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4장 6-8절 래바논에서 함께 하자
(아 4:6)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후에 왕은 또 다시 홀연히 떠날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임재와 연합 가운데 충만했던 은혜는 또 다시 부재와 침묵 속으로 돌아가 더 깊은 사랑을 위한 시간을 준비합니다.
말씀과 은혜 - 함께 할 때는 한 없이 행복한 것이지만 그 말씀은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음식을 소화시키듯 끝없는 묵상과 또 순종함을 통하여 온전하고 깊은 삶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육신이 되어 삶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의 신비이자 여정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떠나는 신랑의 여정은 단순히 신부를 홀로 내어버려두고 사라지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가 갈 곳을 알려 준 후 그 곳으로 같이 가자 하십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반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꼐 가자." (8절)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 천국의 복음, 산상수훈을 들려주시듯 자신의 사랑하는 신부를 십자가의 산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레바논에 있는 산은 어떤 산입니까?
- 첫 째, 그 산은 몰약과 유향이 있는 산입니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몰약과 유향의 이미지는 여인을 치료하고 회복하며,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시는 그런 삶의 길입니다 .
십자가의 삶, 고난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향을 발하는 것이고 주님은 그 안에서 참 쉼을 주십니다.
우리 삶은 축복으로 향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축복을 달라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치 자신이 높아져야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풍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산으로 부르시어 제자들을 향한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나니..."
그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오직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복입니다.
왕은 술람미 여인을 산으로 불러 예루살렘 여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신비하고 거룩한 영적인 길로 초대합니다.
- 그 산은 우리를 흠이없게 하는 산입니다.
(아 4:7)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십자가의 산 아래에서 우리는 아무런 흠이 없는 자가 됩니다. 그 분께서 우리의 모든 흠을 가리우고 창조하실 때 모습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때 삶의 아름다움은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만 그 분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의 삶은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꿉으로 아름다와 지려고 했습니다. 겉은 아름다왔지만 그들은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한낮 평범한 하층 여인에 불과합니다. 노동으로 인해 검게 그을린 피부며 들판을 뛰다니는 모습은 예루살렘 여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에게 선택을 받음으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됩니다. 그 분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꾸어도 자기 만족에만 머무는 삶은 아름답지 못한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같고 어리석고 미련한 길이지만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한 것이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천하에 있는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천하를 창조한 그 분 안에 있으므로 천하보다 귀한 자가 됩니다.
(아 4:8)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해석상의 가장 어려운 구절입니다.
이 전까지 왕은 술람미 여인을 "나의 어어쁜 자,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비둘기"라고는 불렀어도 한 번도 나의 신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를 나의 신부라고 부릅니다.
레바논은 사시 사철 꼭대기에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흰산'이라는 의미로 솔로몬의 성전을 지은 백향목의 원산지입니다. 3장에서 이 곳의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신부를 불렀습니다.
광야에서의 장막 성전은 조각목으로서 지었지만 솔로몬은 가장 좋은 나무인 백향목으로 지었습니다.
조각목같은 술람미 여인이 왕으로 말미암아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백향목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분의 죽음으로 그 분의 자녀, 그분의 신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좁은 길, 높은 길을 향하는 그 분의 제자, 그 분의 신부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서에서는 신부로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 부르는 삶입니다.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는 레바논 산의 봉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아마나는 ‘진리’이고 스닐이란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며, 헤르몬은 ‘파괴’라는 뜻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각각의 특성을 가리키듯 참 진리, 승리자(구원자), 그리고 심판자의 의미를 지닌 세 봉우리입니다.
여인을 이 레바논 산으로 불러 세 봉우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상에 오르셔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이 경험한 삼층천을 기억나게 합니다.
참제자, 참 사도, 참 신부인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맛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맛을 본 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오늘 죽어 천국에 가자하면 망설입니다.
장가도 가야하고, 성공도 좀 해 보아야 하고,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두고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나 탈출하게 하시는데 뒤를 바다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아내와 같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술람미 여인은 비둘기 처럼 순전히 오직 왕을 바라보다가 레바논 산에 오르게 됩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 이 땅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영적인 깊은 체험은 우리의 순전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두 마음을 두면 안됩니다.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미련을 두면 그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사자 굴과 표범 산에 내려다보아라”. 사자나 표범은 땅을 지배하는 짐승들입니다. 땅의 정복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자가 되기 위해, 표범이 되기 위해 그들을 우러러 보지만
왕과 함께 레바논에 오른 술람미 여인은 이제 그런 것들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봄니다. 그녀의 우러름의 대상은 오직 왕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땅의 것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신앙생활 하면서 여전히 땅에 것에 집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가?
하늘의 것을 맛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직 순전히 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자를 주님은 지금도 산으로 부르십니다.
참 진리, 참 승리, 참 심판을 맛보게 하시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흔들리지 않고 파도 위를 걷게 하십니다.
순전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늘의 은혜를 소망하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가치있는 삶을 사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난 오늘도 주님과 함께 몰약과 유향의 산을 통해 치유받고 거룩함의 은혜를 경험하는가?
2. 오늘 나의 삶에서 레바논의 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상의 사자와 표범같은 방해물은 무엇인가?
찬양) 주님은 신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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