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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토머스 아켐프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과 인생의 여정의 단계 기도 

I.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etio Modena)    

  1.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기원 및 동기   

  • 11세기 초까지 수도원이 엄청나게 타락하면서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프란시스칸 같은 탁발수도회였다. 수도원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재속 수도원과 폐쇄 수도원이다. 탁발 수도회 이전 수도회는 대개 폐쇄 수도원이고 탁발수도원은 재속 수도원으로서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여하는 것이다.  
  • 프란시스칸이나 도미니칸 같은 탁발 수도회는 중세 교회에 큰 도전을 주고 갱신 운동을 일으켰으나 대학의 시작 등 스콜라 주의가 발달되면서 수도회는 점차 교회에 봉사하고 교육을 강조하는 지성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지성주의, 엄격한 예식주의 및 율법 주의에 맞서서 회개와 경건 생활을 강조하는 한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신경건 운동이라 부른다. 이 운동은 네덜란드인인 제랄드 그루테 ( Gerard Groote 1340-1384)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35세 때에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은거하며 참회의 생활과 영적인 독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게 되었다. 영적으로 나태하고 지적으로 무지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당시의 성직자들을 향하여 새로운 각성과 회개를 외치는 그의 사역은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자극을 주어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어 자발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며 사도적인 삶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1. 특징 

  • 이들은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중세 수도원이 강조했던 수도 서약등을 하지는 않았고 탁발 수도회처럼 걸식을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또한 지역의 교회와 단절하지 않고 지역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 참여하며 고해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단순히 겸손과 사랑과 단순한 생활과 도덕적인 실천에 초점을 두었다. 
  • 그들의 영성생활의 주요한 원천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라틴어가 유일한 종교적 언어였기 때문에 예배에 있어서 라틴어로만 성경을 읽고 미사를 집례했지만 신경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릎쓰고 성경이나 예전책 혹은 경건 서적들을 평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방어로 번역하는 일에 투신하여 라틴어를 모르는 비지식인들조차 성경과 경건 서적을 통하여 경건 생활에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 그들은 경건에 유익이 되는 성경 구절이나 교부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서로 토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주일 오후에는 마을 주민들도 초대하여 그들의 토론에 참여케 하면서 경건생활의 보편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 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중요한 생활 방식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기꺼이 다른 형제들에게 드러내어 고백하고, 이어서 주어진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의 훈련을 통하여 겸손과 순종의 덕을 쌓아갔다. 
  • 이들은 반지성주의 혹은 반 성직주의로 지적 형성 보다는 성경을 묵상하며 주로 도덕적인 진보에 관심을 두었으며 반대로 사변적인, 논리적인 유희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믿음에 관한 진리는 지적인 문제가 아닌 가슴으로 경험되는 감성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이 담긴 감성적인 헌신은 이미 얻은 도덕적인 덕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자신의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 였는데 그 양식을 씹는 과정으로서 명상을 선택했다. 명상을 할 때에는 주로 역사적인 예수, 즉 고난 받으신 예수, 공생애적인 예수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향한 내면적인 헌신을 경험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표였다.

  1. 그리스도를 본받아, 3대 베스트 셀러 - 성경, 천로역정, 그리스도를 본받아...

  • 데보티오 모데나 운동의 산물로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mitation of Christ)"이다. 이 책은 신경건 운동의 형제 자매 공동체에서 행해진 가르침과 잠언들이 기초가 되어 경건생활을 조직화한 작품이다. 전체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로 들어갈 수 있을까? 첫째, 영적 변화의 첫단계는 겸손을 통한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겸손은 인생이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향한 타고난 욕망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믿지만 아무리 우리의 욕망을 채워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 두번째 영적 변화를 위한 조언은 적극적으로 덕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세번째 조언은 내면의 평안 (히브리어 샬롬, 헬라어 에이레네)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 평안은 욕망의 추구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진다. 네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며 매일을 사는 것이다. 이 사랑은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난 아가페 사랑이다. 다섯번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와 대면하라는 것이다. 우리 자아와 세상에 대하여 죽으면 곧 어디서 출발하던 십자가와 대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다. 모든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 우리가 짊어지기 때문에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십자가는 우리와 함께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위든, 아래이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당신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실 때 가졌던 것과 동일한 마음을 우리의 삶에 구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떠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을 따르는 것이다.
  • 본성(NATURE)의 지배를 받는 삶과 은혜(GRACE)의 지배를 받는 삶

