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와 망각 (마가복음 6:45-52)

 

1. 즉시, 제촉하사 (45절)  

  • 두 번이나 걸쳐서 강조하면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떼어놓으신다. 
  •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들과 작별하며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벳새다 지역으로 가게 하신다. 
  • 언제인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 오병이어: 4복음서에 빠짐없이 기록된 사건. 예수의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기적의 사건이다. 십시일반 모아 서로 잘 먹은 사건이 아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듯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무리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시도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떠들었다. 
  •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 예수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만 있으면 언제나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무리들에게서 예수께서는 마치 어린아이를 나쁜 친구에게서 떼어놓으시는 것처럼 즉시, 제촉하여 그 자리를 뜨게 하신다. 

그리고 서둘러 무리들도 해산시키시고 본인도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다. 

떡을 먹고 배불러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 자리에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위험한 것일까? 

천천히 앉아서 각자 느낀 점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순 없는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급하게 제자들을 먼저 보내어 저들의 호들갑스러운 장면을 못보게 만드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킨 후에 또 홀로 기도하러 가셨을까? 

가서 또 무슨 기도를 드리셨을까? 

 

  • 뒤풀이문화- 그 사건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한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결국 자아도취에 빠진다. 

드라마가 하나 끝나면 깊은 우울증에 빠져 드는 배우. 큰 성공한 영화를 찍고 나서 그 다음 작품에 연이어 실패하는 사람들. 

여전히 그 작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더군다나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하고자 한 것. 

예수를 왕으로 세우자! 

광야에서 사탄의 세 번째 유혹-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의 방법- 십자가를 통한 구원계획. 그 길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는 완전한 방법. 그것을 위해 내려오신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 없이 예수에게 왕이 되도록 유혹. 쉬운 길, 넓은 길, 십자가 없는 길로 인도하는 것. 

이런 자들과 어울리다보면 제자들의 신앙도 위험해진다. 왜 쉬운 길 놓아두고 어려운 길만 골라 가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오면 시험과 연단을 이길 도리가 없다. 

 

창 3장 뱀의 유혹-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 

바벨탑도 모든 죄의 근원은 자아 도취, 결국 교만함. 

자기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 

 

2.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젖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았지만 무리들의 호들갑 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넌다. 

저물었다는 것은 이미 하루가 지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제 어제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인생은 바다 가운데다. 다시 고난의 삶으로 돌아왔다. 

아니 바람이 거스르므로 지금 그들의 삶은 너무나 힘에 겹다. 

 

무리들과 반대로 지금 제자들은 오늘의 고난 때문에 어제 일어난 모든 기적을 잊어버렸다. 아니 기억할 틈이 없었다. 

도취가 어제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그 반대는 무엇인가? 망각이다. 어제의 일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마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 기억하라. 내가 행한 일과 행하는 일들을 기억하라. 

 

제자들은 어부- 삶의 전문가...

저녁 6시 부터 3시간씩 1경(6-9시) 2경(10-12시), 3경(1-3시), 4경 (4-6시) 

맙소사, 밤을 꼴딱 세워가며 지금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몇시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적어도 4-5시간은 지금 바다에서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 일상의 어려움.. 먹고사는 문제.. 현실은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 

이제 죽는구나. 삶의 고난 앞에서 이젠 소망없이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오늘의 문제, 현실에 문제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지나가는 예수를 본다. 

그토록 그들의 능력이 되고, 안심이 되는 예수가 지나가신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보자 제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유령인가?" 

달리 말하면, 귀신인가? 또 다시 말하면 사탄인가? 

 

절망앞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그들의 말은 뜻밖에도 예수를 가리켜 사탄인가?하는 외마디였다. 

친절하게도 성경은 이들이 심히 놀라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 떡떼시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고 설명한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었는가? 바로 오늘의 문제, 현실의 문제, 고난 앞에서 믿음이 둔하여 진 것이다. 

 

어제의 일에 도취되는 것- 교만함과 패망함 

그러나 어제의 일을 잊고 사는 것 -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 못하고 헛소리 하는 것. 

