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열어주는 사람 (사무엘상 25장 20-35절)
1. 배경
1) 엔게디 광야의 굴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목숨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며 신앙의 승리를 거둔 후 (24장)
2)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을 때 (25:1)
-> 롤러 코스터처럼 신앙의 up and down이 심할 때, 오늘의 슬픔과 충격이 어제의 신앙의 성숙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을 때
2. 사건
유다지방의 마온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은 "어리석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목축업을 하는 큰 부자였지만 3절에 보면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피하던 중에서도 다윗과 그 무리들은 남의 것을 약탈하지 않고, 오히려 강도들이나 광야의 동물로부터 그 지역에서 목축을 하던 목동들과 그 동물들을 지켜주었습니다.
- 다윗의 증언: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헤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7절)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1절)
- 목동들의 증언: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15-16절)
-> 다윗의 진술과 자발의 종들의 진술이 동일하게 다윗의 선행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이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털을 깎는 시기가 왔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이들에게 양털을 깎는 시기는 일종의 추수감사절과도 같은 수확의 시기입니다. 한 해 동안 공들인 양모를 거둬들여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이 때는 술과 음식이 가득한 음식상이 차려 집니다. 그들의 목축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다윗은 열명의 동지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술과 음식을 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격식을 갖추어 공손하게 음식을 구하였습니다.
[삼상 25:6-8]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자기와 자기와 함께 있는 자들을 한껏 낮추어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을 대접하는 것을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지키는 민족입니다.
거기에다 지금은 잔칫날입니다. 잔칫날에는 지나가는 자는 모두 들려서 음식을 나눕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우리가 좋은 날 왔으니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윗을 청하여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나발이 뭐라 하냐면
10절부터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들이 많도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어디 종살이 하다가 도망나온 자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11절)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골리앗을 물리치고 군대장관까지 한 다윗을 알지 못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에게 도망나온 다윗을 엎신여기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러니까 다윗이 열이 받은 것입니다. 자기는 대접받아 마땅한데도 예를 갖추고 대했거늘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모욕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와 함께 한 동료들 400명을 이끌고 지금 나발을 혼내주러 가는 것입니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3. 다윗의 위기
표면적으로 다윗의 분노는 합당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나발에게 내 뿜는 분노는 정당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앞 장에 엔게디 굴 속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마저도 하나님께 의탁하며 용서했던 다윗이 나발의 처사에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언뜻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에 걸고 나아가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묻거나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더 앞섭니다.
견고한 댐이 무너지는 것은 강한 파도가 아니라 작은 구멍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엄청난 고난이나 핍박이 아니라 삶의 작은 구멍, 유혹이나 분노의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에게서조차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던 다윗이 지금은 분에 못이겨 400명의 동지를 이끌고 복수의 길을 갑니다. 이 때의 다윗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자신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나발의 목숨이 위태한 나발의 위기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신앙적으로 이 장면은 다윗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크게 실패할 수 있는 위기입니다. 왜 이 위기가 찾아왔습니까?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윗의 실패의 원인은 1절 "사무엘이 죽으매"라는 첫 마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기름붓고 지금까지 믿음의 조력자요 버팀목이었던 사무엘이 죽자 다윗의 마음도 무너진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질 때, 나발이라는 어리석은 자의 행위가 다윗의 신앙 전반을 무너뜨리는 큰 도화선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황을 이용해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편안할 때는 유혹을 주고, 슬플 때에 그 감정을 더욱 무너뜨리는 사건을, 사람을 이용합니다.
3. 귀를 여는 자 아비가일
이 소식을 하인에게서 들은 나발의 처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마리 등등 음식을 가지 가지 싸들고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윗에게로 달려옵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엎드려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말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나발의 이름의 뜻은 "어리석은 자"인데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이 누군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25절)
사람에게 직접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신 일이니 당신이 나발에게 보복하면 당신도 나발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6절)
내가 용서를 대신 빌고 음식을 다 가져왔으니 화 풀고 드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축복하시어 당신의 집을 세우시리니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지르지 마옵소서
(삼상 25: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나발이 치는 사건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의 처지 까지도 신앙안에서 바라보며 누가 당신을 쫓든지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생명싸개 속에 싸듯이 보호하실 것이며 당신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물매로 던지듯 던지실 것입니다 하며 다윗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무엇입니까?
