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37-38절 생수의 강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사람의 신체 - 70-80퍼센트가 수분으로 이루어졌다.
내 몸무게가 만약 100킬로그램이라면 80kg이 물이라는 소리.
걸어다니는 물통.
신체에 물이 부족하면 피부가 건조해져서 가물어진 땅처럼 피부가 갈라진다.
관절을 부드럽게 움직일 수도 없다.
혈액이 잘 순환되지 않으면 모든 병의 원인이 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몸의 수분이 부족하면 사고의 질도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눈물이나 땀으로 몸의 배설물을 내보내지도 못한다. 몸이 부패한다는 것이다.
몸의 수분이 모자랄 때 몸의 경보장치 - 갈증, 목마름이다.
입술이 마르고, 혓바닥도 바짝 타오르고, 두통이 생기고, 피부도, 관절도 상하기 시작한다.
배고픔보다 더 심한 고통 갈증, 목마름이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못배긴다. 물을 마셔야만 갈증이 끝난다.
갈증이 나는데 계속 운동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여행을 할 수는 없다. 갈증은 물을 마셔야만 해결된다.
영혼은 어떨까?
영혼에 수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다양한 경보장치가 울린다.
작은 일에도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나타난다. 툭하면 화가 나고,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죄와 두려움이 영혼을 죽인다.
이런 영혼의 갈증은 병이 아니라 경고다. 육신의 갈증이 물을 공급하라는 경고이듯 영혼에도 영적 수분의 공급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내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경고, 우리 감정의 경고, 때로 우리 육신의 경고- 우리 영혼에 갈증이 날 때 흔히 영, 혼, 육이라 불리는 우리의 존재는 끊임없이 경고음을 낸다.
- 영혼의 갈증의 증상
외로움 (사랑), 두려움 (담대함), 분노 (기쁨), 염려 (소망), 불안 (평안)
-> 영혼의 갈증이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갈증을 사라지게 하는 수분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이는 당연히 영적 목마름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다행히 그 물을 구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우리는 거져 얻는 이 물을 은혜라고 부른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그 물은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 명절 끝 날
초막절 -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이것은 일년의 농사를 다 지은 후에 야외에 초막을 짓고 가족 들 뿐 아니라 성안에 거하는 노비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다 함께 모여 일년 동안의 농사를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절기이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때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초막절이라 부른다.
초막절 행사의 중요한 의식 중의 하나가 제사장이 매일 실로암 못에서 금으로 만든 물병에 물을 가득히 채워 가지고 백성들 사이를 지나와서 제단을 돌면서 물을 뿌리는 의식을 한다. 일주일 동안 매일 한 번씩 하다가 마지막 날 끝날, 이 날을 특별히 큰 날이라고 하는데 이 날에는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제단을 일곱바퀴 돌면서 물을 뿌리는 의식을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목말라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된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을 이 날, 초막절에 행하는 것이다.
이 날도 제사장이 이 의식을 하고 있을 때에 예수가 백성들에게 소리치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갈이 흘러나리라!"
갈증나서 애가 탄 사람에게 물이 들어가면 그 갈증이 사라지고 새 힘이 쏟듯,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에 똑같은 일을 하신다. 갈라지고, 염려하며, 화가나고 불안한 마음에 그 분이 공급하시는 생수는 우리 안에서부터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 갈라지고, 메마르고, 녹슬었던 자리가 유연해진다. 외로움 대신 사랑을,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분노대신 기쁨을, 염려대신 소망을, 불안 대신 평안을 주신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은 예수 외에는 공급자가 없다. 세상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그 갈증을 해결해 줄 것 같지만 그것은 생명수가 아니라 이른바 영혼에 해를 끼치는 청량음료일 뿐이다.
사이다나 콜라같은 소다 음료를 사람들은 흔히 청량음료 라고 부릅니다. "청량"하다의 의미는 맑고 투명하다라는 의미인데 사이다 광고를 하면서 맑고 투명한 물에 소다 거품을 강조하면서 광고하면서 이름마저도 청량음료라고 지어 놓으니 "왠지 들이키면 시원하고 달콤하고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소다음료는 사실 마실때만 시원하고 실재로는 갈증이 잘 가시질 않습니다. 그 속에 있는 당분이 입 안에 남아서 오히려 더 갈증이 납니다. 그리고 그 당분과 소다성분이 합쳐져서 이를 썩게 하고, 위장을 거북하게 하며, 몸의 건강을 해칩니다. 이런 것들이 점점 알려지고 강조되면서 조금만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알아서 소다를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청량음료라는 착각에 속아서 들이키게 되면 결국은 건강을 상하게 되겠지요.