  1. 본성은 삶을 분주하게 하지만 은혜는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한다. 
  2. 본성은 자기 중심적이지만 은혜는 하나님을 향한 삶이다.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중심에 있다
  3. 본성은 순종의 멍메를 피하려 하지만 은혜는 자기 중심성을 넘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향한다.  
  4. 본성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만 은혜는 자기 목적을 위해 성공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 
  5. 본성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경의를 원하지만 은혜는 모든 존경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6. 본성은 수치와 경멸을 두려워하지만 은혜는 예수 이름으로 비난 받는 것을 기뻐한다. 
  7. 본성은 게으른 반면, 은혜는 해야 할 일을 기쁘게 찾는다
  8. 본성은 유행에 민감하고 물질적인 소득을 기뻐하고 상실에 낙담하지만 은혜는 영원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지나가는 것들에 메달리지 않는다. 
  9. 본성은 탐욕적이고 소유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은혜는 친절하고 나누고 작은 소유에도 만족한다. 
  10. 본성은 몸과 자아에게 몰두함으로 생겨나는 염려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은혜는 그것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길에 있는 것들로 향한다. 
  11. 본성은 감각을 만족시키는 위안을 찾아다니지만 은헤는 하나님 안에서 위안을 찾는다
  12. 본성은 이기적인 소득이 동기가 되지만 은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보상을 구하지 않는다. 
  13. 본성은 적은 사람들과만 즐기기 원하지만 은혜는 모든 사람과 나누기를 원한다. 
  14. 본성은 부족한 것과 고통에 대해 쉽게 불평하지만 은혜는 의연하게 가난을 견딘다. 
  15. 본성은 자신을 만뭉에게 향하게 하지만 은혜는 만물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16. 본성은 비밀을 알고 싶어하고 내막을 알고 싶어하지만 은혜는 영혼에 유익한 것들만 취한다. 
  17. 본성은 작은 일에도 쉽게 불평하게 하지만 은혜는 모든 것을 의연하게 견디게 한다. 
  18. 본성은 사람들에게 나를 드러나기를 원하게 하지만 은혜는 헛된 괴시를 피하게 한다. 
  19. 본성은 감각에 몰두하게 하지만 은혜는 감각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 
  20. 본성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원하지만 은혜는 하나님만 알아주기를 원한다. 
  21. 본성은 죄의 다스림을 받지만 은혜는 은헤의 다스림을 받는다. 
  22. 본성은 내가 선악을 판단하려 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시기를 원한다. 
  23. 본성은 악에 굴복하지만 은혜는 덕의 빛을 발한다. 
  24. 본성은 자신의 에너지로 나아가는 반면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에 의존한다. 
  25. 본성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외면하지만 은혜는 겸손하게 단점들을 끌어안고 그것으로부터 배운다. 

  1. 개신교 신앙과의 관계 

  • 이들의 영적 순례는 영적인 회심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개신교의 회심처럼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는 의지적인 결단을 의미한다. 회심의 결단으로부터 지속적인 진보를 위한 영적인 훈련이 강조된다. 그들에게 영성 훈련은 곧 개인의 결단을 통해서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훈련을 의미한다. 가장 가까운 목표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 데보티오 모데나 운동이란 중세가 여러 가지 외적인 행위로 경건을 정의하려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경건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 운동이다. 
  • 이와 같은 경건 주의자들의 태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에라스무스나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II. 인생의 여정 단계 기도 (Stages of the Journey) 

  •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약속된 땅을 향해 가는 인생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여정의 단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험한 광야 가운데 머물고 있는지, 호렙 산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약속된 땅을 따라 위험하지만 희망 가득한 진격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여정의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 말씀을 따라 기도해 보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삶을 진단하는데 있어서도,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현재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중요한 기도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시내산, 혹은 호렙산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계시를 받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계시를 받는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애굽도 아니고 약속된 땅도 아닌 광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중요하지 않은 여정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산에 충분히 머물라"한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 목적: 우리의 신앙여정을 살펴보고 그 여정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관계맺고 계신가를 기도를 통해서 깊이 묵상하고 성찰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 방법