"다윗이여, 원수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나발은 어리석은 자요 불량한 자인데 그 자 때문에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 되시렵니까?"
흔히 우리의 감정이 격해질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판 사판이다. 나 못참는다." 그렇다가 일을 치루고 나서 뒷감당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격한 감정은 우리를 파괴한다. 자녀를 혼내다가 폭력을 행사하고, 후회하고 부부싸움을 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던져 버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으며, 자기 밑에 사람을 훈계하다가 자기 감정에 못이겨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무너뜨려 버립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든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회개를 해도 그런 일들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다윗 앞에 무릎꿇은 아비가일의 말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임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들 끼리의 싸움에서 아비가일은 한낮 여자요,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은 약자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굳은 마음과 격한 감정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빛을 회복시키고 모든 죄의 위험에서 다윗을 구해냅니다.
3. 회복된 영성 다윗
아비가일의 말은 잠들었던 다윗의 신앙을 깨웁니다. 악한 자 나발의 행위에 똑같은 악으로, 힘으로, 폭력으로 되갚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범죄할 뻔 했던 다윗이 본면의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는 자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2-33)
다윗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받아들였고 군사를 되돌립니다. 회개는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세상에는 빛을 찾아 보기 힘든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힘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칼을 휘두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을 미워하다가 결국 우리 또한 똑같은 악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어리석은 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지만 그와 함께 거하면서도 나발의 어리석은 일에 관여하지 않고 선을 행했습니다. 악과 부딪치면서 살아가면서 악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을 행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아비가일은 나발로 인해 악에 빠질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해줍니다. 분노의 감정에 잡힌 다윗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합니다. 난파당할 뻔한 다윗을 폭풍에서 부터 건져 냅니다.
굳건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폭풍우가 아닙니다. 우리 안의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 작은 구멍이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 주위에 난파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악한 자들을 대하다가 똑같이 악해져서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빛을 잃어버립니다.
믿음은 핑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 누구 때문에 상처입었다. 누구 때문에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리고 놓쳐 버린 것은 우리를 넘어뜨기게 했던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4. 결론 - 하나님께 귀를 여는 자가 되라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고자 자신의 수하 318명을 데리고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무찌르고 구해왔을 때에 소돔왕은 다윗의 승리를 칭찬하며 모든 탈취물이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한껏 승리에 도취될 만할 때에 넘어지기 쉬운 허영심, 권력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우쭐해져 있는 아브람을 꾸짖듯이 "만군의 여호와를 찬송하라"하며 자칫 넘어질 뻔 했던 아브람의 신앙을 되돌려 놓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든, 사람이 없으면 낙타의 입을 통해서든 믿는 자의 잘못된 삶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것이 말씀이고, 그것이 예배이고, 그것이 신앙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누군가는 그러한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보며 탈선할 것 같은 신앙을 바로 잡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않고 나발처럼 술에 취해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 사울처럼 깨닫는 것이 하루도 안 되어 다시 자기 본성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가 완전무결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이 되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자 나단 선지자가 그 잘못을 지적했을 때에 다윗이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자신의 명예가 아니라 "주의 성령이 내게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었지만 "힘"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영성적 듣기 - 누군가와의 만남이나 대화에 있어서도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3자의 대면이라는 의식
그러면 상대방이 나의 감정을 건드려도,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낯선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귀를 열게 해 준 아비가일이 남편인 나발에게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귀를 열도록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말을 해도 듣지 않으니까 아비가일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25절)
미련한 자는 귀에다 대고 소리쳐 주어도 자신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훈계를 기뻐하며 깨닫고 돌이킵니다.
사람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소리도 듣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싸여서 주위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를 닫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 하늘과 소통하고 이웃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 자, 에바다의 역사를 날마다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주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트레이시 제일교회 > 주일예배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추어진 행복을 캐는 자 (마태복음 13장 42-44) (1) | 2022.07.24 |
---|---|
힌놈의 아들 골짜기 (렘 7:30-32절) (0) | 2022.07.24 |
하나님의 훈련 방법 (마태복음 14장 22-33) (0) | 2022.07.24 |
빈 그릇의 기름을 채워라! (왕하 4:1-7) (0) | 2022.07.24 |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장 37-44절) (0) | 2022.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