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와 제자 (본문: 마 9:35-38)
지금은 돌아가신 옥한음 목사님에 의해 제자훈련이 한국에 소개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를 키우는 것이었다라고 말을 합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무리에 있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리들이 여러 가지 목적, 대개는 각자 개인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제자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인생의 목적보다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을 맞추는 자. 이러한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하여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설명하시고, 그들에게는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가 더욱 신성한 사건을 경험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모습, 귀신 쫓는 모습, 모든 사역의 모습을 지켜보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19-20) 이른바 지상명령(The Great Mission)을 내리시는데 이 말씀은 분명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제자 삼은 것처럼, 너희도 제자를 삼으라는 분부를 하심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제자들을 택하고, 함께 하시면서 가르치고, 보이시고, 훈련시키시고 위임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중점은 제자 만들기 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좀 바꾸어서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성육신의 목적이 ‘제자를 만드는 것이냐?’하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영리
구원의 4가지 원리, 복음의 핵심 원리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2.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3.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4.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è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고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그 분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è 이것이 구원의 기본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 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공생애의 많은 시간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함께 하시고(경험케 하시고), 훈련시키시고, 마침내 승천하실 때는 너희도 제자를 삼아라 하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자와 제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구원받은 자들이 곧 제자입니까? 다시 말하면 제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까?
무리-> 제자 : 무리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인가?
무리와 제자는 어떤 관계인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è 이것은 구원에로의 부르심. 구원은 돈 없이, 값 없이 받는 것이다. 주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다.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무거운 것들을 요구하신다.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 예수를 믿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è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무리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눅 14:25-27]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 지금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데,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가 말씀에 거하고 지켜야 하지요. 그 말씀을 최우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자기 가족들보다도 말씀을 우선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구원의 조건과 제자의 조건이 굉장히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교회만 나오면 구원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을 얻는다, 참 평안을 얻는다고 해서 교회는 나왔는데,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점점 더 요구하는 것도 많고, 자기를 부인하라 하고 봉사하라 하고 헌신하라 하니까 신앙생활 점점 힘들다. 말씀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하면서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1) 구원은 값없이 거저받는 은혜지만 우리가 행함으로 인해 상급을 받는다. 그래서 그 상급에 따라서 2) 부끄러운 구원과 영광스런 구원이 나뉘게 되고, 3) 천국에서의 지위가 달라지게 되고, 4)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그건 또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요.
왜냐? 천국에는 계시록 21장에 보면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고 나왔지요.(21:4) 거기에는 밤이 없고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다고 (21:25-26) 증거하고 있습니다.
-> 알곡과 쭉정이부터, 부끄러운 구원… 상급의 문제
1) 물론 성경은 구원받은 자가 받게 될 상급, 상에 대해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받게 될 면류관과 영광과 칭찬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상급이 결정되고 계급이 나뉘게 되면 거기에도 차별이 있고,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고, 만족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 우리의 현실과 다를 게 없는 것이 되지요. 자 밭에 일하러 온 품꾼들이 어떤 이는 아침부터 나와 열심히 일하고 어떤 이는 오전에 어떤 이는 오후에 어떤 이는 끝나기 바로 직전에 나와서 일을 합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먼저 온 자가 더 많이 받고 늦게 온 자는 조금 받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이지요.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빨리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똑같이 한 달란트씩 주지요. 그러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2) 구원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받는 은혜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시하는 위험한 말이지요. 성경 어디에도 부끄러운 구원이란 말은 없습니다. 부끄러운 구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영광을 받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최소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부끄러운 구원은 존재하지않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롬10:11)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구절은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우편 강도의 구원에 대한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3:10~15에 나오는 비유를 잘못 해석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십자가상의 구원받은 강도가 평생 죄 짓고 죽기 전에 예수님 영접했다 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친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면서 그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3) 알곡과 쭉정이는 교회 안에 구원 받을 자와 구원 받지 못할 자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 결코 구원받은 자들을 신앙의 정도로 분리해 놓은 것이 아니지요. 교회 안에도 자기 죄를 회개 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도, 영접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왜 제자인가?
