게 잘 모시고 다니는 데 왜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도 주님을 그저 잘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주님은 잠자코 계세요. 내가  다 알어서 할께요하지는 않는가? 

 

고물은 배 후미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것처럼 예수님도 배의 선장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게를 베고 주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스스로 배를 움직이며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주님이 깨십니다. 

다 늦은 것 같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늦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십니다. 

광풍의 근원, 파도의 근원, 우리의 모든 염려의 근원에 대해 바로 진단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바람에게,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전문가, 배의 전문가였던 제자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고통을 단지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비록 바람과 바다를 향했지만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

내가 옆에 있는데 왜 나를 제쳐두고 너희들끼리 힘을 쓰느냐?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절) 

제자들이 지금 무서워하는 것은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시험이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닥치는 파탄, 실직, 이혼, 암, 병.....

이런 것들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광풍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광풍이 파도를 만들어 우리의 심령을 치고, 깨고 부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광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광풍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화형을 앞에 두고도, 사자들이 자기들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41절)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이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감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다.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묵상질문) 

1.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다니지만 혹시 주무시게 내 버려 두시지는 않는가? 광풍과 파도 앞에서 홀로 애쓰며, 그러면서도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2. 고난이 두려운가, 광풍이 두려운가? 실패가 두려운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 

 

찬양)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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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26-34절 자라는 씨의 비유 

 

씨뿌리는 비유가 밭, 즉 말씀을 받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씨앗, 즉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로 인해 몇 십배의 열매를 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등불은 씨 뿌리는 자의 정체, 즉 그가 곧 예수 자신이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등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즉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 역시 빛의 자녀, 곧 빛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는 자라는 씨의 비유로 옮겨집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은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앞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뿌리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고 사람들은 주로 밭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사람, 혹은 이전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 하고 그 사람, 인자,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지 않고, 불특정한 사람인 a man, 즉 어떤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뿌려진 씨앗은 어떻게 됩니까?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오직 옥토밭에서만 온전히 열매를 맺는데 이 구절에서 뿌려진 씨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라는 말은 사람이 자건 깨어 있건...씨앗은 자란다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이 한결 같이 같은 속도로 꾸준히 자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기복이 있다. 좀처럼 자라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설 것 같으면 넘어지고, 위태할 것 같은데 하면 오히려 요동치 않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다고 해서 씨앗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꿈쩍 않다가 자고 깨고 일어나 보니 싹이 나고 자라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의 발전, 성숙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성령은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열매맺게 하는 것을 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역사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유롭다. 

우리가 알지 못하게 말씀의 역사는 사람을 자라게 하지만 또한 신앙의 역사에는 지름길이 없다. 싹을 내는 신앙, 이삭을 내는 신앙, 그리고 충실한 곡식을 내는 신앙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어린아이의 믿음,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이 여정을 건너띌 수 없다.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신앙의 여정을 따라 씨앗은 자라고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비행기 항로- 하늘에도 비행기들마다 다니는 항로가 있다. 우리 눈에는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하늘이지만 비행사들끼리만 공유하는 길- 하늘의 길,. 

신앙의 길도, 그 길을 걷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신앙의 여정- 언제 지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지날는지 알 수 없지만 되돌아 보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길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 4:29) 

 

이것이 그냥 우리가 들으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뒤에는 요엘이란 사람의 예언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욜 3:13)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요엘서의 주제는 '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은 거기서 곡식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던 사람들은 이제 그 고난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임하면." 이 가사가 요엘서에서 가져온 가사입니다. 이 '주의 날'은 예수님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어 고난을 견뎌왔던 자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추수의 날인 것입니다.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주의 날이 임했는가? 

