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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빈 그릇의 기름을 채워라! (왕하 4:1-7)

by 소리벼리 2022. 7. 24.

빈 그릇의 기름을 채워라!  (왕하 4:1-7) 

 

부활절을 맞이하는 본문으로는 처음 다루는 본문. 왜 부활절에 이 본문을 다루게 하시는가? 함꼐 이 본문을 들여다 보자. 

 

아합왕의 시대 - 북왕국- 20명의 왕조 중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여로보암의 길,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정한 장소에서, 자신이 정한 사람을 세워놓고, 자신이 정한 때에 황금송아지를 앉혀놓고 예배하는 길. 

자기복음,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 우상-> 황금으로 자기들을 섬겨주기를 원하는 자신의 욕망이 표현된 신께 제사하는 신앙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 아합왕. 그나마 명목상으로나마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예배하는데서 떠나 자신의 아내 이세벨을 따라 바알과 앗세라 사제들로 성전을 채우고, 바알과 앗세라 상을 세우고 제사하게 함. 

 

그 때, 그러한 시대에 의분에 차서 일어났던 선지자 - 엘리야

그가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인 후에에도 아합이 변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자, 낙심하고 지쳐 로뎀나무 가에 망연히 주저앉아 고백했던 말

- 내가 열심히 특심하오나 나만 남았습니다. 

-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하고 입맞추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두었다." (열왕기상 19장까지의 내용) 

 

그 칠천명을 찾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고, 또 다른 무리들을 찾아 그 믿음의 계보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여 엘리야의 남은 일생 - 자신의 후계자 엘리사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선지자를 양성하는 것. 

 

우리나라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6.25때에도 국가적인 위기 때에 힘썼던 것 - 전쟁보다 우선 한 것 - 교육

기독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과 더불어 세우고자 했던 것 - 학교

우리나라 빈민선교, 구제 선교에서 늘 중시하면서 세워 나갔던 것 - 야학-> 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바알에게, 세상에게, 세상 권력에게 무릎꿇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열왕기상 후반부와 열왕기하에 걸쳐서 엘리야와 그 뒤를 이은 엘리사의 때에 "선지자의 제자,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열왕기하 2장에 보면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상당한 수의 제자들의 수(50여명)가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선지자라는 것이 교육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기름 부으심)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를 제외하곤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구약의 시대, 성경은 적어도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시기에 현재의 신학교와 같은 선지자로부터 교육을 받고 또한 선지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는 기관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신앙적으로 부흥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던 시대였습니다. 

나라의 분위기가 왕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신앙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 선지생도들의 삶은 대게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웠지요. 

하나님 믿고 의지해서 살려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하는데 아합과도 같은, 그 뒤를 이은 아하시야와 여호람 같은 모든 왕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들의 삶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한 아내의 남편되었던 선지생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악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따라 선지생도가 되었지만 무슨 경위인지 모르지만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빚만을 남긴채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의 경제 활동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과부들은 가장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입니다.  

룻기를 보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 밭에 남기워진 이삭을 주어 살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빚을 갚는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빚쟁이들이 독촉을 하다가 급기야 두 아들을 데려가 종을 삼고자 합니다. 

그 가족이 한 것이라고는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 잘 믿고자 한 것 밖에는 없는데 남편은 아무런 열매도, 사역도 하지 못한 채 죽고 이제 두 아들은 악한 세상의 종이 되어 끌려 가려 하고 있습니다. 

 

왜 신실한 자에게 고난을 내리시는가? -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

하나님이 만물의 주권자이시니까 이런 고통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 얘기하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가정에 닥친 이 여인과 같은 가정의 고난은 우리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어떤 선한 뜻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악한 세상 중에 하나님 믿고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하는 자들, 신앙적으로 열심내는 자들이 세상에서 받는 고통은 신앙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구약 시대에서 가장 능력있고 대표하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의 밑에서 교육받고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입니다 .

선생은 교육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도, 가정도 함께 떠맡는 부모와도 같은 역할입니다 아무리 악한 아합왕 때 이더라도 하나님은 엘리야 한 사람을 통해서도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멸하고 위대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생도 중 한 명이 아내와 두 아들을 남기고 빚만을 남긴 채 죽은 선지생도.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여러 한계의 상황을 만난 사람들을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 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왕하 4: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1. 대화의 대상이 누구인가? 

원망이나 기가막힌 일이 일어났을때, 대개 사람들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앞에서 한탄하거나 원망하거나 저주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문을 닫아 스스로 자기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선지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에게 나왔습니다. "당신이 이 모든 일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자를 만났습니다. 

1절에 보니까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조용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응어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엘리사를 찾아가 조용, 조용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죽을 것 같고, 괴로운 그 마음을 토합니다.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소연을 하던, 원망을 하던, 아니면 부르짖고 매달리던, 이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가 그 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렘 33:2-3)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결국 일을 행할 수 있는 분에게 나와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할 수 있는 자에게 나아가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행할 수 없는 자에게 이야기 할 때가 살펴 보면 더 많습니다

그냥 들어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능력없는 자가 아무리 듣고 있어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일을 행하십니다. 성취하십니다. 크고 비밀한 것들을 보여 주십니다. 

 

2. 여인의 고백-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여인은 엘리사에게 절규합니다. 

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습니다. 이제 빚쟁이들이 와서 두 아들을 종삼겠다고 합니다. 

여인의 의도는 이겁니다. 

