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목으로 만들어진 교회 (출애굽기 25장 10-16절)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쨰내지 말지며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지난 주 설교 혹시 기억나십니까?
무화과나무의 저주 - 왜? 열매가 없기 때문에...
무화과 나무의 앞 뒤 -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
즉,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열매맺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사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 -
성령을 통한 인격의 열매, 빛된 삶의 열매(행위), 입술의 찬양의 열매, 의(바른관계)에서 나오는 화평의 열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는 죄의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 오늘은 교회의 구성원 성도, "나"가 포함된 성도의 정체성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오늘 다룰 중심 단어는 조각목입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27장 - 성막 안의 속죄소 (지성소)에서부터 성막의 문과 기둥, 뜰까지 성막에 대한 모든 설계
그 중심 재료가 되는 것 - 조각목
25-27장까지 대략 9번의 조각목이 등장한다.
- 여러분이 설계사라면 성막을 지을 때에 가장 먼저 어떤 것을 언급을 할까?
아마도 대개는 먼저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서 전체의 모양을 구상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구상을 할텐데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제시하신 것은 지성소에 있을 언약궤와 속죄소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바로 성막의 기초고, 설계이고, 핵심이기 때문이다.
- 조각목은 언약궤의 중심 재료였을 뿐만 아니라 , 진설병을 두는 상, 성막의 널판, 기둥, 제단 등 성막의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사용되는 주요 재료였다.
조각목이라 번역된 이 나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아카시아 나무'(acacia wood)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어성경과 KJV만은 이를 '싯딤나무'(shittim wood)로 번역하고 있다. 같은 종이지만 아카시아나무는 잎이 길고 넙적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중동지방의 광야나 사막에서 자라는 싯딤나무는 수분 증발을 막을 수 있게 잎이 작고 꽃이 피지 않는다.
흔히 라스베가스나 유타를 여행할 때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지만 앙상하게 있는 가시나무가 바로 싯딤나무이다.
건축재료로서 이 조각목은 나무의 기둥도 두껍지 않고 가지는 가시가 많아 성경에서 성막을 만들 때를 제외하곤 목재로서 거의 사용할 수 없는 나무다. 그래서 디윗궁이나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는 이 조각목 대신 당시 가장 좋은 나무였던 백향목을 재료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언약궤를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다른 것은 백향목이나 금속을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만큼은 여전히 조각목을 사용케 하셨다.
한동안 성막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일으키면서 성막의 하나하나의 재료나 모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가지 재료 중에서 이 조각목은 특히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은혜가 크다.
- 조각목의 특징을 몇가지 살펴 보자.
1.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면 가시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특히 바람불고 고요한 밤에는 그 소리가 더 시끄럽다.
2. 사막에서 자란 조각목은 수분이 부족해서 바짝 말라 있고, 그 결과 가지가 앙상하다 못해 비틀어져 있는 나무가 많다. 가시가 많은 것도 모자란 수분으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3. 조각목은 또한 모래와 바람 등 사막에서의 험한 환경으로 가지가 곧지 못하고 중간 중간에 악마디가 많아 뿌리로부터 진액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 들어보니까 괜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가? 맞다. 조각목은 바로 우리 인생을 닮은 나무다.
1. 우리 또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가시투성이의 존재가 되었다.
평안할 때도 문제지만 바람불고 인생의 밤이 되면 이 가시는 시끄러울 정도로 서로를 찔러댄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모난 성품, 쓴뿌리 투성이인 인생인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까지 말이나 행동으로 얼마나 모나게 찔러대며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른다. 남만 찌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도 를 찔러서 상처투성이를 만들 때도 많이 있다.
2. 수분이 말라 바짝 말라 있다는 것은 은혜를 잃어버린 인간의 영적 갈증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목마르다. 세상은 영적 갈증으로 목마른 곳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권력을 가져도, 지식을 가져도, 건강을 가져도, 그것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더 우리를 목마르게 한다. 영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만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 영적 갈증을 해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목마른 이유는 여전히 세상의 것에서 만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3. 가지가 곧지 못하고 악마디가 많아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기 못한다는 것은 우리 성품에도 이 악마디가 많아 스스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서 고립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 말씀도 의심이 많은 성품 때문에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남들이 무슨 권면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주려 해도 세상에서 너무 많이 얻어맞고 속아서 그런지 교회에 와서도 ‘그것이 사실일까? 그럴 수가 있나?’ 하는 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이라는 진액을 순수하게 공급받지 못한다. 얼마나 완악한지 모른다. 물론 믿지 못하게 만든 교회나 목사, 성도들의 책임도 있지만 구약의 모세나 다윗, 그리고 예수님조차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인간 안의 악마디가 말씀을,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타당한 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완악함이 악마디처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고립해 성장을 방해한다.
-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은 다른 나무가 아닌 바로 이 쓸모없어 보이는 조각목으로 교회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듯 백향목을 쓰지 못하셨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내 전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 조각목 가지고 만들어라 하고 아얘 율법으로 정하셨다.
1. 조각목처럼 남에게 계속 상처주고 시비하며 찔러대는 근성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시고 교회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의 언약궤를 담은 그릇으로 쓰고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조각목이 성전 기둥으로 쓰임받는 것을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2. 하나님께서 말라비틀어진 조각목을 성막 건축 목재로 선택하신 것은, 사막의 조각목과 다름없는 우리 인간이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3. 악마디가 많아 진액이 공급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언약궤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 어떻게 조각목은 성전의 도구가 될 수 있었을까?