 

(요 3:18-21)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빛을 영접치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결국 악한 자이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빛에 있다가 어둠에 들어서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다가 서서히 보기 시작함. 자기 자신은 안 보이고 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충 본다. 대충 보기 때문에 감각을 의지한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삶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둠에 있다가 빛이 나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만 보인다. 그러다가 서서히 세상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말씀 안에 나오면 나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 나를 보고 이젠 더 나아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세계는 처음엔 잘 모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심는 자도 심기운 자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심겨지면, 말씀은 자라고, 모든 쓸때 없는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까지도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씨앗을 자꾸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씨앗은 땅 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곧 땅 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땅 속에 묻히지만, 곧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부활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십니다. 말씀이 심겨진 사람은, 영원하여, 죽음조차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말씀이 심겨진 그 사람은 영원하여, 반드시 부활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죽음을 뚫고 일어섭니다. 예수와 똑같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말씀이 아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여러분을 부활하게 합니다. 그 부활은 너무도 위대한 일이라, 생명의 풍성함 그 자체, 죽음이 설 자리가 없는 완전한 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의 파종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묵상 질문) 

  1. 하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심고 가꾸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다. 우리가 매일 같이 읽는 말씀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나라를 살고 계십니까? 

  

  2. 열매가 익을 때, 낫을 데는 추수 때는 믿는 자들에게는 열매를 거두는 추수의 때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심판의 때라는 것을 깊이 새겨 봅시다. 

  

  (지금은 엘리야 때 처럼)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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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21-25  (등불) 

 

등불이 무엇인가?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출 27:20-21)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신앙 

-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순간이 아닌 온전한, 전부의 신앙. 

 

아론과 그의 아들들- 믿음의 제사장들의 절대적 의무 - 등불을 보살피는 것. 등불을 꺼뜨리면 죽는다. 

심지어 엘리 제사장의 때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던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성전의 등불을 꺼뜨리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의 등장 이후 이 등불은 곧 사람이 되었다. 

(삼하 21: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 불렀고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등불이라 찬양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다윗을 등불이라 불렀다. 

(왕상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대하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그 기름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 다윗,

그 다윗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등불이었습니다.

더불어 이 등불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등불은 단 한 차례도 꺼지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렇게 밝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고나서 이 등불은 곧장 위기를 맞습니다. 마치 바람 앞의 등불 마냥 말입니다.

 

(대하 29:7)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 29장 2절에 무엇이라 증거하냐면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신앙개혁을 하며 성전을 성결하게 하며 개혁하면서 하였던 말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단지 등불을 끄고 라며 했지만 이것이 나타내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그들의 충격적인 모습.

 

(잠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렘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그리고는 정말, 그 등불이 꺼졌습니다. 

B.C. 587년 성전은 모두 돌덩이가 되어 무너졌고, 이스라엘의 등불은 꺼졌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던 등불은 이제 키고 싶어도 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다윗의 등불은, 이제 촛대까지 뽑혀 다시는 빛을 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금 밝히시는 등불  (함께 봉독) 

(요 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막 4:21-22)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지금도, 성전에는 등불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허락해줘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등불이었고, 그 등불이 켜있다한들, 이스라엘이 바라는 진짜 다윗의 등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등불이 타고 있는 성전은, 에돔 사람인 헤롯,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이 리모델링하는 성전 안의 등불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다윗의 등불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등경 위- 촛대, stand. -> 일곱교회는 곧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타올랐습니다. 그것도, 그 등불이 일곱 촛대위에 올라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방 안을 환히 밝힙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왕의 귀환. 정확히는 다윗 왕의 귀환입니다. 아니 다윗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윗보다 더 큰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등불이라 말합니다.

꺼저버린 등불 앞에서 절망했던 이들에게, 등불은 스스로 걸어왔습니다. 

  "등불이 등 받침대 위에 올라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영접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경고의 말씀 

(막 4:24-25)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듣는 말- 예수님의 말씀. 

지금 유대인들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았기리라." 

 

말씀을 가지고 듣고 열매맺는 자는 받을 것이다. 열매 맺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세상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여전히 미적미적 대면서 사는 자들은 믿는 믿음 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밭에 감추인 보석을 발견한 자 - 자기의 온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소유하는 자... 지혜로운 자. 