  1. 신명기 1장 6-8절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신 1:6-신 1:8]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 애굽의 때: 당신의 인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가장 험난하고 힘들었을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때를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애굽의 삶과 연관시켜 보십시오. 당신의 애굽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의 인생에서 애굽의 단계에 해당되는 곳을 기억해 보십시오. 
  • 광야시기: 자, 이젠 애굽에서 탈출하여 뒤따른 삶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시기에 당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랑하듯 혹시 방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 길에서 멈추어섰던 적은 없으셨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또한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신의 인생여정에서 광야같던 여정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관하여 생각해 봅시다. 
  • 호렙 산에서: 당신의 인생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 및 계시가 주어졌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 분의 임재 안에서 쉼을 쉬던 때가 있었습니까? 신앙의 여정 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인생 여정에서 호렙산에 해당 되던 때를 기억해 봅시다. 그 기억이 광야 같은 삶에서 어떤 소망을 주었습니까? 
  • 잠시 침묵 속에서 호렙산에서의 당신의 모습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지시하고 계십니까? 그 음성을 듣는 당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 약속의 땅: 자, 이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당신에게 약속된 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향해 당신의 신앙여정이 향해가고 있습니까? 
  • 다시 현재의 당신의 위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어떤 여정 가운데 당신은 머물고 있습니까? 어느 여정에서 당신의 인생이 가장 길게 머물렀습니까? 이 묵상이 당신에게 준 유익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어느 여정이 당신에게 가장 인상 깊게, 혹은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까? 
  • 하나님께 당신의 신앙여정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면서 기도를 끝맺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 7 강 노르취의 줄리안과 마음의 간구 묵상기도     


I. 노르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3-1423)  


  1. 생애  

  • 그녀의 삶이나 이름 조차도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14세기 말 영국의 노르치에 있는 성 줄리안 교회에 붙어있는 작은 방에서 평생을 은수자로 살았던 여류 신비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실한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은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거나 은수자로 사는 것 뿐이었다. 은수자는 주교나 수도원장의 면접을 거쳐서 허락을 받고 두 명의 하인을 두게 했다. 그리고 창문에는 두 개의 창문을 두어 하나의 창문은 바깥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두었고, 하나는 내부를 향해서 상담이나 영적인 지도를 받으러 온 사람들을 만나 대화 할 수 있게 하였다. 노리치 시에는 은수자가 많이 살았고, 이런 은수자들이 많다는 것은 그 도시를 위해서 축복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기꺼이 거룩한 남녀 은수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은수자들의 역할은 단지 영적인 도움만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기도와 영적 지도는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되었다.
  •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일대는 흑사병(1348년부터)이 창궐하고, 백년 전쟁 (1337-1453)과 농민 혁명(1381), 교회의 커다란 분열의 위기(1378-1417)으로 영국 전체가 혼란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피폐된 상황이 모두 인간의 죄로 말미암았고 하나님께서 이에 대하여 심판하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인간의 부패된 죄성과 이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설교나 글들이 많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 줄리안은 두 개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계시』라는 한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 집필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길이가 짧은 텍스트(Short text)로 알려진 첫 번 째 작품과 긴 텍스트로 알려진(Long text) 두 번 째 쓴 작품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텍스트는 『계시』(Showings)라는 제목으로 1373년 5월 8 일에 그녀가 하나님께 받은 환시에 기초하여 쓴 것이다. 두 번째 텍스트는 줄리안이 환시를 받은 후 20년간 줄리안 교회의 은둔소에서 기도와 성찰, 신학화 작업을 거친 뒤에 그녀가 체험한 환시의 의미를 더 깊게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첫 번째 텍스트의 네 배의 길이로, 신학적 주석을 붙여 완성시킨 것이다. 줄리안의 사후 거의 2세기 동안이나 그녀의 『계시』는 잊혀진 채 무시되었고 17세기에 와서야 최초로 출간되었다. 출간 후 이 책은 영국 여성이 최초로 영어로 쓴 작품으로서 그 신학적인 깊이와 섬세한 표현으로 영성 문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각각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만 알 수 있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었다.
  • 환시를 받기 이전에 줄리안은 하나님께 세 가지의 은혜를 선물로서 주실 것을 청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실제로 동참하여 그 고통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은혜였다. 줄리안은 막달라 마리아 처럼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의 고통을 증거하기를 원했다. 둘째로 죽기까지 신체적인 병을 앓을 수 있는 것으로, 줄리안은 신체적 병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신체적 영적 고통을 청했다. 이런 태도는 당대에 유행했던 일반적인 신심행위 중의 하나였다. 셋째로 하나님의 선물로써 세 가지의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은혜였다. 세 가지의 상처란 줄리안이 일생 동안 느끼게 될 통회의 상처, 연민의 상처, 하나님을 갈망하는 지향으로부터 느끼게 될 상처였다
  • 1373 년 5월 8일, 그녀가 삼십살 육 개월 되던 해, 그녀는 칠일 동안 심한 병으로 죽도록 아팠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소생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나 또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줄리안은 젊은 여성으로 하나님께 더 잘 봉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 없이, "나는 마음을 다하여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드렸다"고 적고 있다. 줄리안이 본당 신부님에게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는 순간,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그녀에게 십자가를 보도록 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창조주이며 구원자의 상징을 당신께 가져왔으니 이것을 보고 힘을 얻으십시오." 줄리안이 한 동안 죽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녀의 생명은 놀랍게도 회복되었다. "별안간 나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나는 전보다 좋아졌다." 새벽 4시, 새벽의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올 때, 첫 번째 환시를 체험했다. 죽어가던 줄리안은 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뜻밖에 예수의 가시관에서 흘러나오는 성혈을 보았다. 그 이후 새벽 4시부터 오후 3시까지 15차례의 환시를 보았으며 낮에는 정지되었다. 그 날 밤에 1차례의 환시를 또 보았다. 이 16 차례의 환시를 기록한 것이 오늘 날 우리에게 알려진 『짧은 텍스트』이다. 이 환시는 주로 성 삼위와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  