그러면 도대체 도취되지도 말고 잊지도 말고 적당히 기억해야 하는가? 

 

3.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어제의 예수를 생각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만하지도 아둔해지지도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내 인생의 배에 예수가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 '

날마다 오늘의 예수를 앉고 사는 것. 

그 품 아래 거하는 것. 

 

묵상질문) 

1. 은혜 충만한 이후 갑작스레 찾아오는 슬럼프나 공허감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무엇이 은혜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나 생각해보자. 

2. "도취와 망각"이라는 두 가지 단어를 묵상하며 "지금,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하자

 

찬양) 주 품에 

 

어린양 예수 (요한복음 1장 49절) 

 

기독교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 Jesus Christ 

어떤 이: Christ - Last name, Jesus- First Name? -X

Jesus(예수) - 고유명사로서 그 사람의 이름 

Christ- 보통명사,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말로 야훼와 호세아가 결합된 말입니다. 야훼는 하나님이고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말이 예수의 의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메시야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보통명사 - 누구라도 메시야가 될 수 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예수님이 활동하신 1세기 -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끊어진 상태, 그러나 그들에게는 비롯 정통성은 없지만 왕과 제사장은 존재, 로마의 식민치하 아래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다윗과 같은 참된 왕으로서의 메시야. 

그 메시야가 왕으로 올지, 선지자로 올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해 줄 그 어떤 누군가를 기다리며 메시야 대망론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유대의 사회, 특별히 당시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종교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이에서 예수의 출현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이다. 

이 두 부분을 경계짓는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 사건이다.  

 

[마 16:14-17]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여러 메시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이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 이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이야기가 없다. 제자들의 고백 이후에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기디린 메시야는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메시야인데 그 메시야가 참혹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도 이전까지의 메시야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메시야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들의 생각 바깥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구약성경에서도 이미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모습이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4번에 걸쳐 하나님의 종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메시지는 바로 이사야 52장 13-53:12까지에 묘사된 메시야의 모습이다. 

 

(사 52:13-53:7)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7)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사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트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향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 -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실제로 예수의 연구가 - 외모적으로, 어떤 존귀함을 찾아볼 수 없던 모습. 

사도 바울 역시...

 

그런데 영화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의 모습 - 유대인이 아닌 백인의 모습, 금발이나 연한 갈색, 인자한 모습. 

세상의 문화는 예수를 그렇게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 - 당시 입에 담지도 못하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 

           늩지 처참 -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

           그런데 그렇게 죽어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외모. 왜? 

이사야 53장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 

왜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어야 했는가?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 때문이다. 

 

그의 사명을 상징하는 사건 - 구약의 제사, 특별히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 속죄일의 희생양

구약의 성막, 성전 -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교회보다 훨씬 거룩하고 신비한 모습이 아닐까? 

성막 - 외부에서 보편 꺼먼 가죽으로 쌓인 음침한 천막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 매일 같이 양과 염소, 송아지와 비둘기를 잡아 제사하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몇번씩 - 도살장의 모습이다. 그들의 각을 뜨면서 발생하는 피비린내, 타면서 발생하는 고기냄새.

일년 내내 진동 - 거룩? 왜 이래야만 했는가? 그것을 통해, 그 예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난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의 벽이 이토록 컸다. 

그들이 행했던, 마음 속에 품었던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외면하고, 불순종하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모든 죄...

사람들끼리 전쟁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빼앗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그 모든 죄가 그런 아수라장 같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피의 제사 속에서 또한 불결해진 성막 자체, 제사장, 레위인의 모든 더러움, 그리고 매일의 제사를 통해서 다 씻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한 대속죄일이 일년에 한 번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제사의 날이지 죄를 씻지 못하면 당하게 되는 심판의 날. 

