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편 1-5절 사랑하는 자가 받는 고통
[시 22: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신약- 요한복음 3장 16절
구약 - 시편 23편
그런데 구약학자, 특별히 시편을 전공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된 시편 시편 22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의 하나(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읊조리신 유일한 시편구절 -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마지막 탄식의 순간에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탄식하신 주님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한 시편 - 시편 22편 - 메시야 시편, 십자가의 시편 -> 1절 외에도 여러구절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성취되는 고난기사의 절정이다.
다윗의 부르짖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윗의 언어로, 사람의 언어로 아파하시고 부르짖고 기도하셨다.
하나님도 고난당하실 때에, 천상의 고통을 천상의 언어로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언어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기도하셨다.
- 절에 가면 앉아 있는 부처의 상
편견을 버리고 그 상을 바라보면 느끼는 것
세상의 것을 다 초월한 미소와 따스함.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한 손은 무릎에 한손은 앞을 향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평안함과 위엄.
그래서 불교에 귀의하면 결국 세상을 떠나 그 초연함을 따라 산으로, 부처가 되어 속세를 버리고 모든 집착과 나 자신마저도 잊고 해탈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 해탈, 무아지경
- 그런데 예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 고통당하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
석가모니는 세상을 초월해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갔다면
예수는 초월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으로, 그 고통으로 내려와서 그 육신으로 인간의 고통을 당하신 분.
그리고 그 언어로 기도하신 분.
이 세상의 것을 아시고 경험하시고 그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신다.
나는 이 세상의 문제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데
믿음 좋다는 한 분이 "다 부질없는 것이야. 그런 고통은 다 소용없는 것이야..."하면 그 말이 과연 위로가 될까?
그런데 우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를 통해 받는 위로는 무엇인가?
"내가 안다. 내가 그 고통을 안다. 나도 그렇게 아팠다...." 그 말이, 그 음성이, 그 말씀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emphas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 yet he did not sin.
->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없는 대제사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 당하셨던 한 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배고품의 문제, 육신적 고통의 문제, 오해당함의 문제, 배반당하는 문제,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버림받는 문제....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오늘 다윗의 부르짖음처럼 그가 가장 의뢰하고 의지하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문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하며 그에게 가든 그는 아신다. 공감하신다. 그리고 같이 아파하신다.
십자가의 구원 - 우리의 죄를 구속해주시는 것 - 추상적인 것 - 신학적인 것
그에 앞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십자가 아래에서의 은혜 - 구체적인 것 - 영성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내가 너의 고통을 이해한다. 내가 너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내가 너의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한다"
시편 22편 - 다윗의 고난, 예수의 고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 그 침묵 때문에 난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신뢰한다. - 더 큰 은혜가 임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
다윗이 아닌, 예수가 아닌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았다"하는 경험이 있나?
그런 막연한 감정이 아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럽게 부르짖어버린 적이 있는가?
시험에 떨어지고, 연인이 헤어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고, 사업이 망하게 되고....세상이 날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있어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나님이 날 버리셨다는 고통을 부르짖는 것 - 저 자신도, 누구에게서도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그만큼 먹고살기가 편해서 그런가?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옛날보다 편해졌다고는 할지 모르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난의 강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힘들어하고, 나이 좀 먹었다하면 내 인생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고난이 많은 삶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누구도 나만큼, 이토록 고난에 대한 경험이 많을 것이라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면서도 내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부르짖음, 그 호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자가 막상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서 느껴지는 적막감, 고독감, 두려움, 염려, 낙심....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정말 다윗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했던 것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기도해 보았는가? 그런 기도를 들어보았는가?
그 분의 음성이 들리기 전에 나 혼자 포기하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다른 길을 찾아오진 않았는가? 침묵하시고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그런 침묵이 오히려 더 익숙한 것이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 누가 버림받았다고 이토록 아프게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다윗처럼, 예수처럼 이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할 수 있을까?
한 연인이 있었다. 서로 사랑해서 둘이 꼭 결혼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인이었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 커플이 헤어지게 되었다.
한쪽은 덤덤히 이 이별을 받아들였다. 사랑했으니 헤어질 수도 있지. 그래도 그동안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으니 헤어지는 것도 아름다운 거야. 그 사람도 축복해주고 나도 이젠 새로운 사람 만나야지.
그런데 한 쪽은 헤어진 것을 통해, 내가 버림받았다는 고통으로 인해 몇날 며칠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밥을 먹지도 못한다. 삶이 다 끝장 난 것 같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헤어졌음에도 계속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을거란 환상에 빠지기도 하고 도무지 헤어짐을 인정할 수 없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한 것인가? 누가 간절히 사랑한 것인가? 누가 자신의 전부를 받쳐 사랑한 것인가?