1.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해야 비로소 은혜가 임한다.
정말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소리: 이 교회 사람들은 다 이상하다. 다 비정상이다. 다 상처투성이다. 이 말은 자신은 정상이고 다 괜찮은데 남들이 다 이상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백향목인데 남들은 다 조각목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의 실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은혜도 모르고 구원의 진리도 모른다. 늘 자신이 낫기에 축복도 더 받아야 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못하기에 혹시라도 잘 되면 이해하질 못한다.
그런데 내가 조각목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러기에 예수의 은혜가 갈급하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바로 예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조각목임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 나 자신이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못나고 어리석어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과 공포를 느껴본 사람만이 살려는 본능으로 주님을 찾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 하듯 하나님을 찾는다. 난 다 괜찮으니까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 이 부분만 좀 도와 주세요. 이 문제만 좀 해결해 주세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성형수술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바꾸기 위해 오셨다. 조각목을 성전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가 바뀌어야 할 조각목들이다.
2.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조각목을 성전 짓는 재목(材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도에 맞게 잘 자른 후에 껍질을 다 벗겨 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라는 껍질을 벗겨 내야 한다. 외식과 위선, 남들을 의식하는 것, 남들과 비교해서 교만하던가 열등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 모두 나 라는 껍데기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 한다. 하나님께서 내 울타리를 깰 수 있도록 말씀이 날 부술 수 있도록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조각목을 소용에 맞게 치수대로 잘라 쓰듯, 우리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쓰임 받을 때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각 도구마다 한 규빗 반, 어떤 것은 여섯 규빗, 규격이 있는데, 난 세 규빗이니까 그대로 쓰시오 하면 여기에도 저기에도 무엇에도 쓸 수가 없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쓰시자고 할 때 자기의 모습을 꺾고 순종할 때에 비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지식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수준에 맞도록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다. 내가 내 믿음을 끌고 가면 망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끌고 가는 기준이 되게 해야 한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저는 부족해서 못 해요”라고 한다. 사양하는 것을 겸손으로 잘못 알고 너무 자신을 잘라내서 쓰지 못하는 경우이다. 주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만 하면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이 알아서 하신다. 모세도 기드온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못해요 했지만 그 떄마다 하나님은 내가 할 것이다. 너는 그냥 나만 따라오라 하셨다.
목사인 저도 기도하다가 본문을 받고 설교를 준비할 때 두려움이 앞설 때가 정말 많다. 이 말씀을 하다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이 말씀 빼고 저 말씀 빼면 하나님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나?’ 설교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그분만 배경 삼고 담대하게 나가면 내가 했던 모든 두려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볼 수 있게 하신다. 못 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다.
3. 금테를 두르고 금 고리를 걸어야 한다.
조각목을 언급할 때마다 함께 같이 등장하는 것이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를 달라는 것이다.
껍질을 벗긴 조각목은 곧장 금테로 싸야한다. 그냥 놔두면 비가 오면 썩고 뙤약볕이 내리쬐면 비틀어져 갈라지고, 무엇에 부딪히면 금세 부러지기 때문이다. 또다시 조각목의 특징으로 돌아가기 전에 껍질 벗긴 조각목은 바로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를 걸도록 했다.
순금으로 싸라는 것은 예수 안에 있으라는 것이다. 믿음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 금고리를 걸라는 것은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 따라 살라는 것이고, 또한 성령과 함께, 그리고 성도들과 형제들과 함께 거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조그마한 일을 당해도 금세 교회에 안 간다고 버팅긴다. 조각목을 금으로 싼 것처럼 우리도 금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각목 같은 심령을 싸서 예수 안에 있어야 한댜. 그리고 예수 부활 후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협력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교회
- 제사장, 레위인, 왕이 중심된 교회: 세습되고, 폐쇄적이며, 구별된 존재들
예수님의 제자
- 갈릴리 어부, 새리, 여인들, 이방인들, 병자들
- 신약의 교회 - 어부들이 사도가 되고, 성령받은 여인들이, 이방인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된 교회
아수라장- 그런데 성령 안에서 연합하고, 사랑하고, 로마를 무너뜨렸다. 로마의 왕과 귀족들을 변화시켰다.
조각목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 받아서....
- 결론
성도된 우리는 내가 조각목이듯 서로 조각목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조각목과 같은 인생들을 부르셨다.
그렇기에 때로 교회에서 찔리고, 상처나고, 쓴뿌리가 보이고, 악마디같은 근성을 경험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떄로 저를 보면서도 실망할 수 있고, 믿었던 믿음의 선배나 동료들에게도 실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럴 때, "교회가 왜 그렇냐? 성도가 왜 그렇냐?" 그렇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또 그렇기에 교회가, 주님이 필요함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조각목 같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우리의 껍질을 벗겨 위선과 외식을 벗고, 주님 앞에 진실해야 한다.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테를, 성령의 테를, 그리고 그 위에 성도의 사랑과 연합을 위해 힘써야 한다.
주님은 조각목같은 우리를 중심에 둔 교회를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그 분의 피로 우리를 싸시고, 그 피가 금같은 믿음이 되어 우리의 모습을 예수의 뜻대로 사용하신다. 그런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그렇게 조각목같은 우리를 통해 세워져 가는 트레이시 제일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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