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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아씨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sisi)와 Centering Prayer    

  1. 성프란시스코 (St. Francis of Assisi,1181-1226) 

  1. 생애  

  • 이탈리아의 아시씨에서 당시 유명한 상인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24살때까지 세속적인 삶을 즐기며 청년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 청년의 때에 전쟁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어 감옥에 있다가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에서의 오랜 투병생활 중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체험을 하게 된다. 
  • 당시의 시대는 교회가 국가와 지나치게 동일 시 했을 때이다. 주교들과 신부들, 심지어는 교황들까지 종교 지도자들이라기 보다는 권력자들이 되었고,  크리스찬들이 종교와 규범으로써 복음이 아닌 예법과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제도를 강조했다. 당시의 하나님은 복종을 강조하는 절대자로, 그리스도도 사랑이 아닌 재림하여 심판하시는 역할이 강조되었다. 
  • 1205년 도밍고의 폐허가 된 교회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기도를 하던 중 "가서 네가 보았던 폐허가 된 내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급히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옷을 많이 가지고 도밍고 교회의 사제에게 이 돈을 주어 교회를 보수하게 하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관청에 넘겼다. 관청의 소환명령에 따르지 않자 주교 앞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가 고소를 하기도 전에 프란시스코는 아무 말 없이 옷을 모두 벗어서 아버지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고행자가 입는 속옷만 입은 채 "지금까지 당신을 땅에서의 내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문등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 그가 재건한 교회 중 하나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는 중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마태 10:9~11)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따르는 데 일생을 전념한다. 
  • 1209년에 프란시스를 따르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란시스 형제회를 세우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청빈과 금욕을 모토로 한 복음의 전파를 사명으로 내세운 그들의 수도회를 공식으로 인정받고 유명한 수도회칙을 남긴다. 이 규칙의 핵심은 "복음을 선포하고 말씀대로 살아라. (말과 행동의 일치) 오직 한 벌의 옷을 가지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규칙대로 산다.<청빈>   
  • 이러한 그의 수도원 운동은 당시의 부패하고 물질에 물든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동시에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기존 교회와 일정 수준의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 프란시스의 노년에 그는 프란시스 수도회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시킬 것인가, 교황의 명령에 따르고 순종함으로서 교회를 지킬 것인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 자신의 손에 예수의 못자국이 생기는 성흔의 표시를 통해 결국 교회 안에서 교황의 명령에 따를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1. 프란시스와 수도원의 특징 

  • 아버지로서의 하나님(Fatherhood of God) : 프란시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거스리는 범법의 수효를 계속 헤아리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복종해야 하는 엄한 군주가 아니라 오히려 아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며, 그들이 자유의지로써 수용하거나 혹은 거절하도록 여지를 남겨 두시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아버지의 형상이었다. "여러분의 근심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 입니다." 
  • 그리스도는 중세 말엽의 회화들 속에 그렇게도 많이 나타나는, 최후의 심판을 맡으신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신 베들레헴의 그리스도이었고, 영적으로 굶주린 인간을 위해 음식으로서 자신을 내주었던 최후 만찬의 그리스도이시며, 인간이 자기 자신의 비인간적 상태로부터 일어날수 있도록 희생재물로서 죽으셨던 갈보리산의 그리스도이시다.
  • 생활양식으로서의 복음 (The Gospel as a way of life): 복음은 우리가 살면서 순종해야 할 삶의 일부가 아니라 크리스찬의 삶의 양식이고 전부이다. 그는 법을 초월하고, 법보다 훨씬 더 멀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삶과 동화되는 정도로까지의 삶을 추구했다. 복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간성을 넘어 오르도록 해 주고, 또 세상으로 하여금 그것이 지닌 집합적인 죄악을 넘어 오르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온 마음과 영혼으로 그리던 것이다." 
  • 형제애 (Brotherhood) : 죽기 전,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 중 "그리고 얼마 후에 주께서 나에게 몇몇 형제를 주셨습니다."  

