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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예수 (요한복음 1장 49절) 

 

기독교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 Jesus Christ 

어떤 이: Christ - Last name, Jesus- First Name? -X

Jesus(예수) - 고유명사로서 그 사람의 이름 

Christ- 보통명사,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말로 야훼와 호세아가 결합된 말입니다. 야훼는 하나님이고 호세아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말이 예수의 의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니라

즉,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구원자라는 뜻이지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삼중직)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메시야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보통명사 - 누구라도 메시야가 될 수 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예수님이 활동하신 1세기 -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끊어진 상태, 그러나 그들에게는 비롯 정통성은 없지만 왕과 제사장은 존재, 로마의 식민치하 아래에서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다윗과 같은 참된 왕으로서의 메시야. 

그 메시야가 왕으로 올지, 선지자로 올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재현해 줄 그 어떤 누군가를 기다리며 메시야 대망론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이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유대의 사회, 특별히 당시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종교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이에서 예수의 출현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이다. 

이 두 부분을 경계짓는 사건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 사건이다.  

 

[마 16:14-17]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여러 메시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이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없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 이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이야기가 없다. 제자들의 고백 이후에야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기디린 메시야는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메시야인데 그 메시야가 참혹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도 이전까지의 메시야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메시야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들의 생각 바깥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예수는 구약성경에서도 이미 예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모습이다. 

특별히 이사야서에서는 4번에 걸쳐 하나님의 종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메시지는 바로 이사야 52장 13-53:12까지에 묘사된 메시야의 모습이다. 

 

(사 52:13-53:7)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7)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사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트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향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 -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실제로 예수의 연구가 - 외모적으로, 어떤 존귀함을 찾아볼 수 없던 모습. 

사도 바울 역시...

 

그런데 영화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예수의 모습 - 유대인이 아닌 백인의 모습, 금발이나 연한 갈색, 인자한 모습. 

세상의 문화는 예수를 그렇게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 - 당시 입에 담지도 못하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 

           늩지 처참 -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

           그런데 그렇게 죽어도, 그럴만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외모. 왜? 

이사야 53장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 

왜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죽어야 했는가? 우리의 죄, 아니 나의 죄 때문이다. 

 

그의 사명을 상징하는 사건 - 구약의 제사, 특별히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대 속죄일의 희생양

구약의 성막, 성전 -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의 교회보다 훨씬 거룩하고 신비한 모습이 아닐까? 

성막 - 외부에서 보편 꺼먼 가죽으로 쌓인 음침한 천막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 매일 같이 양과 염소, 송아지와 비둘기를 잡아 제사하는 것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몇번씩 - 도살장의 모습이다. 그들의 각을 뜨면서 발생하는 피비린내, 타면서 발생하는 고기냄새.

일년 내내 진동 - 거룩? 왜 이래야만 했는가? 그것을 통해, 그 예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난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의 벽이 이토록 컸다. 

그들이 행했던, 마음 속에 품었던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외면하고, 불순종하고, 무시하고 비웃었던 모든 죄...

사람들끼리 전쟁하고 죽이고 간음하고 빼앗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정죄하는 그 모든 죄가 그런 아수라장 같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피의 제사 속에서 또한 불결해진 성막 자체, 제사장, 레위인의 모든 더러움, 그리고 매일의 제사를 통해서 다 씻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기 위한 대속죄일이 일년에 한 번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제사의 날이지 죄를 씻지 못하면 당하게 되는 심판의 날. 

 

  • 대속죄일 예배의식의 절차 및 방법
  • 수 송아지: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침. 
  • 숫 염소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성소에 뿌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와 회막과 지성소를 성결케 하는 의식
  • 나머지 한 염소 (아사셀 염소): 대 제사장 아론은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그동안 지은 모든 불의와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다 보냅니다. (죄의 전가) 그리고 정한 사람 하나를 통해 그 염소를 끌고 나가 아무도 살지 않고 살지 못하는 사막 한가운데 광야에 가져다 버리게 되는데 이 사이 백성들의 사이를 지나게 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다 없애기 위해서 지나가는 염소의 몸과 머리에 침을 뱉고 자신의 죄를 마치 그 염소 때문인 것 처럼 다 저주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히게 됩니다. 심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죄가 깨끗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염소를 끌고 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맞고 괴롭힘 당한 염소를 끌고 광야 가운데 던져놓고 한 편으로 건너와 염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염소의 울음 소리만이 근근히 들려오지요. 염소는 힘없이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어느 덧 턱 하고 쓰러지고 결국은 독수리나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끌고 갔던 사람은 염소의 죽음을 확인 한 후에 백성들에게 알리면 백성들은 환호하며 우리의 죄가 다 사해지고 사라졌다고 기뻐하며 아론은 다시 회막에 들어와 나머지 한 양을 가지고 번제를 드려 제사를 마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1년에 한 번씩 드렸던 대 속죄제의 의식입니다. 

 

 이 아사셀 염소에 대한 말씀은 오직 레위기 16장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scapegoat, 희생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염소 하나를 희생시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소의 모습은 정확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죄없는, 흠없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에 백성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질을 했으며 돌을 던지고 모욕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해를 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안의 모든 죄를 전가하듯, 예수를 괴롭히면서 그의 십가가길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그렇게 우리의 죄를 감당할 어린양으로, 희생양으로 오셨기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묵묵히 그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어린양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분이 그 고통을 감당하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하나님을 쳐다볼 수 없었던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 분에게 무엇이든 구하고, 피비린내가 아닌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즐겁게, 평화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어린양으로서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지성소의 큰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어린 양 예수의 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벽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맘껏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린다. 십자가가 아닌 영광스런 메시야,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광을 재현시킬 메시야 

그렇게 헛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정작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때론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신앙에도 예수를 우리 생각대로 바꾸어 놓고 예수를 자신의 이상형처럼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 때가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용히 깊이, 묵상하다보면,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그 영광스런 찬란한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을까? 

그 메시야는 왜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을까? 

왜 제자들도,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하나이다. 

나의 죄 때문이다. 

나의 그 모든 죄를 그분의 그 십자가로 모두 씼으시고, 그리고 그 분처럼 하나님을, 아무 두려움없이, 친밀하게 아버지 아빠, 하면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그 모든 장벽과 휘장을 그 분의 몸으로 찢어 놓으신 것이다. 

 

지금도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높이 만들어줄 영광스런 이상형 예수를 사모하는가? 

충분히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으신 분이 죄인처럼, 침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면서 어쩔 떈 무력하게,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그 이유는 오직 나의 죄를 씻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는, 그래서 그 분 앞에 정말 겸손하고 감사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그리고 그 분이 걸어가신 길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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