2) 특징 

A. 중세 여성 신비가 

  • 줄리안의 이 <계시>도 중세 여성신비가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 특징 중 하나는 삼위일체와 같은 신학적 용어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려 하지 않고 일상적, 혹은 열정적인 사랑의 용어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ex. 잔느귀용의 <아가서 주석>) 
  • "이 계시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지혜롭게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내게 주어졌다....진실로 우리의 연인은 영혼이 온 힘을 다해 그 분을 의지하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항상 그 분의 선하심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B. 기도  

  • 기도에 관한 줄리언의 글 중 가장 통찰력 있는 부분은 하나님이 과연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여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는 순간 나온 듯한 글이다. "내가 너의 간구의 근거다. 네가 품어야 할 것은 나의 뜻이다. 그러면 나는 네가 그것을 원하도록 해 줄 것이고 네가 그것을 간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네가 무언가를 간구할 때 그 간구하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고서야 어떻게 구할 수 있느냐?" "아무 느낌이 없을지라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을지라도, 건조하고 메마른 시기에, 아프고 연약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전심을 다해 기도하라. 그 때 너의 기도가 나를 가장 기쁘게 할 것이다. 너에게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지라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살아있는 기도는 그런 것이다."  수년간의 기도의 삶을 통해 줄리안은 이렇게 선언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과 하나되게 한다."  
  • "하지만 이런 느낌은 잠시만 지속되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난 슬픔 속에 홀로 남겨졌다. 삶의 권태가 몰려왔고, 나 자신이 싫어졌고, 살아갈 힘도 잃어버렸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유일한 위안과 위로였다. 난 그것들을 붙들었다. 느낌은 거의 없었음에도." - 느낌이 없는 기도?-> 근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 "우리 영혼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저 찾고(seek) 아파하고(suffer), 신뢰(trust)하는 그 일 뿐.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그러다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는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C. 그리스도 

  • 그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속죄에 대한 장황한 이론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많은 피를 흘리신 몸...흰 살갗, 사랑스런 몸에 가해진 심한 채찍질로 부드러운 살갗에 심한 상처를 입으신 것을"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 "뜨거운 피가 엄청나게 흘러내려서, 살갗도 상처도 볼 수가 없었다. 피밖에 없는 것 같았다." 
  • 아담이 넘어졌을 때, 하나님의 아들도 넘어졌습니다. (When Adam fell, God's Son fell) 

D. 어머니 하나님

  • “진실로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또한 진실로 [우리] 어머니이시기도 하다.”(LT 59)  줄리안의 체험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하나님의 여성성"에 대한 통찰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라고 고백한 점이다. 
  • 하나님을 어머니에 빗댄 사람이 줄리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줄리안의 말은 하나님은 ‘말하자면’ 어머니 같으시다(like a mother)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어머니이시다(is Mother)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 어머니이신 것은 예수께서 우리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나?”하는 질문에 줄리안은 이런 답을 내놓는다. 하나님께서는 “만사에 [우리] 어머니의 일을 하시려고” 성육신하셨다.(LT 60) 예수께서는 자신 속에 우리를 품고 계시다가 “전무후무한 극심한 진통과 산고를 겪으셨고, 죽기까지 하셨다.”(LT 60)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Passion)은 우리를 낳으시려고 성자 하나님께서 기꺼이 감수하신 산통이었다. 그 출산의 현장에 “피와 물”(요 19:33)이 쏟아졌다. 여성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에서, 그렇게 물과 피를 쏟으며 새 생명을 출산하신 ‘어머니 예수’를 보았다. 