소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의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 여기면서 좀처럼 끊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돈, 성공, 명예, 권력, 섹스, 도박, 게임, 쇼핑....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한 것들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착각하면서 추구하고 중독되고, 가족을, 건강을, 사랑을 희생하고 포기하면서 나아가지만 결국 남는 것은 소다처럼 우리의 영육간의 건강을 헤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는 것 - 예수께서 "내게로 오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 한다."
- 누가 이 생명수를 마시는가?
예수님은 제한을 두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우리는 우리가 받는 은혜에 대해 우리 스스로 제한을 둔다. 오늘은 기도하지 못했으니까 은혜가 없겠구나.
오늘은 정해 놓은 말씀을 읽지
- 어디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가? 종교행위가 이루어지는 제사장들의 의식을 진행하고 있는 바로 그 중심에서...
일년 중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그 절기에 성전 중앙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그들을 주목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게로 오라"하신다.
"종교"행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기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평안을 줄 수 없다. 갈증을 감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생명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 안에서, 자기들의 행위 안에서 갈증을 해소하려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갈증은 깊어만 간다. 이단들을 보면서 차라리 저들이 더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러워하기도 한다. 똑같이 예수 없은 의식에, 자기 열심에, 잘못된 것에 충성하며 갈증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 예수께서 생수를 "마시라"의 표현은 되풀이 해서 들이키라는 것이다. 계속 마시라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쉼없이, 목마를 때마다 목마른 영혼에 생명수를 부어주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릴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나를 짖누를 때마다, 형식적 종교의식이 아닌 진정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이 생명수를 공급하라는 것이다.
[엡 3:18-19]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러한 건물의 치수로 묘사했을까? 어떤 높이의 벽도, 어떤 깊이의 절망도, 아무리 넓은 바다도, 아무리 긴 고통의 순간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보다 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갈증도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채우지 못할 것은 없다.
- 우리는 ~때문에 사랑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다. 내가 비록 오늘 해야 할 순종을 이루지 못했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갈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만 한다. 사랑의 출발점은 항상 그리스도이지 나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길 때에 은혜를 바란다. 그런데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은 삯이지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받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샘은 마름이 없다. 다함이 없다. 멈춤이 없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들에게, 제사장들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난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너희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연약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절박한, 간절한 그런 심령의 생명수가 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거하라는 것은 방문하라는 것이 아니라 살라는 것이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라. 그 분 안에서 살아라. 그 분의 사랑으로 내 집을 삼으라. 그 사랑 안에 거하면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주님은 나의 안에,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사랑 안에서 내 집을 지으라고, 밤이 될 때마다 그 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배고플 때마다 그 곳에서 밥을 먹고, 외로울 때마다 그 안에서 사랑을 공급받으라 하신다.
두려운 일이 있는가? 염려되는 일이 있는가? 고통 많은 당신의 집에서 나와서 그 분의 사랑안에 당신의 집을 지으라.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그 가지는 죽은 가지다. 그러나 살아있는 나무에 접붙인 바 되면 내 가지와는 상관없이 나무의 열매가 나온다. 주님의 집에 사는 자는 주님의 열매를 맺는다.
그 분의 열매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열매다. 그냥 넉넉히 쌓아놓는 열매가 아니라 때에 맞게, 꼭 필요할 때에 주시는 모자람이 없는 열매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십자가 아래 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기 전까지는 세상에 발을 딛지 말라"
그 안에서 회복하라. 그 집에서 잠을 자고 그 집에서 밥을 먹고 그 집에서 맘껏 이야기 하고 채운 다음, 당신의 세상으로 일하러 가라. 일이 끝나면 또 당신의 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들어가라. 그 분의 집은 거할 곳이 많다.
예배도 중요하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를 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거하기 위해서다.
예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고 누리기 위해서다.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 누릴 때까지, 내 마음을 그 분께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목 마른가? 당신의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가?
무엇으로 그 갈증을 채울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그 갈증을 채울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가?
예수만이 그 갈증을 멈출 수 있다는 말을 믿는가? 동의하는가?
아니면 밤낮 예수를 믿었어도 한 번도 그 갈증을 멈춘 적이 없는가?
정말 예수께 와서 그 분께로부터 물을 받아마셨는가?
마당 뜰만 밟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고 아직 예수로부터 그 물을 얻지 못하진 않았는가?
내 방법이 잘못 되어 있진 않았을까?
오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고 동의한다면
그 분께 나아오라. 그 분으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으로 인도하는 물을 받아 마시라. 매일 같이 그 사랑안에 집을 짓고 살으라. 가슴 벅찬 그 사랑을 누리라.
아무리 예배드려도, 기도해도, 그 사랑이 체험되지 않으면 그 사랑을 깊이 맛보기 전에 그 집을 떠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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