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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하나님의 훈련 방법 (마태복음 14장 22-33)

by 소리벼리 2022. 7. 24.

하나님의 훈련 방법 (마태복음 14장 22-33) 

 

본문에서 제시하는 장면 - 오병이어 기적 사건 이후에 등장하는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 

지난 4월 첫 주 요한복음 6장의 본문으로 "그들이 가려는 땅"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누었던 장면 

오늘은 좀 다른 시각으로 마태복음의 본문을 가지고 바라보고자 한다. 

 

1. 즉시, 제촉하사 (22절)  

  • 두 번이나 걸쳐서 강조하면서 제자들을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떼어 놓으신다. 
  • 아직도 그 현장에서는 사람들의 흥분이 가시지 않고 여전히 그 현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큰 일이라도도 있는 듯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촉하여 건너편 - the other side로 가게 하신다. 
  • the other side: 오병이어의 맞은 편 현장, 은혜의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삶의 현장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현장이  마치 어린아이를 나쁜 친구에게서 떼어놓으시는 것처럼 즉시, 제촉하여 그 자리를 뜨게 하신다. 

그리고 서둘러 무리들도 해산시키시고 본인도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다. 

 

그 자리에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위험한 것일까? 

천천히 앉아서 각자 느낀 점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순 없는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급하게 제자들을 먼저 보내어 저들의 호들갑스러운 장면을 못보게 만드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킨 후에 또 홀로 기도하러 가셨을까? 

가서 또 무슨 기도를 드리셨을까? 

 

  • 뒤풀이문화- 그 사건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한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결국 자아도취에 빠진다. 

드라마가 하나 끝나면 깊은 우울증에 빠져 드는 배우. 큰 성공한 영화를 찍고 나서 그 다음 작품에 연이어 실패하는 사람들. 

여전히 그 작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 은혜의 효과 - 교회 현장이나 신앙생활에서 큰 은혜의 체험 후에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기를, 그 운혜의 기운 아래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 같다.

은혜의 기운에 취해 있고 싶은 제자들을 건너편 폭풍우기 있는 곳으로 속히 보내고 

예수님 자신은 산에서 홀로 밤을 맞이하신다.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큰 은혜의 현장 뒤에 산에 무리들과 심지어 제자들과도 떨어져 따로 밤을 맞으시는 장면은 외로움을 넘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 시간 예수님은 따로 하나님을 만난다. 

은혜의 기운에 취해있는 것이 아니라 밤에, 홀로, 산에서 오롯이 하나님과 은밀하고 친밀한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이 외롭거나 처량하지 않고 거룩한 이유이다. 

 

우리는 은혜의 현장에 사람들과 함꼐 있고 싶어하지만 주님은 그 은혜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과 나누고 싶어한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 다른 목적에, 다른 사람들 떄문에 그 은혜를 빼앗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많은 사역자들이 기적의 현장 이후에 교만해지고, 넘어지거나, 엘리야 처럼 반대로 무기력증이나 우울감에 빠진다. 사역의 후유증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성한 사역 이후에 언제나 홀로 하나님과 대면한다. 

그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설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은혜의 열기에 취하지 않고 그 건너편 파도가 있는 삶의 현장을 보게 하신다. 

 

2.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를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를 떠났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심리적 거리가 은혜의 현장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은혜의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은혜의 기억이 사라져 버린 그들이 맞이하는 것은 물결로 말미암은 고난이다. 

 

지금 제자들은 오늘의 고난 때문에 어제 일어난 모든 은혜를 잊어버렸다. 신앙생활에서 잊어버린다는 것, FORGET의 의미는 곧 잃어버림 LOST이다. 

신앙에 있어서 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마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 기억하라. 내가 행한 일과 행하는 일들을 기억하라. 

 

3.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 유대인의 시계 

저녁 6시 부터 3시간씩 1경(6-9시) 2경(10-12시), 3경(1-3시), 4경 (4-6시) 

맙소사, 밤을 꼴딱 세워가며 지금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몇시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적어도 4-5시간은 지금 바다에서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제 죽는구나. 삶의 고난 앞에서 이젠 소망없이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물 없음으로 불평하는데 3일이 채 안걸렸다면 

오병이어를 경험한 제자들이 죽음만을 기다리는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우리의 연약함의 현 주소이다. 

난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베드로가 그 날 밤에 예수를 저주하는 자가 된다. 

열 두 제자 중 가장 믿음 좋다는 베드로가 그랬다. 난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는 이유다. 베드로로 자신했지만 저주했다. 

신앙은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다 위로 걸어서 - 주님은 바다 위를, 우리가 두려워하는 고난의 위를 걸어서 오신다. , 그 위로 오신다. 고난 가운데에서 그 중심에서부터 오신다. 

산타처럼 썰매 타고 하늘에서부터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두려워하는 고난 속에서, 그 위에서 오신다. 

 

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며 유령이라고 외치는가? 

고난 가운데서는 주님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는 상관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주님을 포장한다. 거룩한 옷과, 잘생긴 외모, 인자한 표정-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이고 전통이다. 

떄로 주님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순간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도 오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삶의 어느 순간, 오병이어의 순간이건, 풍랑의 순간이건, 죽음의 순간이건 우리를 살리시는 그 분의 음성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자는 복되다. 복된 존재가 된다. 죽음 같은 내 삶에 생명이 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실패는 거듭된 믿음의 훈련을 보여준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30절) 

 

신앙인은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자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자로 나뉜다. 

우리 또한 풍랑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자가 될 수도 있고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자가 될 수 있다. 

 

신앙생활하면서 상황이나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 수없이 듣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그러한 상황을 만나면 감정대로 물에 빠져간다. 

그러한 자기 모습을 보고 인정하면 부르짖을 수 있다. 

부르짖는 이유는 내 연약함을 알기에 부르짖는 것이다. 

 

4. 예수님이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친다. (32절) 

신앙은 우리의 삶이라는 배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다. 

떄로 은혜라는 이름으로 주님이 아닌 그 기분을 의지할 때가 있다. 

주님은 은혜의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은혜의 현장에서 떼어 놓으시고 홀로 잊게 하시게도 하고 

고난이라는 풍랑 가운데 우리를 집어넣어 그 곳에서도 주님을 만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훈련방법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개척해서 지금까지 한 주도 빠짐없이 대면예배를 드려왔던 우리에게 이 온라인 예배는 낯선 경험이고 또 당황스러운 현실이다. 

더우기 부흥회 뒤에 찾아온 코로나 확진 소식은 모든 은혜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게 하는 것과 같다. 

온라인 예배를 준비하느라 몇몇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드니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 아직까지 온라인 예배를 안드렸다는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교회가 이미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생활화 되어 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알수 있듯이 우리 성도들 역시 예방 접종을 3차까지 모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에 노출되면 언제든 걸릴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동안 우리가 한 번도 빠짐없이 대면예배를 드린 것 자체가 기적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왜 지금 시점에 하나님은 이러한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하셨을까? 

매번 나누었던 개척비전대로 우리는 교회가 사라지거나 예배가 폐하여져도, 이 세상에 홀로 남아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할 수 있는 한 성도가 교회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는 교회이다. 

은혜 가운데 임한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대면예배를 통해 은혜 주신 주님은,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도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라는 교회된 성도, 바로 여러분이 어느 환경에서도, 감정이나 환경을 통해 흔들리는 모래 위의 집이 아닌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림없는 반석 위의 집, 바다 위에 주님과 함꼐 항해하는 배와 같은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은혜가 첫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과 그 가정위에 함꼐 하시길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