         E. 만물안에 깃든 하나님의 충만

  • 줄리안은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만물이야말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표현임을 이해했다."하늘과 땅과 만물이 위대하고 넉넉하며 아름답고 선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만물과 모든 복된 일을 가득 채우며 끝없이 흘러 넘친다... 하나님은 모든 선이고 모든 것 안에 있는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나는 하나님과 우리의 실체 사이에서 아무런 차이도 보지 못한다. 이를테면 모두가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실체는 하나님 안의 피조물이다.
  • 그리고 나서 나는 (마음의 눈으로) 한 순간 하나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비전에서 나는 그분께서 만물 안에 계신 것을 보았다......만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죄는 없다......(따라서) 죄란 그저 없는 일이다(sin is no deed). 
  • 좋은 것을 좋은 것이게 하는 그 '좋음'(goodness)은 곧 하나님이다. 어떤 것이 좋은 건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이다. 
  • 하나님보다 작은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다. (all that is less than He is not enough for us) 
  •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은 곧, 모든 것들에 깃들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이 계시에서 주님께서 내게 어떤 자그마한 것을 하나 보여주셨는데, 보니, 개암 크기만하고 동그란 무언가가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유심히 보며 물었다, "이게 대체 뭘까?" 대답이 들려왔다, "창조된 만물 전체이니라."(It is all that is made) 나는 그 조그마한 것이 존속되고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찌나 미미한지 금방이라도 없어져 버리고(sink into nothingness) 말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깨닫게 해주시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존속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물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 줄리안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은혜로운 비전에 의해 압도당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것이 지금껏 존속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만물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LT 5) 하나님이 ‘크신’ 분인 것은, ‘사랑’이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어찌 큰지 그 사랑 앞에서 우주는 고작 콩알만 하다. 우주를 무한하다 여기기 쉬우나,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우주는 무한하지 않다. 무한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무한하다. 그리고 그 무한한 사랑이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은” 이 세상을, 만물을, 만인을 지금 이 순간도 떠받쳐 주고 있다.  

  • 줄리안이 살던 중세는 죄, 저주,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주제에 강박 되어 묶여 있었다. 줄리안은 이 비관론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 사랑, 자비로 대응했다. 줄리안은 수년간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해 심판이나 영원한 벌이라는 두려움이 야기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줄리안은 용맹스럽게도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전적인 신앙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갈등을 서서히 풀어나갔다 
  • "죄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선으로 밝혀질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죄가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II. 마음의 간구 묵상 기도 (Meditation on the Herat’s Longing) 

  • 침묵으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내 마음 안에 있는 깊은 간구를 발견하도록 한다. 
  • 요한 복음 1: 35-38절을 천천히 낭독하라.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 2분정도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라. 자신이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고 예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구하느냐?"하고 묻고 있는 현장을 생각하라. 
  • 본문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낭독하고 다시 2분 정도의 묵상 시간을 가지라.  
  • 예수의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당신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 지금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간절히 원하는 것과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가? 단순히 당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할 때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당신의 깊은 간구를 발견 한 것은 일치하는가, 혹은 다른가? 

  • 당신 마음 속 깊은 간구를 발견케 하신 성령님께 감사드리고 다시 한 번 그 소원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간구하고 감사함으로 기도를 마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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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아씨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와 Centering Prayer    

  1. 성프란시스코 (St. Francis of Assisi,1181-1226) 

  1. 생애  

  • 이탈리아의 아시씨에서 당시 유명한 상인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24살때까지 세속적인 삶을 즐기며 청년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 청년의 때에 전쟁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어 감옥에 있다가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에서의 오랜 투병생활 중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체험을 하게 된다. 
  • 당시의 시대는 교회가 국가와 지나치게 동일 시 했을 때이다. 주교들과 신부들, 심지어는 교황들까지 종교 지도자들이라기 보다는 권력자들이 되었고,  크리스찬들이 종교와 규범으로써 복음이 아닌 예법과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제도를 강조했다. 당시의 하나님은 복종을 강조하는 절대자로, 그리스도도 사랑이 아닌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역할이 강조되었다. 
  • 1205년 도밍고의 폐허가 된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기도를 하던 중 "가서 네가 보았던 폐허가 된 내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급히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옷을 많이 가지고 도밍고 교회의 사제에게 이 돈을 주어 교회를 보수하게 하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관청에 넘겼다. 관청의 소환명령에 따르지 않자 주교 앞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가 고소를 하기도 전에 프란시스코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모두 벗어서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고행자가 입는 속옷만 입은 채 "지금까지 당신을 땅에서의 내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문등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 그가 재건한 교회 중 하나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는 중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마태 10:9~1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따르는 데 일생을 전념한다. 
  • 1209년에 프란시스를 따르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란시스 형제회를 세우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청빈과 금욕을 모토로 한 복음의 전파를 사명으로 내세운 그들의 수도회를 공식으로 인정받고 유명한 수도회칙을 남긴다. 이 규칙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대로 살아라. (말과 행동의 일치) 오직 한 벌의 옷을 가지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규칙대로 산다.<청빈>   
  • 이러한 그의 수도원 운동은 당시의 부패하고 물질에 물든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기존 교회와 일정 수준의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 프란시스의 노년에 그는 프란시스 수도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시킬 것인가, 교황의 명령에 따르고 순종함으로서 교회를 지킬 것인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 자신의 손에 예수의 못자국이 생기는 성흔의 표시를 통해 결국 교회 안에서 교황의 명령에 따를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1. 프란시스와 수도원의 특징 