 

  • 대속죄일 예배의식의 절차 및 방법
  • 수 송아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침. 
  • 숫 염소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성소에 뿌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회막과 지성소를 성결케 하는 의식
  • 나머지 한 염소 (아사셀 염소): 대 제사장 아론은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그동안 지은 모든 불의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다 보냅니다. (죄의 전가) 그리고 정한 사람 하나를 통해 그 염소를 끌고 나가 아무도 살지 않고 살지 못하는 사막 한가운데 광야에 가져다 버리게 되는데 이 사이 백성들의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다 없애기 위해서 지나가는 염소의 몸과 머리에 침을 뱉고 자신의 죄를 마치 그 염소 때문인 것 처럼 다 저주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게 됩니다. 심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죄가 깨끗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맞고 괴롭힘 당한 염소를 끌고 광야 가운데 던져놓고 한 편으로 건너와 염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염소의 울음 소리만이 근근히 들려오지요. 염소는 힘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어느 덧 턱 하고 쓰러지고 결국은 독수리나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끌고 갔던 사람은 염소의 죽음을 확인 한 후에 백성들에게 알리면 백성들은 환호하며 우리의 죄가 다 사해지고 사라졌다고 기뻐하며 아론은 다시 회막에 들어와 나머지 한 양을 가지고 번제를 드려 제사를 마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1년에 한 번씩 드렸던 대 속죄제의 의식입니다. 

 

 이 아사셀 염소에 대한 말씀은 오직 레위기 16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scapegoat, 희생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염소 하나를 희생시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소의 모습은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죄없는, 흠없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에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질을 했으며 돌을 던지고 모욕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해를 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안의 모든 죄를 전가하듯, 예수를 괴롭히면서 그의 십가가길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그렇게 우리의 죄를 감당할 어린양으로, 희생양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어린양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었던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분에게 무엇이든 구하고, 피비린내가 아닌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즐겁게, 평화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지성소의 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맘껏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 십자가가 아닌 영광스런 메시야,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광을 재현시킬 메시야 

그렇게 헛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정작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때론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에도 예수를 우리 생각대로 바꾸어 놓고 예수를 자신의 이상형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 때가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용히 깊이, 묵상하다보면,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그 영광스런 찬란한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을까? 

그 메시야는 왜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을까? 

왜 제자들도,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하나이다. 

나의 죄 때문이다. 

나의 그 모든 죄를 그분의 그 십자가로 모두 씼으시고, 그리고 그 분처럼 하나님을, 아무 두려움없이, 친밀하게 아버지 아빠, 하면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그 모든 장벽과 휘장을 그 분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것이다. 

 

지금도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높이 만들어줄 영광스런 이상형 예수를 사모하는가? 

충분히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으신 분이 죄인처럼, 침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면서 어쩔 떈 무력하게,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그 이유는 오직 나의 죄를 씻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는, 그래서 그 분 앞에 정말 겸손하고 감사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그리고 그 분이 걸어가신 길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마가복음 6:30-44) 

 

  • 앗수르에 의해, 바벨론으로, 그리고 페르시아로, 그리고 이젠 로마의 식민지로, 반세기 이상을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비참함이었습니다. 긴 식민지의 삶 속에서 그들의 희망은 오직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독립시키고 회복시키는 것, 아니 그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습니다. 극소수의 배부른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목자 없는 양같이, 돼지 쥐염열매를 먹고 사는 탕자와 같이, 너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거리의 대부분의 사람들, 전체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은 하루 하루의 먹거리를 해결하기도 벅찬 그야말로 극빈자들이 넘쳐나는 곳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전합니다. 

 

  •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등장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들의 갈증을 채우는 샘물이었습니다. 역사의 오랜 어둠을 통해 가난과 질병이 가득찬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주었고, 실재로 그가 만지는 병자들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그의 만지심을 바라면서 몰려들었습니다. 

 

  •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정만 5천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소망을 찾으러 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살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만사를 재쳐두고, 어쩌면 재쳐둘 만사도 없었기에,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없었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릅니다. 

