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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내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민수기 14장 7-9절)

by 소리벼리 2021. 11. 28.

내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민수기 14장 7-9절) 

1. 서론  

 

흔히들 "너 비전이 뭐니?" "이 사람은 비전이 있다." 더 나아가 "이 교회는 비전이 있다."라고 할 때 비전이 의미하는 것? 

꿈, 전망, 가능성 등으로 두루 사용하는 단어

 

성경에는 비전이라는 말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전을 의미하는 몇가지 구절들이 있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 - 비전의 의미로 쓰인 단어다. 마지막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다. 

비전은 말 그대로 "보는 것"과 관련이 깊은 단어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 선지자를 지칭하는 또 다른 호칭은 "선견자"였다. "미리 보는 자"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때 바라보자의 헬라어는 "아포라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고정되어 뚜렷하게 보는 것. 하나의 곳에 집중하여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에,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에 이 "아포라오"라는 단어가 씌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된 시선으로 그 분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비전은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애써 보아야 하나님의 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에바다"하듯이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래서 비전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 마음이 곧 소명이다. 

소명은 Calling, 곧 하나님이 나를 특별한 목적을 향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셨음을 깨닫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르신 자에게 주신 것이 사명, 곧 부르심에 대한 특별한 임무, 소명에 대한 책임감이다.  

소명은 나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나의 임무를 아는 것이다. 

 

 

2. 도입 - 비전,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보는 것.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 

오늘은 그 중에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눈을 갖게 하시길 원하시는가? 민수기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알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택하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나를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비전을 가진 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본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볼 적에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죄와 벌>을 쓴 도스도에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대로 본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채 살아간다. 

 

  • 하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 

1.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사명을 주어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출 4:10, 13) 라고 말했다. 

2.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라"라고 부르셨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 

[렘 1:5-6]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3. 동시대를 살았던 이사야를 선지자로 불렀을 때, 이사야는 더 나아가 "화도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사 6:5)라고 말했다. 

4.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라고 말했다. 

5.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불렀을 때, 기드온은 미디안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겁쟁이였다. 

 

  •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 - 열등감과 교만함, 자기비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지 못한다. 

대부분 참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하나님 주신 나의 고유함을 바라보는 대신에 남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함을 통해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함은 결국 하나이다. 

우리 안에 나를 판단하는 기준 -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남과 비교해서 우쭐한 것이 교만이고 남과 비교해서 움츠려 드는 마음이 열등감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만함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판단하고,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끝이 없고, 쉼이 없고, 결국 남을 무너뜨리려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열등감과 교만함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의미로 우리의 비전을 가로 막는 것은 '자기 비하', 혹은 '자기 학대'이다.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 안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이 잘못된 자기 사랑의 표시라면 자기 비하는 전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표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전을 포기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어 죽어야만 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없게, 가치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도 끊임없이 나 자신과 비교한다.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난 것이 있으면 내가 겸손해져서 다가가고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면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대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보다 잘 나 보이면 나 자신의 교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고 

나보다 못나 보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관심을 두지 않거나 혐오한다.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과 자녀의 인격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자기 비하의 전형 적인 예 

"이런 못된 놈의 자식" "00놈의 자식" 

자기의 자녀에게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결국 자기가 못된 부모, 00이라는 존재라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본다 - 관 -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자기가 보는 눈은 생리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 자기가 경험했던 인생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고, 자신과 남을 바라본다. 

 

  • 자기 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 - 언어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가 비전의 사람인지,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아침묵상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육신에 있어서 혀, 말의 역할 - 배의 키, 말의 재갈-> 결국 인생의 목적, 방향이 말에 달려 있다는 것.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그 방향으로, 목적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시면서 행하신 것 - 

-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킨 것

- 홍해를 갈라 백성을 건너가게 하시고 애굽 병사들을 물리치신 것 

-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 

- 만나를 내리신 것 

-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

- 공중의 매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신 것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갖가지 기적의 선물 세트를 다 보여 주신 것. 가장 가까이서, 가장 강력하고 다양한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가기까지 광야를 살았던 출애굽 1세대 히브리인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 대표 각 1명씩을 뽑아 정탐하러 보낸다. 

정탐한다는 것은 보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라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의 안목이 드러난다. 누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지, 누가 열등감과 자기비하로 자신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는지....

 

- 먼저 12명의 정탐꾼들이 동일하게 본 것 

[민 13:27-28]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 사실을 가지고 열 명의 정탐꾼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부정적 언어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비교에 의한 열등감

악평하여 이르되 (잘못된 판단- 선입견이 가득찬 말

거주민을 삼키는 땅 (거주민이 누군가? 가나안 민족, 아낙 자손- 그들이 땅에 삼켜졌는가?) - 사실 왜곡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 자기 비하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 - 막연한 추측에 의한 잘못된 판단

-> 라합을 비롯한 가나안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 떨었더라. 가나안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떨고 있었는데 그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고 그들도 그렇게 볼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을 통해 보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본 것은 라합과 가나안 사람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만을 보았다. 

 

비전은 무엇?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는 것. 

 

그들은 왜 자신들을 그렇게 보았는가? 

하나님 이전에 애굽에 있을 때의 자신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노예생활 하던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우리가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세계는 애굽의 세상. 노예로서 항상 부러워하고 눌려하던 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 비전이 없는 삶-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 

불신앙은 불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민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심히 아름다운 땅 Vs 거주민을 삼키는 땅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면 (경멸하지 않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무시하지 않고) 인도하고, 들이시고, 주신다. 

Guide, Get a ticket in the Entrance, and give them to the land. 

거역하지 말라. - 인정하라. 받아들이라. 맞이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왜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지 않고 귀족이었나? 모세처럼 왕족이었나? 

아니다. 똑같이 노예였다. 

더군다나 갈렙의 족보를 살펴보면 

[민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그나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로서 에돔족속의 조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에서 벗어났던 에서의 후예였던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사람이 된다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된다. 

 

갈렙의 족보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대상 2:18-20]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낳은 아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로 말미암아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그는 아수바와 여리옷, 그리고 마지막에 에브랏이라는 아내를 맞게 되는데 성서학자에 의하면 아수바와 여리옷은 애굽에 있을 때에 얻은 처요, 에브랏은 출애굽 당시의 아내 

그에게서 나은 아들이 훌, 그 훌의 손자가 브살렐 

훌은 누구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준 사람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는 훌을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소개. 

 

그리고 그의 손자 브살렐 - 오홀리압과 더불어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총 책임자. 

 

[출 31:2-5]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에돔의 후예였던 갈렙의 자손이 어떤 지파에 속하게 되는가? 유다지파....

다윗과 예수님의 지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열악한 배경과 환경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다. 그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나중에 가장 고령이면서도 기개있게 아무도 가지 않은 땅, 헤브론 땅을 취하면서, 비전의 사람이 된다. 

 

여러분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치유받은 세상, 하나님이 충만한 세상을 지니고 그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신앙 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세상, 부모와 타인으로부터 욕먹던 나, 멸시받던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젠 그 세상을 떠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거저주신 그 땅 안의 사람,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비전은 결국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회복된 나로 세상을 바라볼 때, 꿈이 열리고, 열매가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있다. 한 해 동안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는가? 

아니면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세계에 갇혀서 비교하고, 비하하고, 하나님을 멸시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교회,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으로 나 자신과 다른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 - superviser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를 위한 권력자가 되면 교회는 망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교회와 성도를 볼 때 우리는 소망있는 비전의 사람, 비전의 교회가 된다. 

그 눈은 내 안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분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눈으로 2021년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2022년을 비전의 해로 만드시는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