  • 아버지로서의 하나님(Fatherhood of God) : 프란시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거스리는 범법의 수효를 계속 헤아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복종해야 하는 엄한 군주가 아니라 오히려 아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며, 그들이 자유의지로써 수용하거나 혹은 거절하도록 여지를 남겨 두시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아버지의 형상이었다. "여러분의 근심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 입니다." 
  • 그리스도는 중세 말엽의 회화들 속에 그렇게도 많이 나타나는, 최후의 심판을 맡으신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신 베들레헴의 그리스도이었고, 영적으로 굶주린 인간을 위해 음식으로서 자신을 내주었던 최후 만찬의 그리스도이시며, 인간이 자기 자신의 비인간적 상태로부터 일어날수 있도록 희생재물로서 죽으셨던 갈보리산의 그리스도이시다.
  • 생활양식으로서의 복음 (The Gospel as a way of life): 복음은 우리가 살면서 순종해야 할 삶의 일부가 아니라 크리스찬의 삶의 양식이고 전부이다. 그는 법을 초월하고, 법보다 훨씬 더 멀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되는 정도로까지의 삶을 추구했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성을 넘어 오르도록 해 주고, 또 세상으로 하여금 그것이 지닌 집합적인 죄악을 넘어 오르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온 마음과 영혼으로 그리던 것이다." 
  • 형제애 (Brotherhood) : 죽기 전,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 중 "그리고 얼마 후에 주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를 주셨습니다."  

     계급 구분이 경직화되고 수도원의 규칙에서조차 제 2계급의 시민들에겐 평수사 직분만 허용되었을 때, 또한 주인과 하인 귀족과 농민, 특권 상류층과 평민하층의 계급이 그 시대의 하나의 질서가 되었을 때, 프란시스는 적어도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참된 형제애가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자신의 수도회를 "작은 형제들의 회"라고 이름지으며, 형제애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도전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 작음(Minority): 프란시스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과 특권과 지위에 대한 추구와의 절연"이었다. 그것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들, 곧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소망이다. 그것은 봉사 받지 않고 봉사하려는 욕망이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나누며, 서로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서로 유용한 자가 되려는 욕망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욕망, 즉 인간의 가장 악한 경향을 극복 하려는 믿음 안에서의 소망이다. 
  • 가난 (Poverty): 재산, 풍요 그리고 개인재산과 물질에 대한 집착, 이것들은 프란시스에게 있어 형제애 및 하나님과의 일치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다. 그 삶이 돈과 돈으로 살수 있는 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복음과 복음의 대상인 사람들 보다는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인격이 재산보다 더 중요하고 사람들이 물건들보다 더 중요하다. “모든 형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탁발, 즉 주는 대로 먹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돈 때문에 타락한 수도원들을 개혁하려는 시대적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대안적 삶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수도원들이 대부분 돈과 땅을 기부 받아 풍족하게 생활해왔고, 그 결과 타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가난한 사람의 행색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처럼 탁발을 하는 형제회의 모습은 수도원의 역사에 있어서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가난은 영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자본주의인 현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많은 교회들은 가난이라는 주제를 영성의 주제로 삼기보다는 벗어나야만 하고 회피해야만 하는 죄와 벌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 고통의 수용 (Acceptance of Suffering) :고통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모든 대가를 치루고서 피해야 하는 악이지만,  프란시스는 경외심을 가지고 고통에 접근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고 고양시키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프란치스코는 고통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고통의 남은 부분을 나의 몸으로 채우겠다"고 했듯이 고통을 위해서 기도했다. 
  • 평화의 영성:  "당신의 가슴속에 평화를 더욱더 충분히 간직하도록 힘쓰십시오. 어느 누구든 당신 때문에 분노나 모욕적 언동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당신이 보이는 평화와 선의, 자비에로 움직여야 합니다" 
  • 교회에 대한 존경 (Respect for the Church): 교회는 본질적인 교리 및 윤리영역에서 인간적 나약함과 심지어 오류에 항상 떨어 질 수 있다. 프란시스 시대에 있어서 교회 안의 인간적 나약성은 대단히 커서,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가 거의 되지 못했다. 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지님으로 인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성직자의 대다수가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분노가 충분히 근거를 지닌 채 만연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보다시피,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나의 교회를 수리하여라"고 프란시스를 부르셨다.프란시스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그 명령에 순종했다.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성직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파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의 부족함을 우리들이 보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평화의 자녀들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성직자도 사람들도 함께 얻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성직자의 타락에서 사람들만 구하는 것 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3) 주요 작품 

