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감사절 (살전 2:13절)
(살전 2: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서, 스위스에선 칼빈에 의해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신앙의 순수성을 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에, 영국에서는 신앙의 순수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불편한 형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534년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하기 위하여 여왕인 캐더린과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를 열어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형식은 그대로 가톨릭을 따르나 가톨릭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른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나 형식이 신앙의 회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순수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청교도운동이라 부르는 신앙의 회복 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조에 따라 가톨릭이냐, 성공회를 교체하던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는 가톨릭 왕조로부터도, 국교회 왕조로부터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에 오직 신앙생활의 자유를 위해 승무원 6명과 남자 72명, 여자 29명, 100여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1620년 메이플라오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 미국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이런 긴 항해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100여명의 사람들이 긴 뱃여행을 시작해서 65일만에 11월 9일 미국의 동부 메사추세츠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뱃속에서도 뱃멀미니 건강악화로 시달리다가 꿈에 그리던 땅에 도착했더니 그곳 사정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곧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해 겨울을 지나는데 죽은 숫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어찌 눈물바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땅을 경작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가을 그들은 풍성한 수학을 거두며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50-60여명 남은 청교도들은 한해를 돌아보며 먼저 죽어간 이들을 기리고, 또한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했습니다. 90여명의 많은 인디언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초대는 했는데 자기들보다 많은 90여명이 초대되어 오자 당황이 되었지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급하게 들새라도 잡으러 나갔는데 다행히 들판에 있는 많은 칠면조를 잡아 그들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첫번째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인생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걸어 나아가는 행로에서 자그마한 구렁텅이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자기의 걸어가는 행로가 비록 캄캄하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작은 빛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사의 태도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인류의 역사도 바뀝니다. 100명이 탈출하여 50여명만이 살아남은 극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들 청교도의 신앙은 지금의 미국의 개척정신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미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고향을 떠나고 생명을 걸고 어떠한 희생도 무릎쓰고 얻고자 한 것일까요? 다 잘살기 위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그들의 도전과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던 수많은 희생들, 그리고 이 신앙을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서바쳐야 했던 수많은 생명들은 거꾸로 믿음이 생명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라는 구절이 있고 이 구절로 된 찬양도 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되었는데, 교회사를 보면 정말 믿음을 위해 생명을 버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신앙의 지형도에서 보면 한국은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된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신앙은 바울의 시대에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확대됩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청교도들의 이주로 이제 아메리카 대륙이 신앙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 그 중에서도 그들과 인접하지 않은 동북, 동남아는 오히려 지구를 돌아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가려 선교사들의 눈에도 가리워진 나라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을 전도하려고 지나가다가는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된 19세기 말에 우리나라는 고종황제가 이른바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 문물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의 입국 자체가 차단되었고 몰래 들어와서 선교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멀리 영국에서, 미국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던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긴 뱃여행으로 땅에 내리지도 못하고 죽은 경우도 허다했으며 땅에 내려서도 낯선 환경과 문화로 미국땅에서 첫해 절반가까이 죽었던 것처럼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차라리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온 첫 세데 선교사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 나라에 와서 어린 자녀가, 아내가, 그리고 선교사 본인이 수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러한 희생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지 10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 미국을 낳았고 영국을 바꾸었듯이, 뚫릴 것 같지 않던 한국의 신앙의 문이 열리자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서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감옥의 옥문이 열려 빠져나와 도망치듯 도달한 곳이 데살로니가 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해서 적지 않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곧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그들을 위협하고 또 쫓아냅니다.
그 며칠 사이의 소란 중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3주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2-3개월 가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곧 바울과 실라는 또 쫓기어 떠나고 교회만 덩그러니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냥 도망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 감사하냐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라, 찬양해라. 감사해라
우리의 삶-
그 사람이 좋아지면, 내 감정이 동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좋은 일이 생겨야 찬양하는 것이지.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한 것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사랑해라. 하나님의 말씀이니가 감정이 동하지 않아도 사랑해라.
어려운 중에도 찬양해라.
고난 중에도 감사해라. 절망 중에도 감사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
그런데 감정이 앞서는 우리의 사랑, 우리의 찬양,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가? 정말 진실하고 정직한 감정일까?
누군가는 아무리 사랑을 줘도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힘들고 누군가는 나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이른바 나쁜 남자인데도 오히려 좋아하고 쩔쩔 매지 않은가?
부모가 아이들에게 베푸는 정성과 사랑은 얼마나 훨씬 강해졌는가? 그래도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누리는 것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나 감사하나?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하는가? 좋은 것 사주었을 때에 하는 찬양은 얼마나 입에 발린 소리들이 많은가? 진실한 감사와 진실한 찬양을 찾기 힘든 세상 아닌가?
감정은 우유부단한 것이다. 진실하지 못하다. 현실을 왜곡하고 과대포장하거나 반대로 축소시킨다. 말 한마디 상처로 인해 사람 전체가 꼴보기 싫기도 하고 다신 안본다 하면서 반대로 맔한마디 때문에 풀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 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정에 놀아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그분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날 사랑한다는 이 고백은 "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변해도 세상이 변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변해도 한 번 새겨져 있는 그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그 고백. 외침..."
왜 우리 감정이, 환경이 사랑하도록, 찬양하도록, 감사하도록 허락지 않는데 말씀으로 감사하라고 하시는가?
변치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견고히 서라는 것이다. 내 지금 감정이나 환경은 어렵고 막혀 있어도 반드시 그 분이 날 인도하시고 감싸 안으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감사는 내가 받은 은혜를 되찾게 한다. 오늘 특송 - 은혜: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알고보니 은혜다.
감사는 지금의 어둠을 이기는 소망이 된다.
그래서 감사는 천국 백성의 표요
감사는 신앙의 선포요
감사는 행복의 열쇠요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요
감사는 죄의 독을 없애는 해독제요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그릇인 것이다.
목사로서 저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
주일 예배 전에 제 설교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읽어보면서 어떻게 이 설교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견고히 할 수 있을까?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내 기도로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으로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력해지고 움추려 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부족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마음을 알고자 마음을 여는 성도님들이 계시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결국 저는 통로요 제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역사되어지면 설교자는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 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를 이루어가는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제 모든 삶의 열매이고 면류관이고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은 축제의 잔치이기도 했지만 그 축제 안에는 고향을 떠난 설움이, 긴 항해를 통한 고통이, 긴 겨울 죽어간 수많은 가족들의 죽음과 슬픔이 깊게 묻어있는 잔치였습니다.
한 해 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게 신앙생활 하던 코로나 가운데서 참된 교회, 참된 예배를 향해 몸부림치던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아픈 기억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닌 상처도 있었고, 사랆들의 수근거림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견디고 함께 했던 이유는 참 예배에 대한 갈망,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몇 명이 모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자 우리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함께 예배드리고, 소수이기에 가능한, 비록 마스크를 끼고 드리는 예배였지만 대면예배를 한 주도 빠짐없이 드렸고, 두 번의 야외예배, 여름 수련회, 그리고 선물로 주어진 밭모임등을 통해 정상적인 모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 완벽한 것은 없어서 때론 함께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이 이사로, 질병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일도 있었고, 의견의 불일치로 작은 갈등을 빗기도 했지만 그러한 일들은 더 기도하고,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자 우리에게 주신 연약함의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장미꽃도 감사하고, 장미의 가시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 은혜인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신앙의 역사를 계속해 나가도록 우리 첫 추수감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더 온전한 예배,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더 힘 힘쓰고 전진하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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