 

따라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그 분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라 믿는다면, 주의해서 그 분의 말을 세심하게 들여다 봐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 속에, 분명 당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해결들을, 그 분은 분명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은 당신의 문제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사람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 분의 말씀을 세심하고 깊게 들여다 보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그저 좋은 얘기, 좋은 결론, 나에게 익숙한 얘기라 생각하지만, 

그는 말씀을 주의하여 들여다보지 않기에, 그 안에서 정작,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반전을 만날 수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도 반전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찾으려는 자는 정말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가진 것 마저 빼앗기에 될 것입니다.예수께서는, 등불이신 그 분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바로 그 사람, 등불이신 예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는데 전심전력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목소리는 결코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가슴을 고동치게하고, 하늘 높이 솟은 불길처럼 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그 분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리게 될 것입니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무릎꿇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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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와 제자 (본문: 9:35-38)

 

지금은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에 의해 제자훈련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에 있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여러 가지 목적, 대개는 각자 개인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제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인생의 목적보다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을 맞추는 자. 이러한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하여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설명하시고, 그들에게는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 더욱 신성한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모습, 귀신 쫓는 모습, 모든 사역의 모습을 지켜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28:19-20) 이른바 지상명령(The Great Mission)을 내리시는데 이 말씀은 분명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제자 삼은 것처럼, 너희도 제자를 삼으라는 분부를 하심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을 택하고,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고, 보이시고, 훈련시키시고 위임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 만들기 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좀 바꾸어서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성육신의 목적이 제자를 만드는 것이냐?’하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영리

구원의 4가지 원리, 복음의 핵심 원리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2.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3.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4.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è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고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è 이것이 구원의 기본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공생애의 많은 시간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함께 하시고(경험케 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마침내 승천하실 때는 너희도 제자를 삼아라 하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자와 제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들이 곧 제자입니까? 다시 말하면 제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까?

무리-> 제자 : 무리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인가?

무리와 제자는 어떤 관계인가?

(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è 이것은 구원에로의 부르심. 구원은 돈 없이, 값 없이 받는 것이다. 주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무거운 것들을 요구하신다.

[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 예수를 믿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è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무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 14:25-27]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지금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데,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가 말씀에 거하고 지켜야 하지요. 그 말씀을 최우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자기 가족들보다도 말씀을 우선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구원의 조건과 제자의 조건이 굉장히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교회만 나오면 구원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을 얻는다, 참 평안을 얻는다고 해서 교회는 나왔는데,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요구하는 것도 많고,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봉사하라 하고 헌신하라 하니까 신앙생활 점점 힘들다. 말씀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하면서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1) 구원은 값없이 거저받는 은혜지만 우리가 행함으로 인해 상급을 받는다. 그래서 그 상급에 따라서 2) 부끄러운 구원과 영광스런 구원이 나뉘게 되고, 3) 천국에서의 지위가 달라지게 되고, 4)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건 또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왜냐? 천국에는 계시록 21장에 보면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나왔지요.(21:4) 거기에는 밤이 없고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21:25-26) 증거하고 있습니다.

-> 알곡과 쭉정이부터, 부끄러운 구원상급의 문제

1) 물론 성경은 구원받은 자가 받게 될 상급, 상에 대해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받게 될 면류관과 영광과 칭찬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상급이 결정되고 계급이 나뉘게 되면 거기에도 차별이 있고,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고, 만족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우리의 현실과 다를 게 없는 것이 되지요. 자 밭에 일하러 온 품꾼들이 어떤 이는 아침부터 나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이는 오전에 어떤 이는 오후에 어떤 이는 끝나기 바로 직전에 나와서 일을 합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먼저 온 자가 더 많이 받고 늦게 온 자는 조금 받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이지요.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빨리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똑같이 한 달란트씩 주지요. 그러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2) 구원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받는 은혜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시하는 위험한 말이지요. 성경 어디에도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영광을 받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최소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부끄러운 구원은 존재하지않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10:11)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은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우편 강도의 구원에 대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3:10~15에 나오는 비유를 잘못 해석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십자가상의 구원받은 강도가 평생 죄 짓고 죽기 전에 예수님 영접했다 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친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면서 그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3) 알곡과 쭉정이는 교회 안에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 결코 구원받은 자들을 신앙의 정도로 분리해 놓은 것이 아니지요. 교회 안에도 자기 죄를 회개 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왜 제자인가?

