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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아침묵상 (새아가서 강해)

아가서 2:8-10 일어나 함께 가자!

by 소리벼리 2022. 1. 9.

아가서 2:8-10  일어나 함께 가자! 

 

  • (아 2:8)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예루살렘 여인들과의 비교에서도, 세상의 다른 유혹에서도 자유함을 얻은 술람미 여인은 이제 신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민감한 영적인 귀를 얻게 됩니다. 신랑을 찾기 위해 그가 양을 치는 곳과 정오에 쉬는 곳을 알려달라는 그녀에게(1:7-8), 그를 찾기 위해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곁에서 염소새끼를 먹여야만 했던 여인은 이제 자신이 머문 곳에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에 모든 장벽들이 사라지고 우리가 그 분께 집중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찾아헤매지 않아도 그 분의 임재, 그 분의 다가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나의 시선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영성가들은 작은 산은 우리 마음의 외적인 부분이고 산 위는 우리 영의 가장 깊은 부분이라 해석하며 그분께 집중하며 얻는 그 분의 임재와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을 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다른 연합을 경험하게 됨을 이야기한다. 

 

  • (아 2:9)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그분의 충만한 임재는 계속적으로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여인은 사슴이나 노루의 움직임을 통해서 사랑하는 님의 갑작스러운 나타남과 사라짐을 표현합니다. 즉 그 분과의 달콤한 연합을 맛볼 때에 우리는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때론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라짐은 마치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자기 눈앞에 나와 있는 사슴이나 노루처럼 슬며시 다시 곁에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 분은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분을 항상 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따끔씩 그 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항상 체감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의 시대에 하나님을 대면한 자는 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경계, 완전한 선함과 죄악의 흔적을 품은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도 실재로는 우리의 존재가 그 분과의 지속된 연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덧 다가와서 그 분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시는 주님은 또한 어느 순간 그 분의 부재를 통해서도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부재로 다시금 그 분을 찾아 헤엘 때에, 어느 덧 다시 다가오십니다.  

 

  • (아 2:10)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앞 부분에서 술람미 여인과 왕의 연합을 가로막는 것은 주로 예루살렘 여인들이었습니다. 즉 겉으로는 왕을 사모하고 갈망하지만 그들의 본성은 허영이고 자기 만족이고, 자기를 가꾸는데만 있는 세상적인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부가 거하고 있는 은밀한 곳에 와서 왕은 여인을 향해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을 밖이 아닌 우리 내부로 돌리시며 때로는 그 분의 임재는 때는 사라짐을 통해서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분의 임재에 익숙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안에 안주하지 말고 그 분이 거하는 곳, 그  분이 인도하는 곳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우리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나를 따르라고 부탁하십니다. 이전의 나아옴은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연적인 만족, 세상적인 만족을 버리라는 부름이었다면 이제는 우리의 본성을 떠나라는 부르심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처럼 그 분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거처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제 신랑은 또다른 영적 경험의 세계로 여인을 인도합니다. 

 

결혼이라는 것 - 사랑을 위해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는 것.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너무나도 당연한 삶의 경험이지만 결혼을 위해 부모를 떠나는 것, 

이제 서로 사랑하기 위해, 익숙한 사랑을 떠나는 것 

사랑이라는 것, 결혼이라는 것 - 너무나도 충격적인 모험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이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떄문입니다. 

하나님꼐서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태가 결혼을 두려워하는 것, 결혼하지 회피하는 이유 -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한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요소들이 있지만 

신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떄는 사랑이 사라졌기에, 모험도, 희생도, 오래 참음도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 한 복판에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처소를 나와 나와 함께 깊은 곳, 높은 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 하십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묵상을 위한 질문) 

  •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허영심이 여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 그 분의 임재가 주는 달콤함을 경험해 보았는가? 아니면 지금 그런 달콤함이 사라진 것 같아 목말라 있지는 않은가? 나 자신이 그 분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할 때에라도 그 분은 사슴처럼, 노루처럼 여전히 조용히 내 주위에 머무르시며 내 내면의 창밖에 서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 그 분이 내면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나에게 와서 일어나 함께 가자 할 때에 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찬양) 예수 늘 함께 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