1) 신앙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2) 그리고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신앙 좋은 사람이 좋게 죽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한 신앙인 이었지만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죽을 때에 자기 자녀들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나라의 기울어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분의 제자들은 갖가지 잔인한 방법으로 순교당했습니다. 

 

신앙인이 좋게 죽으면 좋겠지만 좋지 않게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든지 신앙인은 죽으면 하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결국 신앙인에게 남겨져 있는 것은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2) 이제 난 어떻게 합니까?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여지껏 남편의 신앙에 의지해서 살았는데, 남편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떠났습니다. 이제 나 어떡해요...

아내의 말은 무엇입니까?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는 부르짖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의 믿음, 자신의 신앙은 말을 못합니다. 

여인은 믿음 좋은 사람의 아내였을는지는 모르지만 믿음 좋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하 4: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엘리사의 응답 -너의 믿음을 채워라. 

여인의 부르짖음을 듣고 엘리사가 말합니다. 

1)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아내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신앙좋은 남편이 죽었으니 내 하소연좀 들어주십시오. 거기다가 좀 더 기대하는 것은 '내가 억울하니까 날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엘리사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꼐 나온 제자들에게, 병자에게 주님께서 던지는 질문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what do you want? 

"네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네 문제 넘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 다음 질문: 

"네 집에 있는것이 무엇이냐?" 

지금 아내가 엘리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가진 것이 있다면 날 도와줘야 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도와줄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의지하는 남편이 없어졌을 때에,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냐? 

믿음 좋은 선지 생도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여인이 말합니다. 

"기름 한 그릇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살 길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방법이 없다고 부르짖는 여인에게, 엘리사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 네게 남긴 것이 있다. 너에게 찾을 것이 있다.” 고 하십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기름 한 그릇, 기름 한 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름 한 병이 있음을 고백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없어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 기름 한 병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남편과 남편의 믿음만을 의지하던 여인에게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남편의 신앙, 남편의 믿음이 아닌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내 남편도 죽고, 빚은 넘치고, 두 아들마저도 빼앗길 처지이지만….그래도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내 도움이시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주신, 당신이 주신 성령이 남아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건,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름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 나와서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은혜를 바라고, 하나님이라면 내게 도울 수 있다라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 안에는 기름이 있는 것입니다. 

설사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큰 믿음을 가지진 못했어도, 확실한 체험을 가지진 못했어도, 때로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원망하고, 기도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끈덕지게 나와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하나님, 내게 작은 기름 한 병 남아 있습니다.”라고 깨닫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 있다는 여인의 대답에 엘리사는 또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채워지길 원하는 은혜의 공간입니다. 빈 그릇은 내 영의 갈급함의 공간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분량입니다. 준비된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더 이상 빠지면 광신에 빠지고, 친구도 잃게 하고, 남들로부터 주목받게 되니까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같습니다. 갈급해하지 않습니다. 도와주면 그만 아니어도 그만입니다. 

 

엘리사는 집안의 모든 빈그릇을 모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집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라 합니다. 조금 빌리지 말고 빌리 수 있는 만큼 모든 이웃의 빈그릇을 긁어 모으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넘치는 은혜를 주려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부어 줄 테니 네 주위의 갈급한 심령, 네 주위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심령, 모든 공허한 자, 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를 긁어모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의 모든 가난함을 채우지만 나만 알았던 나의 시선을 내 주위에, 내 이웃에 돌리도록 합니다. 지금 나도 없어서 죽을 것 같은데 내 주위의 더 가난한 영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 할 때에, 엘리사의 이 요구는 황당한 요구입니다. 

지금 빚쟁이가 독촉하며 아들을 달라고 하는데, 이웃에 나가서 또 빈그릇을 빌려 오라니,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많이 빌려 오라니, 이웃이 내 말을 들어줄지도 모르고, 그 그릇을 가지고 무엇을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엘리사의 말을 듣습니다. 후다닥 달려나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이 모라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그릇을 가져 옵니다. 

4절) 너는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어디로 들어갑니까? 

네 집안의 골방, 아무도 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세상의 것 생각지 말고, 빚쟁이도 생각지 말고, 죽은 남편도 생각지 말고 오직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가져온 빈그릇,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의 모든 빈 그릇, 빈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까지, 문을 닫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성령의 은혜가 가득 찰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81:10-12)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다. 그러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습니까? 절망과 원망과 염려로 고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고후 6:1-2]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부활절 -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 -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각자의 살 길을 위해 도로 물고기 잡는 어부가 되려 한다. 

하늘에는 잔치가 열리고 난리가 났는데 그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변합니까? 

오순절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들의 눈이 열리고, 능력이 임하고,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바로 앞에서 거듭 말씀하셔도 이해하지 못하고 딴짓하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야 비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했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권세를 무리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댜. 

법적인, 이론적인, 영적인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부활을 그들의 삶 속에 경험한 것은 오순절 성령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500여명이 함꼐 하던 무리가 380명이 떠나고 120여명이 남아 그 자리를 지켰더니 그 남은 120여명이 전세계를 움직였습니다. 

부활의 완성을 성령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것이 크던 작던 여러분 안에는 작은 기름 한 병들이 있습니다. 그 기름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기름을 앞에 두고 더욱 갈급한 심령으로 빈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부흥회는 빈그릇을 채우는 기회입니다. 

여러분, 많이 준비한 자가 넘치도록 받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빈그릇까지도 데리고 오고 긁어 모아서 그릇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부흥회는 여러분이 준비한 모든 빈그릇이 채워지는 부흥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태운 한 병 기름이 모든 빈그릇에 넘치도록 채워지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