평화의 기도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 

                   어두움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온천하 만물 우러러"란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1. Centering Prayer (향심기도, 중심기도, 집중기도) 

  • 이 기도는 우리의 이성이나 생각,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의 내면에 깊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과 함께 거하기 위한 단순하고도 깊음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1. 지침

  1.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조용히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라. 
  2. 내 안에 일어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거룩한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예)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평화, 사랑, 기쁨, 안식, 십자가, 부활, 신뢰?

       c. 일단 거룩한 단어(말씀)를 선택했으면, 기도하는 동안에 변경하지 말라.

       d. 생각들을 의식하게 되면, 아주 조용히 처음 선택했던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 “생각”이란 감정, 심상, 기억, 회상 등을 포함한다.  
- 생각은 집중기도의 정상적인 한 부분이다. 잠시 동안 어떠한 생각들이 나의 마음속에 나타나는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고 아주 조용히 거룩한 단어로 복귀하라. 
- “아주 조용히 거룩한 단어로 복귀하다”라는 표현은 최소한의 노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집중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가 주도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 거룩한 단어가 모호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럴 땐 거부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임재 안에 자신을 맡기라. 

       e. 육체에 다음과 같은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 우리 몸의 여러 부분에 경미한 아픔이나 통증, 혹은 경련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몸에 있는 정서적인 매듭들이 풀리는 데 기인한다. 
- 우리의 사지가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영적인 주의집중의 심오한 차원에 기인한다. 
- 위의 두 경우에, 그러한 증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거나, 아니면 정신이 잠시 감각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거룩한 단어에게 복귀하는 것을 허락한다.

f. 자연스럽게 침묵가운데 감사함으로 기도를 마쳐라. 


  • 부정적인 정의에서 집중기도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다. 
    –그것은 긴장 해소 연습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인 은사가 아니다. 
    –그것은 초심리학적(para-psychological)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감지된”(felt) 하나님의 임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론적인 묵상이나 정의적(情意的)인 기도가 아니다. 

  • 긍정적인 면에서 집중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동시에 그 관계를 육성하기 위한 훈련이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의 이동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어, 즉 침묵에 친숙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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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강 어거스틴 (Augustine)과 위 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   



  • 고대 영성 – 순교 영성 (박해시대)-> 수도원 영성(기독교 공인 이후-내적 순교, 매일매일의 순교)-> 개인의 경건과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을 우선 순위로 둠 

  • 중세 영성 

  • 로마가 쇠락하며 이방민족들의 혼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와 로마 중심의 문화 (the Classical Culture)가 

쇠락하며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 등으로 유럽의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등장.  

  • 600여년 경부터 문예부흥, 인문주의,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1500여년까지의 약 1100년 동안의 기간을 중세시대라고 일컫는다. 
  • 교회가 학문 및 문화를 독점했으며 봉건주의사회로서 폐쇄적 사회였다. 
  • 개인의 가치보다는 사회, 공동체의 가치가 우선되는 사회였다. 
  • 구원의 수단으로 세례나 성찬식 같은 성례전이 가장 우선시되었다. 
  • 철학적, 학문적으로는 암흑기라 여겨졌으나 카톨릭과 개신교의 신학과 영성의 근간이 닦여진 기간이다.
  • 가장 기독교가 발전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가장 타락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살펴봄으로써 현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타락의 원인 및 처방을 동시에 유추해 볼 수 있다. 
  • 특별히 중세시대의 이론적 틀을 제시했던 초기 중세의 두 인물 서방교회의 어거스틴과 동방교회의 위 디오니시우스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