구원받은 자에게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인가?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데에 그의 사역을 집중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 그들만 사랑하려고, 그들만 복주시려고 그들을 택하셨는가? NO,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듯이 그들을 통해서 수많은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한 자가 바로 제자인 것이다. 복받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은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è 누구를 사랑했는가? 제자를? 아니다. 세상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제자 뿐만 아니라 무리를 모두 사랑하셨다.

l  하나님의 첫째 궁극적인 관심사는 제자가 아니라 무리다!

(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      하나님의 심정, 그리스도의 심정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왕자로 태어났는데 거지처럼 사는 자녀들의 모습불쌍한 거다. 한없이 불쌍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 모습그들이 왜 불쌍한가? 그들이 아버지가 있고 목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서 부모없는 고아처럼,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이다.

-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큰 할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장면시간 날 때마다, 아니 없는 시간도 내어서,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돌아돌아 가면서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 한 자, 고달픈 자를 만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셨다. ? 그들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      그런데 공생애의 기간은 정해져 있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와 사건을 알리고, 그 분을 믿게 하고 영접하게 하는 일을 전하기 위해서…. 오직 세상에 죄악에 빠진 사람들, 부모 없이, 목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알리고자, 그 일을 위해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이고, 그들에게 영혼 구원의 일을 맡기시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말씀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엄격하게 명하신 것이다.

-      예수를 따라, 그 예수가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오직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리를 위해….

-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를 보러 오기는 했지만, 아직 불완전한 자들.. 온전히 믿지 못하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때로는 쭉정이도 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잃은 양. 그런데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자들. 예수를 대신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는 자들그들이 바로 제자!

-      제자는 무리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제자 입장에서는 왜 구원 받았으면 됐지.. 힘들게 예수를 따라야 하나?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 보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야 하나? 그러니까 어떤 제자들은 내가 이렇게 하니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높은 자리 주소서상급 주소서하지만 제자는 상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깊히 사랑하는 자, 그 사랑을 정말 깊히 깨닫고 체험한 자가 하는 것이다.

-      베드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치라. 네가 내 양을 좀 맡아라…. 우리가 상급을 위해서만 일한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라 공로로 일하는 것이다. 거기엔 내가 일했으니 자리 주세요 하는 거래만 있다. 자기를 모두 내어 줄 수 없다. 그런데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온전히 죽여야 돼. 거래하는 자는 도저히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지 못해.. 그러니까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에 감동된 자.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를 죽이고 한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극단적인 두 교회

1) 제자에 관심이 없는 교회: 성도를 양육하지 않고, 성숙시키지 못하는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새신자들로만 가득찬 교회는 능력이 없고, 성숙이 없고, 사명이 없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제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신자, 말씀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교회 교육의 목적이고 기능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의 사명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제자에만 관심이 있는 교회: 그런데 교회가 너무 제자에게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한 자, 예수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자가 마치 쭉정이인양, 죄인인 양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 또한 교회의 구원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리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관리 대상은 제자가 아니라 무리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무리를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l  교회: 제자들을 양육하여 무리들을 돌보게 하는 곳

l  무리:자기 목적, 자기 이익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자

l  제자: 예수가 선택하여 자기를 부인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

제자가 무리의 모습을 띠는 교회는 무리를 향한 돌봄이 없다. 서로를 향한 이익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제자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다.

 

l  제자의 특권

홍해를 건넌 것- 구원받은 백성 무리

요단강을 건너는 것 성화, 성결을 체험하여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것 여호수아, 갈렙

가장 큰 공신이지만 가장 힘든 길, 양보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것. 그 분과 은밀히 교제하는 삶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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