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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5-16절)

by 소리벼리 2021. 11. 28.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5-16절) 

 

전세계 성도들이 성경 66권 안의 모든 구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꼽으라면 1, 2 위를 다투는 구절 - 시편 23편과 더불어 요한복음 3장 16절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신앙고백을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성구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이 구절이 나타내게 된 배경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그가 누구이기에 그에게 기독교 역사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말씀을 주신 것일까? 

 

본문 3장 1절에서는 니고데모가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바리세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리고 여러분 성경책에 지도자라는 말 뒤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분들은 그 번호를 따라서 설명을 읽어보면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더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로마의 승인하에 이스라엘 국가 전체에서 종교적 일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까지도 함께 결정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초기 문헌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나오는데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1)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2)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며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며 

3) 또한 경제력을 갖춘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부러울 것 없는 권력과 재력과 남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학자들은 "밤에" 라는 시간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처럼 전기나 불빛을 내기가 어려웠던 때에, 밤은 곧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요, 더군다나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손님을 초대하는 일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그것도 밤에 찾아왔을까요? 

밤에 찾아왔던 것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와서 주님을 가리켜 선생이라 부릅니다. 

 

1장 38절부터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둬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묻지요.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며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친절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유력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님이지요?" 라고 묻습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이 알려지면 그가 누려왔던 선생의 자리, 사람들의 존경스런 눈빛이 사라질까 두려워 남들이 보지 않는 밤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기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하고, 밤잠을 설쳤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남들의 칭송을 받고, 그 자신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였더라 할지라도 그가 풀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 영적인 갈증, 갈망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남들을 가르치고 존경을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세상 사람들은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인생을 잘못살았다는 말로 여긴다. 그래서 그 가난함을 숨긴다. 부자인채 한다. 난 부족함이 없다 한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복되다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가난함을 숨기지 말라 한다. 

마음의 가난함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다. 아니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을 가장하고 꾸미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주님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님을 도와줄 지언정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의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왔지만 은밀히라도 주님께 찾아온 니고데모를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로 온 선생님이지요?" 묻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면 선문답같은 대화이다. 

선생님 맞지요? 하고 묻는데 거듭나야지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신다. 

논리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 니고데모의 가난한 심령, 그 영적 가난함때문에 밤에 찾아온 그 연약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넌 심령이 가난한 자이구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키를 주시는 것이다. 

그 키는 무엇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영적인 가난함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소리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요, 그러기에 영적인 대화를 따라가지못한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난 늙었는데 어떻게 또 태어납니까? " 그의 학식에 비추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답변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10절) 

 

니고데모 - 바리새인이요 선생이었다. 달리 말하면 율법학자요 율법의 실천자였다. 

그가 그 자신의 영적 갈급함, 마음의 가난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대충 신앙생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대도 만족이 없다. 평안이 없다. 계속 부족한 것 같고,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가 없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17절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하나님 주신 계명을 알지 아니하냐?"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절 (함께)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이것을 가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구제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소리인가? 이것은 일차적 해석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애쓴 것 - 주님의 계명을 힘써 지킨 것 

그것을 보시고 주님이 "사랑하사" - 그것을 귀히 보신 것이다. 그의 노력의 흔적들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리고 너와 같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네가 살아왔던 그 신앙, 계명을 지키는 그 열심을 또 다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런데 자신이 해왔던 그 마음이 네 마음에 가득차서 네 가난함이 사라져 버렸다. 

네 열심이 네 의가 되어서 너는 네가 행한 그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취해 있구나.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을 다시 다 비우고 나와 새 길을 가자꾸나....

 

마치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았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려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우고 마음대로 행했다면 이젠 내 마음대로 살아보렴...: 하는 것으로 새로운 부르심으로 그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행했던 아무리 선하고 좋았던 열심도 그것이 스스로 만족이 되면 그것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자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계명을 지켜도 그것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은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므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내려서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된다. 

회개하고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장대 높이 놋불뱀을 달아놓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도록 하셨다. 그것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들은 바라보지 못함으로 죽게 되었다. 

 

우리가 내는 열심. 

교회 내에선 그것 때문에 누군 열심히 믿고 누군 게으르게 믿고 그것으로 신앙의 높낮이를 판단하지만, 결국 우리가 내는 모든 열심이란 눈을 들어 장대를 바라보는 그런 노력과 의지이다. 물론 이것조차 못하는 분들이 분명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끝까지 바라보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어떤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상, 그 인간...그렇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떠난...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모든 신앙의 열심은 결국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화) 오징어 게임 오일남 할아버지 - 첫번째 방송 인터뷰 - 유튜브 

 

젊었을 땐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꺾어서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바라보고 있다가 그냥 옵니다. 

그 꽃이 보고 싶으면 다시 그 산에 갑니다. 나이가 드니 그렇게 되네요. 

그냥 조용하게, 조금은 투박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듣는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갑자기 눈물을 떠트리며 흐느낍니다. 그것을 보며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소유하는 신앙이 있고,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요. 

젊을 때는 신앙도 내것, 구원의 은혜, 방법, 공부하듯, 참고서 외우듯 그렇게 소유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니예요. 내가 그 분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분도 날 완전히 소유하지 않으세요. 

 

그 분도 날 바라보시며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듯 조심이 다듬어 가시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 눈에 비친 그 분이 가다듬어 가시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신앙은 때로는 잡히지 않고, 더딘것 같고,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진보가 없는 것 같지만 내 존재의 모든 것 까지도 주님 손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을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항상 내가 힘써 했던 것보다 훨씬 빠를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없습니다. 교만함이 없이 감사만 남습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그런데 육적인, 혹은 율법적인 마음에 젖어 있던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그런 소리도 율법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회개해야지... 

제일 답답할 때가 어떨 때인가? 본심을 몰라 줄때... 진정성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