  • 대표저서 – 고백록 

  • 생애- 십 세 때에 이미 천재로서 알려질 정도로 탁월한 지적인 능력을 인정받았다. 항상 비물질 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그가 자란 기독교는 이런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처음 그가 새로운 대안으로 찾은 것은 마니교였으나 마니교의 대 스승이라 하는 파우스투스와의 대화를 통해 실망을 하고 이 후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그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 한 분이신 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바울 신학에 접근하게 되고 신앙에 몰입하며 33세 때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 그는 이러한 영적인 방황 가운데 자신의 내적 상태, 즉 영혼에 대해서 영적 여행을 하게 된다. 그는 영혼 안에는 진리, 사랑, 영원성의 세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즉 영혼에는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이 있고,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고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동시에 삼위일체의 모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의 기능을 기억과 이해와 의지로 요약하며 설명하는데 이 영혼의 세 기능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혼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즉 기억 안에는 영원성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반향한 것이며 이해 속에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진리(logos)를 반향한 것이다. 의지는 성령의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것이고 성도들을 연결하는 끈이며 이것은 곧 사랑이다. 인간이 이러한 진리, 사랑, 영원성을 회복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이런 결론 끝에 그는 고백록 제 10권에서 "너무 늦게 내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했고 제 5권에서는 "주여 내가 당신을 찾기 위해서 내 밖을 찾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당신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미 당신은 거기에 있었고, 당신은 이미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나는 어둠 속과 살얼음 위를 돌아다니며 나 밖에서 당신을 찾았으나 내 마음 안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사오니 바다의 심연 속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 그는 이 생각을 정리하며 자기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여행은 자기 내면을 향하는 여행이다. 다시 말해 나의 영혼 깊은 곳으로의 내림이 곧 하나님으로의 상승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영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혹은 어떻게 훌륭한 영성 훈련을 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라고 대답한다. 

  • 그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찾을 때까지 우리의 영혼은 불안하다. 영혼 깊은 곳으로의 내려감이 곧 하나님 그분께로 올라가는 거이고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이다!



2. 디오니시우스 (Pseudo-Dionysius)-사도바울의 제자로 알려짐.  (행 17:34) 

  • 신플라톤주의 영향 – 모든 피조물은 일자(하나)에서부터 나왔으며 계속 거기서부터 멀리 떨어져서 아주 단순한 것으로부터 다양한 것으로 퍼졌다고 본다. 따라서 다양하게 퍼진 것일수록 하나님성을 소멸한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의 죄는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의 결핍이고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선의 결핍이 곧 죄라고 본 데에 영향을 끼쳤다.  

  • 부정의 신학과 긍정의 신학: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긍정의 신학 (affirmative Theology-kataphatic way): 모든 피조물은 위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과의 유사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이 가진 좋은 성품을 나열해보면 생명, 사랑, 자비, 용서, 인내, 온유, 절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적은 부분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우리 안에서 묵상과 경건훈련을 통하여 성숙시킴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저서는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등의 저서가 이러한 토대 안에서 씌여진 책이다. 
2) 부정의 신학 (Negative Theology-aphophatic way) – 이 방법은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해도 닮아 갈 수 없는 하나님과의 비유사성을 강조한다. 이 방법에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부족한 성품을 다 거부하며 부정해 가면 마지막에는 어둠을 만나게 되는데 이 어두움을 찬란한 어두움 (bright darkness) 혹은 무지의 구름 (cloud of unknowing)이라고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의 재연합이 이루어진다. 이 어두움의 순간은 세상적인 감각으로서는 의식할 수 없는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감각적 세계와는 다른 무지의 세계이다. 

  • 위 디오니시우스는 또한 영적인 성장의 단계를 정화 (purification), 조명 (illumination), 일치 (unification) 의 3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정화의 단계에서는 죄의 정화를 끊임없이 행하는 단계이고, 이 단계를 거침으로 신적인 진리의 빛을 조명 받으며, 신의 지식의 맛을 조금 맛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thirsty for God)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맛을 살짝 보았기 때문에 생명을 바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원하게 된다. 


Practice 2. 예수 기도 (Jesus Prayer) II

예수 기도는 부정적인 영성의 대표적인 기도로서 오랫동안 수행되어져 왔다. 이 기도가 추구하는 것은 고요함, 평안함, 잔잔함이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마음과 감정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집중하는 데에 있다. 

    1) 역사적 기원 

한 이름없는 순례자가 성령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을 읽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이 수도자는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단지 우리가 그 방법을 모를 뿐이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채득하기 위하여 순례 여행을 시작했다. 러시아 방방 곡곡을 순례 하면서 많은 사부들을 만나 보는 중에 어디에선가 예수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첫날에는 예수 기도를 3000번 하고 다음에는 6000번, 12000번까지 하면서 마침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체험하는 신비한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2) 방법

  • 호흡의 리듬을 느리게 조정하라. 

  • 내적인 눈은 마음의 자리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자세에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은다.

  • 그리고 마침내 가장 평온한 상태에서 숨을 들이 쉬고 내쉬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

  • 기도 중에 예수 이름에 깊은 헌신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라. 

  •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날카로운 참회의식을 가지라. 

  • 거듭되게 반복하라. 

  • 내적인 침묵을 통하여 집중적이고 내면적인 평온의 상태로 들어가라.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