 

  • 예수님또한 그들을 불쌍히 보시면서 날이 저물때까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전하는 자도, 말씀을 듣는 자도 내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니 뭐 달리 변화를 기대할 것 없는 내일이라는 시간보다 지금 듣는 이 말씀이 더 가치있고 단맛이었고 잠시나마 내일의 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 날이 저물었습니다. 날이 지고 어두우면 몰려드는 것은 걱정입니다. 이제 내일을 걱정해야 합니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옵니다. 밤이 오니 말씀의 즐거움도 꿈처럼 깨고 걱정과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변화된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더 어두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촌과 마을로 가서 무언가를 사먹게 하소서..." 

 

  • 장소는 빈들이고 때는 저물어 가는 황혼입니다. 먹을 꺼리를 구할 때도 없고 살 때도 없습니다. 마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빨리 마을로 보내자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마을로 간다해도 과연 음식을 구하거나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 대부분은 음식을 사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는 자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수없이 다루어져 왔던 말씀이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이 구절입니다. 

 

  • 제자들에게 떨어진 주님의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이 줄 수 있는 형편인가? 

지금 보다 훨씬 어려울 때의 상황. 잘 사는 어부가 아니라 하루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어부... 

그나마 어부의 직업도 그만두고 지금은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와 함께 다니면서 누군가 예수님 때문에 음식을 대접을 하면 덩달아 먹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녔던 사람들. 배고픈 그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율법도 무용지물

 

그리고 지금 당장의 형편은 어떠한가? 31절에 보니까 그들 역시 지금 굶주려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 둘씩 둘씩 보내어 전도도 하고 돌아왔던 그들이다. 심신이 피로하고 배고프고, 지금 급한 것은 다른 무리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쉬어야 하고 먹어야 되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보고 한 두 명도 신경쓰는 것이 어려운데 5천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의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5천명을 먹이신 것은 결국 주님이 하셨다.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주님이 축사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제자들이 겪어야 했던 심적, 육적 어려움을 잘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저 어린 아이보다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로서 그들을 평가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자로서 이 자리에 함께 한다면 이 상황에서 믿음을 나타낼 자신이 있는가? 주님이 저들을 먹이라고 할 때에 심신도 지쳐있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믿음 가지고 5천명에게 다가갈 자가 있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지 자신의 능력을 생색내고자 하신 말씀일까? 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 아이 앞에서 저들의 무능을 드려내려고 하신 것일까? 

그 말씀에 진심을 없었을까? 그저 빈말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일까? 

정말 그들이 저들을 먹일 것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없었을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 지금 시대에 있어서 신앙인이 가장 경계하고 싸워야 할 것은 자기만 잘 살고자 하는 물질주의 문명. 

신자유주의 경고의 메시지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기대- "부유한 자를 더 배부르게 하면 결국 가난한 자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 부자의 주머니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다. 

 

  • 우리나라의 경제정책- 부자 감세... 자유경제의 원칙을 고수한다. 

부자가 잘 살면 그 효과가 중산층 빈곤층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교황이 말했듯이 그리고 유럽의 경제 정책이 표방하듯이 부유층의 주머니는 가난한 자들에게 열려 있지 못한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세금이라든가, 기부문화를 통해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른바 수정 자본주의이다. 그것이 그나마 다 같이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이다. 가난한 자들은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고 부유한 자들은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얼마 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의 방법은 이런 제도적인 개혁을 넘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파격적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너희가 저희를 먹이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부유한 자들을 보고 좀 저들을 도와달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부자들의 것을 빼앗아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 

제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너희들끼리 해결하라고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제자들에게 저들을 먹이라고 한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 물으신 다음에 하신 말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가 부자라서?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자냐?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요한복음에 요한 서신에 나와 있는 말씀.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곧 먹이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로 저들을 먹이는 것이 사랑이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이고 씻기는 것으로 그 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배반하고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회복시키실 때에 한 일도 불을 피워 그들에게 고기를 먹이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한마디로 죄인을 그 분의 살과 피로 먹이시는 것이다. 

 

  •  한국의 천주교- 학문으로, 선진 문명으로 (조선 중기부터...) 신진 엘리트 계급에 의해 소개...실패- 천주 실의....실학

                    100년 후의 기독교 - 가난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학문이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전파... 

                    복음은 복음으로 연다.  