구원받은 자에게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인가?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데에 그의 사역을 집중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 그들만 사랑하려고, 그들만 복주시려고 그들을 택하셨는가? NO, 그들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듯이 그들을 통해서 수많은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한 자가 바로 제자인 것이다. 복받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은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è 누구를 사랑했는가? 제자를? 아니다. 세상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 제자 뿐만 아니라 무리를 모두 사랑하셨다.
l 하나님의 첫째 궁극적인 관심사는 제자가 아니라 무리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 하나님의 심정, 그리스도의 심정…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 왕자로 태어났는데 거지처럼 사는 자녀들의 모습… 불쌍한 거다. 한없이 불쌍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 모습… 그들이 왜 불쌍한가? 그들이 아버지가 있고 목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서 부모없는 고아처럼,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이다.
-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큰 할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는 장면… 시간 날 때마다, 아니 없는 시간도 내어서,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 먼 길도 돌아돌아 가면서 예수님은 병든 자, 가난 한 자, 고달픈 자를 만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셨다. 왜? 그들을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 그런데 공생애의 기간은 정해져 있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와 사건을 알리고, 그 분을 믿게 하고 영접하게 하는 일을 전하기 위해서…. 오직 세상에 죄악에 빠진 사람들, 부모 없이, 목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알리고자, 그 일을 위해서 제자들을 세우신 것이고, 그들에게 영혼 구원의 일을 맡기시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말씀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엄격하게 명하신 것이다.
- 예수를 따라, 그 예수가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오직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누구를 위해? 무리를 위해….
- 무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를 보러 오기는 했지만, 아직 불완전한 자들.. 온전히 믿지 못하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때로는 쭉정이도 될 수 있는, 그래서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 잃은 양. 그런데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자들. 예수를 대신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해주고 예수를 믿게 할 수 있는 자들… 그들이 바로 제자!
- 제자는 무리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제자 입장에서는 왜 구원 받았으면 됐지.. 힘들게 예수를 따라야 하나?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 보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야 하나? 그러니까 어떤 제자들은 내가 이렇게 하니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높은 자리 주소서… 상급 주소서…하지만 제자는 상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깊히 사랑하는 자, 그 사랑을 정말 깊히 깨닫고 체험한 자가 하는 것이다.
- 베드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그럼 내 양을 치라. 네가 내 양을 좀 맡아라…. 우리가 상급을 위해서만 일한다면 그건 은혜가 아니라 공로로 일하는 것이다. 거기엔 내가 일했으니 자리 주세요 하는 거래만 있다. 자기를 모두 내어 줄 수 없다. 그런데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온전히 죽여야 돼. 거래하는 자는 도저히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지 못해.. 그러니까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에 감동된 자.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를 죽이고 한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극단적인 두 교회
1) 제자에 관심이 없는 교회: 성도를 양육하지 않고, 성숙시키지 못하는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새신자들로만 가득찬 교회는 능력이 없고, 성숙이 없고, 사명이 없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제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성숙한 신자,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신자, 말씀에 온전히 거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교회 교육의 목적이고 기능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의 사명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제자에만 관심이 있는 교회: 그런데 교회가 너무 제자에게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에 사로잡히지 못한 자, 예수를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자가 마치 쭉정이인양, 죄인인 양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게 하는 것 또한 교회의 구원의 사명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리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관리 대상은 제자가 아니라 무리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무리를 구원시키는 것입니다.
l 교회: 제자들을 양육하여 무리들을 돌보게 하는 곳
l 무리:자기 목적, 자기 이익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는 자
l 제자: 예수가 선택하여 자기를 부인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
제자가 무리의 모습을 띠는 교회는 무리를 향한 돌봄이 없다. 서로를 향한 이익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제자는 주님의 택하심을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다.
l 제자의 특권
홍해를 건넌 것- 구원받은 백성 – 무리
요단강을 건너는 것 – 성화, 성결을 체험하여 주님 가신 길을 따르는 것 – 여호수아, 갈렙
가장 큰 공신이지만 가장 힘든 길, 양보의 길, 희생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것. 그 분과 은밀히 교제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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