버림받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 사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고통이 없다. 나 자신만 중요해서 그 사람 아닌 나를 채워 줄 다른 사람만 있으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것-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니라도 자기를 만족시킬 누군가만, 어떤 것이든지 있으면 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 것 - 그래서 우상 숭배는 곧 간음이다. 그 우상 섬김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시기하시는 것도,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니라 하신 이유도
왜?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못견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예수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왜 나를 혼자 남겨두었나요? 하면서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했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 숨바꼭질
친구목사가 시편 강해를 하다가 이 22편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딸아이와 아들과 함께 집 근처 공원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 목사에게는 한나와 동갑인 아들과 초등학교 5헉년된 딸아이가 있다.
서로 술래가 되어 숨박꼭질을 하다가 그 목사님이 술래가 되었는데 먼저 딸아이를 찾고 아들녀석을 찾는 대신에 장난끼가 발동이 되어 딸아이와 함께 거꾸로 몰래 숨어서 아들녀석이 어떻게 하나 보았다.
아빠가 자기를 찾을지 알고 꼭꼭 숨어있던 아들아이가 주위가 조용하자 숨은 데서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게 보고 있다가 아들녀석이 경기가 일으킬 정도로 울자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아빠가 뛰어서 아들에게 가니까 아들녀석이 서럽게 울면서 "아빠가 날 찾아야지, 왜 안찾었어..."하면서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울면서 아들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내 던졌다.
"난 아빠 믿었는데, 난 아빠 믿었는데..."
그 말을 듣고 이 본문을 묵상하니까.... 아, 이 버림받은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 믿었던 자가 외면당했을 때 당하는 고통이구나. 정말 사랑했던 자가 당하는 고통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는 자만이 그 분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 버림받은 것처럼 괴로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이 내 삶 속에서 충만했던 경험을 하는 자만이 그 분의 모습이 삶 속에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 무섭고, 고통스럽고, 울 수가 있는 것이다. 늘 하나님이 안보이는 듯이, 신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그 분이 침묵해도, 내버려 놓아도 어떤 걱정도, 불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안될 때, 내 삶에 문제가 닥쳤을 때에만 하나님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런 성도는 시편 22편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 1절 - 나의 하나님: 걱정이 많고 두려움에 쌓여 부르짖는다.
- 3-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한다.
-> 나의 존재가 불확실하고 내가 환란 중에 정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그 분은 기도하는 자를 건지시는 분이기에 또 신뢰한다.
이러한 고통과 신뢰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조롱거리니이다. (6절)
->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바라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8-9절)
-> 평소에 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의 믿음을 바라보며 참고 있다가 그가 고난당하니 그의 믿음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렇게 믿더니 왜 하나님이 안 구해주시냐?
예수님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제 몸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냐..."
이렇게 조롱당할 때에도 다윗은 또 하나님께 기도한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나를 도울 자 없나이다."
언제? 하나님이 안느껴지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그 때에도 난 당신 밖에 없습니다. 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만 바라봅니다.
- [시 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 이런 고통이 왜?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이지만
[시 22: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 그래도 또 기도한다. 마치 차인 여자가 나를 찬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버리고 떠난 연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간음한 백성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실까? 어떻게 이토록 자신 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그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실까?
21절부터 31절까지는 왜 그런에 대한 설명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그의 응답이 나타난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다.
[시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그리고 그의 경험을 개인의 경험에 두지 않고 자기를 따라 행하는 모든 성도에게 약속으로 준다.
[시 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내가 이렇게 찬양하게 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다. 나와 같이 주를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약속하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신뢰하면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하나님을 돌보고 사랑하고, 마치 늙은 부모 모시듯 하나님을 봉양하는 듯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은 받으실지라도
"네가 내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집을 세워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며 교제하다보면 깨닫는 한 가지는
"정말 내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나님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가, 은혜가 느껴지지 않고 나 홀로 내버려져 있는 그런 고통스런 순간이 여러분들에게 혹시 일어난다면 그 고통 속에서도 다윗이 그랬듯이, 예수님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보시기를 바란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 분이 행하시는 것을 바라고,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 분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을 그려보자.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 분을 믿기를 포기하고,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그 분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때로 나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여전히 그 분께 부르짖어 보자.
왜 안보이냐고, 왜 말씀해주시지 않느냐고. 난 당신만 바라본다고. 난 당신만 믿는다고....
그리고 그 분이 하신 것을 증거삼아 그분이 인도하시는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리자. 찬양을 드리자.
버림받음 - 사랑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이 버림받은 감정을 가장 깊이 체험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아왔다.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지만 성육신 하신 그 예수님을 우린 또 버렸고 죽였다.
그렇기에 그 분은 버림받은 인간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리신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하신다.
당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그 때, 바로 그 분께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맡기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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