                    

예수 그리스도- 지배자를 전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직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75세나 된 무자한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세웠고 가장 약하고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를 쓰셨다. 

왜?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세상의 모든 권세....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저들을 먹이라"한 대상은 단순한 제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다! 

 

왜? 이미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고 복음을 전파한, 복음을 경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미 예수의 권세가 있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그들은 이미 먹이는 자다. 나누어 주는 자가 된다. 

부유한 자가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이 없어서가 도와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가난한 자가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천국을 소유한다. 

예수로만 채울 수 있는 자가 근심하지 않고 자기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나눌 수 없는가? 왜 먹이질 못하는가?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결국 어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간절히 교회의 사명,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주신 말씀이 "너희가 먹이라"라는 이 말씀이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한 3년동안 우리는 광야를 지내왔고, 없는 중에 우리를 먹이신 하나님의 기적을 체혐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체험한 우리에게 너희가 저들을 먹이라 하신다. 

아직까지 "누굴 먹여야 할지,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모른다. 단지 기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과 함께 그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다. 

 

우리보다 낫다 할지라고 먹이고 품을 수 있는 성도, 내가 비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여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제자이고 사도이다. 

 

그 마음만 품으면 예수께서 하신다. 그 마음을 품으면 우리 가정의 어려운 자를 내가 먹을 것이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우리가 먹일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먹게 하셨다. 그것이 성찬이다. 

 

 

묵상질문)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한 구절을 깊이 묵상해보자. 내가 누구를 먹일 수 있을까?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일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마가복음 6:14-29절 (세례요한의 죽음) 

 

마가복음의 시작이 세례 요한의 회개선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시 요한에게서 예수로 넘어가는 신앙의 대 전환을 이야기한다. 

 

세례요한은 신약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보아야 한다. 율법의 마지막 수호자이다. 

그는 헤롯의 죄를 지적했고 백성들에겐 회개를 외쳤다. 

 

그에게 나오는 자는 회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선 철저히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는 광야에서 석청을 먹으며 살았다. 요한복음 1:20장에 보면 그는 드러내어 말하는 자다. 

그 앞에 나가면 누구든 죄가 드러난다. 

이것이 율법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된다. 회개해야 한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살듯이 그는 근신하며 깨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다. 

 

예수님, 죄인을 찾아나선다. 

유대땅 소외된 자, 새리, 혈루증 앓는 여인, 죽은 야이로의 딸...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준다. 

의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묻지 않고 고치신다. 

너는 다 나았다고 선포한다. 지긋지긋한 죄까지도 사해주신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먹고 마셨다. 

금식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도 이삭을 먹었고, 사마리아 땅에 가서도 양식을 구해 먹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드러내는 것 같으나 감추었다. 

인간들의 죄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부자들은, 고향 사람들은...그 분의 말씀을 애써 폄하한다. 무시한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숨기운 말이 된다. 믿는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이 된다. 

 

이처럼 다른 요한과 예수. 

그런데 놀랍게도 헤롯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 곧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외친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아났듯이 예수를 통해 자기가 죽였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의 세례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이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께로 모여든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이제 예수의 시대가 열린다. 

둘인 줄 알았지만 그들의 사역은 끊기지 않고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헤롯 -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갈릴리 지역을 다스림. 

자기 동생 빌립왕의 부인 헤로디아와 결혼

 

세례요한 드러내놓고 그의 죄를 지적-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 

 

헤롯의 지식-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다.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 

                    피하지 않고 잘 들었다. 크게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았다. 그저 후회했다. 

                    듣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했다. 

                    빌라도) 아내의 말을 듣고 예수가 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눈. 

왕이지만 아내의 말, 딸의 말 때문에 죽이지 말아야 할 자를 죽였다.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보다 사람들의 이목이고, 자기의 체면이고, 사회적인 안정감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전한 것은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리를 전한 것이었다. 

누가 더 자유한 삶인가? 

 

겉으로는 사람들이, 딸이 왕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왕이 그들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살인을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죽었지만 그의 고백대로 예수로 인해 부활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