     계급 구분이 경직화되고 수도원의 규칙에서조차 제 2계급의 시민들에겐 평수사 직분만 허용되었을 때, 또한 주인과 하인 귀족과 농민, 특권 상류층과 평민하층의 계급이 그 시대의 하나의 질서가 되었을 때, 프란시스는 적어도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참된 형제애가 아직도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가 자신의 수도회를 "작은 형제들의 회"라고 이름지으며, 형제애란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도전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 작음(Minority): 프란시스에게 있어 작음은 "권력과 특권과 지위에 대한 추구와의 절연"이었다. 그것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이들, 곧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소망이다. 그것은 봉사 받지 않고 봉사하려는 욕망이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함께 나누며, 서로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서로 유용한 자가 되려는 욕망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욕망, 즉 인간의 가장 악한 경향을 극복 하려는 믿음 안에서의 소망이다. 
  • 가난 (Poverty): 재산, 풍요 그리고 개인재산과 물질에 대한 집착, 이것들은 프란시스에게 있어 형제애 및 하나님과의 일치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다. 그 삶이 돈과 돈으로 살수 있는 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복음과 복음의 대상인 사람들 보다는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인격이 재산보다 더 중요하고 사람들이 물건들보다 더 중요하다. “모든 형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탁발, 즉 주는 대로 먹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돈 때문에 타락한 수도원들을 개혁하려는 시대적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대안적 삶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수도원들이 대부분 돈과 땅을 기부 받아 풍족하게 생활해왔고, 그 결과 타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가난한 사람의 행색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처럼 탁발을 하는 형제회의 모습은 수도원의 역사에 있어서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가난은 영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자본주의인 현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많은 교회들은 가난이라는 주제를 영성의 주제로 삼기보다는 벗어나야만 하고 회피해야만 하는 죄와 벌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 고통의 수용 (Acceptance of Suffering) :고통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모든 대가를 치루고서 피해야 하는 악이지만,  프란시스는 경외심을 가지고 고통에 접근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고 고양시키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프란치스코는 고통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고통의 남은 부분을 나의 몸으로 채우겠다"고 했듯이 고통을 위해서 기도했다. 
  • 평화의 영성:  "당신의 가슴속에 평화를 더욱더 충분히 간직하도록 힘쓰십시오. 어느 누구든 당신 때문에 분노나 모욕적 언동을 불러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당신이 보이는 평화와 선의, 자비에로 움직여야 합니다" 
  • 교회에 대한 존경 (Respect for the Church): 교회는 본질적인 교리 및 윤리영역에서 인간적 나약함과 심지어 오류에 항상 떨어 질 수 있다. 프란시스 시대에 있어서 교회 안의 인간적 나약성은 대단히 커서, 교회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가 거의 되지 못했다. 교회는 정치적 권력을 지님으로 인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성직자의 대다수가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분노가 충분히 근거를 지닌 채 만연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보다시피, 폐허가 되어 가고 있는 나의 교회를 수리하여라"고 프란시스를 부르셨다.프란시스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그 명령에 순종했다.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성직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파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들의 부족함을 우리들이 보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평화의 자녀들처럼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성직자도 사람들도 함께 얻을 것이고, 그러면 주님은 그것을 성직자의 타락에서 사람들만 구하는 것 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3) 주요 작품 

평화의 기도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소서 

                   어두움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The Canticle of Brother Sun)는 1225년부터 1226년 사이에 프란체스코가 임종하기 직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완성된 작품으로 총 14절로 이루어졌다. 첫째 부분은 1-9절로 그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관을 잘 담고 있으며 ‘피조물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온천하 만물 우러러"란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둘째 부분은 10-11절로 불화를 겪었던 아씨시 시장과의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으며 ‘용서의 노래’라고도 불린다. 마지막 부분인 12-14절은 ‘죽음의 찬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죽음조차도 ‘자매’로 부르는 그의 초월적 영성을 잘 보여준다.

                   

      

 

  1. Centering Prayer (향심기도, 중심기도, 집중기도) 

  • 이 기도는 우리의 이성이나 생각, 상상을 초월하여 우리의 내면에 깊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과 함께 거하기 위한 단순하고도 깊음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1. 지침

  1.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조용히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라. 
  2. 내 안에 일어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거룩한 단어 하나를 떠올린다. 

예)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평화, 사랑, 기쁨, 안식, 십자가, 부활, 신뢰?

       c. 일단 거룩한 단어(말씀)를 선택했으면, 기도하는 동안에 변경하지 말라.

       d. 생각들을 의식하게 되면, 아주 조용히 처음 선택했던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라.” 
- “생각”이란 감정, 심상, 기억, 회상 등을 포함한다.  
- 생각은 집중기도의 정상적인 한 부분이다. 잠시 동안 어떠한 생각들이 나의 마음속에 나타나는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고 아주 조용히 거룩한 단어로 복귀하라. 
- “아주 조용히 거룩한 단어로 복귀하다”라는 표현은 최소한의 노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집중기도를 하는 동안에 우리가 주도하는 유일한 행동이다. 
-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 거룩한 단어가 모호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럴 땐 거부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임재 안에 자신을 맡기라. 

       e. 육체에 다음과 같은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 우리 몸의 여러 부분에 경미한 아픔이나 통증, 혹은 경련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몸에 있는 정서적인 매듭들이 풀리는 데 기인한다. 
- 우리의 사지가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영적인 주의집중의 심오한 차원에 기인한다. 
- 위의 두 경우에, 그러한 증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거나, 아니면 정신이 잠시 감각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거룩한 단어에게 복귀하는 것을 허락한다.

f. 자연스럽게 침묵가운데 감사함으로 기도를 마쳐라. 


  • 부정적인 정의에서 집중기도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기술(technique)이 아니다. 
    –그것은 긴장 해소 연습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최면이 아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인 은사가 아니다. 
    –그것은 초심리학적(para-psychological)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으로 감지된”(felt) 하나님의 임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추론적인 묵상이나 정의적(情意的)인 기도가 아니다. 

  • 긍정적인 면에서 집중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동시에 그 관계를 육성하기 위한 훈련이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넘어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의 이동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어, 즉 침묵에 친숙하게 해준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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